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 장영희 에세이
장영희 지음, 정일 그림 / 샘터사 / 200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람은 늘 되돌릴 수 없을 때라야 가슴 치며 후회합니다. 좋은 사람이 떠나서야 미안하다며 어깨를 들썩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기다려주지 않고, 사랑이 멀어져야 봇물 터지듯 눈에서 쏟아지죠. 있을 때 잘해라,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부터 줄곧 내려오는 말이건만 사람들은 건성으로 듣다가 뒤늦게 ‘아차’를 되풀이하죠.

 

여기 또 ‘좋은 사람’이 갔습니다. 장애를 딛고 희망을 나누던 장영희 교수는 2009년 5월 7일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 교수의 유고모음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2009. 샘터]은 그녀를 그리워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지요. 그녀의 마지막 수필집에는 당당한 희망과 따듯한 눈길이 어우러져 사람들을 짠하게 만드네요. 그녀가 남긴 빈자리를 어루만지며 책장을 넘겨봅니다.

 

낮은 목소리들에 귀 기울일 줄 아는 평범한 장영희 교수 이야기

 

장 교수 글 재료는 몹시 평범합니다. 일상에서 겪은 일들을 두런두런 늘어놓으며 거기서 느낀 점들을 조곤조곤 풀죠. 6년에 걸쳐 쓴 논문을 도둑맞아 절망에 빠졌던 일, 엘리베이터 문제로 미국 부동산 회사에 항의하며 벌어진 일, 그냥 주겠다는 말에 속아 중국산 부세를 굴비로 알고 산 일, 학생들과 만나면서 울고불고 한 이야기들…

 

또한 장 교수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짜증내고, 토라지고, 성내고, 외로워하고,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게으르고, 귀찮아하고, 어지르고, 망상에 사로잡히기도 하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하루를 보냅니다. ‘너의 머리가 바깥 기후에 시달리듯/ 내 머리는 내 안의 풍파에 시달린다’는 프로스트의 시처럼 일상의 바람에 흔들리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죠.

 

그런 장교수가 보통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장애인? 암투병 환자? 아닙니다. 타인에 대해 마음 열고자 하고, 낮은 목소리들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자신의 희망을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기운을 북돋워주며 남의 상처에 자기 아픔처럼 보듬을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마음이 우러나와 소소한 지은이의 글을 특별하게 만들어줍니다.

 

예쁘게 꾸미기보다 솔직하게 털어놓는 장 교수 얘기에 사람들은 귀를 쫑긋 세우고 맞아, 맞아, 무릎을 치면서 공감하게 됩니다. 어려운 말로 콧대를 세우려 하기보다 권위를 내려놓음으로써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는 글이죠. 거기에 장애인으로서 겪는 어려움, 더구나 암 투병 이야기는 사람들을 돌아보게 하죠. 우리가 얼마나 많은 걸 갖고 있으면서도 행복하게 못 사는지 부끄럽게 합니다.

 

장교수의 몸을 깨뜨린 암, 하지만 그녀의 행복을 무너뜨리진 못 했다

 

당당하던 그녀가 암에 걸립니다. 장 교수는 2001년 암에 걸렸다가 치료를 받고 완쾌판정을 받았으나 2004년, 암이 척추로 옮아졌다는 걸 알게 됩니다. 다시 2년 동안 어렵사리 함암 치료를 해서 나은 듯싶었으나 암은 다시 간으로 전이됩니다. 장애도 모자라 암까지 걸렸을 때, 세상이 얼마나 원망스러웠을지 차마 짐작할 수 없습니다.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다고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냐고 분노가 끓을 수밖에 없죠. 철저한 고독감, 지독한 박탈감에 마음을 부여잡을 수 없었겠죠. 사소한 것들에 불평불만하면서 사람들과 티격태격하던 일상이 너무나 그리웠을 겁니다. 허둥대면서 정신없이 보내지만 돌아보면 허무한, 그 김빠진 생활이 간절했을 거예요.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고통을 떠넘기지 않습니다. 자기 자존심 때문에, 독자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기에 암이 악성이 아니라 양성이었다고 거짓말을 하기도 하죠. 통증 때문에 돌아눕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침대에 누워 있고, 온 몸의 링거 줄을 떼고 샤워 한 번 해보는 것이 소원이었고, 방사선 치료 때문에 식도가 타서 물 한 모금 넘기는 것조차 고통스러워하며 밥그릇만 봐도 헛구역질을 했어도 자세히 말하지 않습니다.

 

암은 장교수의 몸을 깨뜨렸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행복을 무너뜨리진 못 했죠. 그런 고통 덕에 행복할 수 있다고 환히 웃어 보입니다. 몸 건강하고 충분히 행복할 조건들이 넘쳐도 ‘지옥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 요즘, 장교수의 마음가짐은 훌륭한 본이 되죠. 온갖 바람과 매서운 눈보라 속에서도 희망노래를 불렀으니까요. 먼저 슬퍼하되 끝내 달게 받았으니까요.

 

맞다. 지난 3년간 내가 살아온 나날은 어쩌면 기적인지도 모른다. 힘들어서, 아파서, 너무 짐이 무거워서 어떻게 살까 늘 노심초사했고, 고통의 나날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았는데, 결국은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열심히 살며 잘 이겨냈다. 그리고 이제 그런 내공의 힘으로 더욱 아름다운 기적을 만들어 갈 것이다. 내 옆을 지켜 주는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다시 만난 독자들과 같은 배를 타고 삶의 그 많은 기쁨을 누리기 위하여……. - 책에서

 

좋은 사람 장영희, 더 이상 세상에 없지만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박사는 “유명한 의사가 되는 것은 그다지 어렵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정 좋은 의사가 되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라고 하였지요. 이름만 높을 뿐 가까이에서 존경할 수 없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장 교수에게 끌리는 까닭은 곁에서 존경할 수 있는 분이었기 때문인 듯싶습니다. 그녀는 좋은 사람이 되고자 거듭 자신을 높인 사람이니까요.

 

정말 누구의 마음에 ‘좋은 사람’으로 남는 게 얼마나 힘들고, 소중한지 깨닫기 시작한다. 누군가 단 한 사람만이라도 따뜻한 마음, 아끼는 마음으로 날 ‘좋은 사람’으로 기억해준다면 수천 수만명 사람들이 다 아는 유명한 사람이 되는 일보다 훨씬 의미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 책에서

 

장 교수의 바람처럼 그녀는 ‘좋은 사람’으로 사람들 가슴에 영원히 남아 있습니다. 장 교수가 가르친 영문학에는 옥시모론(oxymoron)이란 게 있지요. 모순형용법이란 뜻으로 서로 상반되는 뜻의 낱말을 같이 씀으로서 의미를 두드러지게 강조하는 표현법이죠. 보기를 들면,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당했을 때, <뉴욕타임즈> 머리기사는 ‘작은 거인 암살당하다’였죠. 옥시모론을 쓰면, 장영희 선생님은 더 이상 세상에 없지만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합니다.

 

잊히지 않는 자는 죽은 것이 아니라고 하죠. 소중한 사람을 만나는 것은 1분이 걸리고 그와 사귀는 것은 한 시간이 걸리고, 그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하루가 걸리지만, 그를 잊어버리는 것은 일생이 걸린다는 말처럼, 그녀를 평생 가슴에 간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겁니다. 그녀가 행복함에 빙그레 웃는 모습이 상상됩니다.

 

당신이 누리는 행복을 세어보세요! 하루하루가 기적이랍니다!

 

죽음은 삶과 겹쳐있지만 모든 생명은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죽어가고, 죽음과 삶이 꼬리에 꼬리를 물건만, 죽음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걸 어려워하죠. 특히, 장 교수처럼 좋은 사람이 죽었을 때,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죠. 날로 커져만 가는 슬픔을 다독이며 장 교수가 남긴 말들을 더듬어 봅니다.

 

장 교수는 하루하루가 기적이라며 ‘오늘’을 찬양했습니다. 행복이란 특별한 것이 아니라 그저 이 세상에서 숨 쉬고 사는 거 자체가 행복이라고 일러줍니다. 배고플 때 밥 먹을 수 있고, 화장실 잘 갈 수 있고, 하늘과 나무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얼마나 행복한지요. 게다가 가끔씩 맛난 음식 먹고, 좋은 사람 만나서 얻는 행복은 순전히 덤인데, 인생살이엔 덤들이 가득합니다. 어찌 행복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당신이 누리는 행복을 세어보라고 권합니다. 오늘 일어날 수 없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며 오늘을 마음껏 상상하고 펼치라고 용기를 줍니다. 사랑하다가 이별하는 것이 사랑을 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며 세상을 사랑하라고 손을 내밉니다. 괜찮다며 조금 쉬다가 다시 일어서라고 등을 쓰다듬어 줍니다.

 

바닷물이 썩지 않는 것은 3%의 소금 때문이듯 장영희 선생님 같은 분들 덕택에 세상은 아직 살만 합니다. 티베트 속담에 “내일이 올지 죽음이 먼저 올지 아무도 모른다”고 하죠. 아득한 불안 때문에 오늘이 저당 잡혀 있습니다. 지난 날 걱정이 지금은 생각나지도 않듯 이 책을 읽는 사람 모두가 ‘오늘’을 누리고, 행복해야 된다며 장 교수는 싱긋 웃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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