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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정복
버트란트 러셀 지음, 이순희 옮김 / 사회평론 / 2005년 1월
평점 :
누구나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행복하게 사는 사람은 드물죠. 행복이란 것이 한정판매되는 상품처럼 선착순이나 성적순으로 몇 사람에게만 주는 것이라서 그럴까요? 행복 하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잿빛 얼굴로 하루를 보내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렇게 인생은 흘러가고, 세월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있죠.
왜 모두가 행복 하고 싶다지만 불행할 수밖에 없는지 살펴보면, 사람들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행복이 쏟아지거나 돈을 많이 벌고 지위가 높여져야 행복하다는 잘못된 생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에요. 20세기의 지성 버트런드 러셀은 <행복의 정복>에서 행복은 세상과 맞서 싸워가면서 얻어가는 것이고, 자신이 어떤 태도를 갖는냐가 중요하다며 불행한 사람들의 편견을 뒤흔듭니다.
러셀이 유명한 철학자이자 수학자이기 때문에 내용이 어렵거나 딱딱할 거라 생각하기 쉽지만 막상 책장을 열어보면 상당히 쉬워요. 학자들을 대상으로 쓴 책도 아니고 일반인들이 모르는 심오한 철학이나 해박한 지식이 담겨 있지도 않다고 러셀이 머리말에서 쓸 정도죠. 러셀은 불행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노력하기만 하면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다는 믿음에서 이 책을 썼다고 밝힙니다.
삶을 미워하고 싫어해서 늘 자살할 생각을 품었던 러셀이 행복해질 수 있었던 비결
셀 수 없이 많은 불행한 사람들 가운데 몇 사람만이라도 자신이 처한 상황을 진단하고 거기에서 벗어나는데 이 책이 쓰이길 바란다고 하네요. 불행한 것은 숙명이 아니며 누구나 행복할 수 있으니까요. 자신이 직접 경험을 한 것들을 바탕으로 행복해진 ‘임상결과’들을 적어놓아 더욱 미덥네요. 행복은 애를 써서 얻어내는 것이라고 러셀은 목청을 돋웁니다.
이 책은 어렵진 않지만 러셀이 쓴 다른 책들도 그렇듯 짜임새가 촘촘하지 않아요. 큰 얼개만 짜놓고 여러 보기들을 넣으면서 글이 펼쳐져 나가니까요. 이 얘기했다가 저 얘기했다가 왔다 갔다 하는 꼴이 꼭 시골할아버지랑 밤하늘을 바라보며 두런두런 수다떠는 거 같네요. 경험 많은 할아버지마냥 인자한 얼굴로 행복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자기 생각들을 늘어놓는 러셀.
지은이는 문명국가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날마다 불행을 겪고 있는 걸 안타까워해요. 이와 마찬가지로 자신도 삶을 미워하고 싫어해서 늘 자살할 생각을 품었지만, 수학을 좀 더 알고 싶다는 욕구 때문에 자살충동을 참을 수 있었다며, 불행했던 속내를 털어놓네요. 자살을 꿈꾸던 러셀이 삶을 즐기게 되었으며, 날마다 살맛이 더 난다고 하네요. 그는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바로 몸과 눈을 바꾼 것이죠. 사물을 대하는 태도와 세계를 바라보는 눈이 변한 거예요. 사람들의 불행은 그릇된 세계관, 잘못된 윤리와 삐뚤어진 생활습관에서 비롯된다고 날카롭게 꼬집으면서 자신에 대한 집착을 줄이고, 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하되, 이룰 수 없는 것은 깨끗하게 접으라고 도움말을 주네요. 자신의 자연스러운 열정과 욕구를 짓뭉개지 않고 살리는 쪽으로 인생을 변화시키라고 힘주어 얘기하네요.
꽃 이름 따위를 알아봐야 무슨 도움이 되겠어, 돈벌이에는 보탬이 안 될 텐데, 라면서 푸념만 하는 사람에게 러셀은 자신이 쓰고 있는 안경 색깔을 돌아보라고 충고하죠. 불평불만이란 안경을 쓰면 세상은 온통 짜증과 화딱지죠. 러셀은 삶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는 게 어떠냐고 어깨를 두드려줍니다. 부자들도 굉장히 불행하다면서 결코 돈이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지 않는다고 강조, 또 강조해요.
사실, 자신이 언제 행복한 줄 모르는 사람은 돈에 포로가 될 수밖에 없어요. 무엇을 해야 좋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돈은 그나마 행복할 가능성이 높아 보이기에 매달리는 거죠. 자신의 채워지지 않는 빈 구멍을 메워줄 수 있게끔 착각시키는 환상대상으로써 돈이 자리를 잡았죠. 따라서 오늘날 돈을 떠받는 흐름이 예전보다 강한 것은 신기루를 쫓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뜻이며 그만큼 불행이 넘실거리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정말 씁쓸한 것은 막연하게 행복하고 싶다고 말만 하지 자신이 언제 행복한지 모르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는 거예요. 마치 사랑타령만 불러대면서 드라마에 빠져 살지만 사랑이 뭔지도 잘 모르는 사람과 비슷하죠. 누구라도 만나야 사랑을 할 수 있듯 행복도 자신이 어떠한 사람인지 알아야 할 수 있는데, 자신이 누구인지 몰라요. 사회변화를 잠깐 제쳐놓는다면, 결국 불행은 자신이 어떠한 사람인지 모르는 무지에서, 그리고 허깨비를 집착하는 데서 오는 것이라 할 수 있죠.
세상으로 나가라, 해적도 되어보고 보르네오의 왕도 되어보고, 소련의 노동자도 되어보라!
딱딱해진 자아를 깨뜨리려면 돌아다녀야 해요. 새롭게 들어오는 낯선 경험만이 지난날의 허물을 벗겨내니까요. ‘나’란 존재는 평생 돌아다녀야 하는 신대륙이고, 삶은 자신을 찾아 떠난 굉장한 모험이에요. 수많은 사건들을 온 몸으로 받아내면서 자신이 언제 더 보람을 느끼고 무엇이 더 행복한지 캐내야 하는 것이죠.
러셀은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으로 나가라, 해적도 되어보고, 보르네오의 왕도 되어보고, 소련의 노동자도 되어보라! 무모해 보이는 도전과 숱한 실패, 되풀이되는 시행착오를 통해 사람들은 자신을 보다 잘 알게 되죠. 자신을 잘 아는 사람은 무엇을 해야 행복해질 거라는 속삭임에 휘말리지 않습니다. 행복은 목적지에서 이르러야 주는 자격증이 아니라 출발하는 순간 피어오르는 먼지이며, 길에서 솟아나는 땀방울이니까요. 행복한 사람은 걸어가면서 이미 웃고 있습니다.
러셀은 그밖에도 여러 얘기를 해줘요. 뭔가 대단한 일을 해내고 이름을 날려야 행복해질 거라는 강박에 시달리는 사람에겐 행복한 인생이란 대부분 조용하다며, 사람을 상하게 하는 것은 과로가 아니라 걱정이나 불안이라고 귀띔해주네요. 남과 관계 맺으면서 생기는 터무니없고 생각들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죠. 질투와 죄의식, 권태가 얼마나 사람들 일상에 퍼져있고, 그것이 얼마나 자신을 갉아먹으며 해로운지 조목조목 풀어서 얘기하네요.
누군가에겐 몹시 뻔한 이야기라서 읽다보면 심심할 수도 있겠다 싶지만, 이 책이 나온 지 8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찾아서 읽는 걸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다는 뜻이겠죠. 또한, 사회가 그만큼 행복한 쪽으로 발전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불행해지고 있다는 걸 드러내는 현상이죠. 어느 때보다 풍요로운 한국이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점점 쪼그라들고 말라붙네요. 평범한 사람이 자기 벗과 통화하는 내용입니다.
잘 사냐고? 잘 살고 싶지만, 이렇게 치열한 사회(경쟁)에서 어떻게 행복하게 살 수 있겠니, 직장 다니랴 가족들 챙기랴 친구 만나랴 바쁘기만 하고, 무슨 일을 해도 재미가 없어(권태). 스트레스 풀려고 어제는 친구 만나서 화끈하게 놀았는데(자극) 오늘은 견디기가 더 어렵고 짜증이 나네(피로).
안 그래도 상태가 좋지 않았는데, 글쎄 오늘 나보다 실력이 한참 딸리는 직장 동료가 대박을 터뜨렸다고 기세가 등등하지 않겠어?(질투) 보란 듯이 내 앞에서 부장님한테 칭찬받은 이야기를 하던데, 혹시 부장님 앞에서 날 깎아내린 건 아닌지 모르겠어(피해망상).
난 왜 이렇게 안 풀리나 몰라. 어렸을 때 부모님 말씀 잘 안 듣고 뺀질뺀질 놀았던 벌을 받나봐. 요즘도 친구들 만나서 놀다가 집에 들어가면 어머니 얼굴을 못 보겠다니까.(죄의식) 서른이 한참 넘었는데도 결혼 안 하고 비실거리는 자식 보는 어머니 속이 오죽하겠니. 난 결혼하기 싫은데 독신으로 살면 남들이 괴팍한 성격이라 그렇다고 욕 하는 거 아닐까 싶기도 하고(여론에 대한 두려움)
불행하다면 불행한 앎을 갖고 있기 때문! 행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훈련을 하는 것!
이 책을 번역한 이순희씨가 상상하여 쓴 직장인의 모습이에요. 둘레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대화와 닮아있죠. 현대인들은 뾰족하게 날이 선 채로 끝없이 남을 의식하고, 만성피로에 쩌들어있으면서 스스로에 대한 불만과 걱정으로 불행에 잔뜩 눅져 있어요. 이런 마음자세로 친구를 만나니, 하소연을 하거나 남 흉보는 뒷담화로 흐를 수밖에 없는 것이죠.
불행한 현대인들은 자신의 불행에 대해 보통 세 갈래로 반응해요. 자신은 자유롭고 싶은데, 세상이 자신을 경쟁 속으로 떠밀고 있다면서 발뺌을 하려 하거나, 삶은 고통이라며 한숨만 쉬거나, 마지막으로 엉뚱한 곳에서 행복이란 파랑새를 부르거나! 자신이 불행하다면 이 세 갈래가 아닌지 따져봐야겠죠. 이러한 핑계에 갇히면 행복할 수 있는 희망도 보이지 않게 되니까요.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으면서 일부러 불행을 고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신이 불행하다면 불행한 앎을 갖고 있기 때문이죠. 자신이 넘어진 것을 알아야 딛고 일어날 수 있어요. 그렇다 해도 그릇된 앎은 암처럼 쉽게 고쳐지지 않아서 꾸준히 치유를 해야 해요. 1km걷던 사람이 갑자기 10km를 걸을 순 없는 법이니까요. ‘러셀의 수다’는 잘 떼어지지도 않은 자의식과 망상을 떨치도록 도와줘 몸을 가볍게 해주네요. 행복힐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훈련을 하는 것이고, 행복은 살면서 정복해야 한다는 러셀의 주장을 곱씹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