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사상사에서 인류의 역사는 '상실'의 역사로 특징지워진다. 인간의 역사는 역사가 시작되기 이전에 인간이 가지고 있었던 근원적인 소중한 무엇인가를 점점 잃어가는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 유대교와 기독교가 공유하고 있는 구약은 이 상실의 역사로서의 인간의 역사에 대한 출발점을 이룬다. 신이 만들어준 에덴 동산 속에서 모든 자연과 인간을 위해 신이 창조해 준 동물들과 평화로운 공존을 해오던 아담과 이브는 금지된 과실을 따 먹음으로써 상실의 역사로서의 인간 역사를 출발시켰다.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 힘든 노동과 출산의 고통을 겪어야 하는 인간 역사의 출발은 동시에 에덴동산에서 가지고 있었던 모든 것들을 잃어버린 상실의 역사의 출발이었던 것이다. 인간은 자연과의 평화로운 공존과 신에게 배운 언어와 세계 사이의 원초적 통일성, 영원히 살 수 있었던 인간의 삶의 시간과 그를통한 세계 시간과의 조화를 잃어버렸다.

창조주가 마련해 준 낙원의 모든 것을 잃어버린 이 최초의 상실은 그러나, 이후 인류 역사가 마련해주는 상실의 첫 출발에 불과했다. 중세 신학교부들은 저 최초의 가장 결정적 상실 이후 인류의 역사가 얼마나 많은 얼마나 큰 상실의 역사에 다름아닌 가를 이야기한다. 이들에게 있어 사람들 사이의 지배와 불평등, 노예, 엄격한 처벌과 법률에 의한 지배는 원죄 이후 점점 상실해 가는 인간의 원초적 윤리성을 극복하기 위해 인류가 도입할 수 밖에 없는 필요악들이었다.[1] „이성을 가진 존재로 그리고 신을 닮게 창조된 존재로서 인간은 다만 이성이 없는 피조물들만을 지배해야 했다. 인간을 지배하는 인간이 아니라, 동물을 지배하는 인간이 그것이다... 우리가 분명히 보아야 할 것은 노예가 생겨나게 된 것은 (창조의 질서가 아니라) 인간의 죄에 의해서인 것이다. 노예의 첫번째 원인은 죄요, 그것이 인간을 강제를 통해 다른 사람 밑에서 일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 신의 나라, 19권 15절) 그 어떤 지배나 강제, 복종과 처벌도 필요없었던 인류는 저 최초의 죄로인해 점점 더 많은 것들을 상실해 갈 것이다.

물론 인간의 역사는 이러한 상실만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저 상실에 못지않게, 아니 어쩌면 잃어버리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을 인류의 역사는 얻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간은 시간이 지나가면서 축적되는 더 많은 세계에 대한 '지식'과 그 지식에 근거하고 있는 문명을 이룩해왔고, 소위 과학적 지식에 근거해있는 이러한 문명은 점점 더 인류를 모든 강제와 부자유로부터 해방시킬 것이다! 소위 역사의 '발전' 개념에 기초해 있던 계몽주의 초기 과학과 합리적 지식들에 대한 낙관적 믿음 속에서 사람들은 에덴동산 이후 우리가 상실했던 것을 보상해 줄만한 위안을 찾았다고 믿었다.

그러나, 정말 저 과학과 그를 통한 문명이 인간이 잃어버린 것을 보상해 줄 수 있는 것일까? 아니 어쩌면 저 과학과 문명은 오히려 다른 한편 그나마 인간이 지니고 있었던 중요한 무엇인가를 그 댓가로 치르고서 얻어지는 것은 아닌가. 인류의 문명이 사실상 인간이 지니고 있었던 자연성, 조화로운 본능에 의거한 자유로운 삶을 억압하고, 훼손시킨 바탕 위에 서있다고 하는 루소의 문명론은 잊고 있었던 인간의 상실의 역사를 상기시켜준 결정적 한방이었다. 인간 문명의 역사란 결국 우리가 지니고 있었던, 인간의 행복의 원천이었던 자연과 조화로운 본능을 상실해가는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

과학과 그것의 결과가 자연에 대한 파괴로, 그로인해 인간에까지 미치는 부작용으로, 심지어 인류 전체를 절멸시킬 수 있는 위협으로 다가오기 시작하면서 저 '상실의 역사'는 더 큰 힘으로 사람들의 가슴을 사로잡기 시작했다. 자연은 인류의 생존까지를 위협할 정도로 점점 더 황폐해져가고, 사람들은 점점 더 큰 처벌과 폭력을 통해서만 규제될 수 있을 정도로 포악해져 가며, 인간의 인간에 대한 지배와 폭력은 더 가증스러워지며, 인간 사회는 어떤 낙관적 전망도 갖지 못할만큼 혼란스러워져 간다고 사람들은 믿기 시작했다.

마르크스가 인간에 의한 인간에 대한 지배, 인간의 탐욕에 의한 자연과 인간의 황폐화가 사실상 '자본주의'라고 하는 특정한 역사 단계의 산물이었다고 선언했을때, 그리하여 저 역사적 단계가 극복된다면 인간의 상실의 역사는 종말을 고할 것이라고 분석했을 때, 그건 인류 역사 전체를 상실의 역사로 비관하고 있었던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의 커다란 위로였을 것이다. 무엇인가 무척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다는, 아니 지금 현재도 계속 잃어가고 있다는 위기감이 사람들을 절망과 비관을 향해 몰아대고 있을 때 맑스는 상실의 역사를 상대화시킴으로써 탈출구를 제시해주었다.

그러나, 맑스는 자본주의의 극복이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발전된 생산력에 의해 가능하다고 말함으로써 자본주의의 지양을 역사적 필연성으로 만드는 결정적인 자기 모순을 범했다. 이 역사가, 무언가 소중한 것을 잃어가는 상실의 역사가 어떻게 거꾸로 그를 극복하게 할 원동력과 필연성을 제공한다는 말인가. 우리가 견디는 오늘의 이 고통과 상실이 이 고통과 상실을 극복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필요한 전제 조건이란 말인가.  이 고통과 상실을 극복하기 위해 이 고통과 상실을 감수해야 한다고? 오히려 자본주의의 극복은 우리가 그로부터 탈출하고 벗어나고자 하는 이 역사 자체의 극복으로 이해되었어야 했다. 맑스가 말했던 혁명은 역사 속에서 이 역사로부터 동력을 얻는 '역사 내에서의 혁명'이 아니라, 이 상실의 역사 자체를 끝장내는 '역사 외부에서의' 단절이었어야 했다.

인간이 이 역사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필연적인 역사적 존재임을 받아들인다면 저 상실의 역사에 대한 음울한 비관론은 피해갈 수 없다. 상실의 역사에 대한 이 비관적 정조는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 변증법>에까지 이어진다. 우리가 이 역사 자체로부터 탈출할 수 없는 한 우리는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는 이 '상실'을 견디는 다른 방법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유일한 방법은 아직 완전히 상실되어 버리지는 않은, 그러나 이 인간의 역사에 의해 멸종의 위기에 처해있는, 저 위태롭게 남아있는 원초적 자연성을 보존하는데 있다. 인간의 문명과 모든 것을 자신의 메마른 틀 속으로 흡수해 버리는 저 합리적 이성이라는 괴물, 자연과의 원초적 화해 대신에 가상의 유희만을 제공하는 문화산업들로 부터 소멸의 위협에 처해있는 미메시스를 구해내는 것, 여기에 오늘날 철학과 비판의 과제가 있다고 아도르노는 말한다. 베케트의 연극 속에서, 쉔베르크와 말러의 교향곡 속에 아직 남아있는, 저 채 상실되지 않은 미메시스가 이 상실의 역사를 견디게 해 주는 유일한 위안이다.

발터 벤야민의 역사철학은 <계몽 변증법>과 맑스주의의 그것 사이에 머물고 싶어한다. 벤야민은 맑스와 더불어 인류가 견뎌야만 하는 저 고통스러운 상실의 역사가 자본주의의 극복과 결부되어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는 이 극복이 '역사적 진보'라는 이름하에 이루어지는 '역사 속에서의 정치적 혁명'을 통해 이루어질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이 상실의 역사는 이 역사의 바깥에서 오는 메시아적 구원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 지금까지의 역사를 파괴하고, 역사의 종말을 가져올 저 메시아는 그러나, 지금 이 역사로 부터 출현하지 않는다. 만일 그렇다면 그는 결국 이 상실의 역사 속에서 생겨난 하나의 에피소드 일 뿐, 결코 이 역사 자체를 종결시키는 구원자가 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상실의 역사가, 어떤 식으로든 극복될 수 있고 극복되어야 한다고 믿는 벤야민은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비판이론가들에게 공통적인 비관적 정조를 물려받는다. 우리를 구원해 줄 메시아가 역사의 바깥에서, 비역사적으로 도래해야만 한다는 것은, 곧 지금 이 역사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저 메시아가 도래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벤야민의 메시아가 맑스의 혁명과 결정적으로 구별되는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1] Augustinus, Vom Gottesstatt, Buch 19, Ka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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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 성학대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어 있는 마이클 잭슨은 테레비젼 광고를 통해 시청자들에게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 자기를 믿어달라 호소한다. 식물인간 상태에 빠진 딸에 대한 인공급식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Terri Schiavo   부모는 언론과 방송의 인터뷰를 통해 일반 사람들에게 호소한다. 이들은 재판과 판결에 직접적인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재판관이나 판사, 정치가들 대신에 자신의 팬들에게, 일반인들에게 언론과 방송에 호소하는 것일까.  

 

자신의 결백을, 혹은 자신의 억울함을, 자신의 올바름을 소위 대중 여론에 호소하는 것은 대중 여론이라는 것이 실제적으로 그러한 사회적 논란에 대한 사회적 판결의 실질적 힘을 가지고 있는 곳에서 가장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그리고, 미국은 바로 대중들의 여론과 다수의 의견들이 사회적 판결의 권한을 가지고 있는 나라다. 이는 어디에서보다 미국의 재판제도에서 확인할 있다.

 

 몇몇의 전문가들대신 미국에선 소위 사회 곳곳에서 자신의 직업과 역할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일반시민들로 부터 선출된 배심원 다수결을 통해 재판의 최총판결을 내린다. 이들의 판결은 소위 사회의 건전한 이성 대변하는 Common Sense로써 논란이 되고있는 사안에 대한 사회 공동체의 일반적 입장을 드러내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사회 대다수의 일반 구성원들에 의해 옳다고 혹은 그르다고 수용되는 것이 사회적 진리이며, 그에 의거해 사회의 사안들이 결정되어야 한다는 공리주의적 입장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사회 대대수의 견해가 혹시 이데올로기적 혹은 대중적 조작의 결과는 아닌지, 그들이 객관적이고 윤리적인 판단기준보다는 집단적 이해나 감정에 의거해 행동하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라는 질문들은 여기서는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Common Sense“ 대한 믿음에선 여기, 지금 실천적인 삶의 맥락과는 동떨어져있는 객관적이고 초월적인 진리에 대한 추구는 관념적 낭비일 뿐이다. 

 

재판관과 판사들의 전문가가 논란이 되는 사회적 사건들에 대해 판결을 내리는 독일의 재판제도는 이와는 다른 철학적 기반에 있다. 여기에선 사회 대다수의 견해가 비합리적 감정과 개인적 이해관계, 이데올로기적 왜곡의 소산물일 가능성을 경계한다. 이러한 서로 다른 재판제도는 사회적 진리를 주장하는 서로 다른 방식을 낳는다. 미국의 재판장에서 검사나 변호사는 전문가들이 아닌 사회 일반인들의 평균적 감성이나 통념적 사유방식에 호소한다. 검사는 사건이 얼마나 끔찍하게저질러졌는지를 묘사하고, „선량하고 성실한 시민이었던 피해자가 사건을 통해 얼마나   고통과 슬픔 겪게 되었는지를 강조한다. 그는 가해자의 과거 전력들을 일반 시민들에게 위협적으로 보이게끔  강조하고, 그가 사회에 남아있을 경우 발생하게 위험요소들을 부각시켜 배심원들의 불안심리를 자극한다.  백인보다는 흑인이, 경찰보다는 할렘의 시민이 재판에서 패배할 가능성이 훨씬 높은 것도 전문가들의 판단보다는 일반 시민들의 우세한 견해가 영향을 발휘하는 미국사회의 특징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마이클 잭슨의 재판이 독일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는 방송광고를 통해 자신의 팬들과 잠재적인 팬들인 시청자들에게 호소하기 보다는 자신의 무죄와 결백을 뒷받침해줄 증거나 증인, 정교한 논거와 논증들을 확보하는데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투여했어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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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철초고에서 칼 맑스는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가 대상에 대한 모든 감각들, 곧 만지고, 보고, 듣고, 느끼고, 냄새맡고, 맛보는, 인간과 세계 사이의 교통을 가능하게 하는 이 감각들을 단지 사적으로 ‚가진다’라고 하는 소유 감각으로만 축소시켰다고 말한다. 사적 소유관계 하에서 „한 대상은 나만의 자본으로 존재하거나, 내가 그것을 먹거나 마시거나 내 몸에 지니거나 그 안에 살게되거나 한 한에서만, 간단히 말해 우리에 의해 사용될 때에만 비로소 우리의 것이 된다." (Karl Marx, Ökonomisch-philosophische Manuskripte, in Schriften, Manuskripten, Briefe bis 1844, Berlin Dietz, S.540)

맑스는 나아가 인간의 다양한 감각을 다만 '소유한다'고 하는 감각으로 축소시킨 사적 소유제가 폐지되어야만 비로소 모든 인간적인 감각들이 완전한 해방을 맞게될 것이라고 말한다. 사적 소유제 하에서 사람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사물들과 인간이 생산해낸 물건들을 만지고, 보고, 느끼는 감각적 향유를 다만 그것을 사적으로 소유하고서야 누릴 수 있다. 말하자면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는 자신의 소유가 아닌 많은 사물과 대상들에 대한 감각적 접근 가능성을 차단시켰다는 거다. 내 지우개 만지지마.  내 책 보면 안돼!  내 장난감 가지고 놀지마...  

맑스가 꿈꾸었던 인간의 모든 감각들이 해방된 사회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그곳에선 말하자면 어떤 대상이 구지 나의 소유가 아니더라도 난 그것을 만지고, 보고, 듣고, 냄새맡고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사회의 모든 재화들이 공유되어 있어 그 누구도 특정한 대상들에 대한 독점적인 감각적 향유를 주장하지 못할 그 사회에서 사람들은 자연과 그로부터 인간이 만들어내는 모든 재화들을 사적으로 소유하지 않고서도 함께 향유하고 즐길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맑스가 꿈꾸었던 저 인간 감각의 해방은 맑스가 꿈에도 생각치 못했을 엉뚱한 장소에서 실현되고 있다. 누구든지 원하는 자는 집어 먹어볼 수 있는 음식들로 가득찬 백화점 식품부, 스스로 만져보고, 입어보고 살 수 있도록 되어있는 옷 매장과 직접 작동하고 들어볼 수 있는 티브이, 라디오, 전자제품 매장, 시승을 가능케하는 자동차 매장 등 새로운 자본주의적 상품시장...  

다만 여기선 사적소유와 인간 감각의 관계가 뒤바뀌어 있을 뿐이다. 누구나 먹어보고, 만져보고, 들어보고, 타 보고, 입어볼 수 있으나 그 물건들은 다만 돈을 지불한 사람들에게만 소유된다. 누구나 만져보고, 누구나 타보고, 누구나 입어볼 수 있는 것들을 그래도 자신의 것으로 소유한다는 것이 주는 흥분!  우린 1844년의 맑스가 아직 알지 못했던 새로운 소유의 감각을 익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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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과학, 문학이 분화되지 않던 근대 이전의 학문들과 마찬가지로 근대 이전의 세계에선 또한 다양한 가치들 또한 아직 분화되지 않았다. 진-선-미가 떨어질 수 없는 가치로 결합되어 있던 이 시대엔 참되고 선한 것은 반드시 아름다울 수 밖에 없으며, 역으로 아름다운 것은 곧 그 내에 선과 참을 함유하고 있다는 생각이 일반적이었다. 자신 주변의 아름다운 대상에 대한 추구(에로스)가 결국엔 선과 진리의 이데아에 대한 추구로 이어진다는 플라톤에게서 이는 분명히 표현되고 있다.

도덕적 순결함에다 아기 예수를 낳음으로써 크리스트교적 진리의 모태이기도 한 성모 마리아가 당연히 미인일 수 밖에 없었던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이다. 선한 주인공들은 잘 생기고 아름다운 반면, 악당들은 그렇지 못하게 등장하는 오늘날 헐리우드의 많은 영화에서도 저 오래된 진-선-미의 결합은 아직도 힘을 발휘하고 있다.

진-선-미가 떨어질수 없는 가치들로 결합되어 있었던 시대는 서양에서는 르네상스 이후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마키아벨리즘을 통해 정치의 영역에서 분명하게 드러난 이러한 변화는 정치가 곧 ‚정의’이자 ‚선의 실현’으로 이해되어왔던, 더구나 기독교적 종교적 가치가 접목되어 더욱 강화된 이러한 가치들이 이제 서로 상대적 자율성을 갖는 것으로 독립하게 되는 것으로 드러난다. 동화나 설화, 민중설화의 영역에서 ‚아름다운 마녀’가 등장하게 되는 것도 이 시기 이후의 일이다. 진-선-미의 가치가 극단적으로 상대화되어 분리되게 되는 과정을 많은 이들은 보들레르 이후 서구의 미적 근대성에서 본다. 아름다움을 위해서 비도덕적, 비윤리적 행위조차 정당화시키려고 했던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 등에서 이러한 경향은 극단화되어 드라난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제 참된 것은 반드시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며, 아름다운 것이 반드시 도덕적으로 선하거나 참된 것도 아니라는 진-선-미의 상대적 자율성, 나아가 그들 사이의 갈등을 거의 당연한 것으로까지 받아들인다.

결합되어 있던 진-선-미의 가치가 분화되고 자율화되는 과정을 이처럼 중세/전근대에서 근대적 사유로의 이행 과정으로 이해할수 있다면 동화 백설공주는 저 이행기의 한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백설공주의 계모 왕비는 백설 공주 다음으로 ‚이 세상에서 두번째로 예쁜’미인이다. 아름다움의 가치를 구현하고 있는 그녀는 그러나, 백설공주를 죽여서라도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예쁜 미인이 되고자 하는 ‚악인’이다. 여기서 아름다움은 악함이라는 대립적 가치와 결합되어 있다. 꺼꾸로 말하면 악한 계모 왕비는 ‚아름다움’이라는, 전 근대 시대에서라면 대립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가치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악인 계모 왕비는 또한 ‚참됨/진리’도 소유하고 있다. 백설공주에 등장하는 ‚마술거울’이 그것이다. 계모 왕비의 방에 걸려있는 마술 거울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지?’라는 질문에 늘 진리만을 대답하도록 되어있는 거울은 자신의 그 ‚어쩔수 없는 진리’로 인해 계모 왕비를 자극, 그녀의 악행을 출발시키게하는 원인이 된다. 전통적으로 대립되는 것으로 여겨져왔던 진과 거짓, 선과 악함, 미와 추의 대립 구도가 저 왕비와 거울의 관계에서는 묘한 방식으로 교차한다. 왕비라는 악이 소유하고 있는, 늘 진리를 말할 수 밖에 없는 거울은 그를통해 „선함’과 결합되어 있던 자신의 도덕적 기반으로부터 벗어나 그의 대립물인 악함의 ‚수단’, 아니 나아가 그 악함이 발현하게 하는 ‚원인’으로까지 활약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다른 식의 해석도 가능하다. 악한 계모 왕비는 사실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백설공주의 아름다움이 제거되어야만 발현되는 것이다. 나아가 계모왕비는 진리와도 대립하고 있다. 그녀는 진리, 곧 자신이 백설공주보다 아름답지 못하다는 진리를 ‚참지못해’결국 백설공주를 죽일 결심을 (악을) 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그녀의 이런 결심을 일으키게 한 건 또한 저 ‚아름다움’에의 추구이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행위는 플라톤에게서도 곧 ‚진리’를 추구하는 첫걸음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그녀가 추구하던 아름다움은 그녀의 아름다움을 둘러싼 진리에서 좌절되고, 그녀는 급기야 그 ‚진리’를 인위적으로 해소시키려 결심하게에 이른다. 결국 승리하는 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백설공주의 선함이다.

 이와는 다른 차원에서이긴 하지만 심청전 역시 중세시대와는 달라진 멘탈리티를 반영하고 있다. 물론, 심청은 선하고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까지 아버지를 구하려는 효녀에다, 연꽃에서 등장한 후 국왕을 반하게 만들만한 미녀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녀의 이러한 선함은 아버지의 눈뜸을 통해 보상을 받는다는 점에서도 중세적 가치관에서 크게 벗어나있지 않다. 그러나, 최소한 일국의 왕이 어디 출신인지도 모를, 다만 연꽃에서, 아름다운 자태로 나타난 ‚여인’을 왕비로 – 아마, 정식 왕비라기 보다는 총애하는 ‚첩’이었겠지만 – 맞이한다는 발상은 이미 저 확실한 신분제도 상의 윤리적 질서의 해체를 전제로 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하다.

 이러한 중세적 가치의 해체과정은 흥부전에서도 드러난다. 장자가 아버지의 모든 재산을 물려받는 중세적 관습에 따라 놀부는 동생의 모든 재산을 자신이 독차지하고는 동생과 그의 가족을 쫓아낸다. 그러나, 흥부전은 이러한 형의, 당시의 관습적 전통에서 보자면 정당하기조차 했을 행동을 ‚인간주의적’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동생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길 거부하는 형은 이를통해 비인간적이며 고약한 욕심꾸러기로 묘사된다. 말하자면 장자상속이라고 하는 중세적 관습이 휴머니즘이라고 하는 새로운 시대적 경향에 의해 비판받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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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엔 우릴 매료시키는 물건들로부터 출발한다. 누군가가 가지고 있던 장난감, 우연히 고물상에서 접한 옛 물건, 헌책방에서 만난 한권의 멋진 고서적 등이 우리 내부의 수집가적 열망에 불을 붙인다. 그리곤 우린 매혹시켰던 그 물건들을 자신의 공간 속에 가져오려는 욕구로 밤잠을 설치기 시작한다.

수집가들은 물건들을 소유하고 가지려고 한다. 그들은 자신이 수집하고자 하는 물건이 저기, 저 곳에, 나아가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만족하지 못한다. 그들은 박물관에 혹은 골동품 가게에 '만지지 마시오'라는 딱지와 함께 붙어있는 물건들을 멀찍이 구경하는 것만으론 성이 차지 않는다. 그들은 그 물건을 자신의 것으로, 자신의 공간 속으로 가져와 언제든지 꺼내 만져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점에서 수집가들은 발터 벤야민이 멋지게 표현했듯, 촉각적 본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1

자신이 수집하는 물건들을 언제라도 자신이 원할 때 자신에 앞에 현전하게 만드는 참된 방법은 그것들을 우리의 공간 속에 가져다 놓는 것이다.2  이 점에서 수집가들은 등산자나 산책가 혹은 박물관 방문자 들과는 다르다. 등산자나 산책자, 박물관 방문자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물건들이 있는 공간에 자기 자신을 가져다 놓음으로써 그 물건들을 자신 앞에 현전하게 만든다. 등산가는 배낭을 메고 산에 오름으로써, 박물관 방문자는 자신이 좋아하는 물건이 전시되는 박물관을 방문함으로써 스스로를 만족시킨다. 그러나, 수집가들은 물건들을 자신의 공간 속으로 가져다 놓아야만, 언제든지 자신이 원할 때 그것들을 자신 앞에서 현전하게 만들 수 있도록 그 물건들을 아예 소유하고 가지고 있어야만 적성이 풀리는 인간 들이다.

일단 어떤 물건들을 수집하기 시작하면 이제 수집가는 또 다른 하나의 형이상학적 욕구에 의해 이끌린다. 총체성, 완전성에 대한 욕구가 그것이다. 물건들이, 그것이 어떤 물건이든 수집가에 의해 분류되고 범주화되면 그것은 하나의 완전한 체계적 총체성을 지향한다. 분류나 범주화는 곧 그를 통해 하나의 체계를 완성하려는 형이상학적인 총체성 욕구의 출발점이다.3

자신이 수집한 물건의 체계에 무엇인가가 빠져있다는 결핍감은 수집가로 하여금 그 빠져있는 것을 어떻게 해서든 채워넣으려는 욕구에 안달하게 한다. 연도별로 수집한 책들 중 빠져 있는 1949년 판과 유럽 모든 국가의 주화모음에서 비어있는 덴마크 주화의 자리는, 그를 바라보는 수집가의 가슴에 휑하니 비어있는 구멍을 만든다. 그리곤 어떻게 해서든 그를 채우고 나서야만 비로소 치유되는 완전성의 결핍이라는 병을 낳는다. 낯과 밤, 하늘과 바다, 나무와 풀, 해와 별, 물고기와 새, 온갖 들짐승들을 지은 신이 천지 창조의 여섯째 날 '자신의 모습을 닮은 인간'을 만듦으로써 창조를 완성했듯이, 수집가는 자신의 수집물에 빠져있는 공백을 채워넣음으로써만 일곱째 날의 안식을 맞이할 수 있다.

수집가에게 있어 물건들은 다만 그 물건 자체의 가치로서 의미를 갖지 않는다. 수집가에게 그 수집품들은 그 물건들의 과거, 물건들의 역사를 통해 말을 건다. 수집가에게 자신의 수집품들은 그것이 얼마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얼마나 희귀한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디에서 생산되었고, 어떤 진귀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 등의 그 물건 자체의 기원과 역사뿐 아니라, 그 물건과 수집가와의 관계의 역사, 곧 그 물건을 자신이 어디에서 발견하였으며, 그것을 처음 보았을때의 감격은 어느 정도였는지, 그리고 어떤 힘들고 아슬아슬한 과정을 거쳐 자신의 손에 넣게 되었는지 등의 역사를 통해 더 큰 의미를 갖는다. 그는 보관해둔 자신의 수집품 하나 하나를 다시 꺼내 볼 때마다 그 물건과 자신 사이에 일어났던 과거를 회상하며, 마치 뮤즈 신에 의해 영감에 빠져들듯 그 물건과 자신 사이의 과거가 주는 아우라4에 빠져든다. 그 물건을 구하는 과정에 얽힌 우여곡절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물건이 수집가에게 갖는 아우라는 더 크고 오래 지속될 것이다. 그 물건들을 통해 영감을 받은 수집가가 자신의 물건을 꺼내 바라볼때 '그는 마치 그 물건들을 통해 물건들의 저편을 바라 보고 있는 마법사와도 같다.'5

저 책의 이전 소유자, 애초의 구입가격, 경매장에서의 긴장감, 그리고 처음 그 책을 손에 잡았을 때의 환희 등이 저 책이라는 물건과 더불어 수집가의 진열장에 꽂혀져있다. 책장에서 그 책을 뽑아든 수집가에게 그 책은 자신의 과거들을, 자신의 역사성을 수집가에게 펼쳐보임으로써 수집가를 마법사와 같은 도취에 빠지게 한다. 수집가에게 자신의 수집품들이 갖는 아우라는 그 물건들이 수집가에게 펼쳐보이는 물건들의 역사성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관상학자가 사람들의 얼굴 모습만을 보고 그의 과거와 그의 운명을 읽어내듯이 우리의 수집가들은 자신의 수집물을 보면서 그 물건의 과거와 그것의 숙명을 읽어낸다. 그러한 점에서 그들은 벤야민이 말하듯 '물건의 관상학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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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Walter Benjamin, Das Passagen-Werk,Shurkamp 1982, Erster Band, S.274

2Walter benjamin, O.g. S.273

3개별적인 것들이 주어져 있을 때 그로부터 존재하지 않는 보편자를 추출해내는 능력인 칸트의 '반성적 판단력'은 현상계에서는 사실상 그에 대해 알 수 없는 가상적 완전성을 이성 이념으로 상정하게 한다. 이미 보편이 알려져 있을 때 개별적인 것들을 그 보편아래 포섭시키는 '규정적 판단력'이 그러한 점에서 존재하는 사물들로 구성되는 하나의 체계를 지향하지만, 우리의 경험을 통해 사실상 인식할수 없는 그 체계의 완전성의 이념은 반성적 판단력을 통해서 요청되는 것이다.

4발터 벤야민의이 말하는 '아우라'가 이처럼 대상이 갖는 역사성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라는 사실은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서 말하는 '복제가 아닌 진품이 갖는 아우라'를 통해서도 설명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진품 모나리자가 우리에게 주는 아우라는, 저 그림 속에 다빈치의 손길과 숨길이 직접 닿았었다는 역사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복제품은 그 그림의 '내용'을 전달해줄 수는 있지만, 그 진품이 갖는 물질적 역사성을 전해주지는 못하며, 그런 점에서 진품이 갖는 아우라를 갖고있지 못하다.

5Walter Benjamin,O.g.S.274/275

6walter benjamin, S.273

7Walter Benjamin,S.274

8Walter Benjamin,S.274/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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