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과 발표, 논문쓰기 등으로 계속 독일어로 말하고 글쓰기에만 매달리다가 간혹 한국어로 글을 쓰려면 난 커다란 내적 장애를 극복해야 한다. 단어는 떠오르지 않고, 문장은 역겨운 약을 집어 삼킬 때처럼 한참을 억지로 쥐어 짜고서야 겨우 튀어나온다. 이러한 증상은 그러나, 번역 등으로 인해 한동안 한국어로 글을 쓰다가 수업시간에 혹은 교수를 만나 독일어로 말을 하거나 글을 써야 할 때도 마찬가지로 생겨난다. 독일어 단어들은 조각 조각 깨어져 맥락없이 뒤섞이고, 문장은 제 자리를 찾지 못해 허공으로 빙빙 헤메 다닌다.

왜, 한국어와 독일어는 내 속에서 이렇게 갈등하는 것일까. 왜 이 두 언어는 내 속에서 항상 투덕거리며 서로 자리 다툼을 벌이는 것일까. 왜 이들은,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결국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기의’를 공유하는 다만 서로 다른 모습의 ‚기표’로 사이좋게 공존하지 못할까. 그건 한국어와 독일어 이 두 언어가 단지 내 머리 속에서 분명하게 현전하는 듯 보이는 말의 ‚의미’를 그저 서로 다른 형태와 형식으로 표현해 내는 ‚외적 표현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사유체계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독일어로 말할 때, 또 그를 위해 독일어로 생각해야 할 때 생각은 내게 „떠오르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그 생각에로 다가가 (Ich komme auf die Gedanke) 그를 붙들어야만 (ergreifen)한다. 사유와 글쓰기의 독일어 모드에서는 기억 또한 내게 ‚떠오르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내 속의 어딘가 그 기억이 있는 곳으로 „나“를 데리고 가 그를 상기시켜야 (ich erinnere mich an)만 한다. 독일어에서 세상의 모든 것들 – 물건, 생각, 문장 들 - 은 스스로가 자신을 드러내거나 표현하는(sich zeigen, sich aeussern) 행위의 주체로써, 다른 모든 것들을 지시하고, 가리키며, 관계시키는 주어로 등장한다. 하나의 사태는 다른 의미를, 하나의 사건은 다른 맥락을, 하나의 주장은 그것에 함축되어 있을 다른 배경 사상을 지시하고(hinweisen), 드러내고 (zeigen), 관계맺게(beziehen)한다.

독일어는 그를 누가 (Subjekt) 수행하느냐에 따라 항상 다른 형태로 변화되어 표현되는 모든 행위들이, 그 모든 인칭과 격과 단수 혹은 복수의 다양한 조건들을 초월해 그 행위 자체를 표현하는 ‚원형’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한다. 누가 그 행위의 주체인지에 따라, 곧 나 (denke) 혹은 너 (denkst), 그 (denkt), 너희들 (denkt), 아니면 우리 (denken) 냐에 따라 그 형태는 수시로 변화하지만, 저 ‚생각한다 Denken’는 행위 자체의 이념은 그 모든 변화들의 ‚원형’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독일어는 자연스럽게, 다양한 속성 (Akzidenz)들에 따라 서로 다른 모습으로 표현되지만 그 본질에 있어선 변화하지 않는 실체(Substanz)를 생각하게 한다.

나아가 독일어의 세계 속에서 사물들은 한국어에서와는 다른 질서와 범주로 이루어져 있다. 장갑과 신발, 바지와 팬티, 책상과 식탁 등 한국어의 세계 속에선 서로 다른 범주에 속하는 물건들이 독일어에선 동일한 카테고리로 묶인다. 개와 물개, 소와 코뿔소, 말과 얼룩말, 쥐와 다람쥐 등 한국어에선 같은 범주에 속하는 동물들이 독일어에선 서로 다른 종류인 것으로 분류된다. 독일어에서 ‚경험’은 우표나 동전을 모으듯 „수집sammeln“되고, 결정은 화살이나 돌멩이로 과녁을 맞추든 „겨냥 treffen“되며, ‚시간’은 흐르지 않고 „달리고laufen“, 배가, 머리가, 이빨이 아픈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나를 아프게“ 하며 es tut mir weh, 내가 진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진정시켜야’ ich beruhige mich 한다.


말하자면, 독일어로 말하거나 글을 쓰기위해 나는 한국어가 내게 열어주는 사물들과 그 사물들 사이의 관계, 그것들이 움직이고 생겨나며 이루어지는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 속으로 날 밀어넣어야 하는 것이다. 독일어의 세계의 게임규칙을 익히고, 그 속의 사물들의 질서와 체계에 익숙해지기 위해 필요했던 시간동안 나는 이전에 내게 익숙해 있던 한국어의 그것들로부터 조금씩 낯설어 졌으며 이는 한국어의 물리적 공간을 떠나, 독일어의 공간 속에서 살고 있는 나의 현 삶의 방식으로 인해 더 가속화되었을 터이다. 고양이와 닭, 개와 버스, 발자국과 녹슨 대문이 한국어에서와는 다른 소리를 내는 독일어의 세계 속에서 한국어로 사유하고 글을 쓰기 위해선 내겐 그렇게 낯설어진 한국어의 세계에 다시 익숙해질 시간이 필요한 거다.

하나의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이행하는 건, 그리하여 내가 알고있는 하나의 세계를 다만 지금까지와는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세계에서 그와는 완전히 다른 법칙과 삶의 형식을 지니는 다른 세계로 발을 디디는 것이며, 그를 위해선 늘 일정기간의 적응훈련이 필요하다. 이 두 언어 사이를 어려움없이 왕복하기 위해선 내 속엔 서로 다른 두 세계가 확고하게 세워져 있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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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테오 리치 - 동서문명교류의 인문학 서사시
히라카와 스케히로 지음, 노영희 옮김 / 동아시아 / 2002년 3월
평점 :
품절


동서양 문화 교류사를 언급할 때 마테오리치는 빠질 없는 인물이다. 그는 유럽사회에 처음으로 자신이 직접 관찰하고 경험한 사실을 근거로 이전의 마르코 폴로의 동방여행기 마르코 폴로의 상상들로 채워져 있었던 것에 반해 중국을 소개했던 인물이었다. 그를 통하여 비로소 유럽엔 물론 많은 부분 유럽인들의 오리엔탈 에피스테메를 통해 변형된 형태로 - 중국의 문화와 역사, 문자와 철학, 문명들에 대해 알게되었고 이러한 유럽의 중국에 대한 인상은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유럽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나아가 그는 또한 유럽의 문명과 사상을 처음으로 중국에 소개함으로써 이후 동양사회에서 서양문명에 대한 이해의 첫발을 만들었던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처음으로 중국에 지리학적으로 제작된 세계지도를 선보였고, 기하학과 수학을 소개했으며, 천주교를 전파시켰다.

 

이러한 역사적, 문화사적으로 커다란 의의를 지니는 리치에 대해 서구사회는 이미 활발하게 연구를 해오고 있었다. 그가 중국에 머무는 동안 모국어인 이태리어로 선교 보고서 이미 1600년대에 라틴어로, 나아가 영어, 불어, 독어, 스페인어 등으로 번역되었을 아니라, 오늘날에도 그에 대한 수많은 연구서와 논문들이 존재하고 여전히 그를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도 있다. 독일어권에만 해도 일반인을 대상으로 그의 전기 다섯 종류 이상이 출판되어 있다.  이에반해 오히려 아시아권에선 그에대한 연구가 지금껏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었는데, 이러한 점에서 비교문화사가인 히라카와 교수의 책은  동서문화교류사의 획을 이루는 중요한 연구가 아닐 없다.

 

그러나 동서 비교문화사의 세계적 석학인 히라카와 교수가 30년간에 걸쳐 집필한 이라는 출판사의 선전을 무색하게도, 책에서 마테오 리치에 대한 동양인의 시각에서 깊이있는 연구를 기대한 내게 책은 조금 실망스러웠다. 책의 절반 (5부까지) 차지하고 있는 마테오 리치의 삶과 그의 중국에서의 행적들에 대한 소개는 사실상 독일에 출판되어 있는 두권의 마테오 리치 전기만 읽어보면 알수있는 것을, 그것도 일본 학자답게, 간략하고도 에피소드 중심으로만 소개하고 있다.

 

물론 책의 후반부에선 동서 사상사의 입장에서 리치의 저작들을 분석하고, 나아가 그것들이 일본과 조선 사회에 미친영향, 그리고 리치를 매개로 이루어진 최초의 본격적인 동서양의 만남에 대해 유럽사회가 보여준 다양한 반향들을 아시아인의 시각에서 연구한 부분에선 비교 문화사라로서의 저자의 역량이 드러나고 있다. 그런데, 에서도, 관점으로는, 중요한 마테오 리치의 저작에 대한  연구가 빠져있다. 바로 그의 저술 西國記法 그것이다. 마테오 리치가 과거시험을 앞에두고 있던 중국인 학생들을 위해 저술한 책은 서양의 기억술 중국의 한자에 적용한 책으로, 유럽의 기억술에 내재하고 있는 서양의 형이상학적 세계이해가 서양 알파벳과는 완전히 다른 구조를 지닌 한자에 적용됨으로써, 데리다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음성중심주의 그와는 전혀다른 문자, 한자간의 충돌에서 생겨나는 중요한 문제들을 제시해 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라카와 교수는 중요한 리치의 저작 내용에 대해선 전혀 언급하지 않은채 다만 간략한 문헌학적 서술만 남기고 있다.

 

리치 자신도, 그리고 그의 보고서 통해 중국의 한자에 대해 알게된 많은 유럽인들은, 오늘날까지도 한자를 자신들의 알파벳 문자의 정반대의 극을 이루는 순수 표의문자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이는 데리다가 지적했던 것처럼 사실 유럽인들의 현존에 대한 형이상학의 뿌리를 이루고 있기도 하다. 나아가 유럽인들은 이러한 한자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근거하여, 한자는 알파벳 표음문자에 비해 논리적이고 추상적인 사유에 부적합하며, 그로인해 권위적이고 문맹률이 높은 사회를 만들어낼수 밖에 없다고까지 주장하고 있다. (Havellock, Jack Goody  )

 

이러한 유럽인들의 한자에 대한 이해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마테오 리치의 서국기법, 동서 비교문화사를 연구하는 히라카와 교수 같은 사람이 아시아인의 입장에서 연구하지 않았다는 것은 무척이나 애석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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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망각 - 문학과 문화학의 교차점
최문규 외 지음 / 책세상 / 2003년 11월
평점 :
절판


이 책의 첫문장에서 지적하고 있듯 1990년대 중반부터 소위 '문화학적 전환'이라는 새로운 학문적 경향들은 기존의 인문학들의 내용과 방법론, 나아가 그 체계와 편제에 이르기까지 심각하게 다시 반성하게 했다. 그 과정 속에서 태어난 '문화학'이란 학문은 그로인해 아직까지도 한편으로는 기존의 다른 인문학들과 미묘한 긴장관계를 가지고 있다.  한편으로는 기존 인문학들의 구태의연한 관념론적 방법론들을 비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미 7,80년대 이후 광범위하게 모든 인문학들에 받아들여졌던 구조주의적, 지식 고고학적, 미시적, 비판이론적 방법론들을 자신의 방법론으로 수용하고 있는 문화학이 과연 어떤 점에서 독자적인 학문적 지위를 요구할 수 있는지 많은 사람들에 의해 문제시되어왔던 것이다. 다른한편, 기존의 인문학들의 입장에서는 소위 '인문학의 위기'라는 담론 속에서 등장한 이러한 '문화학'이 사실상, 사회의 상품과 자본논리에 따라 대학내의 학문들이 재편성되는 소위 '인문학 죽이기'의 대표주자로 받아들여지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새로이 등장한 문화학의 문제의식과 그것과 기존의 문예학, 작게는 문학과의 관계, 나아갈 방향등을 고민하고 있는 이 책은, 그만큼 변화하는 세계와 학문의 문제의식을 한국의 상황 속에서 받아들이고 있는 선진학자들의 역량을 짐작하게 해 주는 척도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 책, 구체적으로 여기에 실린 '최문규'의 글을 읽고 든 느낌은, 그가 문화학과 문화학적 문제의식을 통해 생겨난 문학, 문예학 내부의 위기의식을, 문화학의 등장을 통해 분명해진 변화된 학문적 조건들을 적극적으로 문예학적 내부에 수용함으로써 돌파하려고 한다기 보다는, 저 문화학을, 한국 사회의 특수한 조건일 뿐인, '인문학 죽이기'의 전범으로 보고, 그를 아직 '정리되어 있지 않고, 방향과 방법도 없으며, 자기 모순적인 학문'으로 폄하함으로써 회피하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경향은 우선, 그가 자신의 글에서 인용하고 있는 뵈메의 글 (본 책 46 쪽)이 그 번역상의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 "Man wird zwischen produktiven Dilettantismus und Expertenwissen hin und her geworfen, man findet keinen festen Boden, man vermisst Perspektive und Orientierung" 을 그는 "문화학은 생산적인 아마추어리듬과 전문적 지식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면서 어떤 확고한 토대도 찾지 못하고 관점이나 방향성도 없다"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이는 원문의 주어인 Man을 '문화학'이라고 '오역'함으로써 현재 문화학이 처한 문제가 마치 '문화학' 자체의 구조적 문제인 것 처럼 이해되게 한다.  -  그를 원문의 맥락과는 동떨어지게 인용함으로써 엉뚱하게 이해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경향은 그 이후의 문장 "실제로 문화학, 문화연구, 문화비평이라는 이름으로 생산되고 있는 다양한 글들을 살펴보면,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입증보다는 자의적인 사유나 주관적 상상력에 의존하고 있으며, 글쓰기 방식도 다분히 주관적인 어조와 문체를 띠고 있음을 알수 있다" (47 쪽) 에서는,  그가 '오해'한 문화학과 현재 한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새로운 글쓰기의 실험들을 동일시  한채 다잡아 비판하고 있다. 이를통해 그의 글은 현재 한국에서 인기를 얻고있는, "'푸코, 부르디외' 등의 개념을 "구체화한다고 하면서, 대부분...표피적이고 감성적인 자신의 고유한 수사에 도취된 분석에 그치는"는 글들이 마치 유럽에선 이미 학과로서 존재하고 있는  '문화학'의 내적 구조로부터 나온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서술방식은  안그래도,  문화학을, 기존의 인문학들에 "무슨 무슨 문화학"이란 접미사만 붙임으로써, 인문학을 대학의 상품화의 과정에서 교양수업만을 제공하는 '서비스 학과'로 전락시키고 있는 한국 대학들의 상황 속에서는 더더욱 '문화학'에 대한 오해와 무지에 근거한 반발을 불러일으킬 소지가 많다.

그러나 이 책이 지닌 이러한 문제점들과 오해의 소지에 유의한다면, 이 책은  아직 한국에 아직 잘 소개되지 않았던 매체로서의 '문자'에 대한 논의를 호메로스를 매개로 설명한 고규진의 글이나,  "기억과 망각"이라는 주요한 테마를 민요나 드라마, 나아가 한국사의 문제들 - 정신대 할머니, 일제시대 등 - 과 연결시켜 고민하고자 한 다른 저자들의 참신한 시도들을 통해 넓은 의미에서의 '문화학적 테마'의 새로운 가능성들에 대해 제시해 주고 있다.    

 최문규의 글 중에서 발견한 또 하나의 오역에 대해.

37쪽 주에서 발터 벤야민의 파사지 베르크를 인용하고 있는 대목에서, "상부계급이 하부계급에 다시 영향을 끼침으로써 다음과 같은 점이 입증된다."는 문장은 "Indem er Ueberbau auf den Unterbau zurueckwirkt, ergibt sich"를 번(오)역한 것이다. 곧, "상부계급"과  "하부계급"이 아니라 소위 "상부구조"와 "하부구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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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tiple 2009-09-28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흥미로운 서평이 많네요.
그런데 최문규의 뵈메 번역은 딱히 오역이라고 하기는 어렵게 보이는군요. 뵈메의 문장은 '우리가 현재 문화학의 글들을 읽게 되면 이런 저런 문제점을 발견하게 된다'는 뜻인데, 이를 '현재의 문화학은 이런 저런 문제점을 보인다'로 번역해도 의미가 변하지는 않으니까요. 여기서 '우리'가 어떤 특수한 독자를 일컫는 것이 아닌, 일반적 독자, 즉 man을 말하는 것이라면 말입니다.
 
변신. 유형지에서 (외)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19
프란츠 카프카 지음, 박환덕 옮김 / 범우사 / 199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변신'의 그레고리 잠자는 어느날 아침 자신이 거대한 한마리 흉칙한 벌레로 변신해 있는 걸 발견한다. 도대체, ,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기에 라는 윤리적 질문을 던지기 전에 그는 출근하지 못해 회사에서 쫓겨나 돈을 벌지 못한다면 자신 가족에게 닥칠 어려움과 곤란을 걱정하기 시작한다. 그리이스 비극의 주인공이라면 먼저 자신을 이렇게 만든 신을 향해 운명을 한탄하는 울분을 터뜨리곤, 과연 자신의 어떤 행동이, 어떤 말이, 혹은 어떤 보이지 않던 운명이 신을 분노케 했는지 신탁을 구하기 시작할 것이다. 영문도 모른 채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혼인한 오디프스가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듯 그렇게 그리이스 비극의 주인공들은 저 운명적 사태를 '비극적으로' 맞이했을 것이다.

      그리이스 인들에게 삶의 비극은 전적으로 자신의 운명과 순수하게 부닥친다. 그건 죽음이라는 결말로 치닫고, 관객들은 저 어쩔수 없는 삶의 운명 앞에서 카타르시스의 눈물을 흘린다. 카프카의 주인공들은 다가온 운명의 무게를 진지하 장중하게만 받아 들이기에는 너무나 할일이 많고,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은 고달픈 삶의 주인공들이다. 그레고리는 영문을 알 수 없는 자신의 변신으로 인해 자신의 운명보다는 가족들이 받게 될 어려움과 고통을 먼저 생각한다. 그에겐 자신의 변신을 탓하거나 그에게 울분을 터뜨릴 신들도, 혹은 뼈저리는 후회의 눈물을 흘릴만한 신들의 노여움을 산 과거의 행동도 없다.

카프카가 그려내는 세상엔 그리이스 비극에서처럼 언제나 분명한 원인도, 운명을 바꿀만한 운명적 사건도, 그 모두의 배후에서 인간사를 바라보고 있는 신들도 없다. 카프카의 세계, 그리고 결국 우리가 사는 이 세계엔 다만, 아침에 일어나 출근해 처리해야 할 일들과, 그를 하지 않았을 때 우리에게 닥쳐올 실직의 위험, 그리고 나의 실직이 내 가족들에게 가져다 줄 삶의 곤궁들만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을 뿐이다. 어느날 아침 거대한 벌레로 변해버린 사건을 '비극적 운명'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이유는 하릴없는 신들의 분노 때문이 아니라, 그로 인해 팍팍하게 살아가야 할 인간 세계 속에서 너무 많은 것들을 잃어버려 우릴 힘들게 하기 때문이다. 신들의 분노 혹은 장난, 영웅의 고양된 의지와 숭고한 행위들이 사라지고 없는 카프카의 세계엔 다만 갑작스럽게 들이닥쳐 – <심판>에서의 판결문, <변신>에서의 변신, <>에서의 명령 등 - , 우리의 주인공들을 출구가 보이지 않는 삶의 진탕에서 허우적 거리게 만드는 사건들일 뿐이다.

형이상학적 운명세속적 사건으로 변하게 된 데에 카프카가 날카롭게 그려내는 현대적 삶의 본질이 존재한다. 이제 그 누구도 자신에게 닥쳐오는 일들을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건 다만 재수가 없어, 운이 나빠서 내게 떨어진 사건이다. ‚운명은 그에 대해 신에게 울분을 터뜨리거나 호소할 수 있는 반면, ‚사건은 어떻게든 우리 자신의 힘으로 헤쳐 나가야만 한다. 우린 다만, 이젠 신과 인간을 중개해주는 역할을 오래 전에 상실해버린 세속적 점장이들에게 그들은 심지어 로또 번호를 맞춰 주기도 한다! – 조언을 구해 심리적 명분을 얻을 수 있을 뿐이다.

우릴 괴롭히고, 방해하며, 귀찮게 하는 인간들 쌍둥이 형제“! – 말고, 위험에 빠질 때마다 오딧세이에게 나타나 도움을 주는 여신과 같은 그 어떤 믿음직한 신적 조력자도 갖지 못하는 카프카의 주인공들은 결국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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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 이데아총서 9
발터 벤야민 지음 / 민음사 / 199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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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독자가 지적했던 이 책의 오역은 이 책과 독일어 본을 대조하며 읽어갈 수록 심각한 수준으로 발견된다.  "기술 복제시대의 예술 작품"의 번역문에 등장하는 오역 만을 간략히 지적하고자 한다. 발터 벤야민의 유명한 개념 '아우라'가 등장하는 이 글은 그의 다른 어느 글보다도 가장 많이 읽히고 인용되는 글이다. 이 글의 유일한 한국어 번역이 실려있는 반성완의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은 어쩌면 바로 이 글 때문에 지금까지 계속 팔리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글에 대한 반성완의 번역은 많은 문제를 지니고 있다. 소극적으로 그의 번역은 그 어느 다른 글보다 분명하고 뚜렷한 논점을 지닌 벤야민의 이 글을 해독 불가능한 추상적 해설문으로 바꾸었을 뿐 아니라, 나아가 벤야민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오역들로 점철되어 있다.

이 번역문 1장에만도 심각한 수준의 오역들이 튀어나온다. 가장 심각한 오역은 Graphik을 '판화'라고 번역한 것이다. 여기서 '그래픽'이란 어떤 특정한 매체를 통해서 그려진 그림이 아니라, 대상을 그림을 통해 묘사하는 그림 일반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를 '판화'라는 도대체 어디서 연유했는지 모를 번역어로 대치하다 보니 „목각이 등장함으로써 비로소 처음으로 판화가 기술적으로 복제가능하게 되었다.“ 와 같은 이해하기 힘든 번역 문장이 생겨났다. 도대체 '판화가 기술적으로 복제'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판화를 찍어내게 하는 원판(나무 혹은 동판 등)이 기술적으로 복제된다는 것인가?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목각을 통해 판화 원판이 기술적으로 복제된다? 아니면, 원판을 통해 종이위에 찍어낸 '판화'가 기술적으로 복제된다는 말인가? 원래 판화는 원판에 대고 여러번 찍어낼 수 있는 매체 아닌가? 그렇다면 도대체 목각에 의해 비로소 판화가 기술적으로 복제가능하게 되었다는 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벤야민의 이 번역문 앞에서 머리를 썩혔을 독자들은 벤야민이 아닌 번역자에게 분노할 일이다. 이는 독자들에게 불필요한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게 하는 명백히 잘못된 번역이기 때문이다.

„석판 인쇄술을 통해 판화는 일상생활을 그림을 통해 담을 수가 있게 된 것이다.“라는 번역문도 이상하긴 마찬가지다. 석판 인쇄술이 발명되기 이전엔 그렇다면 판화가 일상을 그림을 통해 담을 수 없었단 말인가! „이때부터 판화는 인쇄술과 보조를 같이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판화술은 석판인쇄의 발명이 있고 난 후 수십년이 채 지나지도 않아서 사진술에 의해 다시 뒤처지게 되었다.“라는 번역문도 독자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오역 중의 하나다. 도대체 판화가 인쇄술과 보조를 같이한다는 것이 무슨말인가? 더구나 판화술이 사진술에 의해 뒤처지다니? 사진의 발명이 위기에 빠뜨린 것은 번역자가 고집부리듯 '판화술'이 아니라, 이전까지 다양한 매체에 의해 이루어져 오던 세계에 대한 시각적 모방 곧, '그래픽'들이었다.

„마치 석판인쇄 속에 그림이 그려져 있는 신문이 시각적으로 몰래 숨겨져 있던 것처럼 사진 속에는 유성필름이 숨겨져있다.“는 번역문에서 '시각적으로'는 독일어 문장의 virtuell을 번역 (오역)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신문이 시각적으로 몰래 숨겨져 있다“는 식의 우스꽝스러운, 도대체 무슨말인지 모를 혼란스러운 번역문이 탄생했다. virtuell은 우리가 '가상현실' 이라고 말할 때의 그 단어 곧, 가상적이고 잠재적이라는 의미의 단어이다. 석판인쇄가 그림과 화보가 있는 신문을 가능케 했다는 말을 벤야민은 석판인쇄 속에 잠재적으로 그림있는 신문이 숨어있다고 표현한 것이다.

폴 발레리의 인용문 중 „우리는 조그만 동작 하나로 하나의 이미지가 나타났다가는 곧 또다시 사라져 버리는 그런 영상이나 소리를 갖게 될 것이다.“는 번역문 역시 우릴 혼란스럽게 하긴 마찬가지다. 번역자는 자신이 이해하지 못한 원문의 문장을 상상력을 동원하여 매우 '시적으로' 가공함으로써 위와같은 문장 아닌 문장이 탄생하였다.  이는 " 우리는 작은 손가락 움직임, 거의 하나의 신호만으로 생겨났다가 그렇게 다시 사라지는 영상 혹은 소리를 가지게 될 것이다."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이 책이 가지고 있는 번역 상의 문제들은 이 책의 다른 글에서도 드러난다. 그리고 이 오역들은 벤야민에 접근하려는 많은 한국의 독자들의 불필요한 노력과 에너지를 소모하게 한다. 이 번역문의 이해되지 않는 문장들 앞에서 좌절한 독자들은, 번역자가 해설에서 말하고 있듯 이것이 벤야민이 사용하고 있는 '설명적, 논증적 범주로는 좀처럼 붙잡기 힘든 이미지의 언어' 때문이라고만 믿고 벤야민에로의 접근을 포기해 버릴지도 모른다.

유일하게, 얼마되지 않는 벤야민의 번역서로써 이 책이 어서빨리 개정되어 나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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