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 이데아총서 9
발터 벤야민 지음 / 민음사 / 199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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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독자가 지적했던 이 책의 오역은 이 책과 독일어 본을 대조하며 읽어갈 수록 심각한 수준으로 발견된다.  "기술 복제시대의 예술 작품"의 번역문에 등장하는 오역 만을 간략히 지적하고자 한다. 발터 벤야민의 유명한 개념 '아우라'가 등장하는 이 글은 그의 다른 어느 글보다도 가장 많이 읽히고 인용되는 글이다. 이 글의 유일한 한국어 번역이 실려있는 반성완의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은 어쩌면 바로 이 글 때문에 지금까지 계속 팔리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글에 대한 반성완의 번역은 많은 문제를 지니고 있다. 소극적으로 그의 번역은 그 어느 다른 글보다 분명하고 뚜렷한 논점을 지닌 벤야민의 이 글을 해독 불가능한 추상적 해설문으로 바꾸었을 뿐 아니라, 나아가 벤야민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오역들로 점철되어 있다.

이 번역문 1장에만도 심각한 수준의 오역들이 튀어나온다. 가장 심각한 오역은 Graphik을 '판화'라고 번역한 것이다. 여기서 '그래픽'이란 어떤 특정한 매체를 통해서 그려진 그림이 아니라, 대상을 그림을 통해 묘사하는 그림 일반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를 '판화'라는 도대체 어디서 연유했는지 모를 번역어로 대치하다 보니 „목각이 등장함으로써 비로소 처음으로 판화가 기술적으로 복제가능하게 되었다.“ 와 같은 이해하기 힘든 번역 문장이 생겨났다. 도대체 '판화가 기술적으로 복제'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판화를 찍어내게 하는 원판(나무 혹은 동판 등)이 기술적으로 복제된다는 것인가?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목각을 통해 판화 원판이 기술적으로 복제된다? 아니면, 원판을 통해 종이위에 찍어낸 '판화'가 기술적으로 복제된다는 말인가? 원래 판화는 원판에 대고 여러번 찍어낼 수 있는 매체 아닌가? 그렇다면 도대체 목각에 의해 비로소 판화가 기술적으로 복제가능하게 되었다는 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벤야민의 이 번역문 앞에서 머리를 썩혔을 독자들은 벤야민이 아닌 번역자에게 분노할 일이다. 이는 독자들에게 불필요한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게 하는 명백히 잘못된 번역이기 때문이다.

„석판 인쇄술을 통해 판화는 일상생활을 그림을 통해 담을 수가 있게 된 것이다.“라는 번역문도 이상하긴 마찬가지다. 석판 인쇄술이 발명되기 이전엔 그렇다면 판화가 일상을 그림을 통해 담을 수 없었단 말인가! „이때부터 판화는 인쇄술과 보조를 같이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판화술은 석판인쇄의 발명이 있고 난 후 수십년이 채 지나지도 않아서 사진술에 의해 다시 뒤처지게 되었다.“라는 번역문도 독자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오역 중의 하나다. 도대체 판화가 인쇄술과 보조를 같이한다는 것이 무슨말인가? 더구나 판화술이 사진술에 의해 뒤처지다니? 사진의 발명이 위기에 빠뜨린 것은 번역자가 고집부리듯 '판화술'이 아니라, 이전까지 다양한 매체에 의해 이루어져 오던 세계에 대한 시각적 모방 곧, '그래픽'들이었다.

„마치 석판인쇄 속에 그림이 그려져 있는 신문이 시각적으로 몰래 숨겨져 있던 것처럼 사진 속에는 유성필름이 숨겨져있다.“는 번역문에서 '시각적으로'는 독일어 문장의 virtuell을 번역 (오역)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신문이 시각적으로 몰래 숨겨져 있다“는 식의 우스꽝스러운, 도대체 무슨말인지 모를 혼란스러운 번역문이 탄생했다. virtuell은 우리가 '가상현실' 이라고 말할 때의 그 단어 곧, 가상적이고 잠재적이라는 의미의 단어이다. 석판인쇄가 그림과 화보가 있는 신문을 가능케 했다는 말을 벤야민은 석판인쇄 속에 잠재적으로 그림있는 신문이 숨어있다고 표현한 것이다.

폴 발레리의 인용문 중 „우리는 조그만 동작 하나로 하나의 이미지가 나타났다가는 곧 또다시 사라져 버리는 그런 영상이나 소리를 갖게 될 것이다.“는 번역문 역시 우릴 혼란스럽게 하긴 마찬가지다. 번역자는 자신이 이해하지 못한 원문의 문장을 상상력을 동원하여 매우 '시적으로' 가공함으로써 위와같은 문장 아닌 문장이 탄생하였다.  이는 " 우리는 작은 손가락 움직임, 거의 하나의 신호만으로 생겨났다가 그렇게 다시 사라지는 영상 혹은 소리를 가지게 될 것이다."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이 책이 가지고 있는 번역 상의 문제들은 이 책의 다른 글에서도 드러난다. 그리고 이 오역들은 벤야민에 접근하려는 많은 한국의 독자들의 불필요한 노력과 에너지를 소모하게 한다. 이 번역문의 이해되지 않는 문장들 앞에서 좌절한 독자들은, 번역자가 해설에서 말하고 있듯 이것이 벤야민이 사용하고 있는 '설명적, 논증적 범주로는 좀처럼 붙잡기 힘든 이미지의 언어' 때문이라고만 믿고 벤야민에로의 접근을 포기해 버릴지도 모른다.

유일하게, 얼마되지 않는 벤야민의 번역서로써 이 책이 어서빨리 개정되어 나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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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의한 식민지와 외재적이고 강제적인 근대화의 과정을 통해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기억을 잃어버렸다. 자신이 살던 집들은 정체불명의 양철지붕으로 대체되어야 했으며, 어린 시절을 뛰놀던 거리와 마을은 근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도로로, 공장부지로 사라져버리는 운명을 맞았다. 장터는 시장으로 바뀌고, 학교 건물은 일시에 일본 식의 조잡한 군대식 건물로 변해버리는 이러한 과정 속에서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시켜 줄 기억의 물질적 대상들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 현재 한국의 오십, 육십 대 세대들이 체험해야 했던 이러한 역사적 경험은 이후 한국 사회의 특징적 문화를 낳는 원인이 되었다. 그 중 하나가 혈연과 지연을 강조하는 지역주의이다.    

더 이상 남아있지 않은 물질적 대상들로 인해 그에대한 기억을 갖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제 그를 기억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 집착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자신의 기억을 통해 스스로의 정체성을 보장해 줄 물질적 대상들을 상실한 사람들은, 이제 그 물질적 환경에 대한 기억을 갖고있는 사람들과 스스로를 결속시킴으로써 상실의 위기에 처한, 혼란에 빠진 자신들의 정체성을 구원하고자 했다. 근대화의 1세대인 우리 아버지 세대가 겪은 정체성의 혼란은 그들로 하여금 공통의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그룹들, 곧 학연, 지연, 지역적 공동체 주의와의 결속을 강화시켰다. 그들은 같은 학교를 다녔거나, 같은 동네나 지역 출신이라는 명목으로, 곧 지금은 변해버리고 사라졌지만 공동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인해, 개인들의 혼란스런 정체성을 보장해주는 유일한 대안으로 나서게 되었다.  

한 사회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집합적 기억은 다른한편 정치적, 이데올로기적으로 구성되기도 한다. 한국의 집합적 기억은 오랜 동안의 반공주의와 정치적 억압에 의해 심각하게 영향을 받았다. 무엇인가를 기억한다는 것은 곧 다른 한편 기억되지 않는 것들에 대한 망각을 의미하기도 한다. 한 사회의 집합적 기억은 이러한 선별적 기억과 그를통한 의도적 망각의 과정을 동시에 포함한다.

한국 현대사에 등장했던 정치권력들은 자신들의 지지기반을 유지하기 위해 한국의 집합적 기억에(그와 동시에 망각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개입을 추구해왔고, 이를통해 한국 근대사의 많은 과거들은 정치적, 의도적으로 망각되었다. 여기엔 반공적 정권하에서 망각을 강요받은 기억들 - 그를 기억하려는 사람은 투옥되거나 사형당했다 - 과 정치적 억압 속에서 망각되어버린 기억들. 일제 식민지 지배와 관련되었던 친일파들에 대한 망각된 기억들이 포함된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적으로 형성된 집합적 기억 속에는 북한 '공산 괴뢰정권'에 의해 자행된 전쟁의 참혹상과 경쾌한 근대화의 박동, 우호적인 미국의 협조와 빠르게 성장하는 경제, 이를 위협하는 빨갱이 등의 그림이 깊게 그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이처럼 권력에 의해 일방적으로 만들어지고 폭력적으로 관리, 유지되어온 한국 사회의 집합적 기억이 많은 사람들에게 문제시되기 시작한 것은 80년도 이후였다. 사람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이 듣고, 교육받고 받아들이고 있었던 소위 '한국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저 집합적 기억이 얼마나 많은 다른 역사의 흐름들에 대한 망각과 억압, 또한 의제적인 이데올로기와 찬양과 미화로 얼룩져있었던가를 깨닫게 되었다. 이 시기로부터 이제 한국사회엔 우리의 정체성을 형성할 '집합적 기억'을 둘러싼 싸움과 투쟁이 시작되게 된다.

집합적 기억을 둘러싼 투쟁은 우선 서로 현재와 접합점을 찾기를 원하는 과거를 재기억하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의도적으로 망각 또는 간과되었던 친일파들의 행적, 한국전 당시 미군과 국군에 의해 자행된 민간인 학살, 광주항쟁, 삼청교육대, 북파 공작원 등의 역사적 사실들이 재 발굴되어 우리의 집합적 기억 속에 복원되기를 요구한다. 이에 대항하는 세력들은 예를들어 '박정희 시대에 대한 재평가'를 요구하며, 이 기억을 우리의 집합적 정체성의 한 요소로 수용하려고 한다. 집합적 기억을 둘러싼 이러한 투쟁은 지금 현재까지도 한국 사회의 곳곳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역사를 소재로 삼은 영화, 회고록, 역사답사, 친일청산 법률안 등등)   

그리고, 종종 이 집합적 기억을 둘러싼 싸움은 그 출구가 잘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지금까지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게 하는 집합적 기억이 이처럼 권력에 의해 왜곡되고 지배되어왔다는 사실이 의식되고 나서 사람들은 이제 사회가 제시하는 모든 종류의 집합적 기억에 대해 혐의와 의심, 비판의 눈길을 보내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전까지의 이데올로기화된 집합적 기억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 새롭게 형성시켜 나가야 할 우리의 정체성은 그러나, 특정한 과거에 대한 복원이나 발굴 등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현재의 문제들과 끊임없이 대결하는 가운데 서서히 만들어진다. 오늘날 북한을 어떻게 볼 것인가, 미국은? 한국 사회 민주화 운동과 일제 친일파 문제는? 일본에 대한 관계는? 통일은? 이전의 권력에 의해 강요되었던 집합적 기억과 정체성 속에선 명백한 해답이 제시되어 있던 이 질문들에 새롭게 해답을 찾아가고, 토론되며, 투쟁하는 가운데 우리의 새로운 정체성은 만들어져 가는 것이다. 때문에 이는 혼란스럽고 지리한 오랜 동안의 모색을 필요로하는 힘들고 지난한 과정을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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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 - 프랑스 현대문학선 14 프랑스 현대문학선 14
앙리 베르그송 지음, 정연복 옮김 / 세계사 / 199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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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그송은 이 책에서 희극적인 것이 생명적인 것에서 기적인 것이 도출될 때 나온다는 놀라운 통찰을 보여준다. 늘 변화하는 세계에 대해 방심하고 습관적으로 익숙해진 덕택에 발생하게되는 행위들이 희극적이라는 것이다. 의자에 앉으려다 엉덩방아를 찧거나 상대의 말을 듣지않고 성급하게 말함으로써 실수하거나, 상대를 오인하여 희극적 상황이 연출되는 경우들이 이에 해당된다. 그런 점에서 베르그송은 희극적인 것은 삶과 생명적인 것의 긴장감에 대한 상실과 방심에서 기인하는 사회적 교정의 기제라고 이야기한다.

희극적인 장면을 보고 웃을수 있기 위한 중요한 전제는 대상에 대한 지적 태도다. 많은 희극적 장면은 우리가 그에 감정이입을 해 본다면 당사자에게 감정적 분노, 당혹,수치,곤란, 고통 등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런 장면들에서 우리가 웃을 수 있는 것은 그에대해 우리가 전적으로 지적인, 무감정적이고 무감각한 태도를 취하기 때문이다. 인물이나 사건, 행동에 대해 무감각하고 무감정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써 인물이나 사건, 행위들은 그것을 행하는 사람들의 내적 감정상태에서가 아니라, 다만 드러나진 기계적인 결과로만 고찰되며, 그것이 우리에게 웃음을 자아내는 것이다.

„문제가 되는 것이 정신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관심을 한 사람의 육체로 향하게 하는 사건은 무엇이나 다 희극적이다“ 비장한 연설 도중 재채기 하기, 장례식 도중 코풀기, 예배시간에 코골기 등. 신체에 대한 배려가 희극성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사실은 비극 혹은 정신적인 것을 추구하는 연극 등에서 주인공들의 탈 육체성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들은 뭘 마시지도, 먹지도, 화장실에 가지도 않는다. 정신적인 것이 문제가 되는 경우에 ‚육체와 육체성을 상기시키는 행위는 추구되는 정신성과 육체를 대비시킴으로써 웃음을 효과를 불러낸다.

동물원에서 살아있는 동물들의 움직임을 보는 데서 느껴지는 매력은 그 동물들의 완벽한 육체성에 있을 것이다. 그들의 육체는 그 자체로 살아있는 육체성을 보여주며, 하나하나의 움직임에서 저 완벽한 육체성이 발현된다. 그들의 육체는 그들의 생존, 곧 육체성의 보존이라는 목적에 완벽하게 기여하도록 이루어져 있다. 불필요한 혹은 잉여적인 움직임, 그저 재미삼아, 그냥, 심심해서 이루어지는 운동이 하나도 없는 저 완벽한 육체성의 합목적성의 발현에 우린 매료되는 것이다.

부족하지만 인간 역시 육체의 합목적성을 가지고 있다. 많은 경우 우리의 의지에 의해 규제되고 사회화되었지만,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스스로 육체성의 합목적성을 지향하는 많은 부분들이 아직도 남아있다. 재채기, 기침, 콧물, 발기, 코골기 등이 그것이다. 우리가 지향하는 정신성의 한 가운데서 이러한 육체성이 폭로되는 장면이 우리에게 웃음을 자아내는 것은 그를통해 우리 육체가 우리의 영혼과 정신을 ‚제압‘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역시 생명적인 것 속에서 기계적인 것이 드러나는 것이다.

못생긴 얼굴, 뚱뚱한 몸 등 희극배우 중에는 유달리 육체적 특징을 자신의 밑천으로 삼는 사람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못생긴 얼굴을 한 희극 배우는 그 스스로가 극중에서 ‚비장한 연설도중에 발생한 재채기‘의 역할을 한다. 멋지게 준비한 결혼식장에서 처음 드러난 신부의 못생기고 뚱뚱한 얼굴은 한순간 지금까지 진행된 모든 예식과 노력을 ‚육체성‘의 나락으로 빠져들게 함으로써 희극적인 순간을 창출하는 것이다.

타인의 목소리나 특정한 얼굴표정, 제스쳐, 몸동장을 흉내내는 행위가 웃음을 자아내는 것 역시 베르그송의 희극성을 통해 설명될 수 있다. 그렇게 흉내내어지는 목소리, 표정, 제스쳐, 몸동작은 그 인물에게서 특징적으로 고착된 것, 전형적인 것으로 포착된 것들이다. 그것들은 그 인물을 그의 목소리,표정,제스쳐, 동작 등의 고정된 것으로 드러내며 그 순간 그 인물은 특정한 목소리,제스쳐, 동작, 표정으로 환원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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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곡 -상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11
단테 지음, 최현 옮김 / 범우사 / 199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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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곡>의 위대함은 <미메시스>에 쓰여진 아우얼 바하의 설명을 듣고 알았다. 신곡에 사용된 문체는 당시 이탈리아의 일상어였으며, 그것으로 숭고한 주제인 지옥,연옥,천국을 다루고 있다. 또한, 지옥이라는 슬픈 출발에서부터 천국이라는 숭고함으로 끝난다. 이러한 성격으로 인해 이 글엔 희곡 Commedia 라는 이름이 붙여졌던 것이다.

고대적 의미에서 숭고한 것으로 간주될 수 없었던, 일상적이고 기괴하고 불쾌한 것을 직접적으로 묘사함에도 불구하고, 단테의 손에 의해 그것들은 숭고함을 획득한다. 지옥,연옥,천국의 물리적 세계상은 또한 도덕적 위치이기도 한데, 그러한 방식으로 도덕적 질서는 물리적 질서와 근원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서 등장하는 중세형벌의 인과응보적 성격이 지옥편의 묘사에도 그대로 등장한다. 지옥은 현세에서 죄를 범한 자가 그가 범한 죄의 성격과 내용에 따라 그에 대응하는 처벌을 감내하고 있는 곳이다. 이간질을 한 자는 혓바닥이 뽑혀지고, 이간질로 결합되어있던 사람들을 갈라놓은 죄를 범한 자는 동체와 머리가 잘리우는 형벌을 받는다. 건방지게도 너무나 먼 앞을 내다 보려고 했던 '예언자'들은 목이 뒤틀려 등 뒤쪽으로 돌아가는 형벌을 받으며, 교만했던 사람은 목을 무거운 바위에 의해 짓눌려 고개를 들지 못하게 된다.

지상의 것에만 쏠려있던 눈 곧, 탐욕의 죄를 범한 자의 영혼은 자신의 눈을 땅바닥에 못박히는 벌을 받으며, 포식한 자는 굶주림과 목마름의 고통을 당한다. 교만, 질투, 분노, 태만, 탐욕, 탐식, 음란의 7거지악 Peccatum을 저지른 자들은 그 영혼을 지옥에서 그에 상응하는 형벌로서 보복받는다. 그것이 하느님의 율법이다. '인과응보는 여기 지옥의 철칙'이기 때문이다. 푸코를 읽으면서도 들었던 생각이지만, 이러한 형벌 종류의 다채로움에 비하면, 감금이라는 근대형벌의 단순함은 무미건조하게까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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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그 후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37
나쓰메 소세키 지음, 서석연 옮김 / 범우사 / 199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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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자신의 부인이 된 여자를 사이에 두고, 결국 자살에 가지 이르고만 친구와의 '감정다툼'의 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지식인의 이야기.

19세기 프랑스 소설들을 읽으면서도 동일한 생각이 들었지만, <무정>이 등장하기 이미 3년전에 쓰여진 이 소설엔 <무정>에서 보여지듯 소설을 통해 무엇인가를 계몽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강박과 근대화에 대한 소설가의 조급한 자의식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들은 소설을 이미, 계몽이라는 목적지향적 행위의 수단으로 사용할 생각을 버린지 오래다.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면, 소설이라는 영역의 독자성과 가치를 형성하고 존중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에고이즘과 자의식의 문제를 이처럼 정밀하게 다룬 소설이 이미 1914년에 신문연재를 시작한다는 사실은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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