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쯔 파농의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 읽었다. 폭력에 대하여 라는 제목을 1장에서 부터 파농은 식민지 지배자들과 피식민자들 사이의 관계가 화해할 없는, 평화적으로 협상될 없는, 타협되지 못하는 antagonistisch 관계라고 천명한다. 식민지 지배체제 청산 Dekoloniaisation 세계의 질서를 바꾸는 일이며, 절대적인 변혁의 프로그램이다. 그것은 어떤 평화적 협정이나, 마술적인 해결로 이루어질 없다. 거기엔 필연적으로 폭력적 대결이, 식민지 체제가 유지되기 위해 이미 일상적으로, 구조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폭력을 절단시키는 폭력적 대립이 요구된다.  피식민자들이 식민지 세계를 문제시한다는 것은 어떤 관점들의 합리적인 대립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어떤 보편적인 것에 대한 논문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정립되어 있는 자신만을 야만적으로 주장하는 것이다.“ (Frantz Fanon. Die Verdammten dieser Erde, Shurkamp 1967, S.31) 파농에게는 이러한 절대적 대립에 맞서있는 존재들,자신의 땅에 식민지 지배자와 피식민자의 두개로 구분된 세계를 만들어내고, 피식민자들이 접근할 없던 쪽에서 살고있던 백인이자 외국인, 식민지 지배자들은 이런 의미에서의 타자“ (S.31) 다름 아니었다.




오늘날의 세계가 파농이 책을 썼던 1960년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왔는지, 그사이 얼마나 많은 것들이 변화했는지를 알기 위해선 단지 다음의 질문만을 던져보면 된다. 파농이 이야기하던 타자들은, 이들을 타자라고 지칭하던 이들은 오늘날 어디에 있는가? 백인 식민지 지배자들을 타자라고 부르며 그들과의 폭력을 불사한 타협할 없는 절대적 대립을 이야기하던 주체들은 오늘날엔, 동안 모은 돈을 브로커 비용으로 지불하면서. 정원이 훨씬 초과된 배에 목숨을 걸고 스페인 해안으로, 이탈리아의 섬으로, 유럽 연합의 국경으로 밀입국을 시도하는 난민들이 되었다. 그와 더불어 오늘날 타자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국경으로, 난민 수용소로, 자신들의 노동 시장으로 몰려드는 이들 과거 피식민지 자들을 바라보는 과거 식민지 지배자들의 후손유럽의 백인들이다.


파 농에게선 타협할 수 없는 폭력적 대결을 통해서 극복하고 해소시켜야 했던 자신과 타자의 관계는, 오늘날 레비나스에게서, 데리다에게서, 또 타자를 이야기하는 많은 유럽 지식인들에 의해선 해소될 수 없는, 아니 해소되어서는 안되는 자신 속의 '이질적인 것'으로 동일화의 폭력으로부터 우릴 견제해주는 하나의 윤리적 요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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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 7월 초 어느날 밤 다니엘 파울 슈레버는 믿기지 못할 만큼 강렬한 체험을 한다. 처음으로 후방의 신의 나라가 그 신(아리만, 오르무즈트)과 더불어 자신에게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눈을 부시게 할 만큼 압도적으로 화려한 빛이 하늘 전체를, 그의 증언에 의하면 6할에서 8할을 뒤덮고 있었고 이 현상은 며칠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그 다음날 오후 정기적으로 병원 정원을 산책할 때에도 슈레버는 하늘에서 품어져 나오는 이 압도적인 빛을 관찰할 수 있었다. 슈레버에 의하면 그 때 자기 옆에는 그를 담당하던 간병인 M만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하늘을 뒤덮고 있던 압도적인 빛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의 놀라움을 표현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왜 그랬을까? 하늘의 8할을 뒤덮고 며칠 동안이나 지속되었던 빛을 그가 다른 데 정신이 팔려있어 목격하지 못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간병인 M은 그에대해 왜 일언 반구의 놀라움도 표현하지 않았을까?


         슈레버의 이 의문은 지극히 정당한 것이다. 그건 자신의 했던 지각의 객관성에 대한 질문이며, 이는 이와 다른 방식으로는 제기될 수 없다. 우리 자신도 예를들어 어떤 보기드문 것을 보거나 듣게 되었을 때 가장 먼저 자기 주변의 다른 누군가도 그를 지각했는지를 확인할 것이다. 누군가가 내 곁에 있었고, 또 그 역시 나와 동일한 지각을 했다고 한다면 나의 지각은 최소한 객관성의 첫번째 지표를 확보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가 아무 것도 보거나 듣지 못했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혹시 그것이 나의 감각적 착각이었을까라고 의심해 볼 것이다. 하지만 감각적 착각은 나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옆에 있던 그가 다른 곳에 신경이 팔려 그를 지각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이 경우 우리는 다시 한번 자신이 했던 지각의 확실성에 대해  반성해 볼 수 있다. 이 재확인을 거치고 나서도 슈레버에게 있어 그가 했던 지각은 감각적 착각이나 환각이라고 의심할 수 없었다. 그건 그가 저 하늘의 빛을 꿈 속에서가 아니라 깨어있는 상태에서 목격했으며“, 그것도 밤이 아니라 정원에 있던 낮 동안에“, 심지어 며칠 동안이나 계속보았기 때문이다. 한 때 데카르트도 겪은 바 있던, 내가 보고 있다고 믿는 것이 꿈 속의 표상은 아닐까라는 의심을 자신이 깨어있는 상태였다는 자기의식을 통해 떨쳐버린 슈레버에겐 그 지각 체험의 강렬함과 지속성은 그것의 확실성, 나아가 객관성을 의심할 수 없게하는 근거가 되었다.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단 하나, 정상적인 경우라면 분명히 목격했음에 틀림없는이 하늘의 빛에 대해 아무런 놀라움도 표현하지 않는 간병인 M에게 무언가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슈레버는 이미 전부터도 간병인 M이 잠시 기적을 통해 살아있는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는 영혼이라고 의심 할 만한 많은 사례들을 접해왔었고, 이제 이 하늘의 빛 사건은 슈레버의 이런 믿음을 더 확증시켜 주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슈레버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하겠다.


나는 당시의 그가 실제 인간이 아니라 다만 일시적으로 응결된 인간이었다고 가정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간병인 M도 분명히 목격했음에 틀림없는, 거의 하늘의  6할에서 8할을 차지하는 그 빛에 의해 크게 눈이 부셨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의 놀라움을 표현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장에서:

 

당시 나는 M 그를 감지하지 못한 것에 대해 별로 놀라지 않았다. 왜냐면 나는 그가 다만 속의 Traumleben 살고있는, 따라서 사고하는 인간이라면 관심을 가질 밖에 없는 인상들에 대해 이해할 없는 일시적으로 응결된 인간이라고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극히 논리적 판단 과정을 거쳐 도달한 슈레버의 결론이 우리 정상인들의 판단과 어딘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건 슈레버에게서 가능한 세계의 범위가 우리의 것보다 훨씬 더 넓다는 것 뿐이다. 말하자면 우리의 일상적 판단이 의거하고 있는 가능세계에선 기적을 통해 사람의 모습으로 일시적으로 응결된 영혼 따위의 가능성이 제외되어 있는데 반해, 슈레버의 세계에선 소위 사실성이라는 논리에 의해 마련된 이러한 제한들이 없다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을 빌어 이야기하자면 슈레버는 우리 정상인들의 일상적인 생활이 따르고 있는 언어 게임의 규칙과는 다른, 그보다 훨씬 유연하고도 넓은 가능성을 제공하는 규칙을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슈레버는 그의 강렬하고 의심할 바 없는 체험에 근거해 당시 그가 머물던 라이프찌히 정신병원이 지구가 아닌 다른 천체에 홀로 떨어져 있고(원래 병원 옆에 있어야 할 기차역에서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이 피아노를 칠 때마다 영혼들이 그를 방해하고 있으며 (망치로 건반을 내려쳐도 끊어질리 없는 쇠로된 피아노 줄이 여러 번 끊겼기 때문에), 몇 밀리미터 크기의 작은 남자들이 그의 눈꺼풀을 임의로 끌어내리고 있다(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심지어 다른 사람들과 대화 중에도 눈이 감기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이다.


슈레버의 이러한 판단들은 우리가 그에게 어떤 다른 증거혹은 경험들을 지시함으로써 금방 교정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건 그의 가능세계 속에서 그의 지각과 지각에 의해 지탱되는 판단 혹은 믿음들이 서로 하나의 체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세계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지식들의 체계 - 비트겐슈타인은 이를 지식의 덩어리 ­Wissenskörper“라고 부른다 - 구조상 동일하다. 무엇인가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믿음을 지지해주는 다른 믿음들에 의해 지탱된다. 믿음을 지탱해주는 다른 지식 혹은 지식에 대한 믿음이 많으면 많을수록, 또한 믿음을 의심케 하는 근거가 적으면 적을수록 믿음에 대한 나의 확신은 더욱 커질 것이다. 그것이 과학적 사실이건, 종교적 혹은 음모 이론적 믿음이건, 아니면 남편 혹은 아내의 부정에 대한 의심이건 모든 의심 혹은 믿음의 구조는 특정한 믿음(혹은 의심) 믿음(혹은 의심) 지탱해주는 다른 믿음(혹은 의심) 체계들로 이루어져 있다. 남편 혹은 아내의 부정에 대한 의심은 그를통해 우리가 지각하는 모든 사소한 대상, 사건, 소문 등을 우리의 의심을 확증해주는 근거이자 증거로 해석하게 한다. 그러한 근거와 자료, 흔적과 소문, 자취들이 많으면 많을 수록 우리의 의심은 점점 강화될 것이며, 모든 근거들에 의해 강화되고 지탱된 우리의 의심은 좀처럼 사라지기 힘들 것이다. 이제 최초의 의심과 지각이 서로 서로를 강화하고 지탱해 주는 악마적 순환관계 Teufelskreis 생겨난 것이다.


슈레버가 <주목할 만한 정신병자의 기록>에서 진지하게 묘사하고 있는 그의 우주론적 망상체제는 이러한 점에서 외부를 향해 있는 창문 가지고 있지 않다. 물론 그는 책의 후기에서 이전에 자신이 내렸던 결론들이 감각적 착각이나 환각에 의거한 것일 있다는 가능성을 언급하지만, 동안의 체험을 통해 구축해 놓았던 그의 우주론적 믿음은 결코 의심하지 않는다. 자신을 편집증 환자라고, 그의 믿음을 병적 환상 뿐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믿음을 옹호하고 설득시키려는  거기엔 금치산 판정에 불복하는 법정 소송을 위해 그가 작성한 소송문 (우리는 슈레버가 판사였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포함된다. 그리고 그는 재판에서 이긴다!  - 슈레버의 시도는, 픽션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편의 진귀한 드라마를 제공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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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축복’이라고 번역되는 „Seligkeit“는 슈레버에겐 하늘 나라 신의 곁에 존재하면서 정화된 영혼이 도달하게 되는 일종의 세계 혹은 공간이기도 하고, 인간이 지상에서 사는 동안 윤리적으로 선한 행동을 함으로써 쌓게되는 ansammeln – 마치 카드 사용 실적에 따라 늘어나는 ‚포인트 점수’ 처럼! – 무형의 재산이기도 하며, 그를통해 누군가가 저 공간에 받아들여질 만큼 충분히 selig 하다고 판정받게 되는 등급이자, 그 등급을 받게 된 선한, 정화된 영혼이 처하게 되는 어떤 상태Zustand이기도 하다.

슈레버에 따르면 이 축복을 받게 된 영혼은 죽을 때까지 일을 해야 하는 인간과는 달리 ‚영원히’ 아무 노동도 할 필요없이 다만 „끊임없는 향유의 상태“에 자신을 내 맡기고 있다. – 여기서 슈레버가 말하는 영혼이 감지하는 ‚향유’의 성격이 무척이나 궁금해진다. 육체가 없는 영혼은 어떻게, 무엇(?)을 가지고, 무엇(!)을 향유하는 것일까! 육체없는 향유. 육체가 없기에, 육체에 의존되어 있지 않기에 그만큼 더 무한히 지속되고, 한계없이 강렬한 향유…

축복 상태에 있는 영혼이 처해있다는 이러한 향유에 덧붙여 영혼에게는 또 다른 적지않은 즐거움이 보장되어 있다. 그건 „지속되는 향유에 자신을 내어 맡기면서 동시에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과거를 회상“ 하는데서 나오는 즐거움이다. 슈레버에 의하면 축복 상태의 영혼은 자신이 인간이었던 과거 시절에 대한 기억을 지니고 그를 회상하면서 살아간다. 아무 일도 하지않는 무위의 편안함 속에서, 끊임없는 향유 속에서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고 있는 영혼은 이를통해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행복감’ 을 누린다는 것이다.

과거, 특히 자신이 겪었던 사랑의 설레임, 작은 성공, 즐거웠던 삶의 사건들을 기억하고 회상하는 일은, 그럴 조건과 환경만 마련된다면, 인간에게도 작은 행복감을 준다. 즐거웠던 과거 뿐만 아니라, 예를들어 고통스럽던 체험도 그에대한 기억, 회상 속에선 그것의 직접성을 상실하고 하나의 그림이 된다. 그래서 우린 예를들어 나무에서 떨어져 팔을 부러뜨렸던 끔찍한 체험을, 그때의 (육체적) 고통을 다시 느끼지 않으면서도 ‚기억’할 수 있다. 물론 우리에게는 그렇다 하더라도 결코 회상하고 기억하고 싶지않은 그런 과거들도 있다. 그걸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아니 내 바램과는 달리 그것이 떠올려지는 것 만으로도 소리를 지르고 싶을만큼 괴롭고, 고통스럽고, 창피스러운 과거가.

하지만 영혼들에겐 이런 과거조차 그만큼 고통스럽지 않게 회상하고 기억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어 있다. 그건 영혼이, 살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고통스럽고, 창피한 과거가 우릴 괴롭게 하는 것은 우리에게 현실원칙이 지배하는 세계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굳건히 움켜지고 살아가야 하는 삶의 시간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런 인간에게, 그가 저지른 과거의 실수, 잘못된 판단과 결정들은 그의 앞 날을 가로막는, 그래서 대개의 경우는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억압되어야 하는 것들이다. 하지만 자신의 과거를 변명하고, 숨기고, 억압하면서 구차하게 살.아.가.야. 할 의무로부터 방면된 영혼들은, 이미 그 자체로 과거가 현재의 삶 (영혼으로서의 삶!)에 드리우고 있는 깊은 그림자로부터 자유롭다. 과거의 삶에 의존되어 있지 않는, 불쑥 불쑥 예기치않게 회귀해오는 과거로부터 공격받을 현재의 삶을 가지고 있지 않은 영혼들은 그래서, 인간시절 자신의 과거를, 우리가 자신의 전생에 대해 이야기하듯, 떠올릴 수 있는 것이다.

이미 그것만으로도 우릴 숨막히게 하는 행복한 회상과 영원한 향유 속에서 살아가는 축복상태의 영혼에게 슈레버는 또 하나의, 사실상 이 모든 걸 가능케 하는 결정적 능력을 부여하는 걸 잊지 않는다. 그건 망각이다. 슈레버에 의하면 영혼들은 신의 광선 – 슈레버에게 이는 인간 신경과 동일한 성격과 구조를 갖는 신의 신경이다 – 을 매개로 아직 지구에 살고있는 그들의 가족, 친지, 친구들의 근황을 파악할 수 있다. (때로 영혼들은 자신의 지인들이 죽고 나서 자기가 있는 축복계로 끌어 올려지도록 „힘을 쓸 수도“ 있다. – 말하자면 천상 세계에서도 ‚연줄’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정당한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만일 아직 지상에서 살고있는 가족이나 친지 중 누군가가 불행한 처치에 놓이게 된다면 그를 보고있는 영혼들도 그에따라 불행해지지 않을까? 지상에 살고있는 지인들의 불행이 끊임없는 향유 속에서, 과거에 대해 회상하며 살아가는 천상에서의 영혼들의 행복을 훼손시키지 않을까? 이 질문에 대해 슈레버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지구에 살고있는 가족들이 불행한 처지에 놓여있다는 걸 알게되면 영혼의 행복감이 흐려질 것이라는 건 잘못된 생각이다. 왜냐하면 영혼은 과거 인간시절의 기억은 가지고 있을 수 있지만 영혼으로써 자신이 느끼는 새로운 인상들은 그만큼 오래 보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혼의 자연적 망각 natürliche Vergesslichkeit 을 통해 영혼에게 달갑지 않은 새로운 인상들은 곧바로 사라져 버린다.“

여기서 니체의 숨결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그 이전의 철학자들이 망각을, 모든 걸 파악하고be-greifen, 장악해 er-greifen해 개념 Begriff 으로써 자신 속에 보전하고 있어야 할 정신의 능력이 허약해지고, 결핍됨으로써 생겨나는, 그래서 더 이상 자신이 본 것을, 자신이 읽은 것을, 자신이 이해하고 깨달은 것을 자신 속에 지니고 있지 못하는 어떤 무능력 vis inertiae 으로 이해했던 데 반해, 처음으로 이 망각을, 아무 것도 잊어버릴 수 없어 벌벌떠는 정신의 불안함과 한 번 일어난 과거의 일들을 수백번, 수천번 아니 영원히 반복해도 좋다고 긍정하지 못하는 정신의 소심함을 극복할 수 있게 해주는 능동적 힘이라고, 그래서 망각이 없다면 „행복도, 쾌활함도, 희망도, 자랑스러움도, 현재도 존재할 수 없다inwiefern es kein Glück, keine Heiterkeit, keine Hoffnung, keinen Stolz, keine Gegenwart geben könnte ohne Vergeßlichkeit“ ( Zur Genealogie der Moral) 고 이야기했던 니체를.

슈레버가 니체를 읽었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가 우리에게 남긴 유일한 책 <주목할만한 한 신경병 환자의 기록 Denkwürdigkeiten eines Nervenkranken>(1903)에도 칸트의 이름은 한 번 등장하지만 니체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하지만 당시 부르조아 계급이 갖추어야 할 모든 교양과 지식을 갖추고 있던, 피아노를 능숙하게 연주하고, 모국어인 독일어는 물론 영어, 이태리어, 불어, 희랍어를 읽을 수 있으며, 자신에게 말을 걸고, 질문을 퍼부어 그의 정신을 장악하려던 내부 목소리들에 대항해 괴테와 쉴러의 발라드, 바그너의 오페라를 암송할 수 있던 슈레버가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니체가 사망한 1900년 슈레버는 두번째 발병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었다)니체의 책을 한번쯤은 손에 들었을 것이라는 건, 그를통해 그것이 슈레버의 광대한 우주론적 망상체제를 수립하는데 한 몫 했을 것이라는건 개연적이다.

어쨋든 슈레버가 말하는 축복은, 자신에게 달갑지 않은 새로운 인상들은 자연적 망각을 통해 잊어 버리고, 달콤한 기억과 회상의 기쁨을 가져다 주는 과거 인간 시절의 기억들만 보존하는 이 기억과 망각 사이의 절묘한 조화 속에 존재한다. 자신의 <기록>을 집필하고 있던 슈레버는 스스로 이러한 ‚축복’ 속에 처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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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김남시님의 "프로이드와 독수리 "

감사합니다. 람혼님! 사실 이 글들을 이전에 써 놓고 블로그와 다른 카페에 실었던 것인데, 이번에야 알라딘에로 옮겨 놓습니다. 여기에 글을 올리는게 이런저런 기술적 문제로 어려움이 많아서, 예상보다 쉽지는 않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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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문학, 정신분석 프로이트 전집 14
프로이트 지음, 정장진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프로이드의 유명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대한 분석엔 레오나르도가 어린 시절 겪었던 작은 사건이 중심에 놓여있다. 프로이드가 레오나르도의 과학적 탐구욕의 근원이 그의 억압되었던 성적호기심에 놓여으며 어머니에 대한 특별한 관계를 통해 레오나르도의 동성애적 경향이 발전해 나왔음을 분석하는데 사건이 중심 모티브라는 사실은 글의 제목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어린시절의 기억이라는 것만 보아도 있다. 프로이드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레오나르도는 독수리(Geier) 비행에 관한 과학적 분석을 진행하다 말고 갑자기 아주 어린 시절에 있었던 기억을 기록하고 있는데  부분의 이탈라아어 원문은 다음과 같다.

„Questo scriver si distintamente del nibio par che sia mio destino, perché nella mia prima ricordatione della mia infantia e’ mi parea che, essendo io in culla, che un nibio venisse a me e mi aprissi la bocca colla sua coda e molte volte mi percuotesse con tal coda dentro alle labbra.”

프로이드는 이를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다. “아마도 내겐 이미 오래전에 내가 이렇게 철저하게 독수리에 집착하게 어떤 계기가 있었던 같다. 내가 아직 걷지도 못하던 아주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오르는데,  독수리 한마리가 내게 다가와 꼬리로 입을 열고는 꼬리로 여러번 입술을 쳐댔었다.” („Es scheint, dass es mir schon vorherbestimmt war, mich so gründlich mit dem Geier zu befassen, denn es kommt mir als eine ganzfrühe Erinnerung in den Sinn, als ich noch in der Wiege lag, ist ein Geier zu mir herabgekommen, hat mir den Mund mit seinem Schwanz geöffnet und viele Male mit diesem seinen Schwanz gegen meine Lippen gestoßen.“[1])

  진귀하고 별난 어린 시절의 체험, 정확히 말하면 대한 레오나르도의 어린시절에 대한 별난 기억으로부터 프로이드가 어떻게 레오나르도의 어린시절의 성적 체험을, 그로부터 생겨난 그의 성적 정체성과 그의 전체를 이끌었던 무의식적 경향을 이끌어낼 것인지는 프로이드를 아는 사람이라면 예상할 있는 바이다. 레오나르도의 환상은 당연히 성적환상이다. „레오나르도의 독수리 환상을 정신 분석가의 시선으로 살펴본다면 환상은 그렇게 낯선 것만은 아니다...꼬리(Schwanz), Coda 이탈리어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언어들에서도 가장 많이 알려진 남성 성기의 심볼이자 대체물이다.  레오나르도의 환상에 등장하는 상황, 독수리가 아이의 입을 열고는 꼬리로 속을 능숙하게 어루만졌다는 것은 펠리치오, 성기가 다른 사람 안으로 삽입되는 성행위의 표상과 일치한다....그리고 환상은 여성이나 성행위에 있어서 여성의 역할을 수행하는 수동적 동성애자의 꿈과 환상들과 유사하다.“[2]  실지로 독일어에서는 아직도 Schwanz 라는 단어는 페니스의 대체어로 가장 많이 쓰이고 있는데,  무의식의 분석을 언어에 대한 분석으로 열어놓은 장본인 프로이드가 점을 놓칠리 없다. 어쨋든 이로부터 프로이드는 레오나르도의 환상 뒤에는 어머니의 젖을 빠는 혹은 빨리는 행위에 대한 기억 Reminiszenz“ 숨겨져 있으며 어머니 대신 독수리가 대체물로 등장하고 있는 [3]이라고 말한다

이 환상에 대한 언어적 분석을 통해 독수리를 어머니와 연결시킨 프로이드는  나아가 이를 이후 그의 제자였던 C. G. Jung에 의해 더 발전되어 나갈 신화적 심층 심리학적으로 전개시키는데, 여기에서 고대 이집트 여신 Mut 이 등장한다. „고대 이집트의 신성한 그림 문자에서 어머니는 독수리 그림을 통해 표현되었다. 이집트 인들은 또한 어머니 신을 숭배했었는데, 그 신은 독수리 머리를 하고 있거나, 여러개 머리 중 최소 하나가 독수리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 여신의 이름은 „Mut“이라고 불렸다. Mutter (어머니) 와의 발음상의 유사성이 다만 우연적이기만 한 것일까?  독수리는 실제로 어머니와 관계맺고 있는 것이다.„[4] 

프로이드 스스로 무척이나 자랑스럽게 여겼던 레오나드로에 대한 이 분석은 이후 많은 그의 제자들에 의해 보충되고 확증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오늘날에도 프로이드의 레오나르도 분석을 이야기할 때면 빠질 수 없이 등장하는 1919년 재판본에 수록된 Oskar Pfister의 레오나르도의 그림 분석이다. 프로이드가 1919년에 추가한 각주를 통해 소개하고 있는 이 분석에 따르면, 레오나르도의 유명한 그림 성안나와 함께있는 성모자상에는 그가 분석했었던 독수리 환상이 그림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림 속에서 성모가 두르고 있는 치마가 만들어내는 그림 Verxierbild이 독수리 모양을 하고 있을 뿐 아니라 나아가 그 꼬리가 아기 예수의 입을 건드리고있다는 것이다. 레오나르도가 남긴 저 어린시절의 기억이 그대로 그림을 통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1969년 출간된 프로이드 Studienausgabe의 편집자는 이 널리 알려진 프로이드의 레오나르도 분석이 사실상 프로이드의 결정적 오역에 근거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건 레오나르도의 노트에 등장하는 새 이름 nibio’ (nibbio) 라는 이탈리아어 단어가 사실 독수리 Geier 가 아니라 Milan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어린 시절의 레오나르도에게 다가와 꼬리로 그의 입을 열고 입술을 문질러댔던 새는 독수리가 아니라 였다는 것이다.[5] 언뜻 보기에 별 차이가 없어 보이는 이 오역이 프로이드의 레오나르도 분석에 얼마나 결정적인 가를 이해하기 위해선 독수리 Geier와 매 Milan의 서로 다른 모습을 확인해 보아야 한다. 아래 사진에서 보듯 독수리 Geier가 상대적으로 긴 부리와 긴 목을 가지고 있다면, 짧은 목과 더 날카로운 부리를 가지고 있는 매 Milan 의 모습은 그와는 확연히 구분된다. 

  



 

 



 


 

 

 



 

 

 

 

 

 

 

 

프로이드가 독수리와 어머니 사이의 연관을 신화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언급했던 이집트 상형 문자의 역시 프로이드의 말처럼 독수리였다는 것도 그림의 목과 부리를 통해 확인 있다. 



이와 더불어 레오나르도의 그림 성안나와 함께 있는 성모자상 등장한다는 감추어져 있는 그림 역시 아니라 독수리임이 분명하다. 이것이 말해주는 것은 레오나르도의 환상에 등장하는 새가 어머니 의미하며 그것이 심층 심리학적으로 이집트 신화에 근거하고 있다는 프로이드의 분석이 붕괴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독수리 암컷이 수컷의 사정 없이도 수정하고 알을 낳는다는 전해내려오는 이야기를 아버지를 알지 못했던 레오나르도가 그의 어머니에 가졌던 에로틱한 관계와 연결시키고 그로부터 레오나르도의 나르시시즘적 동성애를 도출했던[6] 프로이드의 이론 역시 설득력을 잃게된다.      

도대체 이런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는 프로이드의 실수(?)는 어디서 기인한 것일까? 우리는 사람들의 사소한 실수들을 그냥 지나쳐보지 않았던 프로이드 자신의 이론을 프로이드에게 되돌려 볼 수 있을 것이다. <일상생활의 심리 병리학>에서 프로이드는 카페에서 신문을 보던 중 저질렀던 자신의 오독 Verlesen에 대해 전하고 있는데 그에 의하면, 그는 신문에 실린 사진의 원제목 "Eine Hochzeitsfeier an der Ostsee“ (오스트 해안에서의 결혼식) „Eine Hochzeitsfeier in der Odysee“(오디세이에서의 결혼식)으로 잘못 읽었다.[7] 프로이드는 이러한 오독의 원인이 글을 읽는 사람이...그가 관심을 가지고 있거나 동안 다루었던 것을 그가 읽는 텍스트 속에 투사해서 읽으려는 hineinliest 태도[8] 있다고 보았다. ‚독수리 집착하고 있었던 것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아니라 오히려 레오나르도의 글을 읽고 있었던 프로이드 자신이었지 않을까.  




[1] Sigmund Freud : Eine Kindheitserinnerung des Leonardo Da Vinci. Fischer, S.51.


[2] Sigmund Freud : Eine Kindheitserinnerung des Leonardo Da Vinci. Fischer, S.54.


[3] Sigmund Freud : Eine Kindheitserinnerung des Leonardo Da Vinci. Fischer, S.56.


[4] Sigmund Freud : Eine Kindheitserinnerung des Leonardo Da Vinci. Fischer, S.56-57.


[5] Editorische Vorbemerkung zu Eine Kindheitserinnerung des Leonardo da Vinci. Freud-Studienausgabe, Band X, 1969, S.89-90.


[6] Sigmund Freud : Eine Kindheitserinnerung des Leonardo Da Vinci. Fischer, S.69.


[7] S. Freud : Zur Psychopathologie des Alltagslebens : Über Vergessen, Versprechen, Vergreifen, Aberglaube und Irrtum, 1941 in Imago Publisching London, 1969 Fischer, S. 118.


[8] S. Freud : Zur Psychopathologie des Alltagslebens : Über Vergessen, Versprechen, Vergreifen, Aberglaube und Irrtum, 1941 in Imago Publisching London, 1969 Fischer, S. 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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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8-07-23 0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올리신 글들이 참 반갑습니다. 흥미롭게 잘 읽고 갑니다.^^

김남시 2008-07-24 0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람혼님! 사실 이 글들을 이전에 써 놓고 블로그와 다른 카페에 실었던 것인데, 이번에야 알라딘에로 옮겨 놓습니다. 여기에 글을 올리는게 이런저런 기술적 문제로 어려움이 많아서, 예상보다 쉽지는 않답니다.

letsbe 2024-07-11 1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빈치 분석에서 매를 독수리로 오독했다는 이야기는 익히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프로이트의 논리를 붕괴시키는 수준은 아니라고 봅니다. 프로이트의 해석이 다빈치라는 인물과 실제로 일치하느냐의 여부와는 상관없이-프로이트의 해석이 틀릴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정신분석으로 실제 인물의 파악하려면 더 많은 정보가 요구되기 때문이죠.-주어진 자료로 이끌어가는 논리전개에는 큰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프로이트 분석을 읽으셔서 아시겠지만, 독수리에 대한 해석을 하기 전에 프로이트는 너무나 멀리 떨어진 사항을 증거자료로 사용하려는 것이기에 포기하고 싶기도 하다는 취지의 말로 분석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즉, 그는 하나의 가능성으로서 다빈치의 독수리와 이집트 여신 뮤트를 연관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고대로부터 독수리는 암컷 밖에 없었던 것으로 생각되었고 공중에서 바람으로 임신한다는 전설이 있었으며, 중세 신학자들이 그것을 성모의 처녀 수태의 증거로 사용하기도 했었죠. 그것을 다빈치가 들었을 가능성이 있고, 그런 기억이 환상에서 독수리라는 새를 선택하게 한 것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라는 것이죠. 무의식적 환상을 만드는데 독수리가 재료로 사용되었던 유래를 가능성 차원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다빈치의 유아기 기억은 무의식적으로 만들어진 환상입니다. 다빈치가 의도적으로 독수리, 아니 매를 선택한 것은 아닙니다. 의도적 선택이었다면 프로이트는 다빈치의 특정 의도를 왜곡한 것이기에 큰 오류가 됩니다. 하지만 무의식적 의도는 꿈에서의 재료 선택처럼 하나의 경향은 가지지만 구체적 의도는 다중적입니다. 매를 선택한 구체적인 무의식적 이유는 프로이트가 실제로 대면해서 분석할 수 있는 다빈치가 아니기 때문에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극단적으로 추측해서 다빈치는 독수리에 대해 들었는데 거기에 억압이 작용해 매로 잘못 기억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의미를 얻을 수 있는 추측은 아니라고 봅니다.) 처음부터 틀릴 수도 있는 가능성이 큰 가정입니다. 중요한 것은 구체적 사실이 아니라 경향입니다. 독수리냐 매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새라는 점입니다. 이집트 신화를 안 끌어들여도 새가 성적 상징물임은 프로이트 해석에서는 바뀌지 않습니다. 그리고 꽁지로 입을 치는 행위에 대한 해석 역시 변하지 않습니다. 논리상의 중대한 오류란 그것이 범해졌을 때 그 논리가 무너지고 바뀌는 것을 말합니다.
프로이트가 틀릴 가능성이 있는 하나의 가정만을 가지고 즉, 독수리와 이집트 신화와의 관계 하나만을 가지고 다빈치 분석을 전개한 것은 아닙니다. 읽어보셔서 아시잖아요. 그렇지 않나요? (지금도 긴 댓글을 더 늘리고 싶지 않아서 되묻는 것입니다.) 인간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말 대로 프로이트가 자신의 해석에 유리하도록 오독했다는 지적은 옳습니다. 그리고 그의 분석이 맞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오독 하나가 다빈치 해석의 논리를 붕괴시킨다는 지적은 잘못입니다.(논리적 정합성은 문제가 없습니다. 논리적으로 정합하다와 진리이다라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이것은 역시 보고 싶은 대로 보는, 다시 말해 프로이트를 불편해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하는 지적은 아닐까요? 다빈치에 대한 프로이트의 해석은 애초에 다빈치에 대한 자료가 불명확하고 불충분하기 때문에 실제적 사실과 정확히 일치할 수는 없습니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하나의 시도와 가능성을 제시한 것입니다. 실험과 관찰을 주로 하는 과학에서도 수많은 가능성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옳은 가정도 많지만 틀린 가정은 더 많습니다. 그래서 반박으로 수정작업이 계속 이루어지고 있죠. 하지만 그 반박에는 정당한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결정적이라고 보기 힘든 오류를 가지고 반박의 재료로 삼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하니다. 물론, 프로이트가 너무 모든 것을 성적으로 해석한다고 말씀하신다면 그것에 대해서는 할말이 없습니다. 그것은 텍스트 자체의 논리와는 다른 문제니까요. 진리에 대한 확신은 믿음의 영역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개인적인 취향입니다. 아무튼,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