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기쁨
아베 피에르 지음, 백선희 옮김 / 마음산책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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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다 보면 이것저것을 많이 쥐어도 마음의 갈증이 가시질 않을 때가 있죠. 재미난 것들도 많고, 쾌락도 넘실대는 오늘날이지만 떡만으론 사람답게 살 수 없다는 것을 느낍니다. 마음이 허한 사람들은 뭔가 대단한 이상을 우러르고 쳐다보려고 하지만 현실의 돌부리에 걸려 비틀거리면서 하루하루를 보내죠. 자유와 존엄, 행복과 건강, 형제애를 바라면서도 대부분의 삶을 두려움과 창피함, 낙담과 질병, 외로움 속에 머물게 되죠.

 

왜 인생살이가 이렇게 허무하고 괴로운지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피에르 신부님은 <단순한 기쁨>에서 조용히 어깨를 토닥여주네요.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섣불리 충고를 하기보다는 애정어리고 격정어린 몸짓으로 자신이 행복했던 이야기를 두런두런 늘어놓네요. 조심스럽고 신중한 피에르 신부님의 말씀을 듣다보면, 삶이 사랑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20세기 최고의 휴머니스트 피에르 신부님이 엠마우스 운동을 한 까닭은?

 

피에르 신부님은 20세기 최고의 휴머니스트라고 일컬어지는 분이죠. 프랑스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사람을 뽑을 때 8년 동안 일곱 차례나 1위에 오를 정도니까요. 그는 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19세 때, 모든 유산을 포기하고 수도회에 들어간 뒤, 2차 세계 대전 당시엔 레지스탕스로 나치에 맞서 싸우기도 합니다. 전쟁이 끝난 뒤엔 어려운 사람을 돕고 싶은 마음에 선거에 나가 국회의원에 당선도 되죠.

 

신부님은 정치활동으로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나 곧 한계를 느끼고 직접 어려운 사람들 속으로 뛰어듭니다. 신부님이 세운 ‘엠마우스’는 빈민구호 공동체로 집 없는 사람들과 부랑자, 전쟁고아들의 안식처죠. 평생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한 피에르 신부님은 이렇게 나눔의 씨앗을 뿌렸고,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머금고 자란 엠마우스는 온 세계 44개 나라, 350여개로 늘어나 오늘날까지 행복을 일구고 있습니다.

 

피에르 신부님은 엠마우스 운동을 왜 했을까요? 그저 어려운 사람을 돕기 위해서라는 답도 맞겠지만 그보다 더 절절한 이유가 있었죠. 사람들은 세계 전쟁을 겪으며 사람이 사람에 대해 어떻게 이렇게까지 할 수 있냐며 인간성 그 자체에 의심을 품게 되었죠. 전쟁을 거치면서 지금까지 쌓아온 사람에 대한 믿음이 와르르 무너진 것이죠. 인생이라는 게 살아갈 가치가 있는지 모르겠다며 젊은이들은 고개를 떨어뜨렸고, 절망감이 세계를 휩쓸었습니다.

 

이런 때, 피에르 신부님은 상처 입은 사람들이 서로 돕고 살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어 아픔을 치유하고 행복이 영글도록 땀을 쏟은 것이죠. 세상에 치이고 마음이 찢겨나간 사람들을 살려야겠다는 의지로 엠마우스를 지은 것이죠. 절망에 빠진 사람들은 살아갈 방편이 아니라 살아야 할 이유를 원하는데, 피에르 신부님은 그런 사람들을 엠마우스로 데려와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합니다. 이것이 살아갈 이유라면서!

 

사실, 사람에겐 어려운 말이나 텅 빈 몸짓들이 필요한 게 아니에요. 몸과 몸을 맞대고, 눈과 눈이 마주치는 생생한 관계를 통해서 사람들은 살아갈 힘을 얻으니까요. 그냥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대충 살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남과 맺는 깊은 관계에서 삶에 뜻을 구해야 합니다. 사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라고 했지만 피에르 신부님은 남과 단절된 자기 자신이야말로 지옥이라며, 사람을 사랑하라고 가슴으로 안아주시네요.

 

그래서 자신에게 덕지덕지 엉겨붙어있는 환상을 걷어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린 아이는 예쁜 것을 보면 불일지라도 다가가서 만지고 싶어 하죠. 그러다 손을 데면 다시는 가까이 가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신기루에서 깨어난 것이죠. 이렇게 경험을 통해 사람들도 우상을 깨뜨리고 허깨비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쓰디쓴 반성을 통해 집착과 망상들을 넘어서는 것이죠.

 

이것이 피에르 신부님이나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구원이고, 불교식으로 말하면 해탈입니다. 존재의 뿌리에 닿는 것이죠. 세상에 퍼져있는 여러 가지 허상들은 결코 사람의 목마름을 씻어주지 못합니다. 거짓 만족이나 그릇된 목표에 얽매이게 되면 허무주의와 냉소주의에 젖어들면서 자신을 고문할 뿐이죠. 잘못된 길에선 제 아무리 애를 발을 동동 굴러도 절망스럽지만 삶에 길을 찾으면, 세상을 긍정하고 진정한 사랑에 눈뜨게 됩니다.

 

신부님, 우리는 이 땅에 왜 태어나나요?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랍니다!

 

왜 이 땅에 태어나는 거냐고 물으면, 피에르 신부님은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이지요” 라고 대답하십니다. 사랑과 사람, 행복과 해방이라는 개념들은 나뉠 수 없는 것이니까요. 이것은 간디나 마틴 루터 킹, 간디나 달라이라마 테레사 수녀 등 여태까지 수많은 성인들이 사람들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삶의 알짬입니다. 자신을 옥죄는 세상을 미워하지 않고 복수하기를 바라지도 않으며 헤살꾼들마저 감싸주는 것이 진짜 사랑이죠.

 

희망은 이러한 사랑에 대한 확신이라고 피에르 신부님은 목소리 높이시네요. 사람들은 시험을 잘 보면 좋겠다, 부자가 되고 싶다는 소망들은 많이 갖고 살죠. 그러나 희망을 가진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희망이란 삶에 뜻이 있으며 사랑이 사람을 구원할 거라고 믿는 것이죠. 물질과 쾌락을 쫓아가지만 채워지지 않는 빈 구멍에 주저앉지 않고 마음 안에 진정한 재산 쌓기를 바라는 태도죠. 마음의 구멍은 오로지 자신을 남에게 내어줄 때만 메워지고, 그때 비로소 희망은 피어오릅니다.

 

신부님 직업이 아무래도 성직자다보니 책은 종교 색채를 띨 수밖에 없죠. 기독교에 발을 들인 사람에겐 반가울 수 있지만 한국 기독교의 모순에 손사래를 치는 사람들에겐 듣기 싫을 수 있겠네요. 하지만 교회를 나가느냐 절을 나가느냐, 그냥 집에 있느냐, 이러한 차이는 그다지 따질 게 아니라고 말씀하시네요. ‘좋은’ 기독교인, ‘착한’ 불교인, ‘어진’ 사람이 되어야 하며 무엇을 믿느냐보다 어떻게 살고 있느냐가 중요하다고 강조하시죠.

 

착하게 살지 않으면 벌을 준다는 그 ‘무서운 신’은 19세기와 20세기를 지나면서 죽었어요. 피에르 신부님에 따르면, 하느님은 곧 사랑이기 때문에 교회를 다니고 기독교 경전를 보면 신에 대한 개념은 가질 수 있겠으나 신을 아는 건 아니라고 하시네요. 신을 아는 것, 신을 믿는 것은 사랑을 믿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행해지는 신성모독은 이기주의와 위선으로 얼룩진 종교단체들이 만들어낸 거짓 신들을 향한 것이며, 유일한 신성모독은 사랑에 대한 모독뿐이라고 힘주어 말씀하십니다.

 

사랑이 바로 신이고, 하느님의 본질이 사랑이기 때문에 교회를 다니는 신자든 비신자든 구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확신한다고 피에르 신부님은 얘기하세요. 다만 ‘자신만 챙기는 사람’과 ‘남과 같이 잘 하려는 사람’사이에 구분만 있다는 것이죠. 타인의 고통 앞에서 고개를 돌리는 사람들과 타인들을 고통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싸우는 사람의 차이만 있을 뿐이라고 하십니다.

 

그런 맥락에서 하느님이든 예수든 부처든 신의 이름을 빌려와 도깨비방망이를 휘두르면서 사람들의 돈을 뜯어내고 마음의 풍요로움을 빼앗는 사람들은 거의 사기꾼에 가깝죠. 신은 자유와 사랑이니까요. 종교를 통해 사람을 거듭나게 하고 더 자유롭고 행복하게 하지 않으면 종교라는 탈을 뒤집어쓴 이익단체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면서 자기밖에 모른 채 살아간다면, 도대체 무엇을 믿고 있는 것인지 돌아봐야겠죠.

 

마음이 가난한 사람에게 복이 있다고 예수는 말씀하셨죠. 마음이 가난하다는 건, 자신의 능력과 특권과 학식을 약자들을 위해 쓰는 거라고 피에르 신부님은 풀어주시네요. 힘없는 자들의 권리와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자신들의 삶을 바치고, 어려운 이웃들과 더불어 하늘나라를 이곳에 세우는 일이죠. 강자가 약자를 죽이려 할 때, 나를 죽이지 않고서는 절대로 할 수 없다고 맞서는 행동이 복음이 전하는 바이고 그리스도의 윤리라고 합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을 생활에서 실천할 때만 참된 기쁨을 느낄 수 있고, 삶에 의미가 생겨

 

이렇게 남을 위할 때만 삶에서 참된 기쁨을 느낄 수 있고, 이러한 기쁨 안에서 지혜를 얻는다고 해요. 지혜란 라틴어로 ‘spere’ 즉, 맛보다는 뜻이에요. 기쁨이 솟구치는 순간, 사랑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 겪어본 사람을 알거예요. 신이란, 말로 다할 수 없는 그 기쁨의 상태에서 느낄 수 있는 아름다운 맛이죠. 이 감정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을 생활에서 실천할 때만 움이 틉니다.

 

돈이 신이 된 세상에서 피에르 신부님의 이야기가 가슴 깊이 잘 와 닿지 않을 수도 있어요. 저 하늘 위에서 세상을 쳐다보면서 사람들의 탐욕을 들어주는 ‘산타 할아버지’ 인상을 신에게 씌운 채 개신교가 퍼져왔기에 신은 자유이자 사랑이라는 생각에 선뜻 공감하지 않을 수도 있죠. 더구나 똑똑하고 잘난 사람이 많아진 이때, 아담과 이브를 만들고,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했다는 신화를 곧이곧대로 믿으라는 ‘중세시대 사람들’에 진저리가 나섰을 수도 있겠죠.

 

그래서 의심을 해도 좋다고 웃으며 속삭이십니다. 물음표가 돋아나는 건 자연스러운 거예요. 피에르 신부님도 온갖 의문들이 살아가는 내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고 털어놓으실 정도니까요. 중요한 건 의문을 억누르려 하기보다 사랑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고 답을 찾을 때까지 온 몸으로 공부하고 부딪히고 사랑하고 희망하는 자세죠. 절대자에 대한 믿음이랍시고 어떠한 의문도 생겨선 안 된다고 귀를 막거나 홀로 끙끙거리며 괴로워하는 것이 더 위험한 모습입니다.

 

사랑은 세상 어디에도 있지만 거저 주어지는 게 아니듯 행복과 삶의 의미도 사람들이 구하고 만들어야 하는 것이죠. 복음은 벌써 세상에 퍼졌고 천국은 이미 와 있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그 말씀 들을 귀가 없으며, 볼 눈이 없는 것이죠. 사람으로서 살아갈 때 하느님이든 알라든 부처든 무엇에 빠져들어 세상일에 모르쇠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아픔에 공감하고 함께하는 것에 삶의 뜻이 있고 사랑이 있습니다. 남과 자신의 사이, 그곳에 신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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