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 - 고종석의
고종석 지음 / 개마고원 / 200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역사책을 뒤적거리다보면 꽤나 놀라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수천억의 인류가 있었고 그 댄(반)은 여자였을 텐데, 갈마(역사) 속에 나오는 여자들은 손에 꼽히죠. 그만큼 여자들이 불평등하게 살아왔으며 차별 속에서 역사에 남을 만한 발자욱을 남기지 못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이렇게 받아들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어먹한(위대한) 여자들이 없었던 게 아니라 그 갈마가 지워졌으며, 있어도 아직 우리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여태껏 갈마는 남자들이 투난(기록)해왔고 ‘제2의 성’이었던 여자들에겐 시큰둥할 수밖에 없었죠. 온골(세상)의 갈마를 들먹이지 않고 한국만 보더라도 그래요. 머릿속에 떠오르는 여자들이 얼마 없습니다. 신사임당, 유관순, 음...음... 맞다, 선덕여왕! 다들 어금지금합니다. 사회에서 가르쳐준 게 그거밖에 없으니까요.

 

강금실, 최진실, 로자 룩셈부르크, 오프라 윈프리, 보부아르 등등 멋들어진 여자들

 

책 <고종석의 여자들>[개마고원]은 가려있던 여자들을 들추어냅니다. 강금실, 최진실, 로자 룩셈부르크, 오프라 윈프리, 보부아르, 사유리처럼 잘 알려진 여자들부터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나, 샤를로트 코르데처럼 설은 여자들까지 한 데 모았죠. 인물의 쓸턱(중요)함이나 유명세보단 자기 눈에 들어오거나 마음에 드는 서른 네 여자에 대해 얘기하네요. 지은이는 왜 이런 갈마가 잘 알려져 있지 않은지 씁쓸해하면서 자신이 이런 소개를 한다는 데 신바람을 냅니다. 그만큼 멋들어진 여자들이네요.

 

여자들은 오랫동안 업신여김을 받아왔죠. 온골에 가장 널리 퍼진 종교의 고전을 보면, 여자는 남자가 외로울까봐 그의 갈비뼈 하나를 빼어서 만들어준 존재에요. 남자가 고갱이고 여자는 덤이라는 건 환웅이 내려와서 곰을 여자로 만들어주었다는 단군신화와 빼다 박았죠. 이런 군빛(환상)들은 남자가 갈마에 주먹을 휘드른 얼짬(순간)부터 넘쳐흐릅니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 그럴 뿐 그 안을 들쑤셔보면 여신들의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지 헤아릴 수 없어요. 신화에서 여신들의 이야기가 묻혔듯 갈마에서도 여자들의 삶이 숨겨져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책을 읽다보면, 마치 감춰진 보물을 찾아나서는 기분이에요. 바투(현실)에서 보이지 않던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이 나타낼 때마다 신나고 설레니까요.

 

조금 아쉬운 점은 34명을 다루다보니 그 깊은 속내까지 들어가지는 못 한다는 거죠. 수박 겉 핡기 같은 느낌을 받게 되지만 그럼에도 손뼉을 쳐줄 수밖에 없네요. 수박 겉을 핥다보면 수박 안이 궁금해지듯 일어난 호기심 따라 이 여자들에 대해 스스로 찾아보게 되니까요. 이 책은 맛보기에요. 잘 몰랐던 유기농 먹거리에 눈 뜨듯 지금껏 들리지 않던 여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은이의 바람둥이 끼꺽(기질)을 본받고 싶어져요. 무려 서른 네 여자를 사랑하기란 보통 남자의 깜냥으론 벅찬 일이니까요. 물론, 성욕의 상대로서 이보다 더 많은 여자들을 사랑할 순 있겠죠. 하지만 여성이라는 ‘젠더’를 좋아하고 어울릴 줄 아는 남자는 드뭅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까지 여자와 눈높이를 맞추려 하는 그의 마음씨는 높이살만 하죠.

 

자유주의자이자 ‘괜찮은 남자친구’이 고종석이 조곤조곤 늘어놓는 싱그러운 입담

 

한편으론 지은이를 치켜세워야 하는 것에 씁쓸함도 돋아나네요. 지은이의 몸가짐이나 말투는 사람을 대하는 기본 예의인데, 그걸 했다고 추어올리고 있으니까요. 그만큼 세상살이의 밑절미가 지켜지지 않는 한국이라고 할 수 있죠. 고씨 같은 자유주의자마저 좌파라고 답새당하는 바투에서 여자의 나척(권리)을 얘기하는 건 얼마나 외롭고 괴로운 일인지요. 이러한 마음고생에 뛰어드는 고씨가 고맙네요. 알아듣는 사람이 별로 없어도 자기 그루터기를 놓치지 않고 뱃심 좋게 얘기하니까요.

 

책을 읽으면, 고씨가 단순히 자유주의자로서 ‘올바른 정치성’을 지키고자 여자에게 예의 갖추는 게 아니란 걸 알 수 있어요. 여자들에 대한 따듯한 마음이 한 글자 한 글자마다 녹아있습니다. 그는 남자들이 벌여왔던 바보짓들을 싫어하는 차가운 현실주의자지만 그럼에도 여자에 대한 하제(희망)를 놓지 않는 데서 다사로운 이상주의자의 냄새도 맡을 수 있네요.

 

스스로 염세주의자라고 밝힌 지은이의 생각을 이상주의로 읽어내어야 할 정도로 한국 사회는 샐그러져 있고, 사람들의 얼굴은 갈수록 팍팍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후줄근한 인생을 왜 살아야 하는지 때론 갑갑하게 느껴질 수 있죠. 이 때, 이 책은 퍽 싱그럽게 해줄 듯해요. 지은이의 말랑말랑하면서도 날카로움을 버무린 글 솜씨에 빙그레 웃게 되니까요.

 

능청스럽게 이런 저런 얘기를 떠벌리다가도 갑자기 자기 마음이라면서 이글거리는 눈으로 바라보는 바람둥이처럼 여자들의 이야기를 사부자기 풀어놓다가도 가슴 깊은 곳을 뭉클하게 하는 지은이의 입담은 바람둥이와 무척 닮았죠. 조금만 귀기울이다보면 흠뻑 빠지게 됩니다. 힘들지 그래도 말이야~ 하면서 대화를 조곤조곤 서글서글 끌어가는 ‘괜찮은 남자친구’네요.

 

여자와 남자 사이에 커다란 오해산성이 치솟아있는 한국에서 나이 쉰 된 남자가 어떻게 이러한 감수성을 이어나가고 있는지 몹시 궁금했는데, 책 맨 앞을 다시 펴보니 알 수 있습니다. 아이 때 같이 놀았던 여자 친구들을 간직하면서 살고 있었던 거예요. 남자든 여자든 어릴 때부터 다른 성과 어울리는 일이 얼마나 바구(필요)한지 새삼 주억거리게 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