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심장을 쏴라 - 2009년 제5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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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정상이냐고 누가 묻는다면, 대부분 사람들은 정상이라고 답하겠지요. 침을 흘리며 자기 몸을 ‘통제’하지 못하거나 함부로 상대에게 해를 가하는 사람을 ‘비정상’이라고 여기니까요. 그러한 비정상이 아니기에 정상이라는 주장은 “난 나쁘지 않으니까 착하다”는 논리처럼 허술하죠. 그렇다면 정상이란 무엇일까요? 늘 불안하고, 걱정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은 정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한번 고민해볼 문제지요.

 

정상과 비정상은 권력관계가 생기면서 맥락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죠. ‘미치광이’는 원래 있는 게 아니죠. 지금은 ‘비정상’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사회에서 쫓아내 떼어놓지만 옛날에는 동네에 한두 명씩 ‘그런 친구들’이 있었고 주민들과 어울려 잘 지냈죠. <내 심장을 쏴라>[2009. 은행나무]는 제5회 세계문학상 수상작으로 정상과 비정상, 자유와 치료에 대해 물음표를 던지는 장편소설이네요. 야무진 얼개와 재미난 문체로 정신병원을 그리네요.

 

소설 주인공은 놀랍게도 ‘정신병자’죠. 공황장애와 적응장애로 입원과 퇴원을 거듭하던 정신분열증 환자 ‘나’는 퇴원 일주일 만에 산골짜기 정신병원에 갇히죠. 거기서 재벌의 숨겨진 아들 ‘승민’을 만납니다. 정신병원에는 두 갈래의 사람이 있죠. 미쳐서 갇힌 자와 갇혀서 미쳐가는 자. ‘나’는 전자요, 후자는 승민이지요. 내 인생에서 끝없이 도망치는 ‘나’와 세상으로 끝없이 나가려고 하는 ‘승민’, 동갑내기 두 젊은이의 이야기가 숨 막히게 펼쳐지네요.

 

끔찍한 정신병원 풍경, 진정한 치료를 하려면 사람에 대한 깊은 이해가 바탕 되어야

 

지은이가 간호사 생활하며 겪었던 경험과 정신병원에서 일주일동안 직접 취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소설에서 담아낸 정신병원 풍경은 끔찍합니다. 폭행과 구타가 툭하면 벌어지고, 감금과 격리가 손쉽게 일어나죠. 주인공들을 치료를 목적으로 약물폭격을 받아 ‘나무늘보’로 변하게 되며, 심지어 전기충격요법도 받아요. 물론, 정신병 환자를 고치겠다는 이유가 따라붙죠.

 

교도소가 사람을 바꾸기보다는 범죄기술을 더 배우는 곳이듯 정신병원은 정신병을 고치기보다는 그 수준 유지 또는 피해를 입히는 곳이지요. 이러한 특수시설에 있는 사람들은 피해를 받아도 어디다 하소연할 데가 없죠. 소설을 읽으면 놀라는 지점이 정신병자들 때문이 아니에요. 이른바 ‘정상’이라는 사람들 때문에 무서움이 일어납니다. 도대체 누가 누구를 ‘비정상’이라고 할 수 있을지 소설을 읽다보면 막막해지죠.

 

모든 병에 대한 접근이 달라져야 하죠. 사람은 일차원 존재가 아니기에 아픈 부분을 자르거나 약을 먹는다고 낫지 않지요. 잠깐은 증세가 멈춰질지 모르나 결코 바탕이 바뀌지 않죠. 치료는 환자 몸을 들쑤신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그렇게 나아진다면 사람은 고무찰흙에 지나지 않죠. 잘못된 고무찰흙을 잘라버리듯 인간은 치료가 되지 않습니다. 증상 밑에 드리워져 있는 그림자를 의사와 환자가 함께 찾지 않고서는 절대로 변화를 가져올 수 없지요.

 

따라서 의사와 환자가 ‘치료라는 행위에 같이 참여’해야 하는 거죠. 의사는 단순히 칼을 휘두르는 게 아니라 속 터놓을 수 있는 상담을 하고 환자의 마음을 열어야 하죠. 환자의 생각과 삶이 바뀌어야 치료가 되니까요. 진정한 치료는 소통하는 ‘과정’에서 이뤄지는 겁니다. 그 사람이 왜 그런 현상을 보이는지 기억, 경험, 환경, 가족, 성격 등등 요인들을 꼼꼼히 살펴서 그림자를 걷어내야 하는 거죠. 하지만 병원에서는 명령만 합니다. 현실의 어려움을 들면서 ‘의사가 편한 치료’를 합니다.

 

흔히 정신병은 도파민 이상으로 생긴다고 알고 있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고 하네요. 그렇기에 그 환자 삶에 감추어져 있는 뿌리를 캐야 한다는 거죠.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 하찮아 보이는 이야기와 끝없는 수다 속에서 드러나는 그 사람의 그림자를 찾아야 하는 거죠. 지금 의료 체계에서는 그 뿌리를 볼 눈과 뽑을 힘이 없기에 통증이 잠깐 멈추는 것처럼 보일 뿐, 병은 쉼 없이 세상을 떠돌고 환자는 계속 병원을 찾죠.

 

감시와 처벌 그리고 ‘우리 한을 풀어 달라’는 그들, 당신은 자유로운가?

 

소설에서 주인공들은 끊임없는 감시에 놓여 있죠. 방마다 CCTV가 있고 병동 이곳저곳에서 무엇을 하는지 지켜보고 있죠. 조지오웰의 <1984>에 나오는 ‘빅브라더’처럼 일거수일투족을 단속하고 방 수색을 벌이죠. 다른 사람들을 길들이기 위해 본보기를 보여주며 처벌에 대한 공포를 불어넣죠. 감시와 처벌, 정신병원을 돌아가게 하는 원칙이죠. 일상화된 감시 속에 환자들은 자기 검열을 하고 공포를 내면화하죠. ‘판옵티곤’이 실현된 곳이죠.

 

병원에 갇힌 ‘승민’은 끝없이 탈출을 하려고 시도하고 저항하죠. 승민 곁에 있는 ‘나’도 어쩔 수 없이 사건들에 계속 휘말리죠.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지는 사건들이 워낙 흥미진진하여 책에서 손을 뗄 수가 없네요. 그들의 탈출에 쏠리던 눈을 자신에게 돌려봅니다. 과연 나는 자유로운가? 나를 억압하고 부자유하는 것들로부터 탈출한 적이 있는가? 이 사회는 정신병원보다 자유로운가?

 

한국은 이미 ‘감시와 처벌’을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은 분들이 많이 계시는 형편입니다. 미네르바가 잡혀 들어가고, 전자우편이 만인 앞에 까발려지고 있는 지경이죠. 수많은 감시자들이 여기저기서 개인정보를 조사하고 있고, 인터넷에 올라오는 모든 글들과 댓글들을 감시하고 처벌하고 있지요. 푸코가 살아있었다면 한국을 깊게 연구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드네요.

 

또 다른 의미에서 보면, 일상이라는 감옥에 갇혀있는 것처럼 사는 사람이 많지요. 자기 자신에 만족하지 못하고 변화를 꿈꾸지만 언제나 자기 테두리에서 한 뼘도 못 나갑니다. 그래서 주인공들이 탈출시도를 되풀이할 때, 흠뻑 빠져들었다가 제자리 머무는 모습에 알싸한 동질감을 느끼게 되죠. 책에서 나오는 정신병원이 우리네 세상이니까요.

 

책에는 까만 웃음들이 가득하죠. 생생하게 그려지는 인물들을 보면 절로 웃음이 생기다가도 어처구니없는 사건들에 허탈한 웃음이 빚어지죠. 또한 짠한 감동이 묻혀있죠. 수리희망병원에 갇혀있는 그들에게 ‘희망’은 ‘수리’해야 하는 것이라고 ‘정상’사람은 판단하죠. 이에 맞서는 그들의 몸짓에 가슴이 후끈 달아오르네요. 지은이 정유정이 취재를 마치고 떠날 때, 그들은 ‘우리 한을 풀어 달라’고 하였대요. 그들의 한이 소설을 통해 조금이나마 풀어졌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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