페미니즘의 도전 - 한국 사회 일상의 성정치학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아는 것이 적으면 사랑하는 것이 적다고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말했지요. 세상에는 알아야 되는 것도 참 많고 공부할 것도 쌓였습니다. 삶은 배움의 연속이니까요. 그렇다고 겁먹을 필요 없어요. 처음부터 준비된 인생은 없어요. 성별이나 외모, 인종, 지역 등 여러 요소들을 ‘우연히’ 갖으면서 ‘나’를 이루며 살아갑니다. 따라서 ‘나’는 기성품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과정의 작품입니다.

 

사람들은 살면서 여러 이유로 고통 받지요. 고통은 계급이나 민족 지역 같은 어떤 한 가지 요인으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다른 문제와 함께 작동을 하죠. 다른 요인과 마찬가지로 성별은 알아야 하는 과제가 됩니다. 사회 문제를 풀고 싶고, 자기 삶을 더 의미 있게 하고 싶다면 반드시 젠더문제를 공부해야 하죠. <페미니즘의 도전>[교양인.2005]은 자기 삶과 세상을 돌아보게 해주고, 끝내 자신을 더 행복하게 해주는 책이지요.

 

앎은 경계를 만날 때 얻어지고, 인생에서 깨달음만한 오르가슴은 없다!

 

우리의 삶은 고통의 바다이며, 상처와 투쟁이 끊임없이 되풀이 되죠. 상처를 받은 사람은 상처의 원인과 역사를 밝히려 하지만 상처를 준 사람은 상처에 대해 연구할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상대를 더 이해하려고 애쓰는 쪽은 언제나 약자이거나 더 사랑하는 사람이지요. 편안한 사람은 의문을 품지 못 하지만 아픈 사람은 물을 수밖에 없지요. 언제나 상처받는 사람들이 세상을 움직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불합리함이자 부정의처럼 보이지만 상처받은 사람은 알죠. 사랑받을 때보다 사랑할 때 더 행복하고, 그제야 무언가 배울 수 있다는 것을. 사랑하는 고통 속에서 사람은 자신의 크기와 깊이를 깨닫습니다. 자기 자신과 대화를 포함해 모든 대화는 최음제이며, 인생에서 깨달음만한 오르가슴은 없지요. 상처와 고통은 그 쾌락과 배움에 대해 지불하는 당연한 대가입니다.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은 무언가를 알게 되었다는 겁니다. 안다는 것은 상처받는 것이에요. 타자와 소통하는 가운데 생기는 앎과 상처에서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언어가 자라죠. 상처가 클수록 더 웅숭깊은 세상을 만납니다. 여성주의를 잘 모른다는 것에 당당한 사람들이 많고, 여성주의를 아는 것 자체로 비난받는 경우가 흔한 한국, 그 황무지에서 여성주의는 꽃을 피우고 열매를 나눠주고 있습니다.

 

여성주의를 만나면 세상이 다르게 보입니다. 인식과 생각이 바뀌면 그 이전의 과거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지구가 돈다는 걸 알게 된 이상 하늘이 도는 것처럼 살 수 없듯이 여성주의를 공부하면 남성들만 살아가는 세상이 아님을 깨닫죠. 더구나 일부러 지워진 역사를 알게 되면서 그동안 몰랐던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 사회를 향한 분노, 소통의 절망을 느끼며 상처를 받습니다.

 

이러한 상처는 자신과 세상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죠. 돌에 부딪힌 물이 크고 작은 물거품을 일으킬 때 비로소 물이 흐르고 있음을 깨닫듯, 눈을 감고 돌아다니다가 벽에 부딪힐 때 자기가 서 있는 위치를 알 수 있게 되듯 앎은 경계를 만날 때 얻어집니다. 여성주의는 그 경계를 드러내줍니다.

 

여성을 남성이 소유한 가장 비싼 동산으로 삼았던 가부장제 틀에서 벗어나야

 

이제까지 여성은 인식주체가 아니었습니다. 단지 타자화된 대상, 남자 갈비뼈의 한 조각, 남자 성욕을 풀어주는 판타지 대상이었죠. 국민, 시민, 민중이 아니라 남성이 소유한 가장 비싼 동산일 뿐이었죠. Man은 남성이자 사람을 나타내지만 여성은 man 앞에 wo라는 동물울음소리를 넣어서 이름을 갖게 되지요. 그렇게 오랜 시간 성차별 구조는 단단하게 이뤄져 왔습니다.

 

하지만 여성이라는 사실과 성차별 당하는 일 사이에는 인과관계가 없습니다. 여성이라고 반드시 성차별을 받아야 되는 게 아니라는 거죠. 여성을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현실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여성이 인식주체가 되면 이미 굳어진 세상이 흔들리고 담론의 구도자체가 무너집니다. 여성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면 노동자가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것보다 더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세상이 통째로 뒤집히고 새롭게 재구성됩니다.

 

서구/백인/남성 중심사고는 낡았고 세상을 바꿀 수 없습니다. 성차별 문제는 물론이거니와 빈부 격차, 환경파괴, 폭력, 인종증오, 근본주의 같은 문제들을 남성 시각으로는 더 이상 해결할 수 없지요. 남성 중심 사고의 기본 틀은 이분법이니까요. 이분법은 간단하되 자율성과 독립성을 지닌 타자가 용납되지 않아요. 따라서 새로운 대안들이 나올 가능성이 닫혀있지요.

 

세상은 딱 반으로 나눠 있지 않을뿐더러 나눈다고 나뉘지도 않습니다. 끝은 새로운 시작이고 낮과 밤은 물고 무는데도 가부장제 패러다임은 대립으로만 세상을 파악합니다.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야 하죠. 낮과 밤의 구분이 모호한 해질녘과 동틀 무렵이 아름다운 까닭은 경계의 시간이기 때문이죠. 경계에 선다는 것은 혼란이 아니라 다른 세계로 움직이는 상상력과 가능성을 뜻하지요.

 

여성주의는 기존의 나와 충돌하기 때문에 세상에 물음을 던지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요. 그래서 여성주의는 여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지요. 남성에게, 공동체에, 전 인류에게 새로운 상상력과 창조력을 불어 넣죠. 남성이 자기를 알려면 여성문제를 알아야 해요. 여성문제는 곧 남성문제에요. 여성이라는 타자가 존재해야 남성 주체도 성립합니다. 둘은 언제나 포개져있죠.

 

대화의 가치를 강조하는 페미니즘, 착한 여자는 천당에 가지만 나쁜 여자는 어디든 간다!

 

페미니즘은 5천년이상 계속 되어온 남성사회를 설득하기 위한 것도 아니고 저항이론이나 저항운동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페미니즘은 협상, 생존, 공존을 위한 운동이에요. 여성운동은 남성의 세계관과 경험만이 인간의 역사라고 하는 힘을 상대화시키자는 것이죠. 남성의 삶이 인간 경험의 일부이듯 이제까지 드러나지 않았던 여성의 경험도 인간 역사의 일부임을 호소하는 거죠.

 

여성주의는 다양한 목소리들이 공존하는 사회를 지향하는 거예요. 남성과 여성의 조화를 파괴하는 것은 그동안 억눌려 왔던 여성들의 솔직한 목소리가 아니라 가부장제죠. 다른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사회는 갈등 없는 사회가 아니라 가능성이 없는 사회입니다. 민주주의를 위해 필요한 것은 서로 다른 각자의 처지와 차이를 이해하고 소통하는 연대이지 남성중심의 단결이나 통합이 아닙니다.

 

여성주의는 차이나 차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왜 차이가 일어나는지 이해하는 방식이죠. 통일성이나 단일성의 가치보다는 대화의 가치를 강조해요, 이렇게 될 때만 여성뿐만 아니라 다른 타자들의 목소리가 들리게 되죠. 어느 누구도 모든 면에서 ‘완벽한 진골’은 없어요. 성별과 계급뿐만 아니라 지역, 학벌, 인종, 외모, 장애, 성적 지향, 나이 등에 따라 한 가지 이상 차별과 타자성을 경험하지요. 그렇기에 자기 내부의 타자를 찾아내어 소통해야 할 때 여성주의가 필요합니다.

 

여성주의는 편안할 수 없지요. 다른 렌즈를 꼈는데, 눈에 생기는 이물감은 어쩔 수 없지요. 여성주의뿐 아니라 기존의 지배규범, 상식에 도전하는 모든 새로운 언어는 우리를 편안하게 하지는 않지만 우리 삶을 의미 있게 하지요. 여성주의는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의문을 갖게 하고, 스스로 자신을 정의할 수 있는 힘을 주지요. 저마다 자기 고유성과 다양성을 찾아나가면서 즐겁게 공존하는 방식을 배우는 거죠.

 

아직도 암세포처럼 사회 곳곳에 남아있는 가부장제를 허물려고 여성주의는 망치나 톱을 들지 않아요. 공략하기보다 낙후시키죠. 너 죽고 나 살자가 아니라 그들과 협상하면서 공존하고자 하죠. 스스로 힘을 갖고 가부장제에서 시키는 대로 살지 않습니다. 가부장제에서 착한 여자는 천당에 가지만 나쁜 여자는 어디든 가니까요. 천국이든 지옥이든 자기가 원하는 곳은 어디든지.

 

자기정체성은 사회관계와 맥락 속에서 이뤄져, 나를 바꿀 때 세상을 바꿀 수 있다

 

나는 누구일까요? ‘나’로 규정하는 것들은 하나가 아니에요. 사람은 누구나 다중주체입니다. 자신이 여성으로서 상처 입을 수도 있지만 이성애자나 비장애인으로서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남성에게도 타자성이 존재하기에 언제든지 상처를 입을 수 있지요. 여성주의는 이러한 정체성들을 고민하면서 다른 사람과 어떻게 관계 맺고 대화할지 고민을 안겨줍니다. 상처에서 건져 올리는 고민이죠.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이성애자/백인/부자/서울사람으로 자신을 정의하죠. 하지만 여성주의는 타자성을 만나게 해줍니다. 따라서 이전과 다르게 ‘많은 나’를 이뤄갈 수 있게 되죠. 자기 인생의 참고문헌이 많은 만큼 자신의 삶은 풍요로워지죠. 참고문헌 가운데 페미니즘은 자신을 새롭게 일구게 하는 든든한 밑그림이 되어주고, 모든 걸 효율성 하나로 묶어버리는 신자유주의 파도에 덜 흔들리며 생존하도록 힘을 주죠.

 

모든 정체성은 차이를 가로질러 구성됩니다. 정체성은 본질이 아니라 사회관계와 맥락 속에서 이뤄지는 거죠. 황인이 백인에게 견줘 모자란 게 아니듯 여성이 남성에게 수그리는 것은 당연한 게 아닙니다. ‘판타지’를 끌어들여 강요하는 거죠. 이러한 판타지를 넘으려면, 지금 자신의 정체성에 밑바탕을 두면서도 그것을 본질화하지 않고, 상대방의 상황으로 움직일 수 있어야 해요. 그때, 비로소 차이를 이해할 수 있고, 이렇게 이뤄지는 대화가 ‘횡단의 정치’죠.

 

여성주의가 세상 모든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은 아니지만 마치 도돌이표가 있는 것처럼 반복되었던 현상을 새롭게 짚어볼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죠. 차이를 보편으로 환원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로부터 기존에 보편성을 끊임없이 해체하고 재구성하니까요. 사람들은 주류나 표준에 얽매여있지만, 차이를 드러내어서 서로 어울릴 때, 진정한 인간 해방이 될 수 있죠.

 

미셀 푸코는 “나를 바꾸고 이전과 같이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 책을 쓴다”고 하지요. 누구나 어제의 나에서 벗어날 때, 참다운 나로 살 수 있습니다. 또한 나를 바꿀 때,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나’는 세상과 동떨어진 게 아니라 세상과 겹쳐있기 때문이죠. 나는 변화 시작지점입니다. 자기 둘레 사람 관계가 민주화되고 일상에서 평화를 꽃 피울 때, 정치개혁과 역사의 진보는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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