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망각 - 문학과 문화학의 교차점
최문규 외 지음 / 책세상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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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의 첫문장에서 지적하고 있듯 1990년대 중반부터 소위 '문화학적 전환'이라는 새로운 학문적 경향들은 기존의 인문학들의 내용과 방법론, 나아가 그 체계와 편제에 이르기까지 심각하게 다시 반성하게 했다. 그 과정 속에서 태어난 '문화학'이란 학문은 그로인해 아직까지도 한편으로는 기존의 다른 인문학들과 미묘한 긴장관계를 가지고 있다.  한편으로는 기존 인문학들의 구태의연한 관념론적 방법론들을 비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미 7,80년대 이후 광범위하게 모든 인문학들에 받아들여졌던 구조주의적, 지식 고고학적, 미시적, 비판이론적 방법론들을 자신의 방법론으로 수용하고 있는 문화학이 과연 어떤 점에서 독자적인 학문적 지위를 요구할 수 있는지 많은 사람들에 의해 문제시되어왔던 것이다. 다른한편, 기존의 인문학들의 입장에서는 소위 '인문학의 위기'라는 담론 속에서 등장한 이러한 '문화학'이 사실상, 사회의 상품과 자본논리에 따라 대학내의 학문들이 재편성되는 소위 '인문학 죽이기'의 대표주자로 받아들여지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새로이 등장한 문화학의 문제의식과 그것과 기존의 문예학, 작게는 문학과의 관계, 나아갈 방향등을 고민하고 있는 이 책은, 그만큼 변화하는 세계와 학문의 문제의식을 한국의 상황 속에서 받아들이고 있는 선진학자들의 역량을 짐작하게 해 주는 척도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 책, 구체적으로 여기에 실린 '최문규'의 글을 읽고 든 느낌은, 그가 문화학과 문화학적 문제의식을 통해 생겨난 문학, 문예학 내부의 위기의식을, 문화학의 등장을 통해 분명해진 변화된 학문적 조건들을 적극적으로 문예학적 내부에 수용함으로써 돌파하려고 한다기 보다는, 저 문화학을, 한국 사회의 특수한 조건일 뿐인, '인문학 죽이기'의 전범으로 보고, 그를 아직 '정리되어 있지 않고, 방향과 방법도 없으며, 자기 모순적인 학문'으로 폄하함으로써 회피하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경향은 우선, 그가 자신의 글에서 인용하고 있는 뵈메의 글 (본 책 46 쪽)이 그 번역상의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 "Man wird zwischen produktiven Dilettantismus und Expertenwissen hin und her geworfen, man findet keinen festen Boden, man vermisst Perspektive und Orientierung" 을 그는 "문화학은 생산적인 아마추어리듬과 전문적 지식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면서 어떤 확고한 토대도 찾지 못하고 관점이나 방향성도 없다"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이는 원문의 주어인 Man을 '문화학'이라고 '오역'함으로써 현재 문화학이 처한 문제가 마치 '문화학' 자체의 구조적 문제인 것 처럼 이해되게 한다.  -  그를 원문의 맥락과는 동떨어지게 인용함으로써 엉뚱하게 이해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경향은 그 이후의 문장 "실제로 문화학, 문화연구, 문화비평이라는 이름으로 생산되고 있는 다양한 글들을 살펴보면,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입증보다는 자의적인 사유나 주관적 상상력에 의존하고 있으며, 글쓰기 방식도 다분히 주관적인 어조와 문체를 띠고 있음을 알수 있다" (47 쪽) 에서는,  그가 '오해'한 문화학과 현재 한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새로운 글쓰기의 실험들을 동일시  한채 다잡아 비판하고 있다. 이를통해 그의 글은 현재 한국에서 인기를 얻고있는, "'푸코, 부르디외' 등의 개념을 "구체화한다고 하면서, 대부분...표피적이고 감성적인 자신의 고유한 수사에 도취된 분석에 그치는"는 글들이 마치 유럽에선 이미 학과로서 존재하고 있는  '문화학'의 내적 구조로부터 나온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서술방식은  안그래도,  문화학을, 기존의 인문학들에 "무슨 무슨 문화학"이란 접미사만 붙임으로써, 인문학을 대학의 상품화의 과정에서 교양수업만을 제공하는 '서비스 학과'로 전락시키고 있는 한국 대학들의 상황 속에서는 더더욱 '문화학'에 대한 오해와 무지에 근거한 반발을 불러일으킬 소지가 많다.

그러나 이 책이 지닌 이러한 문제점들과 오해의 소지에 유의한다면, 이 책은  아직 한국에 아직 잘 소개되지 않았던 매체로서의 '문자'에 대한 논의를 호메로스를 매개로 설명한 고규진의 글이나,  "기억과 망각"이라는 주요한 테마를 민요나 드라마, 나아가 한국사의 문제들 - 정신대 할머니, 일제시대 등 - 과 연결시켜 고민하고자 한 다른 저자들의 참신한 시도들을 통해 넓은 의미에서의 '문화학적 테마'의 새로운 가능성들에 대해 제시해 주고 있다.    

 최문규의 글 중에서 발견한 또 하나의 오역에 대해.

37쪽 주에서 발터 벤야민의 파사지 베르크를 인용하고 있는 대목에서, "상부계급이 하부계급에 다시 영향을 끼침으로써 다음과 같은 점이 입증된다."는 문장은 "Indem er Ueberbau auf den Unterbau zurueckwirkt, ergibt sich"를 번(오)역한 것이다. 곧, "상부계급"과  "하부계급"이 아니라 소위 "상부구조"와 "하부구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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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tiple 2009-09-28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흥미로운 서평이 많네요.
그런데 최문규의 뵈메 번역은 딱히 오역이라고 하기는 어렵게 보이는군요. 뵈메의 문장은 '우리가 현재 문화학의 글들을 읽게 되면 이런 저런 문제점을 발견하게 된다'는 뜻인데, 이를 '현재의 문화학은 이런 저런 문제점을 보인다'로 번역해도 의미가 변하지는 않으니까요. 여기서 '우리'가 어떤 특수한 독자를 일컫는 것이 아닌, 일반적 독자, 즉 man을 말하는 것이라면 말입니다.
 
변신. 유형지에서 (외)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19
프란츠 카프카 지음, 박환덕 옮김 / 범우사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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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변신'의 그레고리 잠자는 어느날 아침 자신이 거대한 한마리 흉칙한 벌레로 변신해 있는 걸 발견한다. 도대체, ,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기에 라는 윤리적 질문을 던지기 전에 그는 출근하지 못해 회사에서 쫓겨나 돈을 벌지 못한다면 자신 가족에게 닥칠 어려움과 곤란을 걱정하기 시작한다. 그리이스 비극의 주인공이라면 먼저 자신을 이렇게 만든 신을 향해 운명을 한탄하는 울분을 터뜨리곤, 과연 자신의 어떤 행동이, 어떤 말이, 혹은 어떤 보이지 않던 운명이 신을 분노케 했는지 신탁을 구하기 시작할 것이다. 영문도 모른 채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혼인한 오디프스가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듯 그렇게 그리이스 비극의 주인공들은 저 운명적 사태를 '비극적으로' 맞이했을 것이다.

      그리이스 인들에게 삶의 비극은 전적으로 자신의 운명과 순수하게 부닥친다. 그건 죽음이라는 결말로 치닫고, 관객들은 저 어쩔수 없는 삶의 운명 앞에서 카타르시스의 눈물을 흘린다. 카프카의 주인공들은 다가온 운명의 무게를 진지하 장중하게만 받아 들이기에는 너무나 할일이 많고,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은 고달픈 삶의 주인공들이다. 그레고리는 영문을 알 수 없는 자신의 변신으로 인해 자신의 운명보다는 가족들이 받게 될 어려움과 고통을 먼저 생각한다. 그에겐 자신의 변신을 탓하거나 그에게 울분을 터뜨릴 신들도, 혹은 뼈저리는 후회의 눈물을 흘릴만한 신들의 노여움을 산 과거의 행동도 없다.

카프카가 그려내는 세상엔 그리이스 비극에서처럼 언제나 분명한 원인도, 운명을 바꿀만한 운명적 사건도, 그 모두의 배후에서 인간사를 바라보고 있는 신들도 없다. 카프카의 세계, 그리고 결국 우리가 사는 이 세계엔 다만, 아침에 일어나 출근해 처리해야 할 일들과, 그를 하지 않았을 때 우리에게 닥쳐올 실직의 위험, 그리고 나의 실직이 내 가족들에게 가져다 줄 삶의 곤궁들만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을 뿐이다. 어느날 아침 거대한 벌레로 변해버린 사건을 '비극적 운명'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이유는 하릴없는 신들의 분노 때문이 아니라, 그로 인해 팍팍하게 살아가야 할 인간 세계 속에서 너무 많은 것들을 잃어버려 우릴 힘들게 하기 때문이다. 신들의 분노 혹은 장난, 영웅의 고양된 의지와 숭고한 행위들이 사라지고 없는 카프카의 세계엔 다만 갑작스럽게 들이닥쳐 – <심판>에서의 판결문, <변신>에서의 변신, <>에서의 명령 등 - , 우리의 주인공들을 출구가 보이지 않는 삶의 진탕에서 허우적 거리게 만드는 사건들일 뿐이다.

형이상학적 운명세속적 사건으로 변하게 된 데에 카프카가 날카롭게 그려내는 현대적 삶의 본질이 존재한다. 이제 그 누구도 자신에게 닥쳐오는 일들을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건 다만 재수가 없어, 운이 나빠서 내게 떨어진 사건이다. ‚운명은 그에 대해 신에게 울분을 터뜨리거나 호소할 수 있는 반면, ‚사건은 어떻게든 우리 자신의 힘으로 헤쳐 나가야만 한다. 우린 다만, 이젠 신과 인간을 중개해주는 역할을 오래 전에 상실해버린 세속적 점장이들에게 그들은 심지어 로또 번호를 맞춰 주기도 한다! – 조언을 구해 심리적 명분을 얻을 수 있을 뿐이다.

우릴 괴롭히고, 방해하며, 귀찮게 하는 인간들 쌍둥이 형제“! – 말고, 위험에 빠질 때마다 오딧세이에게 나타나 도움을 주는 여신과 같은 그 어떤 믿음직한 신적 조력자도 갖지 못하는 카프카의 주인공들은 결국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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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 이데아총서 9
발터 벤야민 지음 / 민음사 / 199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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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독자가 지적했던 이 책의 오역은 이 책과 독일어 본을 대조하며 읽어갈 수록 심각한 수준으로 발견된다.  "기술 복제시대의 예술 작품"의 번역문에 등장하는 오역 만을 간략히 지적하고자 한다. 발터 벤야민의 유명한 개념 '아우라'가 등장하는 이 글은 그의 다른 어느 글보다도 가장 많이 읽히고 인용되는 글이다. 이 글의 유일한 한국어 번역이 실려있는 반성완의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은 어쩌면 바로 이 글 때문에 지금까지 계속 팔리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글에 대한 반성완의 번역은 많은 문제를 지니고 있다. 소극적으로 그의 번역은 그 어느 다른 글보다 분명하고 뚜렷한 논점을 지닌 벤야민의 이 글을 해독 불가능한 추상적 해설문으로 바꾸었을 뿐 아니라, 나아가 벤야민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오역들로 점철되어 있다.

이 번역문 1장에만도 심각한 수준의 오역들이 튀어나온다. 가장 심각한 오역은 Graphik을 '판화'라고 번역한 것이다. 여기서 '그래픽'이란 어떤 특정한 매체를 통해서 그려진 그림이 아니라, 대상을 그림을 통해 묘사하는 그림 일반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를 '판화'라는 도대체 어디서 연유했는지 모를 번역어로 대치하다 보니 „목각이 등장함으로써 비로소 처음으로 판화가 기술적으로 복제가능하게 되었다.“ 와 같은 이해하기 힘든 번역 문장이 생겨났다. 도대체 '판화가 기술적으로 복제'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판화를 찍어내게 하는 원판(나무 혹은 동판 등)이 기술적으로 복제된다는 것인가?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목각을 통해 판화 원판이 기술적으로 복제된다? 아니면, 원판을 통해 종이위에 찍어낸 '판화'가 기술적으로 복제된다는 말인가? 원래 판화는 원판에 대고 여러번 찍어낼 수 있는 매체 아닌가? 그렇다면 도대체 목각에 의해 비로소 판화가 기술적으로 복제가능하게 되었다는 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벤야민의 이 번역문 앞에서 머리를 썩혔을 독자들은 벤야민이 아닌 번역자에게 분노할 일이다. 이는 독자들에게 불필요한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게 하는 명백히 잘못된 번역이기 때문이다.

„석판 인쇄술을 통해 판화는 일상생활을 그림을 통해 담을 수가 있게 된 것이다.“라는 번역문도 이상하긴 마찬가지다. 석판 인쇄술이 발명되기 이전엔 그렇다면 판화가 일상을 그림을 통해 담을 수 없었단 말인가! „이때부터 판화는 인쇄술과 보조를 같이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판화술은 석판인쇄의 발명이 있고 난 후 수십년이 채 지나지도 않아서 사진술에 의해 다시 뒤처지게 되었다.“라는 번역문도 독자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오역 중의 하나다. 도대체 판화가 인쇄술과 보조를 같이한다는 것이 무슨말인가? 더구나 판화술이 사진술에 의해 뒤처지다니? 사진의 발명이 위기에 빠뜨린 것은 번역자가 고집부리듯 '판화술'이 아니라, 이전까지 다양한 매체에 의해 이루어져 오던 세계에 대한 시각적 모방 곧, '그래픽'들이었다.

„마치 석판인쇄 속에 그림이 그려져 있는 신문이 시각적으로 몰래 숨겨져 있던 것처럼 사진 속에는 유성필름이 숨겨져있다.“는 번역문에서 '시각적으로'는 독일어 문장의 virtuell을 번역 (오역)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신문이 시각적으로 몰래 숨겨져 있다“는 식의 우스꽝스러운, 도대체 무슨말인지 모를 혼란스러운 번역문이 탄생했다. virtuell은 우리가 '가상현실' 이라고 말할 때의 그 단어 곧, 가상적이고 잠재적이라는 의미의 단어이다. 석판인쇄가 그림과 화보가 있는 신문을 가능케 했다는 말을 벤야민은 석판인쇄 속에 잠재적으로 그림있는 신문이 숨어있다고 표현한 것이다.

폴 발레리의 인용문 중 „우리는 조그만 동작 하나로 하나의 이미지가 나타났다가는 곧 또다시 사라져 버리는 그런 영상이나 소리를 갖게 될 것이다.“는 번역문 역시 우릴 혼란스럽게 하긴 마찬가지다. 번역자는 자신이 이해하지 못한 원문의 문장을 상상력을 동원하여 매우 '시적으로' 가공함으로써 위와같은 문장 아닌 문장이 탄생하였다.  이는 " 우리는 작은 손가락 움직임, 거의 하나의 신호만으로 생겨났다가 그렇게 다시 사라지는 영상 혹은 소리를 가지게 될 것이다."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이 책이 가지고 있는 번역 상의 문제들은 이 책의 다른 글에서도 드러난다. 그리고 이 오역들은 벤야민에 접근하려는 많은 한국의 독자들의 불필요한 노력과 에너지를 소모하게 한다. 이 번역문의 이해되지 않는 문장들 앞에서 좌절한 독자들은, 번역자가 해설에서 말하고 있듯 이것이 벤야민이 사용하고 있는 '설명적, 논증적 범주로는 좀처럼 붙잡기 힘든 이미지의 언어' 때문이라고만 믿고 벤야민에로의 접근을 포기해 버릴지도 모른다.

유일하게, 얼마되지 않는 벤야민의 번역서로써 이 책이 어서빨리 개정되어 나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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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의한 식민지와 외재적이고 강제적인 근대화의 과정을 통해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기억을 잃어버렸다. 자신이 살던 집들은 정체불명의 양철지붕으로 대체되어야 했으며, 어린 시절을 뛰놀던 거리와 마을은 근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도로로, 공장부지로 사라져버리는 운명을 맞았다. 장터는 시장으로 바뀌고, 학교 건물은 일시에 일본 식의 조잡한 군대식 건물로 변해버리는 이러한 과정 속에서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시켜 줄 기억의 물질적 대상들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 현재 한국의 오십, 육십 대 세대들이 체험해야 했던 이러한 역사적 경험은 이후 한국 사회의 특징적 문화를 낳는 원인이 되었다. 그 중 하나가 혈연과 지연을 강조하는 지역주의이다.    

더 이상 남아있지 않은 물질적 대상들로 인해 그에대한 기억을 갖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제 그를 기억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 집착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자신의 기억을 통해 스스로의 정체성을 보장해 줄 물질적 대상들을 상실한 사람들은, 이제 그 물질적 환경에 대한 기억을 갖고있는 사람들과 스스로를 결속시킴으로써 상실의 위기에 처한, 혼란에 빠진 자신들의 정체성을 구원하고자 했다. 근대화의 1세대인 우리 아버지 세대가 겪은 정체성의 혼란은 그들로 하여금 공통의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그룹들, 곧 학연, 지연, 지역적 공동체 주의와의 결속을 강화시켰다. 그들은 같은 학교를 다녔거나, 같은 동네나 지역 출신이라는 명목으로, 곧 지금은 변해버리고 사라졌지만 공동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인해, 개인들의 혼란스런 정체성을 보장해주는 유일한 대안으로 나서게 되었다.  

한 사회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집합적 기억은 다른한편 정치적, 이데올로기적으로 구성되기도 한다. 한국의 집합적 기억은 오랜 동안의 반공주의와 정치적 억압에 의해 심각하게 영향을 받았다. 무엇인가를 기억한다는 것은 곧 다른 한편 기억되지 않는 것들에 대한 망각을 의미하기도 한다. 한 사회의 집합적 기억은 이러한 선별적 기억과 그를통한 의도적 망각의 과정을 동시에 포함한다.

한국 현대사에 등장했던 정치권력들은 자신들의 지지기반을 유지하기 위해 한국의 집합적 기억에(그와 동시에 망각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개입을 추구해왔고, 이를통해 한국 근대사의 많은 과거들은 정치적, 의도적으로 망각되었다. 여기엔 반공적 정권하에서 망각을 강요받은 기억들 - 그를 기억하려는 사람은 투옥되거나 사형당했다 - 과 정치적 억압 속에서 망각되어버린 기억들. 일제 식민지 지배와 관련되었던 친일파들에 대한 망각된 기억들이 포함된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적으로 형성된 집합적 기억 속에는 북한 '공산 괴뢰정권'에 의해 자행된 전쟁의 참혹상과 경쾌한 근대화의 박동, 우호적인 미국의 협조와 빠르게 성장하는 경제, 이를 위협하는 빨갱이 등의 그림이 깊게 그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이처럼 권력에 의해 일방적으로 만들어지고 폭력적으로 관리, 유지되어온 한국 사회의 집합적 기억이 많은 사람들에게 문제시되기 시작한 것은 80년도 이후였다. 사람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이 듣고, 교육받고 받아들이고 있었던 소위 '한국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저 집합적 기억이 얼마나 많은 다른 역사의 흐름들에 대한 망각과 억압, 또한 의제적인 이데올로기와 찬양과 미화로 얼룩져있었던가를 깨닫게 되었다. 이 시기로부터 이제 한국사회엔 우리의 정체성을 형성할 '집합적 기억'을 둘러싼 싸움과 투쟁이 시작되게 된다.

집합적 기억을 둘러싼 투쟁은 우선 서로 현재와 접합점을 찾기를 원하는 과거를 재기억하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의도적으로 망각 또는 간과되었던 친일파들의 행적, 한국전 당시 미군과 국군에 의해 자행된 민간인 학살, 광주항쟁, 삼청교육대, 북파 공작원 등의 역사적 사실들이 재 발굴되어 우리의 집합적 기억 속에 복원되기를 요구한다. 이에 대항하는 세력들은 예를들어 '박정희 시대에 대한 재평가'를 요구하며, 이 기억을 우리의 집합적 정체성의 한 요소로 수용하려고 한다. 집합적 기억을 둘러싼 이러한 투쟁은 지금 현재까지도 한국 사회의 곳곳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역사를 소재로 삼은 영화, 회고록, 역사답사, 친일청산 법률안 등등)   

그리고, 종종 이 집합적 기억을 둘러싼 싸움은 그 출구가 잘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지금까지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게 하는 집합적 기억이 이처럼 권력에 의해 왜곡되고 지배되어왔다는 사실이 의식되고 나서 사람들은 이제 사회가 제시하는 모든 종류의 집합적 기억에 대해 혐의와 의심, 비판의 눈길을 보내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전까지의 이데올로기화된 집합적 기억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 새롭게 형성시켜 나가야 할 우리의 정체성은 그러나, 특정한 과거에 대한 복원이나 발굴 등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현재의 문제들과 끊임없이 대결하는 가운데 서서히 만들어진다. 오늘날 북한을 어떻게 볼 것인가, 미국은? 한국 사회 민주화 운동과 일제 친일파 문제는? 일본에 대한 관계는? 통일은? 이전의 권력에 의해 강요되었던 집합적 기억과 정체성 속에선 명백한 해답이 제시되어 있던 이 질문들에 새롭게 해답을 찾아가고, 토론되며, 투쟁하는 가운데 우리의 새로운 정체성은 만들어져 가는 것이다. 때문에 이는 혼란스럽고 지리한 오랜 동안의 모색을 필요로하는 힘들고 지난한 과정을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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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 - 프랑스 현대문학선 14 프랑스 현대문학선 14
앙리 베르그송 지음, 정연복 옮김 / 세계사 / 199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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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그송은 이 책에서 희극적인 것이 생명적인 것에서 기적인 것이 도출될 때 나온다는 놀라운 통찰을 보여준다. 늘 변화하는 세계에 대해 방심하고 습관적으로 익숙해진 덕택에 발생하게되는 행위들이 희극적이라는 것이다. 의자에 앉으려다 엉덩방아를 찧거나 상대의 말을 듣지않고 성급하게 말함으로써 실수하거나, 상대를 오인하여 희극적 상황이 연출되는 경우들이 이에 해당된다. 그런 점에서 베르그송은 희극적인 것은 삶과 생명적인 것의 긴장감에 대한 상실과 방심에서 기인하는 사회적 교정의 기제라고 이야기한다.

희극적인 장면을 보고 웃을수 있기 위한 중요한 전제는 대상에 대한 지적 태도다. 많은 희극적 장면은 우리가 그에 감정이입을 해 본다면 당사자에게 감정적 분노, 당혹,수치,곤란, 고통 등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런 장면들에서 우리가 웃을 수 있는 것은 그에대해 우리가 전적으로 지적인, 무감정적이고 무감각한 태도를 취하기 때문이다. 인물이나 사건, 행동에 대해 무감각하고 무감정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써 인물이나 사건, 행위들은 그것을 행하는 사람들의 내적 감정상태에서가 아니라, 다만 드러나진 기계적인 결과로만 고찰되며, 그것이 우리에게 웃음을 자아내는 것이다.

„문제가 되는 것이 정신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관심을 한 사람의 육체로 향하게 하는 사건은 무엇이나 다 희극적이다“ 비장한 연설 도중 재채기 하기, 장례식 도중 코풀기, 예배시간에 코골기 등. 신체에 대한 배려가 희극성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사실은 비극 혹은 정신적인 것을 추구하는 연극 등에서 주인공들의 탈 육체성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들은 뭘 마시지도, 먹지도, 화장실에 가지도 않는다. 정신적인 것이 문제가 되는 경우에 ‚육체와 육체성을 상기시키는 행위는 추구되는 정신성과 육체를 대비시킴으로써 웃음을 효과를 불러낸다.

동물원에서 살아있는 동물들의 움직임을 보는 데서 느껴지는 매력은 그 동물들의 완벽한 육체성에 있을 것이다. 그들의 육체는 그 자체로 살아있는 육체성을 보여주며, 하나하나의 움직임에서 저 완벽한 육체성이 발현된다. 그들의 육체는 그들의 생존, 곧 육체성의 보존이라는 목적에 완벽하게 기여하도록 이루어져 있다. 불필요한 혹은 잉여적인 움직임, 그저 재미삼아, 그냥, 심심해서 이루어지는 운동이 하나도 없는 저 완벽한 육체성의 합목적성의 발현에 우린 매료되는 것이다.

부족하지만 인간 역시 육체의 합목적성을 가지고 있다. 많은 경우 우리의 의지에 의해 규제되고 사회화되었지만,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스스로 육체성의 합목적성을 지향하는 많은 부분들이 아직도 남아있다. 재채기, 기침, 콧물, 발기, 코골기 등이 그것이다. 우리가 지향하는 정신성의 한 가운데서 이러한 육체성이 폭로되는 장면이 우리에게 웃음을 자아내는 것은 그를통해 우리 육체가 우리의 영혼과 정신을 ‚제압‘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역시 생명적인 것 속에서 기계적인 것이 드러나는 것이다.

못생긴 얼굴, 뚱뚱한 몸 등 희극배우 중에는 유달리 육체적 특징을 자신의 밑천으로 삼는 사람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못생긴 얼굴을 한 희극 배우는 그 스스로가 극중에서 ‚비장한 연설도중에 발생한 재채기‘의 역할을 한다. 멋지게 준비한 결혼식장에서 처음 드러난 신부의 못생기고 뚱뚱한 얼굴은 한순간 지금까지 진행된 모든 예식과 노력을 ‚육체성‘의 나락으로 빠져들게 함으로써 희극적인 순간을 창출하는 것이다.

타인의 목소리나 특정한 얼굴표정, 제스쳐, 몸동장을 흉내내는 행위가 웃음을 자아내는 것 역시 베르그송의 희극성을 통해 설명될 수 있다. 그렇게 흉내내어지는 목소리, 표정, 제스쳐, 몸동작은 그 인물에게서 특징적으로 고착된 것, 전형적인 것으로 포착된 것들이다. 그것들은 그 인물을 그의 목소리,표정,제스쳐, 동작 등의 고정된 것으로 드러내며 그 순간 그 인물은 특정한 목소리,제스쳐, 동작, 표정으로 환원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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