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 관심을 가져주시고 게다가 이렇게 친절한 리뷰까지 달아주신 것에 대해 번역자로써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비록 번역자의 입장이지만, 누군가 그를 읽어주고 있다는 사실이 이렇게 마음을 뿌듯하게 만들어준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말씀하신 Physiognomie의 번역어에 대해선, 그러나 저는 '관상학'보다는 여전히 '인상학'이란 단어를 고집하고 싶습니다. 그건 한국어 '관상학'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좁은 내포 때문에 그렇습니다. '관상'이란 단어는 '수상' 혹은 '족상' 등과 관련해서 좁은 의미로 주로 '얼굴' 과 관련되어 사용됩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동아 새국어 사전>에서 "관상"은 "사람의 얼굴 등을 보고 그 사람의 재수나 운명 등을 판단하는 일"이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Physiognomie는 말씀하셨던 것처럼 동양에서의 이러한 '관상학'과도 관련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미 그 출발부터 그 대상을 '얼굴'로 제한하고 있지지 않았습니다. 철학 역사사전 (historisches Wörterbuch der Philosophie)의 Physiognomie 항목에서는 이 단어가 이미 고대부터 "생물 - 특히 사람에게 있어 그 외적인 지표나 특징들 (얼굴, 표정, 머리형태, 골격, 태도나 제스쳐 등)로부터 영혼의 성격 (능력과 소질, 감정, 기질과 성격, 병과 운명)을 유추해내는 이론"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유럽의 근대 Physiognomie를 확립한 인물인 Johann Caspar Lavater의 주저 Physiognomiesche Fragmente 에서도 Physiognomie는 "한 인간의 외면을 통해 그의 내면을 인식하는 기술" (Stuttgart 1999, 21쪽)로 정의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Physiognomie의 대상은 따라서 단지 인간의 "얼굴"에로만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직접적인 외양들. 모든 생김새, 윤곽, 모든 수동적이고 능동적인 운동들, 인간 육체의 모든 상태와 자세들 ; alle unmittelbare Äußerungen des Menschen. Alle Züge, Umrisse, alle passive und active Bewegungen, alle Lagen und Stellungen des menschlichen Körpers" ( 위의 책 22 쪽) 를 포괄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지요.
'외적으로 드러나 보이는 특징들을 통해 보이지 않는 내적인 특성들을 유추해내는' 방법으로써 이러한 Physiognomie에 대한 이해는 발터 벤야민에게도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파사지 베르크에서 벤야민이 수집가를 '사물 세계의 Physiognomiker'라고 말할때(Passagen Werk H 2, 7), 수집가가 자신이 수집한 대상물들을 보면서 겉으로는 드러나보이지 않는 그 물건의 '운명'을 마치 "그 물건을 통해 그것의 미래 Ferne를 꿰뚫어보는 마법사처럼" 들여다본다고 말할 때에도 역시 Physiognomie는 위에서 말한 넓은 의미로 이해되고 있다고 봅니다.
Physiognomie가 이처럼 눈에 드러나 보이는 외적인 모습을 통해 보여지 않는 내적인 무엇인가를 간파해내는 기술 (혹은 방법)이라고 한다면, 제 생각에 이는 "관상학"이라는 좁은 의미보다는 사람과 사물, 나아가 도시와 풍경 들이 주는 전체적인 외적 인상을 1차적인 대상으로 갖는다는 점에서 "인상학"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관상학"이라는 단어를 단지 '얼굴'에만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넓은 의미의 대상의 인상 전체와 관련하는 의미로 이해해 사용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엔 '관상학'이라는 단어가 갖는 기존의 의미 연상이 아직 너무 강하다는 느낌을 버릴수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