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
밀란 쿤데라 지음 / 하문사 / 199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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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영화를 보는 듯한 기법. 서로 다른 직업과 맥락에 있는 여러 등장 인물들은 그러나 같은 공간과 시간을 공유하고 있으며,가끔씩 서로 마주치기도 한다. 사건들은 늘 그들 각자의 삶의 공간 속에서 발생하지만 그 공간들은 서로 일부분씩 겹쳐져 있다. 교집합적인 소설. 따라서 우린 그의 소설을 읽으며 그 모든 사건들이 발생하고 있는 그들의 공유공간에 대해 둘러가며 입체적으로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등장인물들은 서로를 모르고 있지만 우린 그들이 서로 모르는 채 스쳐 지나고 있는 광경에 짜릿한 흥분을 맛본다. 그들은 우리가 그들 모두를 내려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또 하나 놀라운 사실은 그 등장인물들의 서로에 대한 관계의 양상이다. 그들은 서로는 알지 못한 채 우연한 장소에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에 대한 인상을 확인하며,(좋든 나쁘든)그들에 대한 입장을 갖는다. 이런 식으로 엮어져 있는 그들 관계의 그물망을 짜는 쿤데라의 솜씨는 정말 놀랄 만하다. 그들의 관계는 서로 주관적 환상에 의해 이루어져 있다. 서로에 대해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신뢰가 일순간에 다시 증오나 배반으로 변해버리기도 한다.

그 변화의 과정은 어쩌면 지극히 사소한 것이기에 희극적으로까지 느껴진다. 그러나 잠시만 생각해보면, 결국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 그러한 사소한 환상과 변화 -물론, 우리는 우리 자신의 소위 심경과 가치관의 변화라는 것에 엄청난 무게감과 존엄성을 부여하려고 한다. - 들에 의해 이루어져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각자는 자기 나름의 상황과 맥락에 대한 해석에 의거해 자신의 행동과 태도들을 결정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각자의 환상들이 부풀어올라 서로 퉁퉁 부딪치며 부유하는 모습과 같았다.

각자는 모두 삶에 대한 각자의 콘텍스트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들의 행동은 그 컨텍스트에 의하면 지극히 일관적이고 논리적인 것이다. 그러나,어느 순간 그 삶들에 작은 균열이 발생하였을 때, 각자의 컨텍스트는 서로 부딪쳐 껄끄러운 소리를 내며 삐걱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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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아빠되세요 - 아기 탄생을 축하합니다
김혜경 지음 / 다음세대 / 199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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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출판되고 있는 육아관련 서적들은 대략 세가지 정도로 분류된다. 하나는 소위 육아 매뉴얼이라 할수있는 실용적인 서적들, 육아법, 응급처치법, 놀이법, 이유식 제조법 등 처음 키우는 아가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를 알려주는 - 마치 처음 접하는 전자제품 사용설명서처럼 - '실제적인' 책들이다.

두번째는 아이들이 보는책으로 주로 '동화'나 '그림책'등이 여기에 속한다. 세번째가 육아에 관한 철학, 혹은 에세이 등으로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에게, 커다란 삶의 한 부분인 육아에 대한 철학적, 사색적 성찰들을 일깨워주는 책이다. (근래 출판되어 호평받고 있는 <젖병을 든 아빠>같은 책들이 여기에 속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은 이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아버지들도 이젠 육아의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는 시대적 분위기에 편승, 육아에 관심있는 아버지들을 겨냥한 듯한 제목은, 선량한 - 직장과 일 속에 치여살면서도 자식에 대한 애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관련서적들을 찾아 헤매는 - 아버지들의 호기심을 유발시킨다. 그러나, 정작 그 내용은 어쭙짢은 육아상식 몇개 - 이는 아이를 키우는 집엔 이미 1-2권씩 있기마련인 웬만한 육아법 책에 다 나와있는 - 와 너무나 일반적인 당위론으로 얇은 책자를 메꾸고 있다.

첫아가를 키우는 아버지로서 그간 구입했던 많은 유아책들중 태반이 사실상 이런 류의 잡동사니에 속한다는걸 깨달았다. 좋은 아빠가 되기위해 이 책을 구입할 마음이 생기는 아버지들에게,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내용 정도는 이미 당신이 다 알고 있는 것들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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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루이 알튀세르 지음, 권은미 옮김 / 돌베개 / 199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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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튀세르를 읽으며 아니 그의 자서전을 읽으며 그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대상은 과연 누구일까를 생각한다. 그는 소위 정신병자이다. 정신병으로 자기 아내를 교살한 그러한 인물이다. 그러한 그가 자기자신에 대한 그래서 그렇게 살수 밖에 없었던 자신에 대한 해명을 하고있다. 그렇다면 해명당하는 대상은 누구고 해명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정신병자인 알튀세르가 정신병자인 자신을 해명하는 것이라면 그건 결코 해명의 구실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정신병자인 알튀세르를 정상인인 그가 해명하고 있는 셈이 되는데, 그렇다면 그는 진정 정신병자가 아니지 않은가!

어쨋든 그는 그의 모든 생을 규정하고 있던 자신의 무의식과 그것으로 인해 드러났던 자신의 이중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존재하고 싶었다. 존재한다는 것은 사유함으로서라기 보다는 사유받음으로서 더 가능한 것이다. 생각되어진다는 것은 그가 이미 존재한다는 것이다. - 데카르트의 코기토 에르고 섬은 그런 의미에서 중복된 의미를 지닌다. 즉, 나는 나를 사유한다. 곧 나는 나에 의하여 사유되고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사유받는 내가 존재한다. 그것은 당연히 사유하는 나의 존재를 전제하고 있는셈. 이렇게 되면 그것은 이중적 존재다. 한번의 사유로 두개의 주체가 구성되었다. 그러나 사유받는 주체로서의 나는 사유하는 나만큼의 활성을 능동성을 고정된 것을 변화시키는 능동성을 지니지는 못할 것이다. 사유받는 것은 사유받음 을 통해 규정되기에 그는 사유받는 그 상태로만 존재할 수 박에 없다. (사진이 우리에게 주는 돌이킬수 없음의 그 부담감!) -

그러나 알튀세르를 내가 사유한다는 것은 아니 그가 그러기를 바라고 있는 그의 글은 한편으로는 그를 거부하게도 한다. 유명한 사상가가 일생을 통해 전개한 자신의 논의들과 저작들을 그것의 근거와 이유를 그렇게 논의할 수 밖에 없었던 내적 필연성을 이야기 한다면 우리가 느끼는 당혹감은 이런 것이다. 마치 어떤 지식의 이데올로기적 의도에 의해 그것의 정당성이 단지 하나의 입장으로 축소되듯이 그가 벌인 수많은 문제점과 논쟁들이 바로 그러한 그의 내적 이유에서 기인한 것이라면 우린 '그''를 이해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의 논의'의 적실성과 정당성을 그 댓가로 치루고서이다. 알튀세르는 이로써 그의 전략을 달성시킨 셈이다. 그의 죽음과 더불어 그의 전 논의를 함께 가지고 가려는 그의 심술. 그를 그토록 도저한 고독속에 남겨두었던 세상에 대해 그가 마지막으로 던지는 복수. - 세상 사람들아, 너희들은 지금의 나를 있게한 나의 저작들을 읽지만 그것은 결국 너희들이 비난하는 지금의 나의 필연적인 일부분이자,결과이다!

섬뜩! 역시 글은 무언가 남기기 위해서 그리고 무언가 보이기 위해서 쓰는 것. 글쓰기는 날 보존하는 그래서 날 존재케하는 작업이다. 그런데 거기에 대한 포기도 이렇듯 담대할 수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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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여 침을 뱉어라
이효인 / 예건사 / 199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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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난, 충무로 판에서도, 정확하게 말하면 영화비평판에서도 운동권 출신과 비운동권 출신사이의 묘한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과 - 그중에서 이효인은 전자를 대변하고, 정성일은 후자를 대변한다.- 그 역시, '한국적인 것'이라는 화두가 한국영화를 둘러싸고 논점이 되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더구나 놀라왔던 것은, 이효인 처럼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마구 하면서도, 글이되고 책이 될수 있구나 하는 깨달음이었다.

작가는 1960년생으로, 이제 거의 40대가 다 되어가는 세대다. 우린 그의 생년월일로 그가 대학1-2학년 쯤에 광주를 맞이했고, 그것이 그의 삶에 결정적 전환을 안겨주었으리라는걸 직감한다. 그는 당시 운동권출신으로는 진귀하게도 영화운동에 일찍부터 발을들여, '서울영화집단' 에서 박광수, 김홍준 등과 활동하다.'서울 영상집단,', '민족영화연구소'등을 전전한 인물이다. '영화평론가' 라는 우릴 주눅들게 하는 '멋진' 표찰아래 그의 이름이, 한겨레 신문 등에 간혹 등장한 걸 우린 발견할 수 있었다. 영화판에 조금 관심이 있던 사람이라면, 그가 한때 한국영화에 대한 비평때문에, 영화판에선 이단자 쯤으로 취급되게 된 작은 사건의 장본인임도 기억할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강수연, 안성기, 문성근, 정성일 등 내노라하는 인물들과 어울려 다니며 영화평론을 한다는 그의 생활은 우리 예상과는 다르게 '지긋지긋한' 것이었다. 아내와 아들, 그리고 체제 4명이 삐질삐질 비비며 사는 10평짜리 아파트와 티코 한대가 40대가 가까화가는 영화평론가 이효인의 집안꼴이었다. 그는 자신의 책-지금 이책-을 낸 출판사(영화언어)에 근무하며, 부정기적으로 영화평을 '팔아' 생활한다.

그의 글은 조악하다. 그는 자신의 문체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 듯 하다. 하고싶은 말만 하자는 식이다. 더우기 그의 글에는 친절하지 않은 세상에 대한 냉소와, 학위가 없어서 대학교수가 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피해의식이 걸러져 있지 않다. 그런데, 잘 살펴보면 그의 피해의식엔 칼이 숨겨져 있다. 난 너희가 유학가고 학위받는 동안, 대한민국에서 허덕이며 운동하고 있었다! 너희가 '진보와 운동의 이름으로' 수사적 문체와 화려한 학위를 팔아먹고 있을때, 난 고통스럽게 한국영화의 미래와 전망에 대해 고민하였다. 사실, 이런 식의 '칼달린' 피해의식은 왜곡되고 부정적 방식으로만 드러나기 십상이다. 그를 백안시하는 영화판의 인물들 (정성일 등)은 그의 이런 자의식을 지적하고 나선다. 이건 마치, 운동권들은 모두 결손가정의 자녀들이거나, 정서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라는 이문열 식의 중상과 같다. 90년대 들어 재생산 된 그것은 더욱 공격적 양상을 띤다. 그것봐, 운동권 출신들은 저래서 안된다니까. '적응'하지도 못하고 있잖아. '적응'과 '지탱'의 힘겨운 줄다리기. 그의 글은 그래서 잘 읽힌다.

이 책은 영화평론 모음집이 아니다. 이책은 이효인 자신의 이야기를 영화, 영화판,영화적 삶-'영화같은'이 아니라, '영화를 통해 밥먹고 살아가는'이라는 의미의 - 속에서 풀어나간다. 80년대를 힘겹게 살아남은 사람과 '영리하게 대처한 사람들' 간의 위화감을 고스란히 느끼며 90년대를 살아가는 그의 삶이 절절하게 느껴진다. 그러면서도 그는 '전투성'을 잃지 않는다. 참 용하다. 40이 다 되도록 버티어내는 그의 견고함은 어디에 뿌릴두고 있을까. 죽을때까지 세상에 침을 뱉으며 살아갈 용기 있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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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6-02-07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놀랐어요.
특히 정성일에 대한 적개심을 숨기지 않는 부분이......
책을 읽고 1년 후인가, 경희대 졸업생인 친구의 결혼식에 갔더니
하객으로 참석했더군요.^^

 
그리스인들은 신화를 믿었는가 - 솔의신서 4
폴 벤느 / 솔출판사 / 199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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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제목 그대로 그리이스 인들은 신화를 믿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하고,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신화를 믿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단지,그리이스인들이 이러저러한 이유와 목적으로 신화를 믿었다'는 전언뿐이라면, 이 책은 그리이스 문화사나 역사 책의 한 종류정도로 치부되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리이스 인들이 신화를 믿었던 방식의 명백함을 인식론의 문제로 제기한다. 그러한 면에서 저자는 대상과 그것의 인식이라는 존재론적 인식론에 대한 시비를 거는 큰 부담감을 걸머지지 않을 수 없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하나의 진실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진실들'이 존재한다. 그 존재라는 것도 객관적 사물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사물들을 바라보는 인간의 프로그램 내에서만 존재한다. 하나의 신화가 허구적이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문제는, 사람들이 신화를 바라보는 진실 프로그램에 따라 결정된다. 그들이 그것을 진실이라고 믿는다면, 신화는 그 진실 프로그램내에서 힘을 발휘하는 진실이 된다. 진실이란 우리가 결코 단념하지 않고 고수하는 의견들에 붙이는 명칭이다. 그것들을 단념하게 되면 우린 그것들이 틀렸다고 말하리라. 따라서, 신화의 진실은 허위/진리라는 대립법으로 규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이스 인들은 자신들의 진실 프로그램 내에서 신화를 믿었으며, 그것은 절대적인 기준에 의한 진리도 허위도 아니었다. 그리이스 인들의 신화에 대한 태도는 동시적이었다. 그들은 신화를 믿으면서 믿지 않는다. 그들은 신화를 믿으면서 그것을 이용하고,더 이상 이득이 없으면 믿기를 그친다. 서로 상이한 두 프로그램에 상이한 두 진실에 대응하는 것일뿐, 진실/허위의 모순된 대립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가진 믿음의 양태들 역시 사실상 이처럼 동시적이며 모순적이다. 우린 영혼,귀신따위의 영적 존재가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과학적 규명들을 믿으면서도, 그와는 상관없이 우리의 삶과 생각에 작용하는 영적 존재들의 영향력을 충분히 감지하고 있다. 이 두 믿음은 왜 대립하지 않고 공존하는가? 결국, 진리/허위의 대립만으로 인간의 모든 믿음 체계가 결정되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믿음과 진실에 대한 흥미로운 주제들
누군가 어떤 말을 하면, 우린 의심쩍은 눈초리로 질문한다. 어디서 그걸 알았지요? 그가 하는 이야기가 그저, 그 자체로 그가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선가 그가 읽었거나 들은 이야기임에 틀림없으리라는 생각, 따라서 그 이야기의 진실성을 그 출처의 권위성에서 찾으려는 의심들이 오늘날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는 프로그램이다. 권위서들을 인용하는 관습, 현학적인 주석을 덧붙임으로써 자신의 발언의 신빙성을 보장하려는 시도들은, 신학적 논쟁에서 유래한 것이다. 신학 논쟁의 모든 귀결점은 절대적 텍스트인 성서로 귀결될 수밖에 없기에, 최후의 결정적인 말은 언제나 성서에서 인용되었음을 밝혀야 했다. 이는, 어떤 절대적 텍스트와 대서사에 의존하여 진술의 진리성을 보장받으려 하는 근대적 학문태도의 기원이 되었다. 그러나, 성서와 같은 절대적 텍스트가 존재하는가. 그것 대신 기능하던 대서사들 - 인간의 본성,자유의 이념 따위- 의 권위 역시 붕괴되어진 지금엔,진실은 어디에 근거하는가.

고대인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가 직접 목격하였거나, 직접 목격한 사람으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할 뿐이다. 고대 희곡 그 어디에서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의도적으로 - 자신이 허위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 거짓말을 하는 장면은 없다. 그의 진술이 과연,실제로 일어난 사실과 부합하느냐 하는 문제는 그의 믿음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이러한 믿음의 방식이 기독교에 오게되면, 진술자의 성실성의 문제로 변화하게 된다. 증인은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성실한 양심의 소유자이므로, 사기와 위선을 행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그가 한 말은 진실하다. 이때부터 진술의 진실성을 판단하는데 있어, 진술자의 성실성까지가 고려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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