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과학, 문학이 분화되지 않던 근대 이전의 학문들과 마찬가지로 근대 이전의 세계에선 또한 다양한 가치들 또한 아직 분화되지 않았다. 진-선-미가 떨어질 수 없는 가치로 결합되어 있던 이 시대엔 참되고 선한 것은 반드시 아름다울 수 밖에 없으며, 역으로 아름다운 것은 곧 그 내에 선과 참을 함유하고 있다는 생각이 일반적이었다. 자신 주변의 아름다운 대상에 대한 추구(에로스)가 결국엔 선과 진리의 이데아에 대한 추구로 이어진다는 플라톤에게서 이는 분명히 표현되고 있다.
도덕적 순결함에다 아기 예수를 낳음으로써 크리스트교적 진리의 모태이기도 한 성모 마리아가 당연히 미인일 수 밖에 없었던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이다. 선한 주인공들은 잘 생기고 아름다운 반면, 악당들은 그렇지 못하게 등장하는 오늘날 헐리우드의 많은 영화에서도 저 오래된 진-선-미의 결합은 아직도 힘을 발휘하고 있다.
진-선-미가 떨어질수 없는 가치들로 결합되어 있었던 시대는 서양에서는 르네상스 이후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마키아벨리즘을 통해 정치의 영역에서 분명하게 드러난 이러한 변화는 정치가 곧 ‚정의’이자 ‚선의 실현’으로 이해되어왔던, 더구나 기독교적 종교적 가치가 접목되어 더욱 강화된 이러한 가치들이 이제 서로 상대적 자율성을 갖는 것으로 독립하게 되는 것으로 드러난다. 동화나 설화, 민중설화의 영역에서 ‚아름다운 마녀’가 등장하게 되는 것도 이 시기 이후의 일이다. 진-선-미의 가치가 극단적으로 상대화되어 분리되게 되는 과정을 많은 이들은 보들레르 이후 서구의 미적 근대성에서 본다. 아름다움을 위해서 비도덕적, 비윤리적 행위조차 정당화시키려고 했던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 등에서 이러한 경향은 극단화되어 드라난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제 참된 것은 반드시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며, 아름다운 것이 반드시 도덕적으로 선하거나 참된 것도 아니라는 진-선-미의 상대적 자율성, 나아가 그들 사이의 갈등을 거의 당연한 것으로까지 받아들인다.
결합되어 있던 진-선-미의 가치가 분화되고 자율화되는 과정을 이처럼 중세/전근대에서 근대적 사유로의 이행 과정으로 이해할수 있다면 동화 백설공주는 저 이행기의 한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백설공주의 계모 왕비는 백설 공주 다음으로 ‚이 세상에서 두번째로 예쁜’미인이다. 아름다움의 가치를 구현하고 있는 그녀는 그러나, 백설공주를 죽여서라도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예쁜 미인이 되고자 하는 ‚악인’이다. 여기서 아름다움은 악함이라는 대립적 가치와 결합되어 있다. 꺼꾸로 말하면 악한 계모 왕비는 ‚아름다움’이라는, 전 근대 시대에서라면 대립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가치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악인 계모 왕비는 또한 ‚참됨/진리’도 소유하고 있다. 백설공주에 등장하는 ‚마술거울’이 그것이다. 계모 왕비의 방에 걸려있는 마술 거울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지?’라는 질문에 늘 진리만을 대답하도록 되어있는 거울은 자신의 그 ‚어쩔수 없는 진리’로 인해 계모 왕비를 자극, 그녀의 악행을 출발시키게하는 원인이 된다. 전통적으로 대립되는 것으로 여겨져왔던 진과 거짓, 선과 악함, 미와 추의 대립 구도가 저 왕비와 거울의 관계에서는 묘한 방식으로 교차한다. 왕비라는 악이 소유하고 있는, 늘 진리를 말할 수 밖에 없는 거울은 그를통해 „선함’과 결합되어 있던 자신의 도덕적 기반으로부터 벗어나 그의 대립물인 악함의 ‚수단’, 아니 나아가 그 악함이 발현하게 하는 ‚원인’으로까지 활약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다른 식의 해석도 가능하다. 악한 계모 왕비는 사실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백설공주의 아름다움이 제거되어야만 발현되는 것이다. 나아가 계모왕비는 진리와도 대립하고 있다. 그녀는 진리, 곧 자신이 백설공주보다 아름답지 못하다는 진리를 ‚참지못해’결국 백설공주를 죽일 결심을 (악을) 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그녀의 이런 결심을 일으키게 한 건 또한 저 ‚아름다움’에의 추구이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행위는 플라톤에게서도 곧 ‚진리’를 추구하는 첫걸음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그녀가 추구하던 아름다움은 그녀의 아름다움을 둘러싼 진리에서 좌절되고, 그녀는 급기야 그 ‚진리’를 인위적으로 해소시키려 결심하게에 이른다. 결국 승리하는 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백설공주의 선함이다.
이와는 다른 차원에서이긴 하지만 심청전 역시 중세시대와는 달라진 멘탈리티를 반영하고 있다. 물론, 심청은 선하고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까지 아버지를 구하려는 효녀에다, 연꽃에서 등장한 후 국왕을 반하게 만들만한 미녀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녀의 이러한 선함은 아버지의 눈뜸을 통해 보상을 받는다는 점에서도 중세적 가치관에서 크게 벗어나있지 않다. 그러나, 최소한 일국의 왕이 어디 출신인지도 모를, 다만 연꽃에서, 아름다운 자태로 나타난 ‚여인’을 왕비로 – 아마, 정식 왕비라기 보다는 총애하는 ‚첩’이었겠지만 – 맞이한다는 발상은 이미 저 확실한 신분제도 상의 윤리적 질서의 해체를 전제로 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하다.
이러한 중세적 가치의 해체과정은 흥부전에서도 드러난다. 장자가 아버지의 모든 재산을 물려받는 중세적 관습에 따라 놀부는 동생의 모든 재산을 자신이 독차지하고는 동생과 그의 가족을 쫓아낸다. 그러나, 흥부전은 이러한 형의, 당시의 관습적 전통에서 보자면 정당하기조차 했을 행동을 ‚인간주의적’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동생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길 거부하는 형은 이를통해 비인간적이며 고약한 욕심꾸러기로 묘사된다. 말하자면 장자상속이라고 하는 중세적 관습이 휴머니즘이라고 하는 새로운 시대적 경향에 의해 비판받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