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들 플라워
김선우 지음 / 예담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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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아름다운 까닭은 색깔이 곱다랗고 향이 탐스럽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온존재를 머금고 있기 때문이죠. 꽃 한 송이를 피워내고자 얼마나 많은 땀과 눈물이 있었는지 그 식물만이 알겠지요. 어여쁘게 핀 꽃 한 송이가 벌과 나비를 불러들이고, 꽃들이 모여 온골을 환하게 비춥니다.

 

꽃은 사람 안에서도 태어나죠. 저마다 꽃 한 송이를 피고자 얼마나 애를 쓰고 있는지요. 그렇게 돋아난 꽃은 그 사람의 정신을 담아냅니다. 하나하나 향기가 다르고 빛깔이 다르지만 위아래는 없어요. 호박꽃은 호박꽃대로 제비꽃은 제비꽃대로 해사하죠. 모두 같이 섞이면서 어울리는 꽃밭이 바로 사회입니다.

 

잊지 못할 촛불꽃들, 2008년 5월과 6월을 되살린 캔들플라워

 

그러나 사람이란 존재는 꽃을 피워 올리기도 하지만 밤을 불러들일 때도 있죠. 꽃들의 아름다움을 가리고 향을 막는 캄캄함이 왔을 때 깨어있는 사람들은 촛불을 듭니다. 촛불꽃들이 피어나면서 어둠을 물리치죠. 한국엔 잊지 못할 촛불꽃들이 있었죠. 김선우 시인의 <캔들 플라워>는 2008년의 촛불시위를 소설로 담아낸 작품입니다.

 

촛불시위를 두고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평가도 딴판이죠. 어떤 사람들은 빨간색을 덧칠하면서 짓뭉개려하고, 어떤 이들은 안타깝지만 한계가 많았다며 씁쓸해하기도 합니다. 수많은 해석들 더듬거리다보면, 촛불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어리둥절해지곤 하죠.

 

이 책은 무거워진 평가들을 비집고 우선 처음에 어땠는지 생각해보자며 2008년 5월을 생생하게 되살려놓죠. 무엇이 옳다거나 그르다는 주장들을 잠깐 제쳐두고, 촛불이 고개 든 때를 펼쳐놓습니다. 세파에 찌들어 모든 일에 심드렁한 어른들을 대신하여 청계천으로 모여든 중고등학생들의 반짝이는 눈으로 촛불을 다시 읽어내고자 하죠.

 

책을 읽으면 왜 청소년들이 먼저 나설 수밖에 없는지 느껴집니다. 삶의 때가 덜 탄 청소년들은 감수성이 굳어버린 어른들과 달리 말랑말랑한 생각으로 움직일 수 있었던 겁니다. 어떤 일을 할 때 얻는 게 뭔지 따지고 셈한 뒤에 움직이는 어른들과 달리 청소년들은 주판알을 튕기지 않습니다. 참을 수 없어서 움직인 거죠. 그들은 특정한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촛불을 든 게 아니라 어둠이 짙게 드리워지는 한국이 속상하여 스스로 나선 겁니다. 그러한 싱싱하고 가벼움이 광장을 열어내죠.

 

이렇게 알아서 모이고 즐기는 청소년들이 바로 촛불의 고갱이입니다. 그들과 소통할 수 있는 어른들이 촛불에 어우러지면서 이야기가 굴러가죠. 통통 튀는 이들의 말과 몸짓을 보다보면 자연스럽게 2008년의 산뜻함을 떠올리게 되네요. 제가끔 헌데를 갖고 있지만, 자신의 아픔에 머무르지 않고 남의 괴로움을 헤아리는 사람들이 촛불을 통해 만나고 따뜻함을 나눕니다. 누군가 아파하면 자신도 아플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말간 눈으로 광장에 들꾀든 것이죠.

 

새로운 생명감각을 가진 평범한 사람들의 고민들이 만나 커다란 잔치를 열다

 

부당한 현실엔 유쾌하게 대들면서도 서로서로 존중하는 소설 속 주인공들을 보면 눈자위가 촉촉해집니다. 세상살이란 남을 못 잡아먹어 안달해야 하는 정글이라고 인상 구기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등을 가만가만 토닥거리면서 힘을 북돋워주니까요. 촛불을 잊지 말라고 조곤조곤 속삭입니다. 함께 이야기를 하고 먹을 것을 나누고 웃고 떠들었던 기억들을 묻어두지만 말라고 지친 가슴을 어루만져줍니다.

 

주인공들이 저마다 외로움 속에서도 더불어 있고자 애쓰는 모습은 촛불시위 때 사람들이 보여줬던 정신을 떠올리게 하며 마음에 물결을 일으킵니다. 잔잔한 먹먹함에 물기가 흠뻑 배어들어요. 시들었던 눈동자가 빛을 내고 메말랐던 시간에 희망이란 물꼬가 트입니다. 표정 없는 얼굴에 핏기가 돌고 입 속에 침이 고이죠. 책장을 넘기는 손이 촛불을 들었던 손이란 생각에 미치면서 뭉클함을 자아냅니다.

 

이러한 울렁임을 낳는 까닭은 촛불을 ‘새로운 생명감각’으로 보기 때문이에요. 단순히 정책에 반대하거나 미국산 쇠고기를 먹기 싫어서 나온 사람들도 있겠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어느 때보다 평화롭게 나온 까닭은 여태까지 보이지 않던 ‘생명에 대한 예의’가 솟아났다는 거죠. 사람이라면 누구나 있는 생명감각을 글로써 건드리고 있기 때문에 책을 읽고 나면, 아늑하면서 뜨거운 기운이 용솟음칩니다.

 

사람들이 보여줬던 수수하지만 참 뜨뜻했던 연대와 환대를 잊고 살고 있지만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촛불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촛불에 대한 차가운 웃음과 비판에도 귀 기울여야 하겠지만, 자그마한 불꽃들이 옆으로 번지면서 한국의 한복판을 가득 메웠습니다.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촛불꽃들을 그냥 업신여겨선 안 되죠. 사람들의 심장을 달구고 한국의 밤을 밝혔던 촛불들을 되짚어봤으면 하네요. 평범하고 소박한 사람들의 고민들이 만나 역사상 가장 커다란 잔치를 열었던 그 때.

 

촛불 시위로 한국이 아예 다른 사회로 발전하거나 나아진 건 아니죠. 당장 몸으로 느낄 수 있는 변화가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100만 명이 촛불을 들었던 기억은 한국에 스며있습니다. 꽃이 지고 난 뒤 열매가 맺히죠. 촛불꽃들이 낳은 열매들은 어떻게 여물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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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평론 알베르 카뮈 전집 20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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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거스르기란 무척 고달픈 일입니다. 조선시대, 양반에 대들기란 꿈도 못 꿀 일이었으며, 일제시대, 독립운동에 뛰어드는 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죠. 힘 센 사람에게 손바닥 비비면서 남들처럼 편하게 살아가라는 달달한 꼬임을 뿌리치면서 그 사회가 정해놓은 길 따라 가지 않는 것은 매서운 일들을 받아들이겠다는 꺾심(의지)없인 할 수 없죠.

 

불의에 대든다는 건 괴로움을 한보따리 짊어지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냥 걸어가기에도 피곤한 인생살이, 둘레의 슬픔에 흔들리고 멈춰 서서 손수건을 건네는 일은 쉽지 않으니까요. 자기 혼자만 잘 먹고 잘 살다가 죽겠다는 게 아니라 남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살피면서 걸어가는 사람은 그 사회와 불화할 수밖에 없죠. 어떤 사회든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레지스탕스가 아닌 다른 쪽에 가 있는 자신을 상상할 수 없었다는 알베르 카뮈

 

배고픈 시절을 잊고 어느새 뚱뚱해진 몸으로 기름진 말들을 내뱉는 사람들 틈에서 끝없이 반항하는 사람이 있었죠. 20세기의 반항아, 알베르 카뮈입니다. 소설 <이방인>과 <페스트>로 이름 높은 카뮈는 사람들이 여러 핑계를 내세워 캄캄한 데를 바라보기보다 반짝이는 빛깔들로 눈을 옮길 때에도 지난 아픔을 잊지 않는 지식인이었죠. 그가 고민하면서 정치사회에 대해 썼던 글 모음이 <시사평론>입니다.

 

사람 사는 시대 가운데 언제 합리성이 탄탄했던 적이 있겠냐만, 카뮈가 살았던 20세기 중반도 오늘만큼 부조리하였죠. 세계전쟁이 터지면서 그동안 믿어왔던 사람에 대한 믿음과 이성에 대한 권위가 부서져 버렸습니다. 여기저기서 마구죽이기가 벌어졌고, 도저히 눈 뜨고 봐줄 수 없는 끔찍한 일들이 숱하게 일어났죠. 모든 게 무너져 내리자 사람들은 한숨 쉬며 고개를 숙일 때, 카뮈는 인간의 운명엔 비관하더라도 인간에게 낙관하자고 글을 씁니다.

 

카뮈는 사람들의 아픔을 멀리서 바라보기만 한 게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있는 몫을 한 사람이죠. 나치의 손아귀에 들어간 프랑스 파리에서 레지스탕스로 독립운동을 합니다. 지하신문 <콩바>에서 그가 써낸 글들은 프랑스 사람들의 가슴을 달구었죠. 나치에 거슬(저항)하기보단 나치에 무릎 꿇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늘어나고, 같이 일하던 벗들이 붙잡혀 총살을 당할 때에도 카뮈는 레지스탕스로서 끝까지 남아 파리의 해방을 맞습니다.

 

그는 “레지스탕스가 아닌 다른 쪽에 가 있는 나를 상상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뿐입니다”라며 당연한 일을 한 거라고 겸손해했죠. “사람은 출생이 아니라 스스로의 행동에서 자격을 얻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자격을 고스란히 보존하려면 그 행동에 대해 침묵할 줄 알아야” 한다며 자신의 레지스탕스 경력을 단 한 번도 치켜세우거나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그에겐 레지스탕스가 부와 권력을 얻기 위함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런 카뮈를 프랑스 시민들은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죠.

 

나치의 손에서 벗어났으나 숙청 재판, 역사주의, 테러, 스탈린 수용소 등등을 놓고 어지러워진 프랑스 사회에서 카뮈는 도둑 들었을 때 목 터져라 짖는 바둑이마냥 비판을 멈추지 않았죠. 독립운동으로 이름을 날리던 사람들이 정부기관에 들어가 한자리씩 하면서 어물쩍 지난날을 덮거나 아니면 자신의 호주머니를 생각할 때에도 카뮈는 피 흘리고 죽어간 사람들을 잊지 않고, 더 나은 프랑스사회와 세계의 평화를 위해 글을 씁니다. 비판지식인으로서 자기 할 일을 한 번도 데면데면하게 여기지 않았던 거죠.

 

이러한 그와 공산주의 세력은 부딪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식인이라면 자본주의 착취에 반대를 하는 게 당연했던 시절이었죠. 하지만 자본주의의 대안으로서 공산주의를 추어올리는 건 카뮈로선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서는 과정으로서 폭력을 정당화하였던 공산주의와 스탈린의 소련에 대해서 카뮈는 에두르지 않고 아주 날카롭게 꼬집으며 목소리 높이죠.

 

오늘의 삶을 파묻어버린 채 내일의 희망을 얘기하는 건 안 된다는 시대의 반항아

 

자본주의를 몹시 싫어한 나머지 공산주의가 벌이는 일들에 대해서 눈감으려고 한 지식인들에게 카뮈는 불편한 존재였죠. 여기서 사르트르와 틀어지고, 프랑스 지식인사회와 다툽니다. 그럼에도 카뮈는 시체구덩이에서 얻어내는 혁명은 어리석은 짓이며, 사람을 죽이다보면 반드시 썩어문드러진 전체주의가 나타난다며 소련에 대해 쓴 소리를 아끼지 않았죠.

 

그래서 ‘혁명’이 아닌 ‘반항’으로 생각을 바꿉니다. 혁명이 너무 많은 피울음을 낳기에 삶의 숨결을 잃지 않으면서 부조리한 현실에 개기는 반항을 고른 거죠. 무장투쟁을 통한 계급지배를 ‘도그마’로 붙들고 있는 공산주의자들에게 카뮈는 ‘천진난만’하거나 ‘반동’처럼 여겨질 수 있을 터지만, 사회주의 좌파로서 카뮈는 적당히 그 시대와 손잡지 않고 끈덕지게 싸워나갑니다.

 

카뮈는 오늘의 삶을 파묻어버린 채 내일의 희망을 얘기하는 건 안 된다며, 자유주의자나 공화주의자들을 평생 강제수용소에 가둔 소련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겁니다. 또한 삶에서 행복을 일구기보다 죽은 다음의 행복을 얘기하는 기독교를 믿을 수 없었죠. 이데올로기나 종교처럼 지금의 행복을 앗아가고, 삶의 생생함을 옥죄는 모든 것에 카뮈는 반대합니다.

 

카뮈는 1957년 노벨문학상을 받고, 작가란 진실과 자유를 위하여 봉사해야 한다는 책무를 받아들임으로써 비로소 자기의 정당성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하죠. 한마디로 진실과 자유를 위할 때라야 지식인이라는 겁니다. 그저 책 많이 읽고 권위 있는 직함을 가슴에 붙였다고 ‘정당성 있는 작가’는 아니란 거죠. 한국에서 글 쓴다는 사람들이 어디에 봉사를 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카뮈가 교통사고로 죽은 지 올해로 50주년이 됩니다. 냉전이 끝났지만, 카뮈가 바라는 대로 터무니없는 죽음을 막고 폭력에 맞서는 국제사회가 오기는커녕 엄청난 뚤커(용기)가 없으면 ‘반항’하는 일마저 엄두가 안 나는 21세기를 맞았습니다. 자기 몸만 배부르게 살아가는 게 최고라고 부추기는 한국의 앞날이 왜 캄캄한지 카뮈의 말을 더듬어봅니다.

 

“진정한 절망은 너무나 질기고 모진 대립에 부딪히거나 대등하지 않은 싸움에서 지쳐버렸을 때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싸워야 할 때에 더 이상 싸울 이유를 찾아내지 못하게 되는 데서 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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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 - 고종석의
고종석 지음 / 개마고원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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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책을 뒤적거리다보면 꽤나 놀라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수천억의 인류가 있었고 그 댄(반)은 여자였을 텐데, 갈마(역사) 속에 나오는 여자들은 손에 꼽히죠. 그만큼 여자들이 불평등하게 살아왔으며 차별 속에서 역사에 남을 만한 발자욱을 남기지 못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이렇게 받아들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어먹한(위대한) 여자들이 없었던 게 아니라 그 갈마가 지워졌으며, 있어도 아직 우리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여태껏 갈마는 남자들이 투난(기록)해왔고 ‘제2의 성’이었던 여자들에겐 시큰둥할 수밖에 없었죠. 온골(세상)의 갈마를 들먹이지 않고 한국만 보더라도 그래요. 머릿속에 떠오르는 여자들이 얼마 없습니다. 신사임당, 유관순, 음...음... 맞다, 선덕여왕! 다들 어금지금합니다. 사회에서 가르쳐준 게 그거밖에 없으니까요.

 

강금실, 최진실, 로자 룩셈부르크, 오프라 윈프리, 보부아르 등등 멋들어진 여자들

 

책 <고종석의 여자들>[개마고원]은 가려있던 여자들을 들추어냅니다. 강금실, 최진실, 로자 룩셈부르크, 오프라 윈프리, 보부아르, 사유리처럼 잘 알려진 여자들부터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나, 샤를로트 코르데처럼 설은 여자들까지 한 데 모았죠. 인물의 쓸턱(중요)함이나 유명세보단 자기 눈에 들어오거나 마음에 드는 서른 네 여자에 대해 얘기하네요. 지은이는 왜 이런 갈마가 잘 알려져 있지 않은지 씁쓸해하면서 자신이 이런 소개를 한다는 데 신바람을 냅니다. 그만큼 멋들어진 여자들이네요.

 

여자들은 오랫동안 업신여김을 받아왔죠. 온골에 가장 널리 퍼진 종교의 고전을 보면, 여자는 남자가 외로울까봐 그의 갈비뼈 하나를 빼어서 만들어준 존재에요. 남자가 고갱이고 여자는 덤이라는 건 환웅이 내려와서 곰을 여자로 만들어주었다는 단군신화와 빼다 박았죠. 이런 군빛(환상)들은 남자가 갈마에 주먹을 휘드른 얼짬(순간)부터 넘쳐흐릅니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 그럴 뿐 그 안을 들쑤셔보면 여신들의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지 헤아릴 수 없어요. 신화에서 여신들의 이야기가 묻혔듯 갈마에서도 여자들의 삶이 숨겨져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책을 읽다보면, 마치 감춰진 보물을 찾아나서는 기분이에요. 바투(현실)에서 보이지 않던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이 나타낼 때마다 신나고 설레니까요.

 

조금 아쉬운 점은 34명을 다루다보니 그 깊은 속내까지 들어가지는 못 한다는 거죠. 수박 겉 핡기 같은 느낌을 받게 되지만 그럼에도 손뼉을 쳐줄 수밖에 없네요. 수박 겉을 핥다보면 수박 안이 궁금해지듯 일어난 호기심 따라 이 여자들에 대해 스스로 찾아보게 되니까요. 이 책은 맛보기에요. 잘 몰랐던 유기농 먹거리에 눈 뜨듯 지금껏 들리지 않던 여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은이의 바람둥이 끼꺽(기질)을 본받고 싶어져요. 무려 서른 네 여자를 사랑하기란 보통 남자의 깜냥으론 벅찬 일이니까요. 물론, 성욕의 상대로서 이보다 더 많은 여자들을 사랑할 순 있겠죠. 하지만 여성이라는 ‘젠더’를 좋아하고 어울릴 줄 아는 남자는 드뭅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까지 여자와 눈높이를 맞추려 하는 그의 마음씨는 높이살만 하죠.

 

자유주의자이자 ‘괜찮은 남자친구’이 고종석이 조곤조곤 늘어놓는 싱그러운 입담

 

한편으론 지은이를 치켜세워야 하는 것에 씁쓸함도 돋아나네요. 지은이의 몸가짐이나 말투는 사람을 대하는 기본 예의인데, 그걸 했다고 추어올리고 있으니까요. 그만큼 세상살이의 밑절미가 지켜지지 않는 한국이라고 할 수 있죠. 고씨 같은 자유주의자마저 좌파라고 답새당하는 바투에서 여자의 나척(권리)을 얘기하는 건 얼마나 외롭고 괴로운 일인지요. 이러한 마음고생에 뛰어드는 고씨가 고맙네요. 알아듣는 사람이 별로 없어도 자기 그루터기를 놓치지 않고 뱃심 좋게 얘기하니까요.

 

책을 읽으면, 고씨가 단순히 자유주의자로서 ‘올바른 정치성’을 지키고자 여자에게 예의 갖추는 게 아니란 걸 알 수 있어요. 여자들에 대한 따듯한 마음이 한 글자 한 글자마다 녹아있습니다. 그는 남자들이 벌여왔던 바보짓들을 싫어하는 차가운 현실주의자지만 그럼에도 여자에 대한 하제(희망)를 놓지 않는 데서 다사로운 이상주의자의 냄새도 맡을 수 있네요.

 

스스로 염세주의자라고 밝힌 지은이의 생각을 이상주의로 읽어내어야 할 정도로 한국 사회는 샐그러져 있고, 사람들의 얼굴은 갈수록 팍팍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후줄근한 인생을 왜 살아야 하는지 때론 갑갑하게 느껴질 수 있죠. 이 때, 이 책은 퍽 싱그럽게 해줄 듯해요. 지은이의 말랑말랑하면서도 날카로움을 버무린 글 솜씨에 빙그레 웃게 되니까요.

 

능청스럽게 이런 저런 얘기를 떠벌리다가도 갑자기 자기 마음이라면서 이글거리는 눈으로 바라보는 바람둥이처럼 여자들의 이야기를 사부자기 풀어놓다가도 가슴 깊은 곳을 뭉클하게 하는 지은이의 입담은 바람둥이와 무척 닮았죠. 조금만 귀기울이다보면 흠뻑 빠지게 됩니다. 힘들지 그래도 말이야~ 하면서 대화를 조곤조곤 서글서글 끌어가는 ‘괜찮은 남자친구’네요.

 

여자와 남자 사이에 커다란 오해산성이 치솟아있는 한국에서 나이 쉰 된 남자가 어떻게 이러한 감수성을 이어나가고 있는지 몹시 궁금했는데, 책 맨 앞을 다시 펴보니 알 수 있습니다. 아이 때 같이 놀았던 여자 친구들을 간직하면서 살고 있었던 거예요. 남자든 여자든 어릴 때부터 다른 성과 어울리는 일이 얼마나 바구(필요)한지 새삼 주억거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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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정복
버트란트 러셀 지음, 이순희 옮김 / 사회평론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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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행복하게 사는 사람은 드물죠. 행복이란 것이 한정판매되는 상품처럼 선착순이나 성적순으로 몇 사람에게만 주는 것이라서 그럴까요? 행복 하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잿빛 얼굴로 하루를 보내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렇게 인생은 흘러가고, 세월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있죠.

 

왜 모두가 행복 하고 싶다지만 불행할 수밖에 없는지 살펴보면, 사람들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행복이 쏟아지거나 돈을 많이 벌고 지위가 높여져야 행복하다는 잘못된 생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에요. 20세기의 지성 버트런드 러셀은 <행복의 정복>에서 행복은 세상과 맞서 싸워가면서 얻어가는 것이고, 자신이 어떤 태도를 갖는냐가 중요하다며 불행한 사람들의 편견을 뒤흔듭니다.

 

러셀이 유명한 철학자이자 수학자이기 때문에 내용이 어렵거나 딱딱할 거라 생각하기 쉽지만 막상 책장을 열어보면 상당히 쉬워요. 학자들을 대상으로 쓴 책도 아니고 일반인들이 모르는 심오한 철학이나 해박한 지식이 담겨 있지도 않다고 러셀이 머리말에서 쓸 정도죠. 러셀은 불행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노력하기만 하면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다는 믿음에서 이 책을 썼다고 밝힙니다.

 

삶을 미워하고 싫어해서 늘 자살할 생각을 품었던 러셀이 행복해질 수 있었던 비결

 

셀 수 없이 많은 불행한 사람들 가운데 몇 사람만이라도 자신이 처한 상황을 진단하고 거기에서 벗어나는데 이 책이 쓰이길 바란다고 하네요. 불행한 것은 숙명이 아니며 누구나 행복할 수 있으니까요. 자신이 직접 경험을 한 것들을 바탕으로 행복해진 ‘임상결과’들을 적어놓아 더욱 미덥네요. 행복은 애를 써서 얻어내는 것이라고 러셀은 목청을 돋웁니다.

 

이 책은 어렵진 않지만 러셀이 쓴 다른 책들도 그렇듯 짜임새가 촘촘하지 않아요. 큰 얼개만 짜놓고 여러 보기들을 넣으면서 글이 펼쳐져 나가니까요. 이 얘기했다가 저 얘기했다가 왔다 갔다 하는 꼴이 꼭 시골할아버지랑 밤하늘을 바라보며 두런두런 수다떠는 거 같네요. 경험 많은 할아버지마냥 인자한 얼굴로 행복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자기 생각들을 늘어놓는 러셀.

 

지은이는 문명국가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날마다 불행을 겪고 있는 걸 안타까워해요. 이와 마찬가지로 자신도 삶을 미워하고 싫어해서 늘 자살할 생각을 품었지만, 수학을 좀 더 알고 싶다는 욕구 때문에 자살충동을 참을 수 있었다며, 불행했던 속내를 털어놓네요. 자살을 꿈꾸던 러셀이 삶을 즐기게 되었으며, 날마다 살맛이 더 난다고 하네요. 그는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바로 몸과 눈을 바꾼 것이죠. 사물을 대하는 태도와 세계를 바라보는 눈이 변한 거예요. 사람들의 불행은 그릇된 세계관, 잘못된 윤리와 삐뚤어진 생활습관에서 비롯된다고 날카롭게 꼬집으면서 자신에 대한 집착을 줄이고, 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하되, 이룰 수 없는 것은 깨끗하게 접으라고 도움말을 주네요. 자신의 자연스러운 열정과 욕구를 짓뭉개지 않고 살리는 쪽으로 인생을 변화시키라고 힘주어 얘기하네요.

 

꽃 이름 따위를 알아봐야 무슨 도움이 되겠어, 돈벌이에는 보탬이 안 될 텐데, 라면서 푸념만 하는 사람에게 러셀은 자신이 쓰고 있는 안경 색깔을 돌아보라고 충고하죠. 불평불만이란 안경을 쓰면 세상은 온통 짜증과 화딱지죠. 러셀은 삶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는 게 어떠냐고 어깨를 두드려줍니다. 부자들도 굉장히 불행하다면서 결코 돈이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지 않는다고 강조, 또 강조해요.

 

사실, 자신이 언제 행복한 줄 모르는 사람은 돈에 포로가 될 수밖에 없어요. 무엇을 해야 좋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돈은 그나마 행복할 가능성이 높아 보이기에 매달리는 거죠. 자신의 채워지지 않는 빈 구멍을 메워줄 수 있게끔 착각시키는 환상대상으로써 돈이 자리를 잡았죠. 따라서 오늘날 돈을 떠받는 흐름이 예전보다 강한 것은 신기루를 쫓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뜻이며 그만큼 불행이 넘실거리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정말 씁쓸한 것은 막연하게 행복하고 싶다고 말만 하지 자신이 언제 행복한지 모르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는 거예요. 마치 사랑타령만 불러대면서 드라마에 빠져 살지만 사랑이 뭔지도 잘 모르는 사람과 비슷하죠. 누구라도 만나야 사랑을 할 수 있듯 행복도 자신이 어떠한 사람인지 알아야 할 수 있는데, 자신이 누구인지 몰라요. 사회변화를 잠깐 제쳐놓는다면, 결국 불행은 자신이 어떠한 사람인지 모르는 무지에서, 그리고 허깨비를 집착하는 데서 오는 것이라 할 수 있죠.

 

세상으로 나가라, 해적도 되어보고 보르네오의 왕도 되어보고, 소련의 노동자도 되어보라!

 

딱딱해진 자아를 깨뜨리려면 돌아다녀야 해요. 새롭게 들어오는 낯선 경험만이 지난날의 허물을 벗겨내니까요. ‘나’란 존재는 평생 돌아다녀야 하는 신대륙이고, 삶은 자신을 찾아 떠난 굉장한 모험이에요. 수많은 사건들을 온 몸으로 받아내면서 자신이 언제 더 보람을 느끼고 무엇이 더 행복한지 캐내야 하는 것이죠.

 

러셀은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으로 나가라, 해적도 되어보고, 보르네오의 왕도 되어보고, 소련의 노동자도 되어보라! 무모해 보이는 도전과 숱한 실패, 되풀이되는 시행착오를 통해 사람들은 자신을 보다 잘 알게 되죠. 자신을 잘 아는 사람은 무엇을 해야 행복해질 거라는 속삭임에 휘말리지 않습니다. 행복은 목적지에서 이르러야 주는 자격증이 아니라 출발하는 순간 피어오르는 먼지이며, 길에서 솟아나는 땀방울이니까요. 행복한 사람은 걸어가면서 이미 웃고 있습니다.

 

러셀은 그밖에도 여러 얘기를 해줘요. 뭔가 대단한 일을 해내고 이름을 날려야 행복해질 거라는 강박에 시달리는 사람에겐 행복한 인생이란 대부분 조용하다며, 사람을 상하게 하는 것은 과로가 아니라 걱정이나 불안이라고 귀띔해주네요. 남과 관계 맺으면서 생기는 터무니없고 생각들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죠. 질투와 죄의식, 권태가 얼마나 사람들 일상에 퍼져있고, 그것이 얼마나 자신을 갉아먹으며 해로운지 조목조목 풀어서 얘기하네요.

 

누군가에겐 몹시 뻔한 이야기라서 읽다보면 심심할 수도 있겠다 싶지만, 이 책이 나온 지 8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찾아서 읽는 걸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다는 뜻이겠죠. 또한, 사회가 그만큼 행복한 쪽으로 발전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불행해지고 있다는 걸 드러내는 현상이죠. 어느 때보다 풍요로운 한국이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점점 쪼그라들고 말라붙네요. 평범한 사람이 자기 벗과 통화하는 내용입니다.

 

잘 사냐고? 잘 살고 싶지만, 이렇게 치열한 사회(경쟁)에서 어떻게 행복하게 살 수 있겠니, 직장 다니랴 가족들 챙기랴 친구 만나랴 바쁘기만 하고, 무슨 일을 해도 재미가 없어(권태). 스트레스 풀려고 어제는 친구 만나서 화끈하게 놀았는데(자극) 오늘은 견디기가 더 어렵고 짜증이 나네(피로).

 

안 그래도 상태가 좋지 않았는데, 글쎄 오늘 나보다 실력이 한참 딸리는 직장 동료가 대박을 터뜨렸다고 기세가 등등하지 않겠어?(질투) 보란 듯이 내 앞에서 부장님한테 칭찬받은 이야기를 하던데, 혹시 부장님 앞에서 날 깎아내린 건 아닌지 모르겠어(피해망상).

 

난 왜 이렇게 안 풀리나 몰라. 어렸을 때 부모님 말씀 잘 안 듣고 뺀질뺀질 놀았던 벌을 받나봐. 요즘도 친구들 만나서 놀다가 집에 들어가면 어머니 얼굴을 못 보겠다니까.(죄의식) 서른이 한참 넘었는데도 결혼 안 하고 비실거리는 자식 보는 어머니 속이 오죽하겠니. 난 결혼하기 싫은데 독신으로 살면 남들이 괴팍한 성격이라 그렇다고 욕 하는 거 아닐까 싶기도 하고(여론에 대한 두려움)

 

불행하다면 불행한 앎을 갖고 있기 때문! 행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훈련을 하는 것!

 

이 책을 번역한 이순희씨가 상상하여 쓴 직장인의 모습이에요. 둘레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대화와 닮아있죠. 현대인들은 뾰족하게 날이 선 채로 끝없이 남을 의식하고, 만성피로에 쩌들어있으면서 스스로에 대한 불만과 걱정으로 불행에 잔뜩 눅져 있어요. 이런 마음자세로 친구를 만나니, 하소연을 하거나 남 흉보는 뒷담화로 흐를 수밖에 없는 것이죠.

 

불행한 현대인들은 자신의 불행에 대해 보통 세 갈래로 반응해요. 자신은 자유롭고 싶은데, 세상이 자신을 경쟁 속으로 떠밀고 있다면서 발뺌을 하려 하거나, 삶은 고통이라며 한숨만 쉬거나, 마지막으로 엉뚱한 곳에서 행복이란 파랑새를 부르거나! 자신이 불행하다면 이 세 갈래가 아닌지 따져봐야겠죠. 이러한 핑계에 갇히면 행복할 수 있는 희망도 보이지 않게 되니까요.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으면서 일부러 불행을 고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신이 불행하다면 불행한 앎을 갖고 있기 때문이죠. 자신이 넘어진 것을 알아야 딛고 일어날 수 있어요. 그렇다 해도 그릇된 앎은 암처럼 쉽게 고쳐지지 않아서 꾸준히 치유를 해야 해요. 1km걷던 사람이 갑자기 10km를 걸을 순 없는 법이니까요. ‘러셀의 수다’는 잘 떼어지지도 않은 자의식과 망상을 떨치도록 도와줘 몸을 가볍게 해주네요. 행복힐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훈련을 하는 것이고, 행복은 살면서 정복해야 한다는 러셀의 주장을 곱씹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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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기쁨
아베 피에르 지음, 백선희 옮김 / 마음산책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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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다 보면 이것저것을 많이 쥐어도 마음의 갈증이 가시질 않을 때가 있죠. 재미난 것들도 많고, 쾌락도 넘실대는 오늘날이지만 떡만으론 사람답게 살 수 없다는 것을 느낍니다. 마음이 허한 사람들은 뭔가 대단한 이상을 우러르고 쳐다보려고 하지만 현실의 돌부리에 걸려 비틀거리면서 하루하루를 보내죠. 자유와 존엄, 행복과 건강, 형제애를 바라면서도 대부분의 삶을 두려움과 창피함, 낙담과 질병, 외로움 속에 머물게 되죠.

 

왜 인생살이가 이렇게 허무하고 괴로운지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피에르 신부님은 <단순한 기쁨>에서 조용히 어깨를 토닥여주네요.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섣불리 충고를 하기보다는 애정어리고 격정어린 몸짓으로 자신이 행복했던 이야기를 두런두런 늘어놓네요. 조심스럽고 신중한 피에르 신부님의 말씀을 듣다보면, 삶이 사랑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20세기 최고의 휴머니스트 피에르 신부님이 엠마우스 운동을 한 까닭은?

 

피에르 신부님은 20세기 최고의 휴머니스트라고 일컬어지는 분이죠. 프랑스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사람을 뽑을 때 8년 동안 일곱 차례나 1위에 오를 정도니까요. 그는 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19세 때, 모든 유산을 포기하고 수도회에 들어간 뒤, 2차 세계 대전 당시엔 레지스탕스로 나치에 맞서 싸우기도 합니다. 전쟁이 끝난 뒤엔 어려운 사람을 돕고 싶은 마음에 선거에 나가 국회의원에 당선도 되죠.

 

신부님은 정치활동으로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나 곧 한계를 느끼고 직접 어려운 사람들 속으로 뛰어듭니다. 신부님이 세운 ‘엠마우스’는 빈민구호 공동체로 집 없는 사람들과 부랑자, 전쟁고아들의 안식처죠. 평생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한 피에르 신부님은 이렇게 나눔의 씨앗을 뿌렸고,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머금고 자란 엠마우스는 온 세계 44개 나라, 350여개로 늘어나 오늘날까지 행복을 일구고 있습니다.

 

피에르 신부님은 엠마우스 운동을 왜 했을까요? 그저 어려운 사람을 돕기 위해서라는 답도 맞겠지만 그보다 더 절절한 이유가 있었죠. 사람들은 세계 전쟁을 겪으며 사람이 사람에 대해 어떻게 이렇게까지 할 수 있냐며 인간성 그 자체에 의심을 품게 되었죠. 전쟁을 거치면서 지금까지 쌓아온 사람에 대한 믿음이 와르르 무너진 것이죠. 인생이라는 게 살아갈 가치가 있는지 모르겠다며 젊은이들은 고개를 떨어뜨렸고, 절망감이 세계를 휩쓸었습니다.

 

이런 때, 피에르 신부님은 상처 입은 사람들이 서로 돕고 살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어 아픔을 치유하고 행복이 영글도록 땀을 쏟은 것이죠. 세상에 치이고 마음이 찢겨나간 사람들을 살려야겠다는 의지로 엠마우스를 지은 것이죠. 절망에 빠진 사람들은 살아갈 방편이 아니라 살아야 할 이유를 원하는데, 피에르 신부님은 그런 사람들을 엠마우스로 데려와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합니다. 이것이 살아갈 이유라면서!

 

사실, 사람에겐 어려운 말이나 텅 빈 몸짓들이 필요한 게 아니에요. 몸과 몸을 맞대고, 눈과 눈이 마주치는 생생한 관계를 통해서 사람들은 살아갈 힘을 얻으니까요. 그냥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대충 살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남과 맺는 깊은 관계에서 삶에 뜻을 구해야 합니다. 사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라고 했지만 피에르 신부님은 남과 단절된 자기 자신이야말로 지옥이라며, 사람을 사랑하라고 가슴으로 안아주시네요.

 

그래서 자신에게 덕지덕지 엉겨붙어있는 환상을 걷어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린 아이는 예쁜 것을 보면 불일지라도 다가가서 만지고 싶어 하죠. 그러다 손을 데면 다시는 가까이 가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신기루에서 깨어난 것이죠. 이렇게 경험을 통해 사람들도 우상을 깨뜨리고 허깨비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쓰디쓴 반성을 통해 집착과 망상들을 넘어서는 것이죠.

 

이것이 피에르 신부님이나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구원이고, 불교식으로 말하면 해탈입니다. 존재의 뿌리에 닿는 것이죠. 세상에 퍼져있는 여러 가지 허상들은 결코 사람의 목마름을 씻어주지 못합니다. 거짓 만족이나 그릇된 목표에 얽매이게 되면 허무주의와 냉소주의에 젖어들면서 자신을 고문할 뿐이죠. 잘못된 길에선 제 아무리 애를 발을 동동 굴러도 절망스럽지만 삶에 길을 찾으면, 세상을 긍정하고 진정한 사랑에 눈뜨게 됩니다.

 

신부님, 우리는 이 땅에 왜 태어나나요?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랍니다!

 

왜 이 땅에 태어나는 거냐고 물으면, 피에르 신부님은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이지요” 라고 대답하십니다. 사랑과 사람, 행복과 해방이라는 개념들은 나뉠 수 없는 것이니까요. 이것은 간디나 마틴 루터 킹, 간디나 달라이라마 테레사 수녀 등 여태까지 수많은 성인들이 사람들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삶의 알짬입니다. 자신을 옥죄는 세상을 미워하지 않고 복수하기를 바라지도 않으며 헤살꾼들마저 감싸주는 것이 진짜 사랑이죠.

 

희망은 이러한 사랑에 대한 확신이라고 피에르 신부님은 목소리 높이시네요. 사람들은 시험을 잘 보면 좋겠다, 부자가 되고 싶다는 소망들은 많이 갖고 살죠. 그러나 희망을 가진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희망이란 삶에 뜻이 있으며 사랑이 사람을 구원할 거라고 믿는 것이죠. 물질과 쾌락을 쫓아가지만 채워지지 않는 빈 구멍에 주저앉지 않고 마음 안에 진정한 재산 쌓기를 바라는 태도죠. 마음의 구멍은 오로지 자신을 남에게 내어줄 때만 메워지고, 그때 비로소 희망은 피어오릅니다.

 

신부님 직업이 아무래도 성직자다보니 책은 종교 색채를 띨 수밖에 없죠. 기독교에 발을 들인 사람에겐 반가울 수 있지만 한국 기독교의 모순에 손사래를 치는 사람들에겐 듣기 싫을 수 있겠네요. 하지만 교회를 나가느냐 절을 나가느냐, 그냥 집에 있느냐, 이러한 차이는 그다지 따질 게 아니라고 말씀하시네요. ‘좋은’ 기독교인, ‘착한’ 불교인, ‘어진’ 사람이 되어야 하며 무엇을 믿느냐보다 어떻게 살고 있느냐가 중요하다고 강조하시죠.

 

착하게 살지 않으면 벌을 준다는 그 ‘무서운 신’은 19세기와 20세기를 지나면서 죽었어요. 피에르 신부님에 따르면, 하느님은 곧 사랑이기 때문에 교회를 다니고 기독교 경전를 보면 신에 대한 개념은 가질 수 있겠으나 신을 아는 건 아니라고 하시네요. 신을 아는 것, 신을 믿는 것은 사랑을 믿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행해지는 신성모독은 이기주의와 위선으로 얼룩진 종교단체들이 만들어낸 거짓 신들을 향한 것이며, 유일한 신성모독은 사랑에 대한 모독뿐이라고 힘주어 말씀하십니다.

 

사랑이 바로 신이고, 하느님의 본질이 사랑이기 때문에 교회를 다니는 신자든 비신자든 구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확신한다고 피에르 신부님은 얘기하세요. 다만 ‘자신만 챙기는 사람’과 ‘남과 같이 잘 하려는 사람’사이에 구분만 있다는 것이죠. 타인의 고통 앞에서 고개를 돌리는 사람들과 타인들을 고통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싸우는 사람의 차이만 있을 뿐이라고 하십니다.

 

그런 맥락에서 하느님이든 예수든 부처든 신의 이름을 빌려와 도깨비방망이를 휘두르면서 사람들의 돈을 뜯어내고 마음의 풍요로움을 빼앗는 사람들은 거의 사기꾼에 가깝죠. 신은 자유와 사랑이니까요. 종교를 통해 사람을 거듭나게 하고 더 자유롭고 행복하게 하지 않으면 종교라는 탈을 뒤집어쓴 이익단체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면서 자기밖에 모른 채 살아간다면, 도대체 무엇을 믿고 있는 것인지 돌아봐야겠죠.

 

마음이 가난한 사람에게 복이 있다고 예수는 말씀하셨죠. 마음이 가난하다는 건, 자신의 능력과 특권과 학식을 약자들을 위해 쓰는 거라고 피에르 신부님은 풀어주시네요. 힘없는 자들의 권리와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자신들의 삶을 바치고, 어려운 이웃들과 더불어 하늘나라를 이곳에 세우는 일이죠. 강자가 약자를 죽이려 할 때, 나를 죽이지 않고서는 절대로 할 수 없다고 맞서는 행동이 복음이 전하는 바이고 그리스도의 윤리라고 합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을 생활에서 실천할 때만 참된 기쁨을 느낄 수 있고, 삶에 의미가 생겨

 

이렇게 남을 위할 때만 삶에서 참된 기쁨을 느낄 수 있고, 이러한 기쁨 안에서 지혜를 얻는다고 해요. 지혜란 라틴어로 ‘spere’ 즉, 맛보다는 뜻이에요. 기쁨이 솟구치는 순간, 사랑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 겪어본 사람을 알거예요. 신이란, 말로 다할 수 없는 그 기쁨의 상태에서 느낄 수 있는 아름다운 맛이죠. 이 감정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을 생활에서 실천할 때만 움이 틉니다.

 

돈이 신이 된 세상에서 피에르 신부님의 이야기가 가슴 깊이 잘 와 닿지 않을 수도 있어요. 저 하늘 위에서 세상을 쳐다보면서 사람들의 탐욕을 들어주는 ‘산타 할아버지’ 인상을 신에게 씌운 채 개신교가 퍼져왔기에 신은 자유이자 사랑이라는 생각에 선뜻 공감하지 않을 수도 있죠. 더구나 똑똑하고 잘난 사람이 많아진 이때, 아담과 이브를 만들고,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했다는 신화를 곧이곧대로 믿으라는 ‘중세시대 사람들’에 진저리가 나섰을 수도 있겠죠.

 

그래서 의심을 해도 좋다고 웃으며 속삭이십니다. 물음표가 돋아나는 건 자연스러운 거예요. 피에르 신부님도 온갖 의문들이 살아가는 내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고 털어놓으실 정도니까요. 중요한 건 의문을 억누르려 하기보다 사랑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고 답을 찾을 때까지 온 몸으로 공부하고 부딪히고 사랑하고 희망하는 자세죠. 절대자에 대한 믿음이랍시고 어떠한 의문도 생겨선 안 된다고 귀를 막거나 홀로 끙끙거리며 괴로워하는 것이 더 위험한 모습입니다.

 

사랑은 세상 어디에도 있지만 거저 주어지는 게 아니듯 행복과 삶의 의미도 사람들이 구하고 만들어야 하는 것이죠. 복음은 벌써 세상에 퍼졌고 천국은 이미 와 있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그 말씀 들을 귀가 없으며, 볼 눈이 없는 것이죠. 사람으로서 살아갈 때 하느님이든 알라든 부처든 무엇에 빠져들어 세상일에 모르쇠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아픔에 공감하고 함께하는 것에 삶의 뜻이 있고 사랑이 있습니다. 남과 자신의 사이, 그곳에 신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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