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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들은 신화를 믿었는가 - 솔의신서 4
폴 벤느 / 솔출판사 / 199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저자는 제목 그대로 그리이스 인들은 신화를 믿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하고,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신화를 믿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단지,그리이스인들이 이러저러한 이유와 목적으로 신화를 믿었다'는 전언뿐이라면, 이 책은 그리이스 문화사나 역사 책의 한 종류정도로 치부되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리이스 인들이 신화를 믿었던 방식의 명백함을 인식론의 문제로 제기한다. 그러한 면에서 저자는 대상과 그것의 인식이라는 존재론적 인식론에 대한 시비를 거는 큰 부담감을 걸머지지 않을 수 없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하나의 진실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진실들'이 존재한다. 그 존재라는 것도 객관적 사물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사물들을 바라보는 인간의 프로그램 내에서만 존재한다. 하나의 신화가 허구적이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문제는, 사람들이 신화를 바라보는 진실 프로그램에 따라 결정된다. 그들이 그것을 진실이라고 믿는다면, 신화는 그 진실 프로그램내에서 힘을 발휘하는 진실이 된다. 진실이란 우리가 결코 단념하지 않고 고수하는 의견들에 붙이는 명칭이다. 그것들을 단념하게 되면 우린 그것들이 틀렸다고 말하리라. 따라서, 신화의 진실은 허위/진리라는 대립법으로 규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이스 인들은 자신들의 진실 프로그램 내에서 신화를 믿었으며, 그것은 절대적인 기준에 의한 진리도 허위도 아니었다. 그리이스 인들의 신화에 대한 태도는 동시적이었다. 그들은 신화를 믿으면서 믿지 않는다. 그들은 신화를 믿으면서 그것을 이용하고,더 이상 이득이 없으면 믿기를 그친다. 서로 상이한 두 프로그램에 상이한 두 진실에 대응하는 것일뿐, 진실/허위의 모순된 대립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가진 믿음의 양태들 역시 사실상 이처럼 동시적이며 모순적이다. 우린 영혼,귀신따위의 영적 존재가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과학적 규명들을 믿으면서도, 그와는 상관없이 우리의 삶과 생각에 작용하는 영적 존재들의 영향력을 충분히 감지하고 있다. 이 두 믿음은 왜 대립하지 않고 공존하는가? 결국, 진리/허위의 대립만으로 인간의 모든 믿음 체계가 결정되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믿음과 진실에 대한 흥미로운 주제들
누군가 어떤 말을 하면, 우린 의심쩍은 눈초리로 질문한다. 어디서 그걸 알았지요? 그가 하는 이야기가 그저, 그 자체로 그가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선가 그가 읽었거나 들은 이야기임에 틀림없으리라는 생각, 따라서 그 이야기의 진실성을 그 출처의 권위성에서 찾으려는 의심들이 오늘날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는 프로그램이다. 권위서들을 인용하는 관습, 현학적인 주석을 덧붙임으로써 자신의 발언의 신빙성을 보장하려는 시도들은, 신학적 논쟁에서 유래한 것이다. 신학 논쟁의 모든 귀결점은 절대적 텍스트인 성서로 귀결될 수밖에 없기에, 최후의 결정적인 말은 언제나 성서에서 인용되었음을 밝혀야 했다. 이는, 어떤 절대적 텍스트와 대서사에 의존하여 진술의 진리성을 보장받으려 하는 근대적 학문태도의 기원이 되었다. 그러나, 성서와 같은 절대적 텍스트가 존재하는가. 그것 대신 기능하던 대서사들 - 인간의 본성,자유의 이념 따위- 의 권위 역시 붕괴되어진 지금엔,진실은 어디에 근거하는가.
고대인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가 직접 목격하였거나, 직접 목격한 사람으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할 뿐이다. 고대 희곡 그 어디에서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의도적으로 - 자신이 허위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 거짓말을 하는 장면은 없다. 그의 진술이 과연,실제로 일어난 사실과 부합하느냐 하는 문제는 그의 믿음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이러한 믿음의 방식이 기독교에 오게되면, 진술자의 성실성의 문제로 변화하게 된다. 증인은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성실한 양심의 소유자이므로, 사기와 위선을 행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그가 한 말은 진실하다. 이때부터 진술의 진실성을 판단하는데 있어, 진술자의 성실성까지가 고려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