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가 과거를 머리 속에 쑤셔넣고 사는 자신의 시대를 향해 '잊어버릴 수 있는 힘'을 갖도록 권고했다면, 그리하여 소화불량을 일으키고 있는 과거에 대한 병적인 기억에, 현재에서 새로운 것을 보는 대신에 과거의 되풀이만을 보는 저 늙어버린 정신에게 '망각'과 잊어버림의 미덕을, 그를통해 낡은 것 대신에 새로운 것에 대한 희망과 의지를 외쳤다면, 벤야민은 역사와 진보의 몰아쳐오는 바람 속에서 잊혀져버리고 있는 과거에 대해 '기억'하기를 요청한다.
과거는 지금 우리의 현재와 마찬가지로 고통으로 가득차 있던, 아직 구원되지 못한 고통의 시간이었다. 고통의 시간을 살고있는 우리가 언젠가 도래할 구원을 갈구하며 살아가고 있듯이, 지나가버린 과거의 시간 또한 구원의 도래를 갈구하며 지나갔던 현재 시간이었다. 지금 현재에, 저 과거에 살았던 이들이 갈구했던 그 미래의 시간을, 여전히 도래하지 않고있는 구원과 해방을 갈구하며 살고있는 우리에겐 저 과거의 시간을 기억하고 상기해야할 책임이 떠맡겨져있다. 해방된, 구원된 시간에 살아갈 후손을 꿈꾸었던 저 과거의 사람들에게 우리들, 바로 그들의 후손인 우리들은 그들의 바램과 갈구를 실현했어야 할 „이 땅에 기다려졌던 존재들“이었기 때문이다.
역사는, 소위 진보를 향해 뒤돌아보지 않고 나아가는 역사는 우리 자신이 바로 이 과거의 외침과 고통스러운 갈구로부터 나온 존재라는 것을 보지않게 만든다. 기억되지 않고 상기되지 않는 과거는 우리 눈 앞에서 폐허로 무너져내리고 우리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면서 진보라고 하는 미래를 향해 떠밀려 간다. 과거의 한순간 한순간이 도래하지 않은 메시아를 갈구하던, 구원을 바라던 고통의 시간이었던 한, 그 모든 한순간 한순간은 우리에 의해 기억되고 상기되어야 할 요구를 가지고 있다. 바로 그것이 „과거의 사람들과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저 비밀스런 묵계“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로 하여금 기억되기를 갈구하고 있던 저 과거는 도대체 우리에 의해 어떻게 기억되어야 하는가? 벤야민에 의하면 과거가 한때 우리에게 요청했었던 '기억되고자 하는 요구'는 그 과거가 '본래 어떠했던가'를 그 과거의 한순간 한순간들의 모습을 그대로 기록하고 기억하고자 함으로써 해소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역사주의의 방식을 채택해 과거를 역사의 진보라고 하는 목적론 하에서 현재의 상태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채택해서도 안된다. 그것은 지배자들이 자신의 현재를 과거의 목표로써 정당화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이다. 그 속에서 과거는 현재라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선 필요 불가결했던 이전 단계로 수단화된다. 이러한 역사주의는 역사를 '이야기'로 만듦으로써 역사에 인과적 사슬을 부여하고, 후대에 일어난 사건들을 이전의 사건들과 목적론적으로 연결시킨다. 이러한 역사주의는 결국 그 역사 서술에 있어서 현재의 승리자의 입장을 취한다. 곧, 현재의 시간, 승리자의 시간의 현재를 과거로부터 일관적이고 연속적인 결과로써 이해하고 서술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과거는 어떻게 기억되어야 하는가?
그에대한 벤야민의 대답을 우리는 그의 8번째 역사철학 테제에서 엿들을 수 있다. 그에 의하면, 우리는 지금의 시간이 과거 역사의 연속성 속에 있는 그것과의 일관성 속에 있는 시간이 아니라 그 역사적 연속성으로부터 벗어난 '예외적 상태'라는 것을 이야기 해주는 역사 개념에 도달해야만 한다. 그것은 역사를 진보의 연속성으로 보는 역사주의로부터 탈피하는 것을 의미한다. 저 진보라는 역사적 규범은 파시즘과 좌파가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를 하나의 연속적인 것으로, 곧 과거의 것이 현재의 것의 밑거름이 되고 현재는 그 과거보다 더 '진보적'이라고 하는 역사에 대한 표상을 가지고 있는 한 우리는 과거의 진정한 상에, 곧 과거에 대한 진정한 기억에 도달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역사에 대한 이러한 표상 속에서 과거는 다만 현재를 위한 발판으로 수단시되기 때문이다. 진정한 과거에 대한 상은 어느 순간 섬광처럼 우리에게 스쳐 지나가는 순간적인 그림으로 기억된다. 현재를 살아가고 있던 우리에게 어느 순간, 저 과거의 한 장면의 의미가 비로소 분명해지는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