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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 - 서경식 김상봉 대담
서경식, 김상봉 지음 / 돌베개 / 2007년 12월
평점 :
품절
오늘은 5월 18일입니다. 5.18, 이 숫자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누군가에게는 월요일 증후군에 시달리는 피곤한 평일일 수 있고, 어떤 이에게는 그저 그런 하루일 수 있죠. 또 다른 이에게는 ‘어떤 사건’이 벌어진 많고 많은 기념일 가운데 하나라고 기억할 수도 있겠지요. 그만큼 시간이 흐른 게죠.
시대가 달라졌지요. 민중당의 주역들이 한나라당의 간부가 되기도 했고 한때 극좌였던 사람들은 뉴라이트라며 이름표를 바꿔 달기도 했네요. 자유와 혁명을 외치던 청춘들은 펀드와 골프를 외치며 회색빛 중년이 되었지요. 박정희를 관대하게 재평가하고, 전두환은 지나갔으니 이젠 잊자고 소리치죠. 일제도 다 나쁜 건 아니지 않냐며 어물쩍 ‘미래로’를 부르짖죠.
맞습니다. 밝은 앞날을 가야죠. 그러기 위해서는 과거를 온전히 이해하고 그 의미를 제대로 알아야 하죠. 늘 그렇듯 미래는 과거에 뿌리를 두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돈과 권력에 눈먼 사람들은 흘러간 시간에서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하기에 끔찍한 역사가 되풀이되곤 하죠. 피 묻힌 이들이 피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에게 용서하라고 윽박지르는 한국, 역사의 시계바늘은 거꾸로 돌아갑니다.
너무나, 너무나 고통스러운 고문, 불의에 무릎 꿇지 않으려 석유난로로 자살하려한 서승
아니, 흥청망청 사는 게 인간의 모습 아니야? 대충 용서하고 대강 살자고. 이 땅의 ‘배부른 돼지’들은 자기 입에 들어가는 사료의 양만 따질 뿐, 그 어떠한 것도 의미가 없지요. 너도 일제시대 태어났으면 친일파하지 않았겠냐, 박정희가 밥을 먹고 살게 해줬잖아, 라며 몇 마디 말로 얼버무릴 때마다 ‘석유난로’가 떠오릅니다.
서승이란 사람은 이른바 ‘재일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잡힙니다. 음습한 취조실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고문들이 이어집니다. 괴로운 나머지 죄 없는 벗들의 이름을 말하게 될까 두려워 수사관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분신을 시도했으나 죽지는 못 하고 지울 수 없는 화상만 입지요.
캄캄한 고문실, 망신창이가 된 몸으로 석유난로를 끌어안는 한 사람, 손도 못 데게 뜨거운 난로, 타들어가는 살, 고약하게 타는 냄새, 엄청난 아픔에도 몸을 떼지 않는 한 사람, 그가 홀로 겪어야 했던 고통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는 사람도 나눌 수 있는 사람도 없죠. 분노를 말하기엔 우리들 혀가 너무 짧네요. 다만, 잊지 않고 잃지 말고 기억하려 합니다.
잔인한 짐승들이 거들먹거리던 시대에 얼마나 많은 서승들이 있었는지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은 칼로 위협하거나 꿀로 꾄다고 무너지는 존재가 아님을 수많은 서승들에게서 배울 수 있습니다. ‘탁’치니까 ‘억’하고 죽는 나약한 사람이니까 힘 앞에 엎드리라며 으르렁거리는 이들에게 무릎 꿇지 않는 것은 이 사회에서 수없이 피어났던 서승들 덕분이죠.
시민을 죽이라는 국가 권력, 죽음을 무릅쓰고서라도 기꺼이 잘못된 것에 맞서는 광주시민들
박정희가 쓰러지고 전두환이 나타난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앞 광장에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20만 명의 시위대가 있었지요. 대학총학생회장단은 군대와 충돌을 걱정하며 ‘서울역 회군’을 결정합니다. 바로 경찰은 지도부를 잡아넣고, 민주화 열기는 꺾이는 듯싶었지만 광주에서는 지도부 없이 시민과 학생들이 모입니다.
공권력이 사라지고 배에 기름 낀 부자들이 떠나버린 광주, 시민들 손에 총과 위험한 무기들이 쥐어졌지만 오히려 더 평화로웠던 광주, 자기 목숨이 으스러질 수 있는 상황에서도 도청을 떠나지 않는 시민군, 시민군들의 입에 주먹밥을 넣어주던 아주머니들, 1980년 5월 광주의 풍경입니다.
바리케이트를 쳐버리고 외부와 고립시키는 국가 권력, 도청 앞 원형분수대 둘레에 빽빽하게 모여 집단 토론하는 시민들, 시민들을 지키라는 군인들에게 시민을 죽이라고 명령하는 국가 권력, 공수부대가 총을 들고 서 있는 앞에서 “너희들 물러가라, 꺼져라, 전두환 물러가라!”라며 죽음을 무릅쓰고서라도 기꺼이 잘못된 것에 맞서는 광주시민들, 그렇게 죽어간 광주시민들. 그래서 오늘날까지 살아있는 광주시민들…….
자기 ‘입과 항문’만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광주는 ‘이상한 나라’처럼 느껴지죠. 그렇기에 광주는 새로운 공동체와 다른 사회를 꿈꾸게 하며, 배는 부르지만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을 끊임없이 건드리죠. ‘불행한 오늘’을 탈출할 때, 또 다른 미래를 상상할 때, 광주는 ‘기적의 어제’이자 ‘미래의 고향’이 되어 주죠.
1980년 5월, 광주 시민들이 우리를 위해 흘린 피는 어떻게 되었나요?
이 시대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1980년 5월 광주는 묻습니다. 사람이란 무엇인가요? 어디에서 왔는가요? 왜 여기에 그런 모습으로 있나요? 그렇게 살고 있는 당신은 누구인가요? 탐욕을 본능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 광주는 묻습니다. 1980년 5월 광주 시민들이 서로를 위해 흘린 피는 어떻게 되는 거죠? 당신은 지금 행복한가요?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뀔 정도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광주를 가슴에 품고 비분강개하던 젊은이들도 이제 언제 잘릴지 몰라 가슴을 쓸어내리는 중년이 되었지요. 30년은 그렇게 한국이란 나라를 바꿔놓았지요. 80년 광주를 꺼내면 이제 그만하라고, 먹고 살기도 각박한데 왜 자꾸 ‘지난 사태’따위를 들추냐고 다른 나라에도 다 있는 일 아니냐며 쏘아붙이기도 합니다.
책 <만남>[돌베개. 2007]은 그런 분들에게 광주와 제대로 만나자고, 자기 삶을 돌아보자고, 말을 걸지요. 서승 선생님의 동생 ‘디아스포라 지식인’ 서경식 선생님과 ‘벌거벗은 철학자’ 김상봉 선생님이 나눈 이야기를 담은 이 책은 광주가 어떤 의미인지, 사람이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깊은 고민을 안겨주지요.
누구보다 그런 물음에 괴로워하며 몸으로 고민한 두 선생님들의 말씀은 석유난로가 되어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온기를, 처음 마음을 잃은 사람에게는 따끔한 열기를 전해주네요. 책을 한 장씩 넘길 때마다 자기 안에 웅크리고 있던 욕심들에 화들짝 놀라게 되네요. 두 선생님의 울음들이 책에 배어있어 딱딱했던 가슴은 어느새 먹먹해지죠.
오늘도 눈물을 흘리고 있는 ‘5월의 광주’가 있습니다. 5.18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민주주의가 위기라고 해요. 독재자가 다시 나타나서도 아니고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서도 아닌데도 말이죠. 오늘날 한국 사회가 이렇게 된 것은 민주주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죠. 그저 몇 년에 한번 투표를 하게 되었다고, 군대에 눈치 보지 않는다고, 나 혼자 배부르게 되었다고 민주주의 사회가 되었다는 착각이 한국 사회를 더 깊은 절망으로 밀어 넣은 거예요.
착하게 살아라,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대하라는 말들은 개인 둘레에만 맴돌 뿐 국가 차원에서는 전혀 시행되지 않지요. 그런 나라 안에서 사람들은 좋은 말들은 철마다 갈아입는 옷처럼 바꿔가면서 걸칠 뿐, 단 한 번도 자기 삶에서 실천하지는 않지요. 그렇기에 자기 생명귀한 줄 알지만 타인의 생명은 낮잡아보고, 고귀한 밥벌이와 게걸스런 식충이를 구분하지 못하지요.
일본에 침략당하여 고통스러웠던 한국이 자기 배를 채우고자 베트남과 이라크로 군대를 보냅니다. 다른 나라에 침략당하여 고통스러워하는 많은 나라들에는 침묵하면서 베트남이나 이라크에서는 와달라고 한 적 없건만 무기를 갖고 들어갑니다. 광주에서 무참히 죽은 사람들을 알면서 여전히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학살에 무관심한 한국입니다.
신, 독재자, 아버지, 이데올로기, 제국주의, 민족, 국가 등 온갖 굴레는 사라진 듯싶지만 더 세련된 모습으로 아직도 사람들을 옥죄고 있고, 여기에 황금이 더해지면서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고 있지요. 결국, 삶에 주인이 되는 일, 사람답게 사는 공동체는 ‘타자’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 오늘도 눈물을 흘리고 있는 ‘5월의 광주’가 있습니다. 5.18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