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 뜨거운 기억, 6월민주항쟁
최규석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요즘 사람들은 풍요로움과 민주주의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때마다 어렵지 않게 ‘신상’을 사고, 손쉽게 키보드를 두드리며 욕을 내뱉고 있죠. 한편, 70년대 박정희에 맞서 화염병을 던지고, 80년대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목 놓아 외쳤던 젊은이들은 이제 재테크에 눈이 빨개진 채 자기자식 명문대 보내는데 빠져있습니다. 골프채를 휘두르며, 참 좋은 세상이라고 되뇌며.

 

대형마트 때문에 재래시장 상인들이 죽겠다고 하소연할 때, 이 대통령은 “내가 노점상 할 때는 슈퍼마켓이 없었거든”이라며 반말하는 뚱딴지가 되더니 “내가 옛날 젊었을 때, 재래시장 노점상 할 때는 이렇게 만나서 얘기할 길도 없었다. 끽 소리도 못하고, 장사 되면 다행이고 안 되면 죽고 뭐 이렇게 모여 하소연할 데도 없었는데 지금은 그래도 이야기할 데라도 있으니 좋잖아?(웃음) 좋아졌잖아, 세상이”라고 말을 합니다.

 

끽 소리 못하고 하소연 할 데도 없었는데, 지금은 그래도 이야기할 데라도 있으니 좋잖아?

 

이렇게 세상이 좋아져서 쇠고기를 싼 값에 배불리 먹여주겠다는데, 촛불을 들고 너나 쳐드셈이라고 떠드니, 열불이 안날 수 있나요. '서민정당‘에서 일자리 창출과 경제를 살리고자 미디어법을 통과하려고 하는데, 끽 소리도 못 했던 무지렁이들이 민주주의 위기라고 들고 일어나니 어찌 화나지 않을 수 있나요. 그렇게 쌓인 게 이제 곧 폭발합니다. 책 <100℃>[2009. 창비]는 임계점을 넘어 물이 끓듯 사회가 확 달라졌던 지난날을 담아내며 오늘을 돌아보게 합니다.

 

뜨거웠던 80년대가 어느새 가물가물해지는 이 때, 강산도 두 번 넘게 바뀌었건만 이 책은 20년 전으로 돌아가 80년대 민주화운동과 87년 6월 항쟁을 그립니다. 80년대 많은 대학생들이 그렇듯 반공정신이 투철한 학생 영호도 대학에 들어가면서 진실에 눈을 뜹니다. 처음으로 광주민중항쟁을 만나면서, 자신의 머릿속에 왜 이렇게 끔찍한 사건이 지워져있는지 큰 충격을 받게 되죠.

 

절대로 빨갱이가 되지 않게다고 다짐했던 영호도 다른 대학생들과 마찬가지로 화염병을 던지고, 대자보들을 붙이게 됩니다. 한국전쟁을 치르면서 애꿎은 사람들이 죽어나갈 때, 혼자가 된 영호의 어머니와 데모하는 것들은 다 빨갱이라는 영호의 아버지, 공장 노동자로 눈물을 집어삼키는 누나와 가족을 위해 두 눈을 질끈 감고 공부만 해서 취업을 한 큰 형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흘러갑니다.

 

이 책을 읽으며 만화가 갖고 있는 힘을 새삼 느끼게 되네요. 영상이 생생함은 더하지만 여운이 덜하고, 글이 상상력은 더 지피지만 읽는 것이 불편할 수 있는데 반해 만화는 부드럽게 가슴으로 들어가 깊은 곳을 건드립니다. 일부러 감정을 부추기지 않는데도 책장을 넘기지 못하고, 왈칵 치솟는 기운에 잠깐씩 하늘을 보게 만드네요. 워낙 찐한 주제를 만화로 그렸기 때문일까요? 그렇기도 하겠지만 작가의 뛰어난 솜씨덕분이죠.

 

이 책을 지은 최규석 작가는 <대한민국 원주민>이나 여러 만화에서 이미 인정을 받은 젊은 만화가예요. 다른 책에서도 그의 열정을 느꼈지만 ‘100℃’에서 두드러지게 뜨겁네요. 자신도 민주화운동을 배운다는 자세로 겸손하게 그렸기 때문인지, 미처 몰랐던 역사 앞에서 놀랐기 때문인지, 그림체에서 묻어나오는 열기에 식어있던 심장이 충분히 데워지네요. 몇 번씩 눈가에 맺히는 물기만이 달아오르는 뜨거움을 조금 누그러뜨려주네요.

 

목숨을 내걸고 싸워온 사람들이 만든 한국, 피눈물을 머금고 핀 민주주의, 이제 안심해도 된다며 행복해하는 사람들이 있죠. 그들은 둘 가운데 하나지요. 바보거나 도둑이거나. 2009년 한국은 용산에서 멀쩡한 시민 다섯 명이 경찰과 용역 연합에 숯주검이 되고, 강에 공구리가 발라지듯 사람들 눈과 귀에도 시멘트가 발라지고 있습니다. 헌법에 나와 있는 집회도 하지 못하고 있으며, 사이버모욕죄를 만들어서 사람들 입도 꿰매버리려 하죠.

 

민주주의가 거꾸로 가고 있다, 파시즘의 초기 낌새들이 나타나고 있다며 걱정하는 가운데 전직 대통령이 자살을 합니다. 훌륭한 언론과 대단한 검찰들이 끊임없이 비열하게 깨물고 악랄하게 할퀴었건만 반성도 없고 변화도 없이 세월은 흘러갑니다. 수만 명이 민주주의가 위기라며 시국선언을 하지만 세상은 너무나 똑같습니다. 도무지 달라지질 않는 세상을 보며,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하죠.

 

도대체 민주주의가 무엇이고, 수많은 사람들이 왜 피와 땀을 흘리며 민주주의를 지키려 했는가?

 

이런 썩은 세상, 이라며 고개를 돌리고 싶을 때, ‘100℃’는 묻습니다. 도대체 민주주의가 무엇이고, 당신은 민주주의를 위해 무엇을 하였는냐고. 그리고 이렇게 말을 하죠. 민주주의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아무것도 아닌 걸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피와 땀을 흘렸다는 것을 잊지 말자고. 우리의 민주주의가 안심할 정도로 튼튼하지 않으며, 끊임없이 강화하고 보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작가는 뜨겁게 얘기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오늘을 똑바로 봐야 합니다. 눈만 뜬다고 제대로 보는 게 아니죠.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맥락을 이해하고 그 뜻을 해석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를 해야 합니다. 입시 때보다 더 빡세게! 첫사랑보다 더 뜨겁게! 민주주의가 흔들릴 때 겪는 피해는 개인 차원을 넘어서 사회 전체가 고통을 당하니까요. 연인과 헤어지는 것보다 시험에서 떨어지는 것보다 민주주의 위기는 더 큰 충격을 줍니다.

 

공부를 하면서 지금을 제대로 알려면, 지난날을 돌아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오늘을 살면서 과거와 내일에 영향을 받는 존재니까요. 오늘은 언제나 새로운 날이지만 어제와 닮은 날일 수밖에 없죠. 우리는 과거로부터 아무리 도망가려 해봤자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오늘을 잘 만들어야 하는 거죠. 오늘은 내일의 과거가 될 테니까요. 지난날을 알고자 할 때, 오늘을 제대로 살고자 할 때, 내일을 꿈꾸고 싶을 때, 이 책은 큰 도움이 되겠네요.

 

탁자를 턱하고 치니까 억하고 죽었던 박종철씨부터 최루탄을 머리에 맞은 이한열씨까지 87년 민주항쟁의 밑절미가 되었던 평범한 대학생들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러봅니다. 또한 고문실에 끌려가 죽지 못해 살았던 사람들이 어떤 세상을 바랐는지 곰곰 생각해봅니다. 오늘날 한국은 그때보다 얼마나 좋아졌나요? 어디서부터 잘못되었기에 민주주의가 이렇게 흔들리고 있을까요?

 

한국은 커다란 위기에 부딪혔습니다. 위기란 늘 적은 수의 사람들이 큰일 났다고 소리치는데서 시작됩니다. 모든 위기가 그렇듯 모든 사람들에게 바로 재갈을 물리진 않지요. 벌써 그랬다면 위기가 아니라 지옥이겠죠. 저 멀리 늑대가 나타났다고 외칠 이는 산에 올라간 몇 명의 목동일 수밖에 없습니다. 마을에 있던 사람들은 목동의 얘기에 늑대가 나타났다는 걸 알 수 있지만 아직 늑대를 못 봤기에 위기감이 피부에 와 닿지는 않죠.

 

지금까지 너무 자주 늑대야~ 라는 외침이 있었는지, 사람들은 심드렁해합니다. 이제 너무 시끄럽다고 힘센 목동 몇 사람만 놔두고 다 없애자고 얘기하는 형편입니다. 한쪽에서는 그 목동들이 늑대라면서 안 된다는 사람들이 있지만 다른 쪽에서는 이것이 선진화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혼란스러운 오늘, 목동이 어때야 하는지,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다시금 생각했으면 합니다. 곧, 100℃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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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관 옆 철학카페
김용규 지음 / 이론과실천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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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영화는 100년 남짓한 시간동안 가장 강력하고도 폭넓은 영향력을 끼치는 문화매체로 자리잡아가고 있습니다. 문학, 미술, 음악이라는 예술 요소에 첨단기술이 더해진 종합예술로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죠. ‘영상으로 펼쳐지는 현실’에 시대 정서가 움직이고 집단무의식이 건드려지면서 사람들은 사회와 자신들의 삶을 돌아보게 됩니다. 자기 이해를 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영화는 삶을 비추는 거울이라 할 수 있죠.

 

따라서 21세기에는 영화가 20세기 문학이 맡았던 역할들을 할 거라 짐작됩니다. 인생에서 누구나 만나는 ‘가슴 저린 주제’들을 작품에서 다룸으로써 사람이 자신을 알 수 있게 하는 것이지요. <영화관 옆 철학카페>[2002. 이론과 실천]은 영화를 2시간 때우는 단순히 수단을 넘어서 철학을 담아내는 원전으로 봅니다. 영화와 철학에 관심 있는 사람에게는 아주 좋을 책이네요. 훌륭한 영화에 그보다 더 멋들어진 철학 해석들이 버무려져 있으니까요.

 

뛰어난 영화해설서이자 재미난 철학입문서, 영화관 옆 철학카페

 

이 책은 희망, 행복, 시간, 사랑, 죽음, 성이라는 주제로 18편의 영화들을 다룹니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에피쿠로스, 아우구스티누스, 칸트, 사르트르, 하이데거, 마르셀, 프로이드, 라이히, 프롬, 엘리아데, 비트켄슈타인, 라캉, 마르쿠제, 마투라나… 수많은 학자들의 사상들을 끌어들이면서 영화를 풀어내죠. 책에 나오는 해설들이 유일한 해석이 아니라 수많은 이해 가능성 중 하나로 생각한다면 뛰어난 영화해설서이자 재미난 철학입문서가 될 수 있죠.

 

소개되는 영화들이 평범한 관객들에게는 조금 낯설 수 있겠네요. 데이트용 오락거리로 영화가 소비되는 현실에서 이른바 상업영화라는 꼬리표를 달고 나온 작품들은 사람들의 복잡한 머리를 2시간 동안 가리는 임무만을 띤 채 점점 시각만 자극하고 있죠. 더구나 조금만 어려워질라치면 책을 덮어버리는 세태에서 어차피 상업영화를 다뤄도 볼 사람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인지 지은이 김용규 철학자는 이른바 ‘작품성 있는 영화’만을 바탕으로 글을 쓰네요.

 

지은이는 읽기 편하도록 여러 모로 애쓴 점이 곳곳에서 드러나지만, 어쩌면 조금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그것은 지은이가 괜스레 어렵게 책을 썼기 때문이 아니라 철학자들의 사상 자체가 어렵기 때문이죠. 아무리 쉽게 써도 안 볼 사람은 안 보겠지만 철학을 더 알고 싶거나 자신의 지식이 모자라다고 생각했던 사람에게는 큰 도움이 되겠네요. 지은이의 친절과 땀방울이 글을 아로 지르네요.

 

한국영화 가운데 유일하게 다룬 <박하사탕>은 정말 대단한 작품으로 갓 스무 살의 청년 김영호가 80년대를 만나면서 파멸하는 이야기지요. 소녀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진압군으로서 영혼에 큰 상처를 받은 김영호는 가학을 해야 하는 고문경찰관으로서 살아가죠. 언젠가 사진이 생기면 들꽃을 찍고 싶다는 순수한 청년은 80년대라는 ‘미친 시간’을 만나면서 무너지죠. 영화를 보다보면 극심한 공포와 함께 지독한 혐오감이 일어납니다.

 

박하사탕은 훌륭한 영화지만 지은이는 아쉬움을 끄집어냅니다. 이창동 감독은 ‘박하사탕’ 홈페이지에서 “단순한 ‘과거지향’이나 ‘복고지향’이 아니라 나에게 ‘박하사탕’은 원점으로 돌아가서, 과연 그 곳에서의 내 본래 모습은 무엇인가를 스스로 질문해 보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질문은 나뿐만이 아닌 현재 시점에서의 다른 사람에게도 의미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밝혔으나 ‘과거로의 회귀’에는 성공했지만 ‘순수로의 회귀’에는 실패했다고 지은이는 얘기하네요.

 

자유의지를 갖고 있어 자기반성을 통해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음, 사람을 사람으로 만드는 본질

 

사람은 본능주의자들의 주장대로 유전자가 만드는 본능에도 영향을 받고, 행동주의자들의 주장대로 주어진 환경에도 영향을 받는 존재지요. 그렇지만 사람은 본능과 환경에 지배만 받는 ‘DNA 운반기계’나 ‘찰흙인형’이 아니에요. 자유의지를 갖고 있어 자기반성을 통해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지요. 이것이 사람을 사람으로 만드는 본질이죠. 김영호는 20년 동안 단 한번도 ‘행동하는 인간’으로서 자기 성찰을 하지 않고 그저 외부상황에서 주어지는 조건형성에 반응만 하는 유기체일 뿐이었음을 지은이는 짚어내네요.

 

갈수록 막장으로 치닫는 김영호에게 양심이란 건 이미 광주항쟁과 독재정권을 거치면서 송두리째 박살이 났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사람이라면 마땅히 있어야 할 고민들을 영화엔 없던 거죠. 순수에서 타락으로 과정에만 집중했을 뿐 더러워지는 것에 ‘저항하는 사람’이 빠져있습니다. 그 아무리 끔찍했던 아우슈비츠에서도 사람답게 살려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김영호는 조금도 반성하는 흔적이 없으니까요.

 

어떠한 환경에 놓이더라도 사람은 자기 모습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마지막 자유’지요. 시대가 아무리 험악했어도 사람답게 살고자 피눈물을 흘렸던 수많은 사람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순수했던 청년의 밑바닥까지 허물어뜨리면서 ‘짐승의 시대’를 돌아보게 하는 영화는 큰 울림을 낳지만 사람이란 존재를 너무 건성으로 본 건 아닌가 생각이 들게도 하네요. 물론, 그 시대에도, 지금도 자유보다 욕망충족에 눈 빨간 괴물들이 많긴 하죠.

 

에리히 프롬에 따르면 양심이란 ‘사람의 자기회귀성’이지요. 프롬은 “사람은 자기 인생을 얻거나 잃는 것에 대해 스스로 책임지는 것이다. 사람은 오직 자기 양심소리를 이해하기만 한다면,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만일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그는 파멸할 것이다. 아무도 그를 도울 수 없으며 그 자신만이 도울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죠. 즉, 진정 자기 자신, 참나에게로 돌아가려는 사람이라면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여만 합니다.

 

사람 스스로 책임지는 존재이기에 자유의지가 있고 양심이 늘 심장 가까이에서 바른 길을 속삭여주죠. “야! 너 정말 삶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냐?… 임마! 네 일기장에 보니까 그렇게 써 있던데. 삶은 아름답다고…”라며 고문하던 김영호가 ‘이건 진짜 아닌데’하며 조금만 더 양심에 눈길을 돌렸더라면 어땠을까요? “나 어떡해”라는 노래를 부르며, 철길 위에서 “나 돌아갈래”라고 외치지는 않았을 거 같습니다.

 

모든 게 거꾸로 돌아가는 현실, 갈수록 거칠어지는 사람들의 영혼, 행복이란 무엇인가?

 

영화는 20년이라는 세월을 여섯 번에 걸쳐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기법을 쓰죠. 모든 게 거꾸로 돌아가는 현실에서 박하사탕은 여전히 의미심장하네요. 갈수록 사람들의 영혼은 더할 수 없이 거칠어지고 메말라가고 있습니다. 사람답게 산다는 것에 대한 생각은 2시간도 하지 않은 채 평생을 ‘돈과 섹스’만 생각하고 있죠. 돈을 어떻게 써야할지 고민도, 섹스를 왜 해야 하는지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은 채 무조건 돈을 많이 벌고, 어떻게든 섹스를 많이 해야 하는 시대입니다.

 

이전 세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쾌락기술들과 전문지식들을 갖고 있지만 우리는 그 안에서 주인이기보다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감각만을 문질러대는 물질문명과 도구화된 정신문명 속에서 지독히도 고통스러우며 거짓되고 무가치한 삶을 살아갑니다. 더욱 더 관능과 쾌락, 소유와 소비, 그리고 얄팍한 상대주의와 저속한 대중문화를 새로운 아편으로 삼아 하루하루 스스로를 위로하고 ‘별 생각 없이’ 살아갈 뿐이죠.

 

그러나 아무리 질퍽한 밤도 아침햇살 아래 허무하듯 누구에게나 한번쯤 ‘깨어나는 시간’이 다가옵니다. 자신의 삶이 비참하고 헛되는 것을 참을 수 없어 보통은 눈을 질끈 다시 감고, 쾌락으로 몸을 던집니다. 쳇바퀴 돌 듯 각성의 시간은 끊임없이 찾아오고, 양심은 쉼 없이 문을 두드립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기 생각에 낀 기름기와 뱃살지방을 걱정하며 귀에 돈을 쑤셔 넣고, 눈에 공구리를 바르면서 사람 같지 않는 사람이 됩니다. 김영호처럼.

 

한국은 행복한 사람이 별로 없는 이상한 나라입니다. 어느 때보다 풍요로운 시기건만 모두들 ‘가난한 영혼’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너무 늦게 돌아가고 싶다고 절규해봤자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행복해지고 싶은 사람은 지금 소리쳐야 합니다. 다시 깨끗해지고 싶다는 절실한 영혼의 소리, 잠시만이라도 숭고해주고 싶다는 삶의 소망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 마음 한 구석에는 가엾은 양심이 눈물 흘리며 아직 남아있으니까요.

 

그 양심을 다독이며 다시금 일으켜 세워주는 일이 철학입니다. 이제 철학의 역할은 새로운 철학 체계를 만들어내는 작업이 아니라 과거의 사상들에서 가치 있는 철학들을 찾아 지금-여기에서 실천하게끔 하는 일로 바뀌었습니다. 사람이란 무엇인가, 지금도 뜨거운 철학자들의 고민들을 만나서, 양심의 눈을 떠야 합니다. 귀를 열어야 합니다. 지금 행복해야 합니다. 그제와 어제가 그렇듯, 오늘 행복하지 않으면 내일 행복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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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과 자유 - 장자 읽기의 즐거움 問 라이브러리 8
강신주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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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행복해지고 싶습니다. 바쁘게 일하는 것도, 싱숭생숭 마음이 들뜨는 까닭도 행복해지고자 함이죠.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훌륭함이 뭔지 알아야 하듯 행복해지려면 행복이 뭔지 밝혀주는 인문학이 필요하죠. 인문학은 사람의 즐거운 삶을 긍정하고, 행복하고 싶다는 정신에서 빚어집니다. 결국, 오늘날 크게 불거진 인문학의 위기란 사람의 자유와 행복의 위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장자를 읽습니다. 장자는 인문학의 정신이 사랑에 있다는 점을 가르쳐주죠. <망각과 자유 - 장자 읽기의 즐거움>[2008. 생각의 나무]는 백남준, 플라톤, 헤겔, 니체, 들뢰즈, 스피노자, 베르그손, 사르트르, 레비나스 등 수많은 철학자들을 가로지르면서 장자를 얽어 쓴 책이네요. 철학자 강신주가 맛깔난 솜씨로 버무린 내용이 꽉 차있으면서도 읽는 재미가 쏠쏠하네요.

 

사람은 사랑으로 이뤄진 존재입니다. 사랑하고, 또 받고 싶어 하죠. 수많은 철학자들이 머리를 싸매고 존재 본질과 세상 원리를 찾은 것도 사랑 때문이라 할 수 있죠. 모두가 사랑이 바깥에서 주어지거나 자기 이전에 있는 것이라 여길 때, 장자는 <제물론>[齊物論]에서 다부지게 얘기합니다. 길은 우리가 걸어가는 데서 완성된다고. 사랑이란 길은 미리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 우리가 서로 발을 내딛을 때 이뤄지는 거라고.

 

길은 우리가 걸어가는 데서 완성, 그 길의 끄트머리에는 뭐가 있어서 길을 내려고 했을까?

 

장자에게 길은 목숨을 걸어 만들 정도로 대단한 것이죠. 그 길의 끄트머리에는 뭐가 있기에 길을 내려고 했을까요? 그 길에서 우리는 바로 타자를 만나게 됩니다. 장자가 우리에게 만들라고 이야기했던 길은 타자에게로 향하는 길이지요. 우리는 왜 타자에게로 건너가야 하는 것일까요? 사람은 타자와 연대와 사랑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길에서 타자를 만나 사랑을 나눌 때라야 비로소 참다운 삶을 누릴 수 있지요.

 

타자를 만날 때, 망각이 필요하다고 장자는 힘주어 말합니다. 왜냐하면 망각이 없다면, 현재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죠. 과거에 대한 기억과 미래에 대한 기대로 사람은 이 순간을 제대로 살지 못합니다. 오늘은 단지 지난날 약속을 지키는 과정에 지나지 않거나 앞날의 기대에 사로잡히기 일쑤죠. 지금이 조각나고 사라져버려 참 기쁨을 못 느끼면서 살게 됩니다.

 

생활이 불만족스럽다면, 사랑을 깊게 만나고자 하면, 깨어있는 행복을 일구려면, 자기 몸을 재배치하고 새로운 환경에 동선을 꾸려야 하고 타자와 결합을 해야 하죠. 새롭게 이어지려면 기존의 모든 연결은 잊어야 합니다. 산책자가 새의 노래와 바람소리를 듣기 위해선 자신의 고독으로부터 빠져나와야만 하는 거죠. 헤엄을 치려면, 땅에서 가졌던 수영에 대한 이성-운동을 잊고 물에서 있는 그대로 감각-운동에 적응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죠.

 

그러나 뿌리 깊게 ‘나’를 지배하는 자의식은 타자와 만남을 가로막습니다. 이러한 자의식을 비워내야 하죠. 장자뿐만 아니라 주체의 자기동일성을 문제 삼았던 불교에서도 비움을 얘기했습니다. 모든 불교 전통의 가르침이라 할 수 있는 공(空), 허(虛), 무아(無我)란 개념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쉽죠. 장자도 심재좌방(心齋坐忘)이란 수양법을 얘기하며 자의식을 내려놓고 타자와 소통하라고 어깨를 두드립니다.

 

자의식을 무너뜨리는 건 꽤 어려운 일입니다. 수많은 벽들이 나타나 사람을 한정짓고 테두리를 그어버리죠. 사람들은 그 경계에 자의식을 지으며 살아갑니다. 타자와 마주칠 때 울림이 일어나는데 자기 벽과 마주치기에 ‘자기 안 소음’이 들끓게 되죠. 울림이 아니라 소음이기에 괴롭습니다. 시끄러운 소리에는 즐거움, 슬픔, 노여움, 고집, 변덕, 허세, 오만, 가식 등등 가짜 자의식이 담겨 있으니까요.

 

살다보면 자의식 때문에 일이 어긋나 딱하게 될 때가 자주 있죠. 사랑하는 타자에 대해 “이것이야말로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거야”, “그에게 이것이 가장 좋을 거야” 자기 경험과 아는 한에서 판단을 하죠. 그렇지만 이러한 판단들 속에서 타자가 자신과 다르다는 것, 그래서 그는 자기와는 다른 생각과 욕망을 가질 수 있음을 곰곰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렇기에 생각대로 되지 않는 타자를 보며 어찌할 바를 몰라 하죠.

 

도대체 당신의 마음을 모르겠다는 당혹감과 함께 아찔한 현기증 상태에서 타자에 대한 판단중지를 하고, 자신에 도사리고 있는 선입견의 뿌리를 들춰봐야죠. 거기서 타자가 자유로운 존재, 즉 타자성을 지닌 존재라는 걸 받아들이지 않았음이 드러납니다. 장자는 바로 이것을 잊고 비우라고 따끔하게 말하죠. 자신을 비우지 않고 상대를 대하면, 자신의 기대와 생각을 그 사람에게 던져놓은 뒤 타자가 그에 따르지 않을 때 몽니를 부리다가 서로 파멸하게 되니까요.

 

자기 기대는 좌절되기 때문에 자기욕망 꺾는 연습을 미리 해야죠. 기대가 사라지는 자리에 타자가 들어올 수 있으니까요. 그대로를 존중할 때, 타자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피어나고 향기로운 사랑이 싹트죠. 타자의 결을 그대로 맞춰주면서 서로가 주체성을 지닌 만남을 하게 되는 거죠. 자의식이 무너지는 경험이고,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자기 역사에 남을 순간입니다. 참된 만남이 이뤄지는 기적이죠.

 

잊어버림은 우리 삶을 좀먹는 기억들과 싸우고 새로운 기억을 이뤄 사랑과 연대를 할 수 있게 해

 

때문에 장자는 망각을 강조합니다. 잊어버림은 우리 삶을 좀먹는 기억들과 싸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죠. 그렇지만 망각은 통과의례일 뿐입니다. 최종 목적은 사랑과 연대를 할 수 있도록 새로운 기억을 이루려고 노력하는 거죠. 잊어버림과 비움은 세상과 단절하고 닫히는 게 아니라 소통하고 열림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비움이나 망각이 타자와의 사랑에서 단지 필요조건일 뿐 절대로 충분조건은 될 수 없다는 점이죠. 비움이나 망각은 타자에게로 건너가기 위한 가벼움과 경쾌함을 제공하지만 타자와 깊게 만난다는 보장을 못 합니다. 선입견과 자의식을 버려야만 그나마 타자와 연결될 수 있는 희망을 품을 수 있기에 날마다 자기를 비워내는 거죠. 물론 이 희망조차 타자에 의해 언제라도 좌절될 수 있음을 깨닫는 게 인생의 지혜겠죠.

 

타자와 만남은 결코 혼자서 이뤄낼 수 없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본인의 노력과 함께 타자도 자신에게로 넘어오려는 갈망을 가질 때에만 ‘나와 남’이 ‘우리’가 되어 만날 수 있죠. 3인칭 ‘남’이 2인칭 ‘당신’이 되는 거죠. 이런 변신은 저절로 되지 않죠. 절망스러운 현실에서도 여기에서 저기를 희망할 때, 간신히 이뤄지는 겁니다. 끊임없이 자기 기대를 누그러뜨리며 타자에게로 건너가고자 애쓰면서 타자가 넘어오고 싶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거죠.

 

인간의 유한성과 타자의 타자성 사이, 다시 말해 ‘나와 남’이라는 깊은 차이를 건너려면 결단과 뛰어넘음이 필요합니다. 뛰어넘음을 하려면 충분히 가벼워야하고 비워내야만 하죠. 갖고 있던 선입견, 오만, 자의식, 사변잡념들을 털어내야 합니다. 나를 무겁게 했던 무게들과 안녕~ 작별한 뒤에야 우리는 타자와 소통할 수 있습니다. 물론 타자에 이른다는 확답은 없지요. 뛰어넘다 곤두박질할지 모르죠. 그럼에도 손을 내미는 삶을 살아야겠죠.

 

소통이 어려운 시대라고 해요. 소통이 뭔지 짚어보면, 소(疏)는 트인다는 뜻이고 통(通)은 연결하다는 뜻이죠. 막혔던 것을 잘 터 흘러서 이어진다는 게 소통입니다. 자신이 갖고 있는 한계를 지닌 지식, 치우친 경험들에 붙잡히지 않아야 소통을 할 수 있는 거죠. 소통이 안 되면 타자를 사랑할 수 없죠. 따라서 망각은 타자를 사랑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 되죠. 나누고 가르고 자르고 따지던 분별작용에서 벗어나 타인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마음이 펼쳐지니까요.

 

비움이나 잊음은 세속에 대한 무관심이나 냉소가 아니라 생성의 긍정이고 타자와 만남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과정입니다. 장자와 비슷하게 선불교의 여섯 번째 스승 혜능은 ‘무념의 실천’을 얘기하죠. 이것은 자기를 비워내서 홀로 도사가 되라는 게 아니라 타자와 함께 참되게 살라는 뜻이죠. 무념의 실천은 ‘세계 밖으로의 초월이 아니라 세계 속으로 초월이니까요,

 

장자의 망각은 사람들 사유에도 큰 영향을 끼쳤지요. 플라톤부터 사람들은 기억을 좋은 것, 잊는 것을 나쁜 것이라 여겼지요. 그런 전통에서 진리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알레테이아(aletheia)는 부정의 접두어 a와 망각을 의미하는 lethe로 구성되어 있죠. 이러한 이분법을 장자는 뒤집어 버립니다. 자신을 잊는 거울처럼 지금 이 순간 타자의 그대로를 비추고 소통을 하여 행복해지라고 장자는 귀띔을 하네요.

 

장자 「덕충부德充府」를 보면 “마음이 조화롭고 즐겁도록 하여 타자와 연결하여 그 즐거움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 또 밤낮으로 틈이 없도록 하여 타자와 더불어 봄이 되도록 해야 한다. 이런 사람이 바로 타자와 마주쳐서 마음에 봄이라는 때를 생성시킬 수 있는 자이다”라고 얘기합니다. 내가 꿈속에서 타자가 되었는지 타자가 꿈속에서 내가 된 것인지 알기 어려운 삶, 판단중지를 하고 자신을 비움으로써 타자와 더불어 봄이 되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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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을 쏴라 - 2009년 제5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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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정상이냐고 누가 묻는다면, 대부분 사람들은 정상이라고 답하겠지요. 침을 흘리며 자기 몸을 ‘통제’하지 못하거나 함부로 상대에게 해를 가하는 사람을 ‘비정상’이라고 여기니까요. 그러한 비정상이 아니기에 정상이라는 주장은 “난 나쁘지 않으니까 착하다”는 논리처럼 허술하죠. 그렇다면 정상이란 무엇일까요? 늘 불안하고, 걱정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은 정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한번 고민해볼 문제지요.

 

정상과 비정상은 권력관계가 생기면서 맥락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죠. ‘미치광이’는 원래 있는 게 아니죠. 지금은 ‘비정상’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사회에서 쫓아내 떼어놓지만 옛날에는 동네에 한두 명씩 ‘그런 친구들’이 있었고 주민들과 어울려 잘 지냈죠. <내 심장을 쏴라>[2009. 은행나무]는 제5회 세계문학상 수상작으로 정상과 비정상, 자유와 치료에 대해 물음표를 던지는 장편소설이네요. 야무진 얼개와 재미난 문체로 정신병원을 그리네요.

 

소설 주인공은 놀랍게도 ‘정신병자’죠. 공황장애와 적응장애로 입원과 퇴원을 거듭하던 정신분열증 환자 ‘나’는 퇴원 일주일 만에 산골짜기 정신병원에 갇히죠. 거기서 재벌의 숨겨진 아들 ‘승민’을 만납니다. 정신병원에는 두 갈래의 사람이 있죠. 미쳐서 갇힌 자와 갇혀서 미쳐가는 자. ‘나’는 전자요, 후자는 승민이지요. 내 인생에서 끝없이 도망치는 ‘나’와 세상으로 끝없이 나가려고 하는 ‘승민’, 동갑내기 두 젊은이의 이야기가 숨 막히게 펼쳐지네요.

 

끔찍한 정신병원 풍경, 진정한 치료를 하려면 사람에 대한 깊은 이해가 바탕 되어야

 

지은이가 간호사 생활하며 겪었던 경험과 정신병원에서 일주일동안 직접 취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소설에서 담아낸 정신병원 풍경은 끔찍합니다. 폭행과 구타가 툭하면 벌어지고, 감금과 격리가 손쉽게 일어나죠. 주인공들을 치료를 목적으로 약물폭격을 받아 ‘나무늘보’로 변하게 되며, 심지어 전기충격요법도 받아요. 물론, 정신병 환자를 고치겠다는 이유가 따라붙죠.

 

교도소가 사람을 바꾸기보다는 범죄기술을 더 배우는 곳이듯 정신병원은 정신병을 고치기보다는 그 수준 유지 또는 피해를 입히는 곳이지요. 이러한 특수시설에 있는 사람들은 피해를 받아도 어디다 하소연할 데가 없죠. 소설을 읽으면 놀라는 지점이 정신병자들 때문이 아니에요. 이른바 ‘정상’이라는 사람들 때문에 무서움이 일어납니다. 도대체 누가 누구를 ‘비정상’이라고 할 수 있을지 소설을 읽다보면 막막해지죠.

 

모든 병에 대한 접근이 달라져야 하죠. 사람은 일차원 존재가 아니기에 아픈 부분을 자르거나 약을 먹는다고 낫지 않지요. 잠깐은 증세가 멈춰질지 모르나 결코 바탕이 바뀌지 않죠. 치료는 환자 몸을 들쑤신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그렇게 나아진다면 사람은 고무찰흙에 지나지 않죠. 잘못된 고무찰흙을 잘라버리듯 인간은 치료가 되지 않습니다. 증상 밑에 드리워져 있는 그림자를 의사와 환자가 함께 찾지 않고서는 절대로 변화를 가져올 수 없지요.

 

따라서 의사와 환자가 ‘치료라는 행위에 같이 참여’해야 하는 거죠. 의사는 단순히 칼을 휘두르는 게 아니라 속 터놓을 수 있는 상담을 하고 환자의 마음을 열어야 하죠. 환자의 생각과 삶이 바뀌어야 치료가 되니까요. 진정한 치료는 소통하는 ‘과정’에서 이뤄지는 겁니다. 그 사람이 왜 그런 현상을 보이는지 기억, 경험, 환경, 가족, 성격 등등 요인들을 꼼꼼히 살펴서 그림자를 걷어내야 하는 거죠. 하지만 병원에서는 명령만 합니다. 현실의 어려움을 들면서 ‘의사가 편한 치료’를 합니다.

 

흔히 정신병은 도파민 이상으로 생긴다고 알고 있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고 하네요. 그렇기에 그 환자 삶에 감추어져 있는 뿌리를 캐야 한다는 거죠.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 하찮아 보이는 이야기와 끝없는 수다 속에서 드러나는 그 사람의 그림자를 찾아야 하는 거죠. 지금 의료 체계에서는 그 뿌리를 볼 눈과 뽑을 힘이 없기에 통증이 잠깐 멈추는 것처럼 보일 뿐, 병은 쉼 없이 세상을 떠돌고 환자는 계속 병원을 찾죠.

 

감시와 처벌 그리고 ‘우리 한을 풀어 달라’는 그들, 당신은 자유로운가?

 

소설에서 주인공들은 끊임없는 감시에 놓여 있죠. 방마다 CCTV가 있고 병동 이곳저곳에서 무엇을 하는지 지켜보고 있죠. 조지오웰의 <1984>에 나오는 ‘빅브라더’처럼 일거수일투족을 단속하고 방 수색을 벌이죠. 다른 사람들을 길들이기 위해 본보기를 보여주며 처벌에 대한 공포를 불어넣죠. 감시와 처벌, 정신병원을 돌아가게 하는 원칙이죠. 일상화된 감시 속에 환자들은 자기 검열을 하고 공포를 내면화하죠. ‘판옵티곤’이 실현된 곳이죠.

 

병원에 갇힌 ‘승민’은 끝없이 탈출을 하려고 시도하고 저항하죠. 승민 곁에 있는 ‘나’도 어쩔 수 없이 사건들에 계속 휘말리죠.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지는 사건들이 워낙 흥미진진하여 책에서 손을 뗄 수가 없네요. 그들의 탈출에 쏠리던 눈을 자신에게 돌려봅니다. 과연 나는 자유로운가? 나를 억압하고 부자유하는 것들로부터 탈출한 적이 있는가? 이 사회는 정신병원보다 자유로운가?

 

한국은 이미 ‘감시와 처벌’을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은 분들이 많이 계시는 형편입니다. 미네르바가 잡혀 들어가고, 전자우편이 만인 앞에 까발려지고 있는 지경이죠. 수많은 감시자들이 여기저기서 개인정보를 조사하고 있고, 인터넷에 올라오는 모든 글들과 댓글들을 감시하고 처벌하고 있지요. 푸코가 살아있었다면 한국을 깊게 연구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드네요.

 

또 다른 의미에서 보면, 일상이라는 감옥에 갇혀있는 것처럼 사는 사람이 많지요. 자기 자신에 만족하지 못하고 변화를 꿈꾸지만 언제나 자기 테두리에서 한 뼘도 못 나갑니다. 그래서 주인공들이 탈출시도를 되풀이할 때, 흠뻑 빠져들었다가 제자리 머무는 모습에 알싸한 동질감을 느끼게 되죠. 책에서 나오는 정신병원이 우리네 세상이니까요.

 

책에는 까만 웃음들이 가득하죠. 생생하게 그려지는 인물들을 보면 절로 웃음이 생기다가도 어처구니없는 사건들에 허탈한 웃음이 빚어지죠. 또한 짠한 감동이 묻혀있죠. 수리희망병원에 갇혀있는 그들에게 ‘희망’은 ‘수리’해야 하는 것이라고 ‘정상’사람은 판단하죠. 이에 맞서는 그들의 몸짓에 가슴이 후끈 달아오르네요. 지은이 정유정이 취재를 마치고 떠날 때, 그들은 ‘우리 한을 풀어 달라’고 하였대요. 그들의 한이 소설을 통해 조금이나마 풀어졌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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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지 밖의 언어 - 지혜의 심장, 우리말 사전 지식의 진화를 위하여 問 라이브러리 9
이상규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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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따, 우리말이 사라질 위협에 처했다고라? 토박이 말들이 얼마나 큰 위기에 처했는지 아시느갑쇼. 언어는 존재의 집으로 무슨 말을 쓰는지 무척 중요해유. 그랑게 한번 한국 토박이 말을 써볼랑게 너그러운 마음으로 읽어주시면 고맙지유. 여기저기 섞인 잡탕말이 되겄구먼. 또한 말법도 조금 바꿔보고쏘.

 

국어학자 이상규씨가 국립국어원장으로서 온 몸과 마음을 다해 쓴 <둥지 밖의 언어>[2008. 생각의 나무]는 한국말 정책과 국어사전에 대해 쓴 책이지라. 국가사업으로 진행해 온 <표준국어대사전>이 담당할 수 있는 지식 그릇이 이미 넘쳤다는 점을 꼬집고 한계들을 지적하지유. 그리고 21세기 현대 사회에서 언어의 중요성과 함께 변두리 말의 중요성을 들어봅시더.

 

인터넷 세계에서 국어정보화하고 다중의 지식 평준화, 그라고~ 말이 중요하지예~

 

지식과 정보 소통의 기반이라카는 한국어는 사용자 숫자를 기준으로 하여도 세계10위권에 속하는 중요 언어입니더. UN의 세계지식재산권기구(WIPO)는 2007년 제네바에서 제 43차 총회 본회의를 열어가꼬 183개 회원국들의 만장일치로 한국어하고 포르투갈어를 국제특허협력조약이라카는 ‘국제공개어’로 공식채택 할 정도지예. 이런 위상에 걸맞꾸로 한국어 관리 체계 구축 전략이 필요가 있어예.

 

인터넷 정보통신과 과학기술이 억수로 발전했지만서도 사람들은 정보를 습득하고 파악할라는데 어렵지예. 지식이나 정보 생산이 크게 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예~ 다중이 엄청나게 늘어나뿌리니까는 지식하고 정보를 잘 활용할 수 있게끔 체계성을 갖춰가지고~ 관리해야 돼예. 이 문제를 무시했다카믄 그 많은 지식과 정보는 쓸모없는 쓰레기가 될지도 몰라예.

 

그러기 위해서 국어정보화를 하는 게 뭣보다 중요하지예. 새로운 고급 지식정보를 다중들에게 줄 때보다 더 소통할 수 있는 말로 바꿔줘야지 안캤습니꺼. 이런 신지식 기반은 사회간접자본으로 미래를 열어가는 동력이 될테니까예. 다양하고 쓸모있다카는 지식과 정보들을 잘 활용할 수 있도록 융합하고 재구성해야지예. 뭔말이냐하냐믄, 지식과 정보의 밑바탕을 강화한다면 일반 다중들의 지식능력을 무척 높일 수 있을 거라고예.

 

다중의 지식 평준화는 선진 국가로 향하는 지름길이라예. 다중의 지식을 높이는 가장 기본이 되는 일은 바로 다양한 지식을 체계화해가꼬 국어사전 맨들고 또 기반에서 공유해보는거지예. 그만큼 소통이 중요한 시대가 됐지 않겠습니꺼. 다중이가 직접 지식을 만들고 관리할 수 있도록 공공기관과 같이 작업할 수 있는 순환 지식 환경을 만들는 거라예.

 

다중의 지식과 정보 통합능력을 인터넷을 통해 협업해가꼬 중간관리비용을 최소화하는기라. 그라믄 웹 기반 국어사전은 국가 지식 생산을 높이는 하나의 방안으로 검토해야지 않겄습니꺼. 온라인 상에서 누리꾼이 만든 정보에 믿음이 안 갈 수도 있지만 색안경만 끼고 보지 말고, 보다 열린 방향으로 가려고 해야지! 대중은 스스로 지식 기반을 만들어가고, 미래를 만들어내는 주인공이니까예~

 

토박이 말들이 잡아먹혀버리는 언어 식민주의 시대, 모국어가 눈에 들어올 턱이 없지라

 

권력이 다른 사람의 영혼을 사로잡아 포로로 만들어븐께 가장 중요한 것이 언어아니겄냐. 총은 몸을 굴복시키고 언어는 정신을 종속시키잖어. 일제가 왜 조선말을 못 쓰게 하는지 떠올려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지 않겄냐. 그러니 여러 이유로 언어들이 없어져불지. 무려 6천 갈래 언어 가운데 절반이 21세기에 사라질 거라드라.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중국어 등이 토백이말들을 잡아먹는 거시여. 언어가 사라지는 것이 생물이 없어져브는 것이랑 비슷한 과정과 속도로 진행되고 있구먼. 다양한 생물이 없어지는 것으로 지구의 위기를 예견할 수 있는게라 다양한 언어가 사라져븐 건 인류의 지적 문명의 재앙이자 다가올 불행을 예고하는 신호이니 않겄냐

 

우리들 언어는 지구에서 한번 없어지면 대체가 불가능한 천연자원이니. 언어가 사라지는 것은 다양한 생물이 사라져브는 위협과 마찬가지니께로 우리가 맞부딪힌 매우 심각한 문제여. 아따 영어가 허벌라게 뒤죽박죽으로 옛날에 죽어버린 언어 빈자리를 무섭게 메우고 있어불데.

 

언어 식민주의 시대가 아닌가 싶어. 영어를 중심으로 몇 개 종주국의 언어가 강화되고, 못 사는 나라에서 똑똑한 것들이 공부해 갔고 잘 사는 나라 언어를 배운께. 즈그네들끼리만 쓰니까 어려운 말을 모르는 국민들을 무시하고 즈그네들끼리만 잘 살라는 것 같어야. 조선 시대에 한자와 한문이 그럈고, 시방은 코쟁이 언어 쓰잖어.

 

가진 것들한테 기대니까 우리들은 ‘네이티브 스피커와 프리토킹’을 해야 한다는 뜨거운 욕망에 사로잡혔어야. 잘 살고 출세하려는 것이 영어랑 친해서 모국어가 사람들 눈에 들어올 턱이 없지 않겄냐. 우리 말과 글을 가꾸는 대신 토익점수를 올리려 눈을 부라리고 있으니 우리 것은 아예 관심이 없는 실정이여.

 

자국어가 사라진 나라치고 멸망하지 않은 나라가 없슈. 변두리말, 토박이말에 관심을 가져봐유.

 

시방 국어사전 지식의 바깥에 내팽겨쳐져 가지고 기초 지식과 정보에 엮여져 있는 낱말들을 사전지식으로 끌어들일 필요가 있다는 거여유. 표준어 둥지 바깥에서 서성거리는 토박이말들을 폭넓게 받아들여서 종합국어대사전에 담아내야 한다는 거지유. 토박이 꽃 이름이나 나무 이름, 날벌레 이름은 모르지만 영어로만 나불대는 학생들이 넘치는 세상 아니겄슈?

 

변두리 말, 토박이 말, 방언에 관심을 가져야 혀유. 효율성만을 따져서 서울말만 위하다보면 똑같은 논리로 민족어는 영어에 밀릴 수밖에 없당께유. 방언 < 표준어 < 영어로 이뤄진 위계를 까부수면서 서로 어우러지는 길 가운데 하나가 방언 연구구만유. 그렇지 않으면 지배언어가 피지배 언어를 잡아먹듯 도시 언어가 변두리 언어를 잡아먹게 되니까유.

 

따지고 보면 표준어도 방언이유. 표준말이라 하는 것이 “우리나라에서는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로 정함을 원칙”으로 한담서유? 서울도 한 지역일 뿐이잖유. 그래서 표준어는 정치상 성공한 하나의 방언이고 다른 방언들은 국어의 일부라는 거여유. 표준어 바깥에 있는 말들은 죄다 쓸모 있는 언어자산이고 국어의 자양분이 되는 것이라 고말이유.

 

서로 다른 지방 사람들이 의사소통할 적에 불편을 덜기 위해 표준어를 정했지만 그것이 변두리말을 옥죄어서는 안 되지유. 고로코롬 한민족의 방언 가운데 공통성이 가장 많은 현대어를 표준어라고 하고, 두루 소통할 때, 공통성이 가장 큰 것을 표준어라 하자고 지은이는 주장하고 있슈. 한번쯤 무조건 외웠던 표준어에 대해 고민해보면 좋겄슈. 요것과 마찬가지로 북한말까지 생각해보면 더 좋을 것 같어유.

 

자국어가 사라진 나라치고 멸망하지 않은 나라는 없슈. 언어가 존재한다는 것은 정신이 존재한다는 거여유. 떳떳하게 세계사회에 참여하는 나라들은 다 자기 언어를 사랑하지유.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자국의 말과 글이 시퍼렇게 살아야 있어야 하는 것 아니겄슈. 지혜의 심장, 지금까지 즈그들 테두리밖에 있는 말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좀 보내주셔유. 그라면 우리말 지식이 진화한당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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