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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과 자유 - 장자 읽기의 즐거움 ㅣ 問 라이브러리 8
강신주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람은 누구나 행복해지고 싶습니다. 바쁘게 일하는 것도, 싱숭생숭 마음이 들뜨는 까닭도 행복해지고자 함이죠.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훌륭함이 뭔지 알아야 하듯 행복해지려면 행복이 뭔지 밝혀주는 인문학이 필요하죠. 인문학은 사람의 즐거운 삶을 긍정하고, 행복하고 싶다는 정신에서 빚어집니다. 결국, 오늘날 크게 불거진 인문학의 위기란 사람의 자유와 행복의 위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장자를 읽습니다. 장자는 인문학의 정신이 사랑에 있다는 점을 가르쳐주죠. <망각과 자유 - 장자 읽기의 즐거움>[2008. 생각의 나무]는 백남준, 플라톤, 헤겔, 니체, 들뢰즈, 스피노자, 베르그손, 사르트르, 레비나스 등 수많은 철학자들을 가로지르면서 장자를 얽어 쓴 책이네요. 철학자 강신주가 맛깔난 솜씨로 버무린 내용이 꽉 차있으면서도 읽는 재미가 쏠쏠하네요.
사람은 사랑으로 이뤄진 존재입니다. 사랑하고, 또 받고 싶어 하죠. 수많은 철학자들이 머리를 싸매고 존재 본질과 세상 원리를 찾은 것도 사랑 때문이라 할 수 있죠. 모두가 사랑이 바깥에서 주어지거나 자기 이전에 있는 것이라 여길 때, 장자는 <제물론>[齊物論]에서 다부지게 얘기합니다. 길은 우리가 걸어가는 데서 완성된다고. 사랑이란 길은 미리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 우리가 서로 발을 내딛을 때 이뤄지는 거라고.
길은 우리가 걸어가는 데서 완성, 그 길의 끄트머리에는 뭐가 있어서 길을 내려고 했을까?
장자에게 길은 목숨을 걸어 만들 정도로 대단한 것이죠. 그 길의 끄트머리에는 뭐가 있기에 길을 내려고 했을까요? 그 길에서 우리는 바로 타자를 만나게 됩니다. 장자가 우리에게 만들라고 이야기했던 길은 타자에게로 향하는 길이지요. 우리는 왜 타자에게로 건너가야 하는 것일까요? 사람은 타자와 연대와 사랑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길에서 타자를 만나 사랑을 나눌 때라야 비로소 참다운 삶을 누릴 수 있지요.
타자를 만날 때, 망각이 필요하다고 장자는 힘주어 말합니다. 왜냐하면 망각이 없다면, 현재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죠. 과거에 대한 기억과 미래에 대한 기대로 사람은 이 순간을 제대로 살지 못합니다. 오늘은 단지 지난날 약속을 지키는 과정에 지나지 않거나 앞날의 기대에 사로잡히기 일쑤죠. 지금이 조각나고 사라져버려 참 기쁨을 못 느끼면서 살게 됩니다.
생활이 불만족스럽다면, 사랑을 깊게 만나고자 하면, 깨어있는 행복을 일구려면, 자기 몸을 재배치하고 새로운 환경에 동선을 꾸려야 하고 타자와 결합을 해야 하죠. 새롭게 이어지려면 기존의 모든 연결은 잊어야 합니다. 산책자가 새의 노래와 바람소리를 듣기 위해선 자신의 고독으로부터 빠져나와야만 하는 거죠. 헤엄을 치려면, 땅에서 가졌던 수영에 대한 이성-운동을 잊고 물에서 있는 그대로 감각-운동에 적응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죠.
그러나 뿌리 깊게 ‘나’를 지배하는 자의식은 타자와 만남을 가로막습니다. 이러한 자의식을 비워내야 하죠. 장자뿐만 아니라 주체의 자기동일성을 문제 삼았던 불교에서도 비움을 얘기했습니다. 모든 불교 전통의 가르침이라 할 수 있는 공(空), 허(虛), 무아(無我)란 개념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쉽죠. 장자도 심재좌방(心齋坐忘)이란 수양법을 얘기하며 자의식을 내려놓고 타자와 소통하라고 어깨를 두드립니다.
자의식을 무너뜨리는 건 꽤 어려운 일입니다. 수많은 벽들이 나타나 사람을 한정짓고 테두리를 그어버리죠. 사람들은 그 경계에 자의식을 지으며 살아갑니다. 타자와 마주칠 때 울림이 일어나는데 자기 벽과 마주치기에 ‘자기 안 소음’이 들끓게 되죠. 울림이 아니라 소음이기에 괴롭습니다. 시끄러운 소리에는 즐거움, 슬픔, 노여움, 고집, 변덕, 허세, 오만, 가식 등등 가짜 자의식이 담겨 있으니까요.
살다보면 자의식 때문에 일이 어긋나 딱하게 될 때가 자주 있죠. 사랑하는 타자에 대해 “이것이야말로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거야”, “그에게 이것이 가장 좋을 거야” 자기 경험과 아는 한에서 판단을 하죠. 그렇지만 이러한 판단들 속에서 타자가 자신과 다르다는 것, 그래서 그는 자기와는 다른 생각과 욕망을 가질 수 있음을 곰곰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렇기에 생각대로 되지 않는 타자를 보며 어찌할 바를 몰라 하죠.
도대체 당신의 마음을 모르겠다는 당혹감과 함께 아찔한 현기증 상태에서 타자에 대한 판단중지를 하고, 자신에 도사리고 있는 선입견의 뿌리를 들춰봐야죠. 거기서 타자가 자유로운 존재, 즉 타자성을 지닌 존재라는 걸 받아들이지 않았음이 드러납니다. 장자는 바로 이것을 잊고 비우라고 따끔하게 말하죠. 자신을 비우지 않고 상대를 대하면, 자신의 기대와 생각을 그 사람에게 던져놓은 뒤 타자가 그에 따르지 않을 때 몽니를 부리다가 서로 파멸하게 되니까요.
자기 기대는 좌절되기 때문에 자기욕망 꺾는 연습을 미리 해야죠. 기대가 사라지는 자리에 타자가 들어올 수 있으니까요. 그대로를 존중할 때, 타자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피어나고 향기로운 사랑이 싹트죠. 타자의 결을 그대로 맞춰주면서 서로가 주체성을 지닌 만남을 하게 되는 거죠. 자의식이 무너지는 경험이고,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자기 역사에 남을 순간입니다. 참된 만남이 이뤄지는 기적이죠.
잊어버림은 우리 삶을 좀먹는 기억들과 싸우고 새로운 기억을 이뤄 사랑과 연대를 할 수 있게 해
때문에 장자는 망각을 강조합니다. 잊어버림은 우리 삶을 좀먹는 기억들과 싸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죠. 그렇지만 망각은 통과의례일 뿐입니다. 최종 목적은 사랑과 연대를 할 수 있도록 새로운 기억을 이루려고 노력하는 거죠. 잊어버림과 비움은 세상과 단절하고 닫히는 게 아니라 소통하고 열림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비움이나 망각이 타자와의 사랑에서 단지 필요조건일 뿐 절대로 충분조건은 될 수 없다는 점이죠. 비움이나 망각은 타자에게로 건너가기 위한 가벼움과 경쾌함을 제공하지만 타자와 깊게 만난다는 보장을 못 합니다. 선입견과 자의식을 버려야만 그나마 타자와 연결될 수 있는 희망을 품을 수 있기에 날마다 자기를 비워내는 거죠. 물론 이 희망조차 타자에 의해 언제라도 좌절될 수 있음을 깨닫는 게 인생의 지혜겠죠.
타자와 만남은 결코 혼자서 이뤄낼 수 없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본인의 노력과 함께 타자도 자신에게로 넘어오려는 갈망을 가질 때에만 ‘나와 남’이 ‘우리’가 되어 만날 수 있죠. 3인칭 ‘남’이 2인칭 ‘당신’이 되는 거죠. 이런 변신은 저절로 되지 않죠. 절망스러운 현실에서도 여기에서 저기를 희망할 때, 간신히 이뤄지는 겁니다. 끊임없이 자기 기대를 누그러뜨리며 타자에게로 건너가고자 애쓰면서 타자가 넘어오고 싶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거죠.
인간의 유한성과 타자의 타자성 사이, 다시 말해 ‘나와 남’이라는 깊은 차이를 건너려면 결단과 뛰어넘음이 필요합니다. 뛰어넘음을 하려면 충분히 가벼워야하고 비워내야만 하죠. 갖고 있던 선입견, 오만, 자의식, 사변잡념들을 털어내야 합니다. 나를 무겁게 했던 무게들과 안녕~ 작별한 뒤에야 우리는 타자와 소통할 수 있습니다. 물론 타자에 이른다는 확답은 없지요. 뛰어넘다 곤두박질할지 모르죠. 그럼에도 손을 내미는 삶을 살아야겠죠.
소통이 어려운 시대라고 해요. 소통이 뭔지 짚어보면, 소(疏)는 트인다는 뜻이고 통(通)은 연결하다는 뜻이죠. 막혔던 것을 잘 터 흘러서 이어진다는 게 소통입니다. 자신이 갖고 있는 한계를 지닌 지식, 치우친 경험들에 붙잡히지 않아야 소통을 할 수 있는 거죠. 소통이 안 되면 타자를 사랑할 수 없죠. 따라서 망각은 타자를 사랑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 되죠. 나누고 가르고 자르고 따지던 분별작용에서 벗어나 타인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마음이 펼쳐지니까요.
비움이나 잊음은 세속에 대한 무관심이나 냉소가 아니라 생성의 긍정이고 타자와 만남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과정입니다. 장자와 비슷하게 선불교의 여섯 번째 스승 혜능은 ‘무념의 실천’을 얘기하죠. 이것은 자기를 비워내서 홀로 도사가 되라는 게 아니라 타자와 함께 참되게 살라는 뜻이죠. 무념의 실천은 ‘세계 밖으로의 초월이 아니라 세계 속으로 초월이니까요,
장자의 망각은 사람들 사유에도 큰 영향을 끼쳤지요. 플라톤부터 사람들은 기억을 좋은 것, 잊는 것을 나쁜 것이라 여겼지요. 그런 전통에서 진리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알레테이아(aletheia)는 부정의 접두어 a와 망각을 의미하는 lethe로 구성되어 있죠. 이러한 이분법을 장자는 뒤집어 버립니다. 자신을 잊는 거울처럼 지금 이 순간 타자의 그대로를 비추고 소통을 하여 행복해지라고 장자는 귀띔을 하네요.
장자 「덕충부德充府」를 보면 “마음이 조화롭고 즐겁도록 하여 타자와 연결하여 그 즐거움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 또 밤낮으로 틈이 없도록 하여 타자와 더불어 봄이 되도록 해야 한다. 이런 사람이 바로 타자와 마주쳐서 마음에 봄이라는 때를 생성시킬 수 있는 자이다”라고 얘기합니다. 내가 꿈속에서 타자가 되었는지 타자가 꿈속에서 내가 된 것인지 알기 어려운 삶, 판단중지를 하고 자신을 비움으로써 타자와 더불어 봄이 되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