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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 뜨거운 기억, 6월민주항쟁
최규석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요즘 사람들은 풍요로움과 민주주의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때마다 어렵지 않게 ‘신상’을 사고, 손쉽게 키보드를 두드리며 욕을 내뱉고 있죠. 한편, 70년대 박정희에 맞서 화염병을 던지고, 80년대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목 놓아 외쳤던 젊은이들은 이제 재테크에 눈이 빨개진 채 자기자식 명문대 보내는데 빠져있습니다. 골프채를 휘두르며, 참 좋은 세상이라고 되뇌며.
대형마트 때문에 재래시장 상인들이 죽겠다고 하소연할 때, 이 대통령은 “내가 노점상 할 때는 슈퍼마켓이 없었거든”이라며 반말하는 뚱딴지가 되더니 “내가 옛날 젊었을 때, 재래시장 노점상 할 때는 이렇게 만나서 얘기할 길도 없었다. 끽 소리도 못하고, 장사 되면 다행이고 안 되면 죽고 뭐 이렇게 모여 하소연할 데도 없었는데 지금은 그래도 이야기할 데라도 있으니 좋잖아?(웃음) 좋아졌잖아, 세상이”라고 말을 합니다.
끽 소리 못하고 하소연 할 데도 없었는데, 지금은 그래도 이야기할 데라도 있으니 좋잖아?
이렇게 세상이 좋아져서 쇠고기를 싼 값에 배불리 먹여주겠다는데, 촛불을 들고 너나 쳐드셈이라고 떠드니, 열불이 안날 수 있나요. '서민정당‘에서 일자리 창출과 경제를 살리고자 미디어법을 통과하려고 하는데, 끽 소리도 못 했던 무지렁이들이 민주주의 위기라고 들고 일어나니 어찌 화나지 않을 수 있나요. 그렇게 쌓인 게 이제 곧 폭발합니다. 책 <100℃>[2009. 창비]는 임계점을 넘어 물이 끓듯 사회가 확 달라졌던 지난날을 담아내며 오늘을 돌아보게 합니다.
뜨거웠던 80년대가 어느새 가물가물해지는 이 때, 강산도 두 번 넘게 바뀌었건만 이 책은 20년 전으로 돌아가 80년대 민주화운동과 87년 6월 항쟁을 그립니다. 80년대 많은 대학생들이 그렇듯 반공정신이 투철한 학생 영호도 대학에 들어가면서 진실에 눈을 뜹니다. 처음으로 광주민중항쟁을 만나면서, 자신의 머릿속에 왜 이렇게 끔찍한 사건이 지워져있는지 큰 충격을 받게 되죠.
절대로 빨갱이가 되지 않게다고 다짐했던 영호도 다른 대학생들과 마찬가지로 화염병을 던지고, 대자보들을 붙이게 됩니다. 한국전쟁을 치르면서 애꿎은 사람들이 죽어나갈 때, 혼자가 된 영호의 어머니와 데모하는 것들은 다 빨갱이라는 영호의 아버지, 공장 노동자로 눈물을 집어삼키는 누나와 가족을 위해 두 눈을 질끈 감고 공부만 해서 취업을 한 큰 형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흘러갑니다.
이 책을 읽으며 만화가 갖고 있는 힘을 새삼 느끼게 되네요. 영상이 생생함은 더하지만 여운이 덜하고, 글이 상상력은 더 지피지만 읽는 것이 불편할 수 있는데 반해 만화는 부드럽게 가슴으로 들어가 깊은 곳을 건드립니다. 일부러 감정을 부추기지 않는데도 책장을 넘기지 못하고, 왈칵 치솟는 기운에 잠깐씩 하늘을 보게 만드네요. 워낙 찐한 주제를 만화로 그렸기 때문일까요? 그렇기도 하겠지만 작가의 뛰어난 솜씨덕분이죠.
이 책을 지은 최규석 작가는 <대한민국 원주민>이나 여러 만화에서 이미 인정을 받은 젊은 만화가예요. 다른 책에서도 그의 열정을 느꼈지만 ‘100℃’에서 두드러지게 뜨겁네요. 자신도 민주화운동을 배운다는 자세로 겸손하게 그렸기 때문인지, 미처 몰랐던 역사 앞에서 놀랐기 때문인지, 그림체에서 묻어나오는 열기에 식어있던 심장이 충분히 데워지네요. 몇 번씩 눈가에 맺히는 물기만이 달아오르는 뜨거움을 조금 누그러뜨려주네요.
목숨을 내걸고 싸워온 사람들이 만든 한국, 피눈물을 머금고 핀 민주주의, 이제 안심해도 된다며 행복해하는 사람들이 있죠. 그들은 둘 가운데 하나지요. 바보거나 도둑이거나. 2009년 한국은 용산에서 멀쩡한 시민 다섯 명이 경찰과 용역 연합에 숯주검이 되고, 강에 공구리가 발라지듯 사람들 눈과 귀에도 시멘트가 발라지고 있습니다. 헌법에 나와 있는 집회도 하지 못하고 있으며, 사이버모욕죄를 만들어서 사람들 입도 꿰매버리려 하죠.
민주주의가 거꾸로 가고 있다, 파시즘의 초기 낌새들이 나타나고 있다며 걱정하는 가운데 전직 대통령이 자살을 합니다. 훌륭한 언론과 대단한 검찰들이 끊임없이 비열하게 깨물고 악랄하게 할퀴었건만 반성도 없고 변화도 없이 세월은 흘러갑니다. 수만 명이 민주주의가 위기라며 시국선언을 하지만 세상은 너무나 똑같습니다. 도무지 달라지질 않는 세상을 보며,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하죠.
도대체 민주주의가 무엇이고, 수많은 사람들이 왜 피와 땀을 흘리며 민주주의를 지키려 했는가?
이런 썩은 세상, 이라며 고개를 돌리고 싶을 때, ‘100℃’는 묻습니다. 도대체 민주주의가 무엇이고, 당신은 민주주의를 위해 무엇을 하였는냐고. 그리고 이렇게 말을 하죠. 민주주의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아무것도 아닌 걸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피와 땀을 흘렸다는 것을 잊지 말자고. 우리의 민주주의가 안심할 정도로 튼튼하지 않으며, 끊임없이 강화하고 보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작가는 뜨겁게 얘기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오늘을 똑바로 봐야 합니다. 눈만 뜬다고 제대로 보는 게 아니죠.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맥락을 이해하고 그 뜻을 해석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를 해야 합니다. 입시 때보다 더 빡세게! 첫사랑보다 더 뜨겁게! 민주주의가 흔들릴 때 겪는 피해는 개인 차원을 넘어서 사회 전체가 고통을 당하니까요. 연인과 헤어지는 것보다 시험에서 떨어지는 것보다 민주주의 위기는 더 큰 충격을 줍니다.
공부를 하면서 지금을 제대로 알려면, 지난날을 돌아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오늘을 살면서 과거와 내일에 영향을 받는 존재니까요. 오늘은 언제나 새로운 날이지만 어제와 닮은 날일 수밖에 없죠. 우리는 과거로부터 아무리 도망가려 해봤자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오늘을 잘 만들어야 하는 거죠. 오늘은 내일의 과거가 될 테니까요. 지난날을 알고자 할 때, 오늘을 제대로 살고자 할 때, 내일을 꿈꾸고 싶을 때, 이 책은 큰 도움이 되겠네요.
탁자를 턱하고 치니까 억하고 죽었던 박종철씨부터 최루탄을 머리에 맞은 이한열씨까지 87년 민주항쟁의 밑절미가 되었던 평범한 대학생들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러봅니다. 또한 고문실에 끌려가 죽지 못해 살았던 사람들이 어떤 세상을 바랐는지 곰곰 생각해봅니다. 오늘날 한국은 그때보다 얼마나 좋아졌나요? 어디서부터 잘못되었기에 민주주의가 이렇게 흔들리고 있을까요?
한국은 커다란 위기에 부딪혔습니다. 위기란 늘 적은 수의 사람들이 큰일 났다고 소리치는데서 시작됩니다. 모든 위기가 그렇듯 모든 사람들에게 바로 재갈을 물리진 않지요. 벌써 그랬다면 위기가 아니라 지옥이겠죠. 저 멀리 늑대가 나타났다고 외칠 이는 산에 올라간 몇 명의 목동일 수밖에 없습니다. 마을에 있던 사람들은 목동의 얘기에 늑대가 나타났다는 걸 알 수 있지만 아직 늑대를 못 봤기에 위기감이 피부에 와 닿지는 않죠.
지금까지 너무 자주 늑대야~ 라는 외침이 있었는지, 사람들은 심드렁해합니다. 이제 너무 시끄럽다고 힘센 목동 몇 사람만 놔두고 다 없애자고 얘기하는 형편입니다. 한쪽에서는 그 목동들이 늑대라면서 안 된다는 사람들이 있지만 다른 쪽에서는 이것이 선진화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혼란스러운 오늘, 목동이 어때야 하는지,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다시금 생각했으면 합니다. 곧, 100℃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