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축복’이라고 번역되는 „Seligkeit“는 슈레버에겐 하늘 나라 신의 곁에 존재하면서 정화된 영혼이 도달하게 되는 일종의 세계 혹은 공간이기도 하고, 인간이 지상에서 사는 동안 윤리적으로 선한 행동을 함으로써 쌓게되는 ansammeln – 마치 카드 사용 실적에 따라 늘어나는 ‚포인트 점수’ 처럼! – 무형의 재산이기도 하며, 그를통해 누군가가 저 공간에 받아들여질 만큼 충분히 selig 하다고 판정받게 되는 등급이자, 그 등급을 받게 된 선한, 정화된 영혼이 처하게 되는 어떤 상태Zustand이기도 하다.

슈레버에 따르면 이 축복을 받게 된 영혼은 죽을 때까지 일을 해야 하는 인간과는 달리 ‚영원히’ 아무 노동도 할 필요없이 다만 „끊임없는 향유의 상태“에 자신을 내 맡기고 있다. – 여기서 슈레버가 말하는 영혼이 감지하는 ‚향유’의 성격이 무척이나 궁금해진다. 육체가 없는 영혼은 어떻게, 무엇(?)을 가지고, 무엇(!)을 향유하는 것일까! 육체없는 향유. 육체가 없기에, 육체에 의존되어 있지 않기에 그만큼 더 무한히 지속되고, 한계없이 강렬한 향유…

축복 상태에 있는 영혼이 처해있다는 이러한 향유에 덧붙여 영혼에게는 또 다른 적지않은 즐거움이 보장되어 있다. 그건 „지속되는 향유에 자신을 내어 맡기면서 동시에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과거를 회상“ 하는데서 나오는 즐거움이다. 슈레버에 의하면 축복 상태의 영혼은 자신이 인간이었던 과거 시절에 대한 기억을 지니고 그를 회상하면서 살아간다. 아무 일도 하지않는 무위의 편안함 속에서, 끊임없는 향유 속에서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고 있는 영혼은 이를통해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행복감’ 을 누린다는 것이다.

과거, 특히 자신이 겪었던 사랑의 설레임, 작은 성공, 즐거웠던 삶의 사건들을 기억하고 회상하는 일은, 그럴 조건과 환경만 마련된다면, 인간에게도 작은 행복감을 준다. 즐거웠던 과거 뿐만 아니라, 예를들어 고통스럽던 체험도 그에대한 기억, 회상 속에선 그것의 직접성을 상실하고 하나의 그림이 된다. 그래서 우린 예를들어 나무에서 떨어져 팔을 부러뜨렸던 끔찍한 체험을, 그때의 (육체적) 고통을 다시 느끼지 않으면서도 ‚기억’할 수 있다. 물론 우리에게는 그렇다 하더라도 결코 회상하고 기억하고 싶지않은 그런 과거들도 있다. 그걸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아니 내 바램과는 달리 그것이 떠올려지는 것 만으로도 소리를 지르고 싶을만큼 괴롭고, 고통스럽고, 창피스러운 과거가.

하지만 영혼들에겐 이런 과거조차 그만큼 고통스럽지 않게 회상하고 기억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어 있다. 그건 영혼이, 살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고통스럽고, 창피한 과거가 우릴 괴롭게 하는 것은 우리에게 현실원칙이 지배하는 세계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굳건히 움켜지고 살아가야 하는 삶의 시간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런 인간에게, 그가 저지른 과거의 실수, 잘못된 판단과 결정들은 그의 앞 날을 가로막는, 그래서 대개의 경우는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억압되어야 하는 것들이다. 하지만 자신의 과거를 변명하고, 숨기고, 억압하면서 구차하게 살.아.가.야. 할 의무로부터 방면된 영혼들은, 이미 그 자체로 과거가 현재의 삶 (영혼으로서의 삶!)에 드리우고 있는 깊은 그림자로부터 자유롭다. 과거의 삶에 의존되어 있지 않는, 불쑥 불쑥 예기치않게 회귀해오는 과거로부터 공격받을 현재의 삶을 가지고 있지 않은 영혼들은 그래서, 인간시절 자신의 과거를, 우리가 자신의 전생에 대해 이야기하듯, 떠올릴 수 있는 것이다.

이미 그것만으로도 우릴 숨막히게 하는 행복한 회상과 영원한 향유 속에서 살아가는 축복상태의 영혼에게 슈레버는 또 하나의, 사실상 이 모든 걸 가능케 하는 결정적 능력을 부여하는 걸 잊지 않는다. 그건 망각이다. 슈레버에 의하면 영혼들은 신의 광선 – 슈레버에게 이는 인간 신경과 동일한 성격과 구조를 갖는 신의 신경이다 – 을 매개로 아직 지구에 살고있는 그들의 가족, 친지, 친구들의 근황을 파악할 수 있다. (때로 영혼들은 자신의 지인들이 죽고 나서 자기가 있는 축복계로 끌어 올려지도록 „힘을 쓸 수도“ 있다. – 말하자면 천상 세계에서도 ‚연줄’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정당한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만일 아직 지상에서 살고있는 가족이나 친지 중 누군가가 불행한 처치에 놓이게 된다면 그를 보고있는 영혼들도 그에따라 불행해지지 않을까? 지상에 살고있는 지인들의 불행이 끊임없는 향유 속에서, 과거에 대해 회상하며 살아가는 천상에서의 영혼들의 행복을 훼손시키지 않을까? 이 질문에 대해 슈레버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지구에 살고있는 가족들이 불행한 처지에 놓여있다는 걸 알게되면 영혼의 행복감이 흐려질 것이라는 건 잘못된 생각이다. 왜냐하면 영혼은 과거 인간시절의 기억은 가지고 있을 수 있지만 영혼으로써 자신이 느끼는 새로운 인상들은 그만큼 오래 보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혼의 자연적 망각 natürliche Vergesslichkeit 을 통해 영혼에게 달갑지 않은 새로운 인상들은 곧바로 사라져 버린다.“

여기서 니체의 숨결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그 이전의 철학자들이 망각을, 모든 걸 파악하고be-greifen, 장악해 er-greifen해 개념 Begriff 으로써 자신 속에 보전하고 있어야 할 정신의 능력이 허약해지고, 결핍됨으로써 생겨나는, 그래서 더 이상 자신이 본 것을, 자신이 읽은 것을, 자신이 이해하고 깨달은 것을 자신 속에 지니고 있지 못하는 어떤 무능력 vis inertiae 으로 이해했던 데 반해, 처음으로 이 망각을, 아무 것도 잊어버릴 수 없어 벌벌떠는 정신의 불안함과 한 번 일어난 과거의 일들을 수백번, 수천번 아니 영원히 반복해도 좋다고 긍정하지 못하는 정신의 소심함을 극복할 수 있게 해주는 능동적 힘이라고, 그래서 망각이 없다면 „행복도, 쾌활함도, 희망도, 자랑스러움도, 현재도 존재할 수 없다inwiefern es kein Glück, keine Heiterkeit, keine Hoffnung, keinen Stolz, keine Gegenwart geben könnte ohne Vergeßlichkeit“ ( Zur Genealogie der Moral) 고 이야기했던 니체를.

슈레버가 니체를 읽었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가 우리에게 남긴 유일한 책 <주목할만한 한 신경병 환자의 기록 Denkwürdigkeiten eines Nervenkranken>(1903)에도 칸트의 이름은 한 번 등장하지만 니체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하지만 당시 부르조아 계급이 갖추어야 할 모든 교양과 지식을 갖추고 있던, 피아노를 능숙하게 연주하고, 모국어인 독일어는 물론 영어, 이태리어, 불어, 희랍어를 읽을 수 있으며, 자신에게 말을 걸고, 질문을 퍼부어 그의 정신을 장악하려던 내부 목소리들에 대항해 괴테와 쉴러의 발라드, 바그너의 오페라를 암송할 수 있던 슈레버가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니체가 사망한 1900년 슈레버는 두번째 발병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었다)니체의 책을 한번쯤은 손에 들었을 것이라는 건, 그를통해 그것이 슈레버의 광대한 우주론적 망상체제를 수립하는데 한 몫 했을 것이라는건 개연적이다.

어쨋든 슈레버가 말하는 축복은, 자신에게 달갑지 않은 새로운 인상들은 자연적 망각을 통해 잊어 버리고, 달콤한 기억과 회상의 기쁨을 가져다 주는 과거 인간 시절의 기억들만 보존하는 이 기억과 망각 사이의 절묘한 조화 속에 존재한다. 자신의 <기록>을 집필하고 있던 슈레버는 스스로 이러한 ‚축복’ 속에 처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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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김남시님의 "프로이드와 독수리 "

감사합니다. 람혼님! 사실 이 글들을 이전에 써 놓고 블로그와 다른 카페에 실었던 것인데, 이번에야 알라딘에로 옮겨 놓습니다. 여기에 글을 올리는게 이런저런 기술적 문제로 어려움이 많아서, 예상보다 쉽지는 않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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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문학, 정신분석 프로이트 전집 14
프로이트 지음, 정장진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프로이드의 유명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대한 분석엔 레오나르도가 어린 시절 겪었던 작은 사건이 중심에 놓여있다. 프로이드가 레오나르도의 과학적 탐구욕의 근원이 그의 억압되었던 성적호기심에 놓여으며 어머니에 대한 특별한 관계를 통해 레오나르도의 동성애적 경향이 발전해 나왔음을 분석하는데 사건이 중심 모티브라는 사실은 글의 제목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어린시절의 기억이라는 것만 보아도 있다. 프로이드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레오나르도는 독수리(Geier) 비행에 관한 과학적 분석을 진행하다 말고 갑자기 아주 어린 시절에 있었던 기억을 기록하고 있는데  부분의 이탈라아어 원문은 다음과 같다.

„Questo scriver si distintamente del nibio par che sia mio destino, perché nella mia prima ricordatione della mia infantia e’ mi parea che, essendo io in culla, che un nibio venisse a me e mi aprissi la bocca colla sua coda e molte volte mi percuotesse con tal coda dentro alle labbra.”

프로이드는 이를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다. “아마도 내겐 이미 오래전에 내가 이렇게 철저하게 독수리에 집착하게 어떤 계기가 있었던 같다. 내가 아직 걷지도 못하던 아주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오르는데,  독수리 한마리가 내게 다가와 꼬리로 입을 열고는 꼬리로 여러번 입술을 쳐댔었다.” („Es scheint, dass es mir schon vorherbestimmt war, mich so gründlich mit dem Geier zu befassen, denn es kommt mir als eine ganzfrühe Erinnerung in den Sinn, als ich noch in der Wiege lag, ist ein Geier zu mir herabgekommen, hat mir den Mund mit seinem Schwanz geöffnet und viele Male mit diesem seinen Schwanz gegen meine Lippen gestoßen.“[1])

  진귀하고 별난 어린 시절의 체험, 정확히 말하면 대한 레오나르도의 어린시절에 대한 별난 기억으로부터 프로이드가 어떻게 레오나르도의 어린시절의 성적 체험을, 그로부터 생겨난 그의 성적 정체성과 그의 전체를 이끌었던 무의식적 경향을 이끌어낼 것인지는 프로이드를 아는 사람이라면 예상할 있는 바이다. 레오나르도의 환상은 당연히 성적환상이다. „레오나르도의 독수리 환상을 정신 분석가의 시선으로 살펴본다면 환상은 그렇게 낯선 것만은 아니다...꼬리(Schwanz), Coda 이탈리어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언어들에서도 가장 많이 알려진 남성 성기의 심볼이자 대체물이다.  레오나르도의 환상에 등장하는 상황, 독수리가 아이의 입을 열고는 꼬리로 속을 능숙하게 어루만졌다는 것은 펠리치오, 성기가 다른 사람 안으로 삽입되는 성행위의 표상과 일치한다....그리고 환상은 여성이나 성행위에 있어서 여성의 역할을 수행하는 수동적 동성애자의 꿈과 환상들과 유사하다.“[2]  실지로 독일어에서는 아직도 Schwanz 라는 단어는 페니스의 대체어로 가장 많이 쓰이고 있는데,  무의식의 분석을 언어에 대한 분석으로 열어놓은 장본인 프로이드가 점을 놓칠리 없다. 어쨋든 이로부터 프로이드는 레오나르도의 환상 뒤에는 어머니의 젖을 빠는 혹은 빨리는 행위에 대한 기억 Reminiszenz“ 숨겨져 있으며 어머니 대신 독수리가 대체물로 등장하고 있는 [3]이라고 말한다

이 환상에 대한 언어적 분석을 통해 독수리를 어머니와 연결시킨 프로이드는  나아가 이를 이후 그의 제자였던 C. G. Jung에 의해 더 발전되어 나갈 신화적 심층 심리학적으로 전개시키는데, 여기에서 고대 이집트 여신 Mut 이 등장한다. „고대 이집트의 신성한 그림 문자에서 어머니는 독수리 그림을 통해 표현되었다. 이집트 인들은 또한 어머니 신을 숭배했었는데, 그 신은 독수리 머리를 하고 있거나, 여러개 머리 중 최소 하나가 독수리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 여신의 이름은 „Mut“이라고 불렸다. Mutter (어머니) 와의 발음상의 유사성이 다만 우연적이기만 한 것일까?  독수리는 실제로 어머니와 관계맺고 있는 것이다.„[4] 

프로이드 스스로 무척이나 자랑스럽게 여겼던 레오나드로에 대한 이 분석은 이후 많은 그의 제자들에 의해 보충되고 확증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오늘날에도 프로이드의 레오나르도 분석을 이야기할 때면 빠질 수 없이 등장하는 1919년 재판본에 수록된 Oskar Pfister의 레오나르도의 그림 분석이다. 프로이드가 1919년에 추가한 각주를 통해 소개하고 있는 이 분석에 따르면, 레오나르도의 유명한 그림 성안나와 함께있는 성모자상에는 그가 분석했었던 독수리 환상이 그림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림 속에서 성모가 두르고 있는 치마가 만들어내는 그림 Verxierbild이 독수리 모양을 하고 있을 뿐 아니라 나아가 그 꼬리가 아기 예수의 입을 건드리고있다는 것이다. 레오나르도가 남긴 저 어린시절의 기억이 그대로 그림을 통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1969년 출간된 프로이드 Studienausgabe의 편집자는 이 널리 알려진 프로이드의 레오나르도 분석이 사실상 프로이드의 결정적 오역에 근거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건 레오나르도의 노트에 등장하는 새 이름 nibio’ (nibbio) 라는 이탈리아어 단어가 사실 독수리 Geier 가 아니라 Milan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어린 시절의 레오나르도에게 다가와 꼬리로 그의 입을 열고 입술을 문질러댔던 새는 독수리가 아니라 였다는 것이다.[5] 언뜻 보기에 별 차이가 없어 보이는 이 오역이 프로이드의 레오나르도 분석에 얼마나 결정적인 가를 이해하기 위해선 독수리 Geier와 매 Milan의 서로 다른 모습을 확인해 보아야 한다. 아래 사진에서 보듯 독수리 Geier가 상대적으로 긴 부리와 긴 목을 가지고 있다면, 짧은 목과 더 날카로운 부리를 가지고 있는 매 Milan 의 모습은 그와는 확연히 구분된다. 

  



 

 



 


 

 

 



 

 

 

 

 

 

 

 

프로이드가 독수리와 어머니 사이의 연관을 신화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언급했던 이집트 상형 문자의 역시 프로이드의 말처럼 독수리였다는 것도 그림의 목과 부리를 통해 확인 있다. 



이와 더불어 레오나르도의 그림 성안나와 함께 있는 성모자상 등장한다는 감추어져 있는 그림 역시 아니라 독수리임이 분명하다. 이것이 말해주는 것은 레오나르도의 환상에 등장하는 새가 어머니 의미하며 그것이 심층 심리학적으로 이집트 신화에 근거하고 있다는 프로이드의 분석이 붕괴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독수리 암컷이 수컷의 사정 없이도 수정하고 알을 낳는다는 전해내려오는 이야기를 아버지를 알지 못했던 레오나르도가 그의 어머니에 가졌던 에로틱한 관계와 연결시키고 그로부터 레오나르도의 나르시시즘적 동성애를 도출했던[6] 프로이드의 이론 역시 설득력을 잃게된다.      

도대체 이런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는 프로이드의 실수(?)는 어디서 기인한 것일까? 우리는 사람들의 사소한 실수들을 그냥 지나쳐보지 않았던 프로이드 자신의 이론을 프로이드에게 되돌려 볼 수 있을 것이다. <일상생활의 심리 병리학>에서 프로이드는 카페에서 신문을 보던 중 저질렀던 자신의 오독 Verlesen에 대해 전하고 있는데 그에 의하면, 그는 신문에 실린 사진의 원제목 "Eine Hochzeitsfeier an der Ostsee“ (오스트 해안에서의 결혼식) „Eine Hochzeitsfeier in der Odysee“(오디세이에서의 결혼식)으로 잘못 읽었다.[7] 프로이드는 이러한 오독의 원인이 글을 읽는 사람이...그가 관심을 가지고 있거나 동안 다루었던 것을 그가 읽는 텍스트 속에 투사해서 읽으려는 hineinliest 태도[8] 있다고 보았다. ‚독수리 집착하고 있었던 것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아니라 오히려 레오나르도의 글을 읽고 있었던 프로이드 자신이었지 않을까.  




[1] Sigmund Freud : Eine Kindheitserinnerung des Leonardo Da Vinci. Fischer, S.51.


[2] Sigmund Freud : Eine Kindheitserinnerung des Leonardo Da Vinci. Fischer, S.54.


[3] Sigmund Freud : Eine Kindheitserinnerung des Leonardo Da Vinci. Fischer, S.56.


[4] Sigmund Freud : Eine Kindheitserinnerung des Leonardo Da Vinci. Fischer, S.56-57.


[5] Editorische Vorbemerkung zu Eine Kindheitserinnerung des Leonardo da Vinci. Freud-Studienausgabe, Band X, 1969, S.89-90.


[6] Sigmund Freud : Eine Kindheitserinnerung des Leonardo Da Vinci. Fischer, S.69.


[7] S. Freud : Zur Psychopathologie des Alltagslebens : Über Vergessen, Versprechen, Vergreifen, Aberglaube und Irrtum, 1941 in Imago Publisching London, 1969 Fischer, S. 118.


[8] S. Freud : Zur Psychopathologie des Alltagslebens : Über Vergessen, Versprechen, Vergreifen, Aberglaube und Irrtum, 1941 in Imago Publisching London, 1969 Fischer, S. 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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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8-07-23 0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올리신 글들이 참 반갑습니다. 흥미롭게 잘 읽고 갑니다.^^

김남시 2008-07-24 0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람혼님! 사실 이 글들을 이전에 써 놓고 블로그와 다른 카페에 실었던 것인데, 이번에야 알라딘에로 옮겨 놓습니다. 여기에 글을 올리는게 이런저런 기술적 문제로 어려움이 많아서, 예상보다 쉽지는 않답니다.

letsbe 2024-07-11 1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빈치 분석에서 매를 독수리로 오독했다는 이야기는 익히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프로이트의 논리를 붕괴시키는 수준은 아니라고 봅니다. 프로이트의 해석이 다빈치라는 인물과 실제로 일치하느냐의 여부와는 상관없이-프로이트의 해석이 틀릴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정신분석으로 실제 인물의 파악하려면 더 많은 정보가 요구되기 때문이죠.-주어진 자료로 이끌어가는 논리전개에는 큰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프로이트 분석을 읽으셔서 아시겠지만, 독수리에 대한 해석을 하기 전에 프로이트는 너무나 멀리 떨어진 사항을 증거자료로 사용하려는 것이기에 포기하고 싶기도 하다는 취지의 말로 분석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즉, 그는 하나의 가능성으로서 다빈치의 독수리와 이집트 여신 뮤트를 연관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고대로부터 독수리는 암컷 밖에 없었던 것으로 생각되었고 공중에서 바람으로 임신한다는 전설이 있었으며, 중세 신학자들이 그것을 성모의 처녀 수태의 증거로 사용하기도 했었죠. 그것을 다빈치가 들었을 가능성이 있고, 그런 기억이 환상에서 독수리라는 새를 선택하게 한 것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라는 것이죠. 무의식적 환상을 만드는데 독수리가 재료로 사용되었던 유래를 가능성 차원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다빈치의 유아기 기억은 무의식적으로 만들어진 환상입니다. 다빈치가 의도적으로 독수리, 아니 매를 선택한 것은 아닙니다. 의도적 선택이었다면 프로이트는 다빈치의 특정 의도를 왜곡한 것이기에 큰 오류가 됩니다. 하지만 무의식적 의도는 꿈에서의 재료 선택처럼 하나의 경향은 가지지만 구체적 의도는 다중적입니다. 매를 선택한 구체적인 무의식적 이유는 프로이트가 실제로 대면해서 분석할 수 있는 다빈치가 아니기 때문에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극단적으로 추측해서 다빈치는 독수리에 대해 들었는데 거기에 억압이 작용해 매로 잘못 기억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의미를 얻을 수 있는 추측은 아니라고 봅니다.) 처음부터 틀릴 수도 있는 가능성이 큰 가정입니다. 중요한 것은 구체적 사실이 아니라 경향입니다. 독수리냐 매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새라는 점입니다. 이집트 신화를 안 끌어들여도 새가 성적 상징물임은 프로이트 해석에서는 바뀌지 않습니다. 그리고 꽁지로 입을 치는 행위에 대한 해석 역시 변하지 않습니다. 논리상의 중대한 오류란 그것이 범해졌을 때 그 논리가 무너지고 바뀌는 것을 말합니다.
프로이트가 틀릴 가능성이 있는 하나의 가정만을 가지고 즉, 독수리와 이집트 신화와의 관계 하나만을 가지고 다빈치 분석을 전개한 것은 아닙니다. 읽어보셔서 아시잖아요. 그렇지 않나요? (지금도 긴 댓글을 더 늘리고 싶지 않아서 되묻는 것입니다.) 인간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말 대로 프로이트가 자신의 해석에 유리하도록 오독했다는 지적은 옳습니다. 그리고 그의 분석이 맞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오독 하나가 다빈치 해석의 논리를 붕괴시킨다는 지적은 잘못입니다.(논리적 정합성은 문제가 없습니다. 논리적으로 정합하다와 진리이다라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이것은 역시 보고 싶은 대로 보는, 다시 말해 프로이트를 불편해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하는 지적은 아닐까요? 다빈치에 대한 프로이트의 해석은 애초에 다빈치에 대한 자료가 불명확하고 불충분하기 때문에 실제적 사실과 정확히 일치할 수는 없습니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하나의 시도와 가능성을 제시한 것입니다. 실험과 관찰을 주로 하는 과학에서도 수많은 가능성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옳은 가정도 많지만 틀린 가정은 더 많습니다. 그래서 반박으로 수정작업이 계속 이루어지고 있죠. 하지만 그 반박에는 정당한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결정적이라고 보기 힘든 오류를 가지고 반박의 재료로 삼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하니다. 물론, 프로이트가 너무 모든 것을 성적으로 해석한다고 말씀하신다면 그것에 대해서는 할말이 없습니다. 그것은 텍스트 자체의 논리와는 다른 문제니까요. 진리에 대한 확신은 믿음의 영역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개인적인 취향입니다. 아무튼,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1.

키에르케고르는 근대 사회에서 개인이 가족, 국가, 혈족 혹은 운명 등의 모든 실체적인 규정들로부터 고립 Isolieren 되어 자신 스스로가 자기 자신의 창조자로, 자신의 모든 행위의 자유로운 주체로 스스로를 의식하고 등장하면서 부터 고대 비극에서 찾아볼 있었던 비극적인 das Tragische’ 해소되고 사라져 버린다고 말한다. (Sören Kierkegaard : Der Widerschein des antiken Tragischen in dem modernen Tragischen. In Entweder Oder.) 모든 자기 외적인 규정들로부터 자유로와진, 아니 스스로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근대적 주체는 고대 비극에서와는 달리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운명적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단지 그의 잘못된 행동 혹은 실수로 인해 파멸하며, 따라서 여기에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고대 비극에서의 비극적 슬픔 Trauer 아니라, 개인의, 결국 그의 잘못된 행위와 선택에서 기인한 몰락을 바라보는 데에서 오는 고통스러움 Schmerz이다. 그건 자기 자신의 창조주이자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맡은 개인의 파멸을 우리는 그의 잘못된 선택 혹은 행동의 결과라는 윤리적 견지에서 바라보게 되며 그에게는 그러한 의미에서의 윤리적 부과되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다른 개인의 파멸을 바라볼 때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스스로를 우리의 행위와 선택의 자유로운 주체로 의식하고 있는 우리가 스스로의 행동과 선택의 결과에 대해 후회의 고통을 겪어야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감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누구의 잘못도 아닌 전적으로 자신의 선택 결과라는 사실, 키에르케고르가 말했듯 모든 죄의 철저한 투명성앞에서, 우리의 고통스러움은 더욱 가중된다. 이러한 점에서 후회 Reue 스스로를 자신 운명의 개척자로 정의하는 근대적 주체가 감수해야 하는 가장 쓰디 고통스러움이다
 

이에 반해 고대 비극의 주인공들에게서 우리가 느끼는 비극적 슬픔 Trauer’ 이러한 고통스러움과는 구별된다. 그것은 우리가 그들의 몰락이 전적으로 그들 개인의 잘못된 선택이나 행위의 결과라고만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생부를 살해하고, 생모와 결혼을 하게 됨으로써 일어난 오이디프스의 파멸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자유로운 개인으로서의 그의 잘못된 선택 혹은 행동 대한 안타까움과 그것이 불러낸 처절한 결과에 대한 동정에서 오는 고통스러움이 아니다. 우리가 느끼는 비극적 슬픔 오이디프스로 하여금 그렇게 행동할 밖에 없게 만들었던, 그를통해 그와 그의 가족 어머니와 그의 안티고네 비극적 운명으로까지 이어지는 어떤 보이지 않는 운명의 피할 없는 손길을 감지하는 데에서 온다. 키에르케고르에 의하면 비극의 본질은 바로 여기에 있다. 형식적으로 보자면 고대 비극에서도 구체적인 명의 개인의 행동이 그를 파멸로 이끌지만, 그러나 그의 행동은 모든 자신의 외적 규정으로부터 자유롭게 스스로의 의지와 판단에 따라 행동하는 근대적 주체의 그것이 아니다.  거기엔 그를 그렇게 행동할 밖에 없게 했던어떤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하고 있으며, 그러한 점에서 비극적 주인공들이 저지른 것은 전적으로 스스로 선택된 행위에서 결과하는 윤리적 아니라, „ schuld 무고 unschuld사이에서 흔들리는비극적 , 심미적 죄이다. 그들은, 그들을 파멸로 이끈 행동을 스스로 벌였던 주체라는 점에서는 schuld 지었지만, 그들의 행위가 눈에 보이지 않는 운명을 잉태하고 있는 필연성 따름으로써 생겨났다는 점에서 그들은 또한 무고 unschuld 존재들이다. ‚비극적 슬픔 Trauer’ 이처럼 주인공을 파멸로 이끈 행위 속에서 작용하고 있는 주관적으로 반성되지 않는“, 어떤 어두움의 계기 의해서 생겨난다. ‚죄의 투명성으로 특징지워지는 고통스러움에서와는 달리 여기에서 우리는 누가 비극적 파멸에 죄가 있는지를 투명하게 확정하지 못한다. ( 이야기를 때의 키에르케고르는 정신현상학에서 헤겔이 분석한 인륜적 의식 논의를 따르고 있다. 헤겔에게서도 고대 비극 주인공들의 행동은 부당한 현실에 맞서 인륜적 법칙을 구현해야 한다는 결심의 직접성에 따라 이루어지며, 이러한 즉자성으로 인해 그건 자연적 존재의 의미 갖는다. 금지에도 불구하고 오빠의 시신을 장사지냈던 안티고네의 행동은 자유로운 주체의 의지적 행동이 아니라, 인륜적 법칙의 필연성을 쫓아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들의 행동은 자기 자신의 의식에 대해서는 물론 그들의 행동이 펼쳐지는 현실에 대해서도 대자적인 근대적 주체의 행동과 구분된다.) 

2. 

19세기 중반 (1843) 글을 키에르케고르는 개인이 가족, 국가, 혈족 등의 실체적인 substantiellen  규정들로부터고립되어 자유로와진 근대에 이러한 비극적인 사라진다고 말했지만, 21세기에 살고있는 우리는 어떤 점에서는 이후 이러한 비극적인 향한 시도들이 오히려 활발하게 추구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한다. 카프카의 주인공들은 그들의 현대인으로써의 외양과 삶의 조건에도 불구하고 고대 비극의 주인공들의 전범을 따르고 있다. 그들은 현대 사회에 살고있는 명목상의 현대인들이지만, 그들에게는 근대적 주체에게 특유한, 자유로운 의지에 의거해 자신의 행위를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는 주관적 개인성이 결핍되어 있다. 그들이 맞이하고, 극복 혹은 대처해야 하는 상황들 재판에 회부되고, 벌레로 변신하며, 낯선 지방에 출장 명령을 받는 어떤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그들에게 주어지며, 거기에 대처해 나가려는 과정 속에서 주인공들은 운명을 잉태하고 있는 필연성 쫓아 결국 몰락과 파멸의 길로 나아간다. 우리가 카프카의 이야기들에서 느끼는 것은, 스스로에게 책임이 있는 그들의 선택의 결과 그들이 맞이해야하는 파멸을 바라보는 데서 오는 고통스러움이 아니다. 그러기에는 그들의 너무도 불투명하며, 그들의 주관성은 너무 연약하다.

 

박찬욱의 일련의 복수 씨리즈에서도 우리는 이러한 비극적인 에로의 지향이 드러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복수를 행하는 주체들이 그렇게 밖에 없는인륜적 의식의 주체들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복수의 근저에 깔려있는 것이 모두 가족 관계 - <올드보이>에서의 남매, <복수는 나의 >, <친절한 금자씨>에서의 부모와 자식,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에서의 손녀와 할머니 라는 것은 이러한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헤겔과 키에르케고르가 모두 이야기하듯이 가족, 특히 부모와 아이 사이의 Pietät 개인을 인륜적 법칙을 실현하기 위해 그렇게 행동할 밖에 없게 만드는중요한 실체적 규정 하나이기 때문이다. <복수는 나의 >에서 자식을 잃은 부모는 상대가 악인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복수 해야만한다. 그의 복수는 스스로의 의지와 판단에 따라 행동하는 자유로운 근대적 주체의 선택적 행동이 아니라 그렇게 밖에 없는 인륜적 필연성에 따른 것이다. 이는 <올드보이>에서 사랑하는 누나를 죽게 만든 오대수에 대한 우진의 복수에도, <친절한 금자씨>에서 유괴되어 살해당한 아이들의 부모가 선생에게 가하는 복수에도, 이보다는 훨씬 온건하고 미화된 형태이긴 하지만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에서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 대한 영군의 상상적 복수에도 해당된다. 법적인 처벌이 해소시켜 없는, 스스로 자신의 손으로 직접 가해자의 육체와 대결해 상처를 입히고, 죽이는 방식으로 분출되는 이들의 복수는 그러한 점에서 우리에게 윤리적 아니라 schuld 무고 unschuld사이에서 흔들리는비극적, 심미적 죄로 받아들여진다

넓은 의미에서 이러한 비극적인 회귀는 <택시 드라이버> 이후로 오늘날까지도 심심치않게 등장하고 있는, 가해자 혹은 살인자를 경찰과 국가 기관의 처벌과 판결에 맡기는 대신 자신의 손으로 직접 붙잡아 처벌하고 복수하는 소위 사적 처벌Selbstjustiz’ 테마에서도 드러난다

3. 
 

키에르케고르는 비극적인 것을 잃어가는 시대는 그로 인해 많은 회의 Verzweifelung“ 얻게 된다고 말한다. 이는 우리가 타인의 행동 아니라 우리 자신의 행동을 바라보는데 있어서 심미적기준 보다는 점점 좁은 의미의 윤리적기준을 적용하며, 그를통해 혹은 우리 자신의 행동을 전적으로 /우리 자신에게로만 환원되는 사적인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러한 점에서 이러한 죄의 주관화/내면화 악인 등장과도 관련되어 있다. 고대 비극에서 우리는, 전적으로 자신의 자유로운악한 의지에 의해 행동하는 악인이라고 불릴 인물 유형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악인 개인이 모든 다른 실체적인 규정들로부터 고립되어 스스로가 자기 행동의 자유로운 주체로 등장함으로써만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이다. 칸트가 자신 행위의 근거를 어떤 외적, 감각적 조건들에도 의존하지 않고 전적으로 자신 내면의 자유( 심연) 가지고 있는 근대적 주체를 설정하기 위해 급진적 das radikale Böse’ 전제하지 않을 없었던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 오죽하면 내가 이런 짓을 하겠는가라고 말하는 의식은 이러한 죄의 주관화/내면화 대한 힘없는 저항이다. 의식은 그를 통해 자신이 저지른 행동이 비극적/심미적 이해받기를 요구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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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도 2009-05-10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철학 공부를 하다 좋은 이야기가 나와서 잠시 반영하려 하는데 괜찮으시다면 양해좀 구하겠습니다 ^^
 


아이들에 대한 부모의 관계는 존재론적 무책임함으로 가득차있다. 나는 저 아이들의 존재를 이 세계 내 존재로 ‚던져놓은’ geworfen 장본인이면서도, 저 아이들이 자신의 저 열려진 현존재로서의 가능성을 펼쳐나갈 그들의 삶 자체를 끝까지 돌보아 줄 수도 없다. 아이들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에 의해 이 세계에, 그들에게 어떤 악하고, 고통스러우며, 힘겨운 삶을 제공할지도 모를 이 열려있는 지평 속에 던져져 버렸고, 나는 내가 이렇게 저질러 놓은 저 아이들의 현존재가 그 현존재의 가장 외적인 가능성, 곧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동반하지도 못한 채 무책임하게 그들의 삶의 지평에서 사라져 버릴 것이다.


부모로서의 나는 스스로가 이 세계에 던져진 존재Geworfen-sein일 뿐만 아니라, 다른 현존재를 이 세계에 던져놓은 존재Geworfen-Haben-Sein 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부모인 나에겐 나 자신의 현존재에 대한 염려가 내가 무책임하게 이 세계 속에 던져놓은 저 아이들의 현존재에 대한 염려Sorge와 중복되어 다가오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나 자신의 세계내 존재 In-der-Welt-Sein 으로서의 불안Angst 뿐 아니라, 저 아이들의 현존재에 대한 염려 Sorge 를 운명적으로 떠안아야만 한다.


그러나, 이 모든, 세계 내 존재로서의 나를 무력하게 하는 존재론적 무책임함을 더욱 더 가중시키는 건 바로, 저 아이들의 현존재로서의 가능성이 나의 현존재의 현실적 조건들에 의존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아이들은 내가 처해있는 나의 삶의 모든 조건들에 의해서 그들 현존재의 가능성들을 규정받는다. 그들이 던져지는 세계는, 모든 이들이 완전히 처음부터 자신의 현존재의 가능성을 새롭게 펼쳐나가는 공백의 세계가 아니라, 이미 나의 현존재에 의해 마련되어 있는 현실적, 제한적 조건들의 세계다.


나는 내가 처해있는 경제적, 사회적 조건들로 인해 아이들에게 더 나은 교육을 시키지도, 더 나은 환경과 도구들을 마련해주지도 못한다. 나는 내가 처해있는 삶의 조건들로 인해 아이들에게 더 넓은 세계의 가능성들을 보여주지도, 더 많은 능력들을 발양시키게 하지도, 더 훌륭하고 효과적인 삶의 자격들을 갖추게 하지도 못한다. 이 모든 제한들은 이 세계 내 존재로서의 저들이 자신의 삶을 펼쳐 나가는데 있어서, 그들이 결코 의도하지 않았던, 한계로, 장벽으로, 경계로 작용할 것이다. 말하자면 나는 저 아이들을, 그들의 의도와 상관없이 이 세계에 던져 놓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결국 나의 현존재에 의해 조건지워진 제한된 삶의 가능성들 속으로 가두어 놓음으로써 또다시, 그들 존재의 가능성들을 제한시키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부모로서의 나는, 과연 어떤 자격으로 저 아이들을, 결국 죽음으로 종결되는 세계 내 존재로 던져놓을 수 있는 것일까. 도대체 나는 어떤 자격으로 이렇게 세계 속에 던져진 저 아이들의 삶의 가능성을, 내가 처해있는 현실적 삶의 조건들로 인해 또다시 제한시킬 수 있는 것일까. 저 아이들이 자신의 한계와 제한이 아니라, 무책임하게 그들을 이 세계 속에 던져놓은 나의 삶의 한계와 제한 때문에 자신의 삶의 가능성을 완전히 실현시키지 못한다면? 그리하여, 저 아이들에게 주어져 있을지도 모를 더 나은 삶의 가능성이, 나의 제한된 가능성으로 인해 아예 처음부터 봉쇄되어 버린다면? 저 다른 현존재에 대한, 이러한 무의지적인 선규정 Vorgriff는 도대체 어떻게 윤리적으로 정당화 될 수 있을까?


부모에게 있어서 아이는 그들 현존재의 조건이 내 현존재의 조건들에 의존해 있지 않은, 그리하여 나에 의해 완전히 흡수될 수 없는 타자가 되지 못한다. 그러나, 저 아이들은 또한 내가 더이상 세계 내 존재임을 멈추고 나서도 한동안 세계 내 존재로 머무른다는 점에서 나의 현존재가 다다를 수 없는 존재론적 타자이기도 하다. 이것이 아이들을 타자이면서도, 또한 완전한 타자이지 못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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