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림보 연극 일지
김한민 지음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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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민의 <카페림보 연극일지>를 보다. 김한민은 이 책 앞에서 <카페림보>에 대한 다섯 개의 창작물 (그림소설), 전시, 연극, 일지, 영상 을 다음과 같은 순서로 보기를 권한다. --> (전시-->연극) --> 일지 --> 영상. 그리고 나는, 작가가 권하고 있는 바로 그 순서대로 <카페림보>를 보았던, 그리 많지 않을 독자 중 하나다. 그렇게 보고 나니 테이크 아웃 드로잉에서 연극을 볼 때는 잘 이해되지 않던 장면들 그것은 여러 조건 때문에 생겨났다. 어떤 장면들에서는 배우들의 대사가 잘 전달되지 않았고, 어떤 소품, 예를들어 박새 같은 경우는 너무 작아, 현장에서는 그게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 , 연극일 지를 보면서 확실해졌다. 그래서 이 일지, <카페림보> 연극의 내용 자체를 이해하게 하는 지침서이면서도, 동시에 <카페림보> 연극 자체에서는 보여지지 않는, 그 연극의 발생적 상황들에 대한 극적 기록이다.

 

이렇게 말해놓고 보니 이 책이 그야말로 건조한 일지일 것이라고 짐작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은, 이미 독립적으로도 하나의 작품’ - 저자 김한민은 이 단어를 좋아하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이다. 그건 무엇보다 이 일지 속에서 작가 김한민이 차지하고 있는 기묘한 위치로 부터 나온다. 이 일지는, ‘카페림보의 원작자이자, 연극 카페림보의 기획자이자 그 연극이 만들어질 때까지의 1차적 관찰자이자 연루자인 김한민의 1인칭 시점으로 쓰여(그려)지지 않았다. 이 책에서 김한민은 다른 인물들 연극에 출연한 배우들, 연출자, 미술 담당자 과 마찬가지로 한 명의 또 다른 등장인물이다. 이 일지를 쓰는(그리는) 김한민은, 그자신 제작자이자 각색자로 참여한 연극을 준비하는 김한민을, 내부에서 동시에 외부에서 그리고 있다. 그를 통해 김한민은 복수화된다. 그로부터 자기 지시적인, autopoetic 한 구조가 생겨난다. 그것이 이 책의 독자를 빨아들이는 기막힌 미적효과를 발휘한다. 그런데, 사실 이런 미적 전략은 이 책 곳곳에 숨겨져 있다. 대표적인 것만 꼽자면 미술담당 검기의 요청에 의해 삭제된 페이지연극일지 도난사건이다. 이 일지를 읽는 독자는 이 일지가 다층적인 실재의 층위에 동시에 속해있음을 깨닫는다. 연극을 준비하는 과정 속에 김한민이 그리던 일지와 그가 도난당했다고 믿었던 일지, 그리고 다시 찾은 일지, 나아가 워크룸프레스에 의해 출판되어 우리 손에 도달한 일지는, 실재론적으로 보자면 서로 다른 층위에 있지만, 그를 읽는 독자에게 하나로 겹쳐진다. 이를 현실과 가상의 구분을 의도적으로 혼란시키는 어떤 종류의 문학적 전략이라고, 개념어를 써가며 분석할 생각은 없다. 다만, 이것이 이 책을 읽는데 혹은 보는데 엄청난 미적 즐거움을 주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는 것은 밝혀두어야 하겠다.

 

이런 점에서 김한민은 천상, 예술가다. 이 괴물같은 예술가는 현실에 대해 말하면서, 그 현실로부터 마술적인 거리를 취한다. 그로부터 그의 작품이 갖는, 기묘한 매력이, 독자를 현실의 여러 층위를 이동하게 한다. 이 일지의 마지막 장면, 그러니까 진행을 맡은 김한민이 바퀴벌레로 분장하고 연극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관객들을 향해 계단을 내려가는 장면은, 고릴락상상스튜디오가 제작한 전시연극 카페림보의 첫 장면과 이어져 있다. 이 일지를 보고, 인터넷에 올려있는 카페림보 전시연극 영상을 보면 그 순간 우리는 또 한번, 김한민이 의도한, 하지만 김한민 만이 의도하지 않은, “카페림보 연극일지전시연극 카페림보사이의 어떤 이행을 경험한다. 그리고는, ‘전시연극 카페림보를 더 잘, 더 많이 볼 수 있게 된다. 이렇게 해서 <카페림보>에 대한 다섯 개의 창작물 (그림소설), 전시, 연극, 일지, 영상 , 하나의 완결적인 구조를 갖고 서로 얽힌다. 김한민이, 괴물같은 예술가임을 보여주는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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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민의 <카페림보 연극일지>를 보다. 김한민은 이 책 앞에서 <카페림보>에 대한 다섯 개의 창작물 (그림소설), 전시, 연극, 일지, 영상 을 다음과 같은 순서로 보기를 권한다. --> (전시-->연극) --> 일지 --> 영상. 그리고 나는, 작가가 권하고 있는 바로 그 순서대로 <카페림보>를 보았던, 그리 많지 않을 독자 중 하나다. 그렇게 보고 나니 테이크 아웃 드로잉에서 연극을 볼 때는 잘 이해되지 않던 장면들 그것은 여러 조건 때문에 생겨났다. 어떤 장면들에서는 배우들의 대사가 잘 전달되지 않았고, 어떤 소품, 예를들어 박새 같은 경우는 너무 작아, 현장에서는 그게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 , 연극일 지를 보면서 확실해졌다. 그래서 이 일지, <카페림보> 연극의 내용 자체를 이해하게 하는 지침서이면서도, 동시에 <카페림보> 연극 자체에서는 보여지지 않는, 그 연극의 발생적 상황들에 대한 극적 기록이다.

 

이렇게 말해놓고 보니 이 책이 그야말로 건조한 일지일 것이라고 짐작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은, 이미 독립적으로도 하나의 작품’ - 저자 김한민은 이 단어를 좋아하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이다. 그건 무엇보다 이 일지 속에서 작가 김한민이 차지하고 있는 기묘한 위치로 부터 나온다. 이 일지는, ‘카페림보의 원작자이자, 연극 카페림보의 기획자이자 그 연극이 만들어질 때까지의 1차적 관찰자이자 연루자인 김한민의 1인칭 시점으로 쓰여(그려)지지 않았다. 이 책에서 김한민은 다른 인물들 연극에 출연한 배우들, 연출자, 미술 담당자 과 마찬가지로 한 명의 또 다른 등장인물이다. 이 일지를 쓰는(그리는) 김한민은, 그자신 제작자이자 각색자로 참여한 연극을 준비하는 김한민을, 내부에서 동시에 외부에서 그리고 있다. 그를 통해 김한민은 복수화된다. 그로부터 자기 지시적인, autopoetic 한 구조가 생겨난다. 그것이 이 책의 독자를 빨아들이는 기막힌 미적효과를 발휘한다. 그런데, 사실 이런 미적 전략은 이 책 곳곳에 숨겨져 있다. 대표적인 것만 꼽자면 미술담당 검기의 요청에 의해 삭제된 페이지연극일지 도난사건이다. 이 일지를 읽는 독자는 이 일지가 다층적인 실재의 층위에 동시에 속해있음을 깨닫는다. 연극을 준비하는 과정 속에 김한민이 그리던 일지와 그가 도난당했다고 믿었던 일지, 그리고 다시 찾은 일지, 나아가 워크룸프레스에 의해 출판되어 우리 손에 도달한 일지는, 실재론적으로 보자면 서로 다른 층위에 있지만, 그를 읽는 독자에게 하나로 겹쳐진다. 이를 현실과 가상의 구분을 의도적으로 혼란시키는 어떤 종류의 문학적 전략이라고, 개념어를 써가며 분석할 생각은 없다. 다만, 이것이 이 책을 읽는데 혹은 보는데 엄청난 미적 즐거움을 주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는 것은 밝혀두어야 하겠다.

 

이런 점에서 김한민은 천상, 예술가다. 이 괴물같은 예술가는 현실에 대해 말하면서, 그 현실로부터 마술적인 거리를 취한다. 그로부터 그의 작품이 갖는, 기묘한 매력이, 독자를 현실의 여러 층위를 이동하게 한다. 이 일지의 마지막 장면, 그러니까 진행을 맡은 김한민이 바퀴벌레로 분장하고 연극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관객들을 향해 계단을 내려가는 장면은, 고릴락상상스튜디오가 제작한 전시연극 카페림보의 첫 장면과 이어져 있다. 이 일지를 보고, 인터넷에 올려있는 카페림보 전시연극 영상을 보면 그 순간 우리는 또 한번, 김한민이 의도한, 하지만 김한민 만이 의도하지 않은, “카페림보 연극일지전시연극 카페림보사이의 어떤 이행을 경험한다. 그리고는, ‘전시연극 카페림보를 더 잘, 더 많이 볼 수 있게 된다. 이렇게 해서 <카페림보>에 대한 다섯 개의 창작물 (그림소설), 전시, 연극, 일지, 영상 , 하나의 완결적인 구조를 갖고 서로 얽힌다. 김한민이, 괴물같은 예술가임을 보여주는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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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미주의 선언 - 좋은 삶은 어떻게 가능한가?
문광훈 지음 / 김영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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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미주의`라는 이름의 자기계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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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매체철학 -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철학의 정원 12
심혜련 지음 / 그린비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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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이론가들을 소개하고 있다는 미덕을 지니고 있지만, 매체에 대한 사유에 있어 중요할 수 있는 몇몇 이론적 쟁점들에 대해서는 오해나 오독의 여지가 많은 책이다.  

일단 눈에 뜨인 두가지만 이야기해보자.

 

저자는 벤야민이 말하는 촉각적 수용을 '시각적 촉각성'으로 제한시킨다. 

 

엄격히 말해서 벤야민이 말하는 촉각성이란, 시각적 촉각성을 의미한다. 그는 새로운 형태의 예술작품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어떤 대상을 시각적으로 지각하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마치 촉각성과 유사한 지각의 체험을 준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67면)

 

하지만 이러한 이해는, 집합체의 신체의 신경감응 수단으로서 제2기술의 잠재성을, 벤야민이 사진, 영화와 같은 기술 매체들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혁명적 잠재성'을 '시각'으로 환원시켜 버리는, 잘못된 이해이다. 오히려 벤야민은 촉각적 수용을 분명히 '시각'과 대비시키고 있다.  

 

 

 

 

역사의 전환기에 인간의 지각기관에 부과되는 과제는 단순히 시각, 다시 말해 관조를 통해서는 전혀 해결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한 과제는 촉각적 수용의 지도에 따라,

익숙해짐을 통해 극복될 것이다"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최성만 역, 발터 벤야민 선집 2, 91면. 번역 일부수정) 

 

 

 

 

 

이러한 방식의 오독은, 프리드리히 키틀러의 논의를 소개하는 대목에서도 발견된다. 저자는 키틀러에게서 축음기, 영화, 타자기가 인간의 두뇌가 기억하던 것들을 대신 기억하는 매체로 이해되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과거를 망각하지 않기 위해서 기억하고 기록한다. 기록이 기억을 대신하고, 또 기록을 위해 매체가 사용되는 한, 매체와 기억은 긴밀한 관계를 맺게된다. 기록(기록매체)와 기억, 그리고 의식적 기록과 그 뒷면에 존재하는 무의식적 기록(무의식)의 상관관계, 바로 이것이 프리드리히 키틀러가 특히 주목하는 매체철학적 주제다...그가 주로 분석하는 매체는 축음기, 영화 그리고 타자기다. 이 세 개의 아날로그 매체들은 각기 기록하는 내용과 지각방식이 다르다. 축음기는 청각적 지각내용을, 영화는 시각적 지각내용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타자기는 사유의 내용을 기록한다. 그는 이 세 개의 기록매체들이 인간의 두뇌 대신 기억들을 저장하는 방식에 주목해서 분석한다." (153-154면)

 

키틀러의 매체이론이, 축음기, 영화, 타자기가 "인간의 두되대신 기억들을 저장하는 방식"에 대한 분석이라면, 사실 그의 매체론은 그 이전 다른 매체이론과 크게 다를바 없게된다. 키틀러 매체이론의 특징은, 기억 혹은 기록해야 할 '내용'이 선재하고, 그것을 어떤 매체 - 인간 두뇌? 축음기? 타자기 등 - 가 기록/기억하는가라는, 매체 이론의 패러다임 자체를 넘어서 있다. Claude Shannon 의 정보이론에서 출발하는 키틀러에게 우리가 듣고, 보는 모든 것들은 감각적 데이터 흐름이며, 그것은 특정한 채널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다. 각각의 채널은 감각 데이터흐름을 서로 다르게 필터링하며, 그를 통해 의미있는 정보와  노이지를 구분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기억의 문제가 아니라 정보 전달의 문제인 것이다.

 

 

 

 

 

 

 

 "인간의 두뇌 대신 기억들을 저장하는 방식에 주목해서 분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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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섬
김한민 지음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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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저자가 만든 <책 섬>은 책으로 만들어진 섬이면서, 책을 만드는 섬이자, 책을 만드는 재료이면서 동시에 그 섬으로 가는 책이기도 하다. 그 섬에서는 힘들고 오래 걸리는 삽질’ - “파는 게 반이야, 책은” - 과 단어들의 조립을 통해 시를 붙잡을 수 있는 문장을 만든다. 책 섬에서 책을 만드는 그는 시인이다. 동시에 그림을 그리는 ()화가이다. 나는 그에게 묻는다. “시가 뭔데요?” 그러면 그가 말한다. “시는 단어로 된 함정이야. 문장으로 꼬은 올무. 볼래? ! 행 하나만 망가져도 바로 도망가지. 하지만 고도의 집중력과 산만력을 발휘하면 정교한 함정을 설치할 수 있어. 보여? 이렇게. 단 한 개의 문장으로도 포획할 수 있고 수십개의 문단으로도 놓칠 수 있어.” ! 무언인가가 보여? 내가 여기 인용할 수 있는 건 그의 문자 뿐이다. 그를 인용하려면 난 그릴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그의 책을 인용할 수 없다. 그의 책은 그가 이야기하는 숙련공들의 게임원리를 충실히 구현하고 있다. “문장하나 이미지 하나 문장 둘 이미지 셋, 그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고 이미지의 띠를 잇고, 문자, 그림, 그림, 문자...” 그의 문자와, 그의 이미지는 핑퐁을 치듯 서로 관계를 맺는다. 그림이 받아주지 않으면 문자가 쳐낸 공은 허공으로 날아가 버린다. 그 때문에 김한민은 결국 나 혼자 이쪽갔다, 저쪽갔다 북치고, 장구치면서 문자와 이미지가 쳐 넘긴 공을 다 받아낸다. 그에게 기록한다는 건’, 쓰는 것이면서 또 그리는 것이다. 쓰기의 근원을 이루던 쓰기와 그리기는 그렇게 결합되어 있다. “문자와 이미지로 짬뽕된우리의 뇌에 새겨지는 건, 글자들만이 아니다. 그래서 이라는 단어로 그의 책을 지칭해 말하는 건 너무 적거나 너무 크다.

책 섬에서 만들어진 책은 두루마리처럼 말려져 있다. 문장 속으로 들어갈 만큼 작아진 저자가 거기 새겨 놓는 건, 아직 펼쳐져 있지 않다. 그 책을 탄 아이가 뭍에 도달한 후에도. 그렇게 저자는 자신이 만들었지만 자신의 것이 아닌 - “책은 만든 사람 게 아니니까” -‘ 갓 지어놓은 책을 떨구어 놓았다. 그건 미끼일까? ’책이 쇠락하는 시대‘, 책을 좋아하기 보다는 책속에서 처방을 찾기를 좋아하는 시대지만, 입질을 할 독자를 기다리는? 난 미끼를 물고, 덮여있는 그의 책을 펼쳐 타고는 그의 섬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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