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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 K
돈 드릴로 지음, 황가한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3월
평점 :

인간은 탄생은 선택할 수 없지만 죽음은 선택할 수 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지만
삶의 마지막은 스스로가 원하는 데로 끝낼 수 있다.
과학과 기술이 급속하게 발전하면서 죽음을 기획하는 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고 느낀다.
이 책은 냉동 보존술을 주제로 인간의 삶과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이야기한다.
다소 어려운 듯한 주제인지라 주인공의 심리에 쉽게 다가갈 수 없었지만
인류가 공통으로 마주치게 되는 현실을 나도 미리 마주해볼 수 있었다.
이 소설은 제프 록하트가 아버지 로스와 만나게 되면서 시작한다.
불치병에 걸린 새어머니 아티스를 위해, 억만장자인 아버지는
기꺼이 이 비밀 실험에 거액을 투자한다.
사랑하는 아내를 영원히 남겨 두고 싶은 마음에, 그리고 그녀와 죽어서도 함께하고 싶은 아버지의 마음을 아들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저 돈 많은 사람의 치기로만 생각할지도 모른다.
제프가 목격한 냉동 보존술은 충격적이다.
몸에서 불필요한 장기를 적출하고 나체로 투명한 캡슐 안에 보관한다.
대부분 이 실험에 참가한 사람들은 불치병에 걸린 사람들이라 여겼다. 하지만 자발적으로 조력 자살을 통해 냉동 보존되길 원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스스로를 미래의 선구자라 여긴다.
소설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가 전반부이며 아버지는 결국
조력 자살을 통해 냉동 보존에 참여하게 된다.
그 후 제프와 연인인 에마와 그의 아들 이야기가 후반부를 장식한다.
새어머니의 죽음과 아버지의 자발적 죽음, 그리고 또 다른 형태로 마주치게 되는 죽음.
연인 에마의 어린 아들이 민병대로 싸우다 총에 맞아 죽는 모습을 우연히 영상으로 목격하게 된다. 제프는 이제 근본적인 질문에 답을 찾아야 한다.
'인간은 태어남을 선택할 순 없지만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명예로울 수 있지 않은가'
여기서 제프가 선택하게 될 죽음은 어떤 형태일까.
성공하며 명예를 떨치는 삶을 위해 앞을 향해서만 달려가던 나는 내 마지막을 어떤 모습으로 남기고 싶을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을 어떻게 장식하면 좋을까.
이 책을 읽는 동안 삶보다는 죽음을 맞이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떠난 후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은 내 모습은 어떤 모습일지,
내 죽음을 진정으로 슬퍼하고 아파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원하는 만큼 행복한 삶을 살고 사라졌는지 다소 철학적인 생각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 어느 때보다 빈부 격차가 심해지고 그로 인해 겪게 되는 빈곤과 풍요가 극명한 현시대에서 죽음조차 화려함과 초라함 속에서 맞이해야 할지도 모르는 각자의 운명이 그저 서글프다.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이라는 주제와는 반대로 제대로 잘 살고 싶다는 의지를 심어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