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 서경식 김상봉 대담
서경식, 김상봉 지음 / 돌베개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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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5월 18일입니다. 5.18, 이 숫자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누군가에게는 월요일 증후군에 시달리는 피곤한 평일일 수 있고, 어떤 이에게는 그저 그런 하루일 수 있죠. 또 다른 이에게는 ‘어떤 사건’이 벌어진 많고 많은 기념일 가운데 하나라고 기억할 수도 있겠지요. 그만큼 시간이 흐른 게죠.

 

시대가 달라졌지요. 민중당의 주역들이 한나라당의 간부가 되기도 했고 한때 극좌였던 사람들은 뉴라이트라며 이름표를 바꿔 달기도 했네요. 자유와 혁명을 외치던 청춘들은 펀드와 골프를 외치며 회색빛 중년이 되었지요. 박정희를 관대하게 재평가하고, 전두환은 지나갔으니 이젠 잊자고 소리치죠. 일제도 다 나쁜 건 아니지 않냐며 어물쩍 ‘미래로’를 부르짖죠.

 

맞습니다. 밝은 앞날을 가야죠. 그러기 위해서는 과거를 온전히 이해하고 그 의미를 제대로 알아야 하죠. 늘 그렇듯 미래는 과거에 뿌리를 두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돈과 권력에 눈먼 사람들은 흘러간 시간에서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하기에 끔찍한 역사가 되풀이되곤 하죠. 피 묻힌 이들이 피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에게 용서하라고 윽박지르는 한국, 역사의 시계바늘은 거꾸로 돌아갑니다.

 

너무나, 너무나 고통스러운 고문, 불의에 무릎 꿇지 않으려 석유난로로 자살하려한 서승

 

아니, 흥청망청 사는 게 인간의 모습 아니야? 대충 용서하고 대강 살자고. 이 땅의 ‘배부른 돼지’들은 자기 입에 들어가는 사료의 양만 따질 뿐, 그 어떠한 것도 의미가 없지요. 너도 일제시대 태어났으면 친일파하지 않았겠냐, 박정희가 밥을 먹고 살게 해줬잖아, 라며 몇 마디 말로 얼버무릴 때마다 ‘석유난로’가 떠오릅니다.

 

서승이란 사람은 이른바 ‘재일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잡힙니다. 음습한 취조실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고문들이 이어집니다. 괴로운 나머지 죄 없는 벗들의 이름을 말하게 될까 두려워 수사관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분신을 시도했으나 죽지는 못 하고 지울 수 없는 화상만 입지요.

 

캄캄한 고문실, 망신창이가 된 몸으로 석유난로를 끌어안는 한 사람, 손도 못 데게 뜨거운 난로, 타들어가는 살, 고약하게 타는 냄새, 엄청난 아픔에도 몸을 떼지 않는 한 사람, 그가 홀로 겪어야 했던 고통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는 사람도 나눌 수 있는 사람도 없죠. 분노를 말하기엔 우리들 혀가 너무 짧네요. 다만, 잊지 않고 잃지 말고 기억하려 합니다.

 

잔인한 짐승들이 거들먹거리던 시대에 얼마나 많은 서승들이 있었는지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은 칼로 위협하거나 꿀로 꾄다고 무너지는 존재가 아님을 수많은 서승들에게서 배울 수 있습니다. ‘탁’치니까 ‘억’하고 죽는 나약한 사람이니까 힘 앞에 엎드리라며 으르렁거리는 이들에게 무릎 꿇지 않는 것은 이 사회에서 수없이 피어났던 서승들 덕분이죠.

 

시민을 죽이라는 국가 권력, 죽음을 무릅쓰고서라도 기꺼이 잘못된 것에 맞서는 광주시민들

 

박정희가 쓰러지고 전두환이 나타난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앞 광장에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20만 명의 시위대가 있었지요. 대학총학생회장단은 군대와 충돌을 걱정하며 ‘서울역 회군’을 결정합니다. 바로 경찰은 지도부를 잡아넣고, 민주화 열기는 꺾이는 듯싶었지만 광주에서는 지도부 없이 시민과 학생들이 모입니다.

 

공권력이 사라지고 배에 기름 낀 부자들이 떠나버린 광주, 시민들 손에 총과 위험한 무기들이 쥐어졌지만 오히려 더 평화로웠던 광주, 자기 목숨이 으스러질 수 있는 상황에서도 도청을 떠나지 않는 시민군, 시민군들의 입에 주먹밥을 넣어주던 아주머니들, 1980년 5월 광주의 풍경입니다.

 

바리케이트를 쳐버리고 외부와 고립시키는 국가 권력, 도청 앞 원형분수대 둘레에 빽빽하게 모여 집단 토론하는 시민들, 시민들을 지키라는 군인들에게 시민을 죽이라고 명령하는 국가 권력, 공수부대가 총을 들고 서 있는 앞에서 “너희들 물러가라, 꺼져라, 전두환 물러가라!”라며 죽음을 무릅쓰고서라도 기꺼이 잘못된 것에 맞서는 광주시민들, 그렇게 죽어간 광주시민들. 그래서 오늘날까지 살아있는 광주시민들…….

 

자기 ‘입과 항문’만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광주는 ‘이상한 나라’처럼 느껴지죠. 그렇기에 광주는 새로운 공동체와 다른 사회를 꿈꾸게 하며, 배는 부르지만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을 끊임없이 건드리죠. ‘불행한 오늘’을 탈출할 때, 또 다른 미래를 상상할 때, 광주는 ‘기적의 어제’이자 ‘미래의 고향’이 되어 주죠.

 

1980년 5월, 광주 시민들이 우리를 위해 흘린 피는 어떻게 되었나요?

 

이 시대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1980년 5월 광주는 묻습니다. 사람이란 무엇인가요? 어디에서 왔는가요? 왜 여기에 그런 모습으로 있나요? 그렇게 살고 있는 당신은 누구인가요? 탐욕을 본능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 광주는 묻습니다. 1980년 5월 광주 시민들이 서로를 위해 흘린 피는 어떻게 되는 거죠? 당신은 지금 행복한가요?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뀔 정도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광주를 가슴에 품고 비분강개하던 젊은이들도 이제 언제 잘릴지 몰라 가슴을 쓸어내리는 중년이 되었지요. 30년은 그렇게 한국이란 나라를 바꿔놓았지요. 80년 광주를 꺼내면 이제 그만하라고, 먹고 살기도 각박한데 왜 자꾸 ‘지난 사태’따위를 들추냐고 다른 나라에도 다 있는 일 아니냐며 쏘아붙이기도 합니다.

 

책 <만남>[돌베개. 2007]은 그런 분들에게 광주와 제대로 만나자고, 자기 삶을 돌아보자고, 말을 걸지요. 서승 선생님의 동생 ‘디아스포라 지식인’ 서경식 선생님과 ‘벌거벗은 철학자’ 김상봉 선생님이 나눈 이야기를 담은 이 책은 광주가 어떤 의미인지, 사람이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깊은 고민을 안겨주지요.

 

누구보다 그런 물음에 괴로워하며 몸으로 고민한 두 선생님들의 말씀은 석유난로가 되어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온기를, 처음 마음을 잃은 사람에게는 따끔한 열기를 전해주네요. 책을 한 장씩 넘길 때마다 자기 안에 웅크리고 있던 욕심들에 화들짝 놀라게 되네요. 두 선생님의 울음들이 책에 배어있어 딱딱했던 가슴은 어느새 먹먹해지죠.

 

오늘도 눈물을 흘리고 있는 ‘5월의 광주’가 있습니다. 5.18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민주주의가 위기라고 해요. 독재자가 다시 나타나서도 아니고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서도 아닌데도 말이죠. 오늘날 한국 사회가 이렇게 된 것은 민주주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죠. 그저 몇 년에 한번 투표를 하게 되었다고, 군대에 눈치 보지 않는다고, 나 혼자 배부르게 되었다고 민주주의 사회가 되었다는 착각이 한국 사회를 더 깊은 절망으로 밀어 넣은 거예요.

 

착하게 살아라,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대하라는 말들은 개인 둘레에만 맴돌 뿐 국가 차원에서는 전혀 시행되지 않지요. 그런 나라 안에서 사람들은 좋은 말들은 철마다 갈아입는 옷처럼 바꿔가면서 걸칠 뿐, 단 한 번도 자기 삶에서 실천하지는 않지요. 그렇기에 자기 생명귀한 줄 알지만 타인의 생명은 낮잡아보고, 고귀한 밥벌이와 게걸스런 식충이를 구분하지 못하지요.

 

일본에 침략당하여 고통스러웠던 한국이 자기 배를 채우고자 베트남과 이라크로 군대를 보냅니다. 다른 나라에 침략당하여 고통스러워하는 많은 나라들에는 침묵하면서 베트남이나 이라크에서는 와달라고 한 적 없건만 무기를 갖고 들어갑니다. 광주에서 무참히 죽은 사람들을 알면서 여전히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학살에 무관심한 한국입니다.

 

신, 독재자, 아버지, 이데올로기, 제국주의, 민족, 국가 등 온갖 굴레는 사라진 듯싶지만 더 세련된 모습으로 아직도 사람들을 옥죄고 있고, 여기에 황금이 더해지면서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고 있지요. 결국, 삶에 주인이 되는 일, 사람답게 사는 공동체는 ‘타자’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 오늘도 눈물을 흘리고 있는 ‘5월의 광주’가 있습니다. 5.18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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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스웨터 - 부유한 이들과 가난한 이들 사이에 다리 놓기
재클린 노보그라츠 지음, 김훈 옮김 / 이른아침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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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돈, 돈, 어느새 돈은 사람들의 목표이자 꿈이 되어버렸습니다. 돈은 거래를 원활하게 돕는 도구이자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일 뿐인데, 스스로 폭군이 되어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있죠. 신이 되어버린 돈을 우러르며 사람들은 머리를 조아립니다. 돈님, 제발 저희를 불쌍히 여기고 저희 곁으로 내려와 주세요!

 

돈만 많다고 행복하느냐? 수많은 부자들이 마음의 가난으로 불행하게 살고 있습니다. 신경학,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사람의 행복은 가지고 있는 부와 비례하지 않습니다. 먹고 살만큼만 되면 돈은 행복에 영향을 주지 못 하는 거죠. 타인과 공감하고 세상에 도움을 주면서 삶의 의미가 피어날 때, 행복감이 깊고 오래 간다는 것, 과학으로 이미 다 밝혀진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한국에서 사는 사람들은 불행합니다. 정말 자신이 바라는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원치 않은 일을 하기에 먹고는 살지만 행복하지 않은 거죠. 괴롭게 출근을 하여 주말만 기다리는 거죠. 딱히 다른 대안은 없고, 그저 흘러가는 젊음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블루 스웨터>[2009. 이른 아침]는 더 행복한 일을 꿈꾸는 젊은이들의 심장을 뜨겁게 달굴 책입니다.

 

돈과 성공이 보장되었던 스물다섯 국제은행가, 아프리가 개발 사업에 뛰어들다

 

모든 사람이 안정된 직장과 출세를 바라는 건 아닙니다. 따뜻한 이상을 가슴에 품고 삶의 의미를 구하고자 오늘도 묵묵히 땀을 흘리는 젊은이들이 있죠. 지은이 재클린 노보그라츠도 그런 젊은이었죠. 권력과 돈, 성공이 보장되었던 국제은행가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스물다섯 살에 비영리기구 아프리카 개발은행으로 일자리를 옮깁니다.

 

그녀가 바보라서 탄탄대로였던 직장을 걷어찬 것일까요? 사람은 결코 빵만을 먹고 사는 존재가 아니기에 용기를 냈던 거죠. 지금 의미 있는 일을 하지 못하면 나이 들어서도 못 한다며 백인이자 미국인으로서 편하게 살았던 재클린은 아프리카로 떠나게 됩니다. 가난과 절망만이 맴도는 절망의 대륙으로.

 

재클린은 아프리카 여성들의 텃세에 마음고생도 하고, 자신의 노력을 무시하는 사람들 때문에 지치기도 했으며, 원만하지 않은 소통에 울기도 합니다. 낯선 이들에게 폭행을 당하기도 하고, 물건들을 도둑맞기도 했으며 무릎에 얼굴을 묻고 외로워하기도 했죠. 그럼에도 그녀는 아프리카에 남아 ‘행복한 변화’를 일으킵니다.

 

엄청난 돈이 들어갔고 지금도 쏟아 부어지고 있지만 아프리카는 여전히 가난합니다. 원조가 실패하는 이유는 도우러 간 사람들이 현지인들의 목소리를 귀담아 듣지 않기 때문이죠. 자기네만이 올바르다고 생각하고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듯 가르치려 들죠. 그렇기에 돈만 많이 들어갔지 공장이 텅 비거나 판로가 없는 물건들만 만들어대곤 하였죠.

 

가난한 이들을 돕는 비영리 벤처자본 어큐먼펀드, 세계에 변화를 일으키다

 

재클린은 그저 돈을 주면서 느끼는 ‘값싼 동정’에 취하지 않고 냉철하게 문제점을 파고 들어가 사업을 바꿔놓으려 하죠. 의식과 제도가 바뀌지 않으면 원조에 길들여져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걸 느끼고, 그들과 눈높이를 맞추며 변화를 시도하죠. 수익이 오래 날 수 있도록 멀리 내다보면서, 자신들이 책임감을 갖고 경영을 할 수 있도록 곁에서 밑그림을 그려주죠.

 

그렇게 소액융자은행 ‘두테림베레’를 설립합니다. 일반 상업 은행들은 돈을 떼일까봐 외면하는 가난한 이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곳이죠. 그저 돈만 빌려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들이 사업을 꾸려갈 수 있도록 경영 지도까지 해주죠. 현지인들과 오해도 생기고 좌충우돌하면서 ‘블루 베이커리’를 열어서 비혼모 스무 명이 스스로 일어서도록 돕습니다.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2001년에 비영리 벤처자본 어큐먼펀드를 세웁니다. 이윤만 쫓는 펀드 회사도 아니고 그냥 돈을 퍼 주는 자선 단체를 넘어서 새로운 회사를 만든 거죠. 어큐먼펀드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 일하는 회사들을 돕습니다. 인도에서 가난한 이들에게 맑은 물을 공급해주는 기업이나 탄자니아에서 말라리아 예방용 모기장을 만드는 기업에게 돈을 빌려주고 사업이 잘 되도록 경영자문까지 해주죠.

 

어큐먼펀드는 2008년까지 4,000만 달러 이상을 40개 기업체에 투자하였고, 2만 3천개 이상의 일자리를 만들어냈지요. 수천 만 명이 맑은 물을 먹을 수 있게 되었고, 해마다 3,000만 명의 사람들이 모기장을 얻으면서 말라리아로 죽는 사람이 줄어들었죠. 이런 대단한 업적은 스물 다섯 먹은 젊은이의 심장에서 시작된 것들이며, 누구라도 마음먹으면 이룰 수 있는 성과들이라는데 의미가 크죠.

 

100만 명이 학살당한 르완다, 짙은 절망에서 희망을 잃지 않다

 

지은이는 아프리카 여려 나라에서 활동을 했지만 르완다와 가장 친밀합니다. 르완다 수도 키갈리에 ‘블루베이커리’를 열었을 정도니까요. 그런 르완다에서 3개 월동안 100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학살을 당합니다. 인구 800만 명의 나라에서 1/8이 죽은 거죠. 바로 1994년에 있었던 르완다 대학살 사건입니다.

 

이 비극의 씨앗은 제국주의와 맞물려 있습니다. 벨기에는 콧구멍이 좁다는 희한한 이유로. 투치족(10%)을 마름삼아 르완다를 식민지배 하였습니다. 벨기에가 떠나버린 뒤, 후투족(90%)은 불만을 터뜨리고 투치족은 반발하면서 갈등이 빚어왔지요. 1994년 4월, 두 종족 사이 평화협정을 맺게 되는 분위기에서 후투족 출신 대통령이 암살당합니다. 그리고 광기의 폭풍이 불어 닥칩니다.

 

후투요? 투치요? 어떻게 대답을 하느냐에 따라 목숨이 왔다갔다 하였지요. 투치족뿐 아니라 학살을 반대하는 융화파 후투족도 무참하게 살해당합니다. 대학살 때, 미국에 있던 재클린은 큰 충격을 받고, 르완다로 갑니다. 이미 알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였고, ‘블루 베이커리’는 건물에 파란색만 덩그러니 남아있었고, '두테림베레'에 있던 모든 자료들은 사라졌죠.

 

더 큰 충격을 준 건 두테림베레에서 같이 일을 하였던 아그네스가 감옥에 갇혀 있다는 거죠. 사회정의를 위해 같이 일한 여성운동의 선구자로 르완다 최초의 여성판자이자 최초의 국회의원이었던 아그네스, 어느 누구도 용서해줘서는 안 된다며 대학살을 부추기고 다그친 주동자로 잡혀있던 거죠. 아그네스를 면회 가서 말을 잇지 못하는 재클린은 그녀가 권력에 삼켜졌다며 마음 아파하죠.

 

자기가 이룬 모든 게 사라져버린 르완다를 보면서 절망할 수도 있으나 재클린은 오히려 희망을 얻습니다. 사람들을 바퀴벌레 취급하면서 죽였던 대학살 현장에서 자기 목숨을 걸고 수많은 생명을 살린 사람들이 있었으니까요. 복수와 앙갚음이 되풀이되었던 끔찍하였던 살육 현장에서도 무엇보다 생명을 중요시하고 사람답게 살고자 한 이야기가 긴박하게 그려져 있네요.

 

소유냐 존재냐, 밥도 중요하지만 정말로 행복 하고 싶다면 존재를 골라야

 

오늘 날 이 세계는 긴밀하게 연결되어있으며 인간은 외로이 떨어진 섬들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된 존재들이죠. 친구들이 놀려서 반품한 자신의 파란색 스웨터를 아프리카 소년이 입고 있는걸 보고 재클린은 깜짝 놀랍니다. 옷에는 자기 이름까지 적혀있지요. 자신이 버린 블루 스웨터가 누군가에게는 따뜻한 옷이 된다는 사실, 세계는 가깝게 이어져 있다는 진실을 새삼 깨달았다고 얘기합니다.

 

시장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사랑만으로 세상이 달라지지 않기에 돈이라는 도구가 필요합니다. 사랑 없는 돈은 가치가 없지만, 돈 없는 사랑은 무기력하죠. 그런 고민 끝에 재클린은 사랑과 돈이 같이 어울리는 사업을 일으킨 거죠. 새로운 모습의 자선 사업으로 무엇이 정말 타인을 돕는 일인지 돌아보게 하는 회사죠.

 

요즘 사회적기업도 많이 생겨났고, 일반 기업들의 사회공헌과 사회책임이 많이 얘기되고 있습니다. 기업은 주주에게 이득을 돌리는 게 최우선이어야 한다고 큰소리쳤던 제너럴 일렉트릭(GE) 전 회장 잭 웰치도 “주주가치는 이 세상에서 제일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며 자기주장을 뒤집었지요. 그만큼 세상이 바뀌고 있습니다.

 

물론, 사람에게 밥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존재욕이란 게 있습니다. 존재욕이란 사람과 사람이, 사람과 자연이 함께 살고자 하는 욕망이죠. 스웨덴 교과서에는 존재욕을 희생하여 소유욕을 채우려한다면 병든 사회라고 가르칩니다. 소유욕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사회가 돕고, 무엇이 더 중요한지 아이들 때부터 가르치기에 존재욕을 실현할 가능성이 더 높은 거죠.

 

지금 한국 사회는 어떤가요? 모든 사람들이 빨간 눈이 되어 소유욕을 채우고자 허겁지겁 살아가고 있습니다. ‘속물’로 살아가는 걸 당연하게 여기죠.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이 나는 바닷물처럼 아무리 쥐어도 행복하지 않기에 뭔가 이상하지만 다른 길을 못 보죠. 그러나 가슴 속 깊이에는 누구나 존재욕이 웅크리고 있습니다. 자신이 정말로 행복 하고 싶다면, 잠깐이라도 ‘밥벌이의 공포’에서 벗어나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려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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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하는 힘
강상중 지음, 이경덕 옮김 / 사계절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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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한 젊은이들이 넘칩니다. 그들이 펼쳐놓는 스펙을 뒤적거리다보면 입이 쩍 벌어지곤 하죠. 젊은이라면 세상에 의문을 품고 공부에 집중하는 게 마땅한 일이기에 대견하지만 개운치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똑같은 상품으로 젊은이들이 제조되었으니까요 공장에서 대량생산된 제품에 감탄하는 것은 초기 산업화 단계에서나 할 일이이죠. 배를 누르면 ‘I love you’만을 외치는 인형처럼 건드리기만 해도 ‘뽑아주세요. 영혼이라고 팔겠습니다’는 젊은이들, ‘득템’을 위해 세상을 헤매고 있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말과 반대로 점점 부자유해지는 젊은이들, 진리가 아닌 걸 붙들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아는 건 많지만 삶이 풍요롭지 않고, 잡동사니 지식 틈바구니에서 어떻게 살아야할지 몰라 헉헉댑니다. 걱정은 하지만 고민을 않기 때문에 지식이 지혜로 나아가지 않는 거죠. <고민하는 힘>[2009. 사계절]은 젊은이들에게 말을 겁니다. 고민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이 책을 쓴 사람은 일본이름을 버리고 강상중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사회에서 살아가는 재일교포 2세입니다. 재일 한국인 최초로 도쿄 대학 정교수가 된 강상중씨는 일본과 한국의 경계인으로서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죠. 언제나 삶을 뒤흔들었던 9가지 주제, 나, 돈, 지식, 청춘, 믿음과 구원, 노동, 사랑, 죽음, 늙음에 대해 지은이는 자기 생각을 두런두런 늘어놓습니다.

 

청춘은 나이가 아니다, 발기불능에 걸린 젊은이들이여, 충격이다!

 

청춘은 나이가 아니지요. 자신은 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고민을 하고 있기에 젊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지금 젊은이들을 ‘발기불능’상태라고 빗댑니다. 세상에 반응하지 않고 고개를 떨구고 있으니까요. 요즘 젊은이들은 뜨겁게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들이 아니라 바싹 말라서 세상으로 배달되는 사람들이니까요. 토익 900점을 넘지 않으면 취직하기 힘들다며 영어책만 파고 있고, 아직 이십대인데도 “이미 나이가 많아서”라고 되뇌고 있는 대학생들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고 고백합니다.

 

물론 그렇게 학창시절을 보내면 유명 기업에 취직할 수 있고 높은 월급은 받으며 ‘생존’할 수 있겠죠. 하지만 ‘실존’하지 못하게 됩니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한 번도 살지 못한 삶이 과연 행복할까요. 자신이 죽을 때 자기가 번 돈이 생각날까요. 덮어두었던 꿈이 생각날까요. 10년 뒤, 이렇게 살고 있는 젊은이들이 자기 삶을 돌아보면, 거기에는 삭막함만이 남아있을 거라고 지은이는 안타까워하죠.

 

한 놈만 잘 먹고 잘 살면 된다는 사회, 남들은 다 죽더라도 자기만은 살겠다는 청년들, 그렇게 ‘진흙탕 개싸움’이 펼쳐지고 젊은이들은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도대체 왜 그렇게 사는냐고 물으면, 그냥 웃지요. 자기도 왜 이렇게 사는지 잘 모르니까. 얼핏 원숙한 듯 보여 인생의 깊이를 안다고 판단하면, 완전 오산이죠. 어른 흉내만 낼 뿐 막막한 인생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하루에도 수백 번 우는 젊은이들이니까.

 

이게 젊은이들만의 문제가 아니지요. 사람을 소모품처럼 쓰고 버리는 끔찍한 사회제도, 점점 얇아지고 약해지는 사회 안전망, 패자부활전이 없는 경쟁 체제에서 젊은이들이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승자가 되지 못할지언정 패자가 되지 않겠다며 영혼을 팔아넘기는 일이 젊은이들만의 잘못은 아니란 거죠. 얘네들이 어느 날 갑자기 안드로메다에서 날아온 게 아니니까요.

 

젊은이들이 어려운 상황에 있다고 얘기하면, 또 응석이냐, 이제 지겹다며 귀를 막습니다. 아무리 부당하다고 항의하고 삭발을 해도 경찰들 시켜서 끌고 가면 그만, 그래, 너희가 고생이 많다, 바꿔줄게, 하며 나서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 그런데 어쩌라고, 툭 내뱉고 다들 쇼핑하러 골프 치러 갑니다. 우린 땐 밥도 못 먹었어, 편한 줄 알아, 이것들아!

 

사회 비판은 하되 자기에게 물음을 던져라, 난 누구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언제까지 불평과 푸념으로 젊음을 갉아먹을 수 없지요. 사회비판은 하되 자기에게 물음을 던져야 합니다. 난 누구이고, 삶은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야 합니다. 고민하지 않은 자는 ‘자기만의 성’안에 갇히게 되고 반드시 파멸하게 되니까요.

 

사랑은 어떤 의미인가, 돈은 얼마나 중요한가, 일이란 무엇이고, 늙음과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정답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런 질문들을 괄호 안에 넣고 가슴 속 깊은 곳에 묻어버리기 일쑤죠. 독에 넣고 파묻은 김장김치는 맛있게 익기라도 하건만, 이런 물음들은 손톱 밑 가시처럼 잊을 수가 없습니다. 두더지게임처럼, “여보세요 잠깐만요”를 외치며 끝없이 사람 마음을 휘저으니까요.

 

지은이는 ‘해답이 없는 물음’을 고민하라고 얘기합니다. 그런 고민은 젊기 때문에 가능하니까요. 이미 늙어버린 어른들은 애초에 그런 고민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청춘이란 한 점 의혹도 없을 때까지 본질의 의미를 묻는 것이라며, 그것이 자기에게 도움이 되든 그렇지 않든 사회에 이익이 되든 그렇지 않든 ‘알고 싶다’는 자기의 내면에서 솟아나는 갈망에 솔직하게 따르라며 은근슬쩍 500원을 넣어줍니다. 책을 읽다보면, 어느새 망치를 들게 됩니다.

 

얍, 얍, 아무리 때려도 두더지들은 계속해서 올라오죠. 고민할수록 더 많은 의문들이 올라옵니다. 종교가 필요한가, 인간이란 존재는 짐승과 다른가, 자유란 무엇인가, 민주주의에서 나는 주인인가, 망치로 두더지들을 두드리다보면 자기 안에서 맴돌던 갈증들이 조금은 풀리게 되죠. 그리고 눈을 돌려 세상을 보면 이전과 다르게 보입니다. 자신이 달라졌으니까요.

 

고민은 자신에게서 시작하지만 결국 타자와 세상으로 뻗어 나갑니다. 자신은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얻고 존재할 뿐이니까요. 자신이 언제 행복한지 인간이란 무엇인지 세상과 나의 관계는 어떠하고 나와 남의 관계는 어떻게 맺어있는지 진지하게 고민해보자고 지은이는 권합니다. 청춘은 고민하는 사람이니까요. 자기도 5학년 6반이지만 끝없이 고민을 하기에 청춘이라고 윙크를 합니다.

 

뿅망치의 달인, 5학년 6반이어도 할리데이비슨을 타고 고민과 젊음을 얘기하다

 

여기서 잠깐, 뭔가 너무 진지해서 오히려 거리가 느껴지는 겉장의 지은이 얼굴만 보고 이 책이 어려울 거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것은 섣부른 판단입니다. 지은이는 태어나면서 정체성에 대해 고민을 하기 시작해서 56년째 고민을 하는 ‘뿅망치의 달인’이니까요. 이제는 책 곳곳에 솔직하게 자기 얘기를 적으면서 능청도 떨 줄 아는데, 무척 재밌습니다.

 

그가 가장 먼저 해보고 싶은 게 배우랍니다. 그리고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합니다. ‘고민하는 힘을 거쳐 최강이 된 뮤지컬 스타’라고 편집자가 지은이를 놀리자, 환상 같은 꿈이 아니라 현실에서 이루고 싶은 바람을 털어놓는데, 할리데이비슨을 몰고 일본과 한반도를 종단하는 거라네요. 이런 꿈을 꿀 수 있게 된 것은, 고민을 통해 두려움이 사라진 것과 비슷하다고 얘기하네요. 달인 가라사대, 두려움은 죽지 않는다, 고민을 하면 사라질 뿐!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친 뒤, 무지개가 뜨고 아름다운 하늘이 보이듯이 고민 끝에는 자신감을 얻고 당당해질 수 있고 세상을 사랑할 수 있게 되죠. 지금 세상은 고민 하지 말고 그저 몸뚱이가 바라는 대로만 살라고 부추기기에 늘 불안하고 걱정이 많습니다. 잡념만 많지 그것을 깊게 고민해서 꿰뚫거나 불안의 뿌리를 찾으려는 시도는 전혀 없습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적당히 살아갑니다. 타인과 두루뭉술한 관계를 맺고, 대가가 확실하지 않은 도전은 피하려고 하며,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별로 휘말리지 않으면서 요령 있게 삽니다. 이렇게 살아도 행복하다면 계속 그렇게 사시면 됩니다. 다만, 지금 삶이 불만족스럽다면, 발기불능한 삶에서 스스로 우뚝 서고 싶다면, 당장 망치를 드세요. 할리데이비슨을 타고 가죽바지를 입은 강상중씨가 엄지손가락을 치켜 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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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 완역본 하서 완역본 시리즈 1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유성인 옮김 / (주)하서 / 2008년 5월
평점 :
절판



자기 자식이나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떤 책을 권하나요. 백이면 백, 좋은 책 읽기를 바라실 겁니다. 좋은 책은, 나는 누구이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게 하죠. 따라서 20대에 10억 버는 법, 10대에 5억 버는 법 같은 책보다 고전이나 명작을 가까이 했으면 하죠. 왜냐하면 삶의 지혜가 고전이나 명작에 담겨 있다는 건 식상할 만큼 알려진 얘기니까요.

 

하지만 그 좋은 책을 스스로 읽고 있냐고 되물었을 때, 머쓱하게 뒤통수만 긁는 사람이 많죠. 좋은 책 읽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당장 손이 안 가는 거죠. 일 해야죠, 술 마시고 놀아야죠, 버라이어티에 드라마 봐야죠, 에구, 할 게 너무 많아, 볼 게 너무 많아, 이런 핑계를 대면서 책장 구석으로 고전을 밀어 넣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가고 나이를 먹죠. 늘 그랬듯 일에 치이고, 불콰한 얼굴로 비틀거리고, TV보며 웃다가도 여러 잡생각에 밤을 뒤척이죠. 안 되겠다 싶었죠. 지금 행복하지 못 하면 내일 행복할 수 없고, 지금 읽지 않으면 영영 읽지 않게 될 거라는 생각에 흠칫 놀라 <죄와 벌>을 잡았습니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지요. 왜, 무려 767쪽에 달하는 이 책을 들고 보면, 팔이 저렸으니까요. 웬만한 책 2권보다 더 두꺼운 이 책을 보면서 솔직하게, 과연 다 읽을 수 있을까, 도중에 지루해서 포기하지는 않을까, 이런 걱정이 스멀스멀 기어올랐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펼쳐지는 놀라운 이야기에 책 속으로 풍덩, 빨려 들어갑니다.

 

젊은이, 사회에 해악을 끼친다며 고리대금업자를 도끼로 죽이다

 

라스콜리니코프는 대학교 공부까지 한 지식인입니다. 그러나 가난, 사회부조리, 동생의 결혼이 겹치면서 그는 무척 혼란스러워하죠. 거기다 지식인으로서 오만까지 더해져 고리대금하는 노파를 도끼로 죽입니다. 자신이 판단했을 때, 노파는 세상에 필요 없는 ‘이’같은 존재였으니까요. 계획과 달리 노파의 백치 동생이 나타나자 동생까지도 죽이게 됩니다.

 

그렇게 두 사람을 죽이고 나서 주인공은 극심한 신경쇠약에 시달립니다. 수많은 논리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지만 소스라치는 불안감과 바닥 모르는 공포감에 까무러치기를 되풀이 하죠. 곁에 있는 사람들은 라스콜리니코프가 미쳤다며 수군거리고 걱정하지요. 거기에 여러 사건들이 벌어지고, 인물들의 욕망이 섞이면서 이야기의 끈적함이 커지죠.

 

이 소설의 반은 대화, 나머지 반은 인물들의 심리 묘사지요. 그 가운데 심리 묘사는 놀랄 정도로 빼어납니다. 불안, 두려움, 즐거움, 기쁨, 우쭐함, 자기비하 등을 자세하게 펼쳐놓아서 인물이 겪는 감정의 변화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지요. 인물의 심장소리가 들릴 듯싶은 표현에 감탄을 하며 책에서 눈길을 못 떼게 됩니다.

 

이렇게 두드러진 심리묘사는 책과 독자 사이에 거리감을 좁혀주죠. 읽다보면, 마치 소설 속 인물이 되는 기분을 들어요. 영화 <존 말코비치 되기>처럼 그 사람 머릿속으로 들어간 느낌이죠. 이 사람은 왜 이렇게 혼란스러워하는지, 저 인물은 저런 행동을 왜 하는지, 몇 장에 걸쳐 풀어놓는 설명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며 공감이 이뤄지죠.

 

정의를 위한 일이었다고 합리화하던 주인공, 사랑 앞에 무릎을 꿇다

 

사람들 머릿속을 따라 가다보면 다른 사람으로 이어진 긴밀한 끈들을 만나게 되죠. 생각은 타인과 자신의 관계에서 빚어지니까요. 부모와 자식, 형제자매, 친구, 애인, 경쟁자, 업무 관계 등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관계가 책 속에 있어요. 예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풍경은 비슷하기에 소설을 보면서 오늘 자신이 맺고 있는 관계를 돌아보게 하네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인물은 성매매 노동자 ‘소냐’지요. 소냐는 가족을 먹여 살리고자 몸을 팝니다. 무신론자에다 허무주의자였던 라스콜리니코프는 소냐를 만나면서 변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에게 손가락질 당하면서도 아름다운 마음을 지닌 소냐에게 감화되는 거죠. 사람을 죽이고도 정의를 위한 일이었다고 합리화하던 라스콜리니코프는 소냐 앞에 무릎을 꿇고 괴로워합니다.

 

그리고 광장에 엎드려 땅에 입을 맞추게 됩니다. 왜냐하면 소냐가 땅에 엎드려 죄를 말한 뒤, 용서를 구하라고 했으니까요. 우울증이 심하고 불안한 라스콜리니코프는 소냐를 만나지 않았으면 자살을 했겠죠. 그러나 ‘소냐의 숭고한 사랑에 마음이 흔들린 라스콜리니코프는 깊은 고뇌 끝에 자기 오만을 꺾습니다. 무릎을 꿇고 자기 잘못을 인정한 뒤, 경찰서로 가서 자수를 합니다.

 

탁월한 인물 표현과 사람 밑바닥을 건드리는 주제 의식, 더구나 인물마다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상황 설정과 짜임새 있는 사건 배치는 <죄와 벌>의 가치를 한껏 높였지요. 개연성 있는 줄거리, 필연성 있는 사건 전개, 가슴 속 울림을 전하는 진실성까지 이 소설은 대단히 완성도가 높으며, 왜 고전을 읽어야 하는지 잘 보여주죠.

 

사형 집행 몇 분 전에 살아난 도스토예프스키,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고 묻는다

 

아시다시피 이 책을 쓴 사람은 도스토예프스키입니다. 그는 사형 선고를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몇 분 전, 황제 특사를 받아 죽음에서 벗어나죠. 그렇게 4년 동안 시베리아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죄와 벌>이 움틉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억압된 감옥에서 고칠 수 없는 간질병을 앓으며 삶과 죽음, 죄와 벌에 대해 머리를 싸매고 괴로워한 끝에 이런 명작을 쓰게 되죠.

 

어리석은 자에게는 그 어리석음 자체가 징계고, 죄를 지은 자에게는 그 죄 자체가 벌이죠. 사람들은 여전히 어리석고 끝없이 죄를 짓지요. 그거 자체가 징계고 벌이죠. 그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남’을 생각해봅니다. 이른바 ‘구원’이죠. 구원은 어려운 게 아니라 사람됨을 지키며 사람답게 사는 걸 이르죠. <죄와 벌>을 보니 사람됨이 무엇이고 어떻게 사는 게 사람답게 사는 모습인지 고민하게 되네요.

 

고전이나 명작을 읽으면 좋겠지만, 읽을 시간이 없다고 사람들은 그럴 듯한 변명을 댑니다. 그리고 몇 시간씩 TV를 보고, 몇 시간씩 인터넷 쇼핑을 합니다. 그리곤 밝아오는 새벽을 두려워하죠. 똑같이 반복되는 일과, 유리벽이 있는 거 같은 사람들, 허겁지겁 시간에 쫓기고 허둥대며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보면 어느새 까만 밤이 짙은 외로움과 함께 밀려들죠.

 

어제보다 더 나은 오늘을 살고 싶다면, 오늘보다 더 행복한 내일을 살고자 한다면, 지금 고전과 명작을 손에 들어야 합니다. 이런 거 한가롭게 읽고 있어도 될까 싶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읽어야 되는 이유지요. 자신이 얼마나 불안에 쫓기고 있는지, 그런 강박에 얼마나 길들여졌는지 되짚어볼 수 있는 기회가 될 테니까요, 지금 당장 시급하게 좋은 책을 읽었으면 좋겠네요. 책이 삶을 구원하는 지도가 되어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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굼벵이의 노래
황원교 지음 / 바움 / 2008년 12월
평점 :
품절



타인을 이해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요. 자기 몸은 타인에게로 가는 출발지이기보다 자신을 가두는 테두리이기 쉽습니다. 눈은 뜨고 있으나 세상의 아픔을 보지 못하고 귀는 열려 있으나 이웃의 신음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들. 정작 상황이 달라져 자신이 고통스러워할 때, 세상은 침묵합니다. 그렇기에 지금 세상은 비극이고, 사람들은 어느 때보다 가난한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세상에는 아시다시피 장애인 편견이란 굳건한 벽이 있습니다. ‘장애인 먼저, 생각이 아니라 행동’이라는 구호는 요란하기만 하고, 행동은커녕 생각을 하지 못할 때가 많죠. 날로 각박해지는 사회에서 장애인 차별은 날로 심해집니다. 그들이 어떠한 심정인지, 무슨 불편이 있는지 사람들은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바움출판사에서 나온 <굼벵이의 노래>를 읽으며, 새삼 장애인 문제를 생각해봅니다.

 

결혼 1주일을 앞둔 젊은 남자, 일을 하며 장밋빛 미래를 꿈꾸던 그에게 갑자기 일어난 교통사고, 전신마비 영구장애, 느닷없이 찾아온 불행은 한 사람을 삼켜버립니다. 이 사람은 온갖 후유증과 합병증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습니다. 극심한 공황상태를 넘어서고자 입에다 마우스 스틱을 물고 컴퓨터 자판을 한자 한자씩 치며 글을 쓰기 시작합니다.  

 

이 사람이 바로 황원교 시인입니다. 타인의 손길에 기댈 수밖에 없기에 스스로를 ‘숨 쉬는 시체’라고 일컫는 황시인, 그가 지난날을 가슴 속에서 꺼내어 어렵게 써내려갔고, 그 글들이 묶여 이렇게 산문집으로 나왔지요. 가족들의 피땀 어린 보살핌과 자신의 눈물겨운 의지로 전신마비 위기를 받아들이는 찡한 이야기가 책갈피 마다 담겨있네요.

 

갑자기 쓰러진 어머니, 아무것도 못한 채 울부짖은 전신마비 아들

 

글 가운데 무척 마음 아린 내용이 있지요. 어머니 얘기입니다. 큰 아들은 전신마비가 되었고, 막내아들마저 ‘재생불량성 빈혈’이란 희소난치병에 걸리게 되었을 때 어머니 심정은 어떨까요. 어머니는 온 몸으로 울면서 거의 뜬 눈으로 철야기도를 드립니다. 오로지 십자가와 성모상 앞에서 자비와 은총을 바라며.

 

어느 날 아침, 어머니는 막둥이를 챙기러 나가십니다. 그러다 저기 현관에서 “쿵”! 하는 짧고 둔탁한 소리와 함께 연이어 “으음, 으음……”신음소리만이 들려옵니다. 어머니가 정신을 갑자기 잃고 차가운 콘크리트 현관바닥에 쓰러지신 거죠. 전신마비 황시인은 “어머니, 어머니……”하고 계속해 소리쳐 불렀지만 어머니는 끝내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 하십니다.

 

정말 가슴 저미는 순간입니다. 황시인은 “나는 그 순간부터 정말 짐승처럼 포효했고, 잠결에 놀라 깬 쌍둥이조카들도 소리쳐 울기 시작했다.”며 그 순간을 털어놓습니다. 어머니가 쓰러졌으나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울부짖을 수밖에 없던 황시인이 떠오르며 목이 멥니다. 조카들을 진정시키고 119에 신고한 뒤, 그는 자기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못한 채 피울음을 흘립니다.

 

그렇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물건들을 하나하나 정리하다보니, 지은이를 더욱 가슴 치게 하는 유품이 있었지요. 그것은 밀려드는 잠을 쫓아버리기 위해 가족들 몰래 숨겨놓고 어머니가 드시던 각성제였습니다. 시인은 “이 못난 불구자식을 밤낮으로 수발하느라 지친 몸과 마음에 쏟아지는 졸음과 피로를 각성제로 달래며 버텨온 그 혹독한 7년의 세월은 어머니에게 얼마나 많은 피눈물을 흘리게 했을까.”며 울고 또 웁니다.

 

종이학 1,000마리를 접으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말을 듣고, 아들이 자리에서 일어나길 바라며 종이학을 접던 어머니, 1,000마리를 접던 날 소녀처럼 기뻐하시던 그 분의 모습을 지은이는 잊을 수 없지요. 그렇게 사랑이 담뿍 밴 종이학은 유품정리와 함께 불탑니다. 그렇게 불 속에서 종이학들은 어머니를 모시고 하늘나라로 날아갑니다.

 

지은이는 밥 한 끼를 먹을 때마다 자기 마음대로 반찬을 골라먹는 재미는커녕 어미니를 대신하여 늙고 병든 아버지의 떨리는 손을 통해 밥숟갈을 날름날름 받아먹는다며 자신의 ‘한심한 꼴’을 탓합니다. 게다가 배설할 때도 도움을 받아야 하죠. 계속 한쪽으로만 있으면 욕창이 생겨 몸을 자꾸 바꿔줘야 하는 지은이. 깊은 밤에 아버지를 부를 때 느끼는 참담함을 어느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렇기에 그는 죽고 싶었지요. 그러나 손가락 하나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기에 죽지 못하고 살았다고 합니다. 공황증세를 보이고 극심한 혼란에 빠지다가 글을 쓰면서 마음을 다잡게 된 지은이, 그는 ‘굼벵이의 노래’를 합니다. 지금 비록 한 마리의 굼벵이처럼 어둠 속에서 창밖의 햇빛을 그리워할 지라도, 굼벵이처럼 온 몸으로 기어서 가고, 그것도 안 되면 굴러서라도 찬란한 햇빛 속으로 당당하게 가겠다며.



장애인의 날 그리고 이명박 대통령의 눈물

 

장애인의 날을 하루 앞둔 19일, 이명박 대통령은 눈물을 흘립니다. 홀트 요양원에서 장애인 합창단의 공연 도중 감동에 젖었기 때문이죠. 이대통령은 “위로하러 왔는데 오히려 위로를 받고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됐다”, “성한 사람들이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시간이 됐다”고 말을 합니다.

 

이 대통령 말처럼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 되돌아봐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한 사람들’이 ‘진짜 성한 사람들’인지 돌아봐야 합니다. ‘몸이 불편한 사람들’을 차별하는 사회에서 성한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지금 보니, ‘마음이 아픈 장애인’들이 성한 사람들이라고 우기는 모습니다. 타인의 고통에 함께 하지 않는 사람들을 성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문제는 ‘성한 사람’ 타령 하기 앞서 이미 ‘성한 정부’가 아닙니다. 국회 보건복지가족위원회는 장애인의 날 4월 20일에 올해 복지 관련 추가경정예산을 대폭 잘라버립니다. 저소득층 지원예산을 1200억 원 줄였고, 기초생활수급자의 생계급여, 주거급여, 의료급여 경상보조 예산도 1093억 원을 줄여서 통과시켰습니다. 한반대 대운하의 짝퉁으로 의심되는 “경기도 강변 살자” 기획에 22조 8800억 원을 쏟아 붓는 거와는 딴판입니다.

 

경제가 어렵습니다. 언제나 고통은 가장 빨리 그리고 제일 오래 ‘사회 약자들’에게 넘겨집니다. 복지부에 따르면 200여 만 명 되는 전체 장애인 가운데 59만 여 명이 ‘절대 빈곤’ 상태라고 합니다. 장애수당은 중증장애인이라야 월 13만원 정도입니다. 그렇다고 장애인이 일자리를 구할 수 있느냐, 이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지요.

 

지금 몸이 불편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눈물 흘려주는 게 아닙니다. 장애인의 고통에 대한 동감이고, 장애인 이해를 바탕으로 한 정책지원입니다. 가락시장 아주머니에게 목도리를 둘러준다고 서민 살림살이가 나아지는 게 아니듯이 눈물을 흘려준다고 장애인들의 흘리고 있는 눈물이 줄어드는 건 아닙니다.

 

이 대통령은 “올해부터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장애인 의무고용 비율을 2%에서 3%로 늘렸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말 한마디에 출근복을 바꿔 입는 장관과 달리 장애인 의무고용률은 지엄한 대통령 얘기에 못 따라가고 있죠. 2008년 공공부문 장애인 의무 고용률은 1.76%에 그쳤습니다. 대통령실 1.7%, 외교통상부는 0.65%밖에 안 되었습니다.

 

상대 아픔에 관심조차 보이지 않는 세태에서 약자를 위로하려는 마음씀씀이는 훌륭한 행동입니다. 더구나 눈물까지. 그러나 진심이 담겨 있지 않으면, 정책지원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그저 ‘쇼맨십’으로 비칠 뿐입니다. 20일에 열린 ‘장애인차별 철폐투쟁 결의대회’에서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공동대표가 이 대통령의 눈물을 ‘악어의 눈물’이라 비판한 이유를 ‘성한 사람들’은 곱씹어야 합니다.

 

타인을 이해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요. 타인의 고통이 자신의 고통으로 여겨지지 않고, 경쟁자 하나가 떨어져 나갔으니 좋아하라는 사회에서 ‘살아남기’를 요구받고 있습니다.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성한 사람들’ 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성한 사람들의 설레발에 ‘몸이 불편한 사람들’의 마음까지 불편하게 만드는 건 아닌지 걱정됩니다. 이명박 대통령의 눈물이 해마다 이때쯤이면, 으레 치러지는 의례행사가 아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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