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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 함께 정처 없음
노재희 지음 / 작가정신 / 2023년 11월
평점 :
궁금해서, 외로워서 책을 읽는다고 말하는 작가 노재희. 그녀의 삶을 잠시나마 들여다볼 수 있는 산문집이다. 정처 없으나 자유롭고 충만한 삶을 노래하는 작가의 고백은 삶과 죽음, 신의 존재, 게으름 등 평범한 일상의 다양한 순간들을 떠올리게 한다.
큰 키 때문에 늘 교실 맨 뒤쪽에 앉아 있어야 했던 학창 시절의 추억, 인생의 변곡점이 된 결핵성 뇌수막염 투병기, 남편과 함께 키우는 블루베리 나무, 이고 지고 다녀야만 했던 수많은 책들 등 나와 닮은 듯 다른 작가의 삶을 잠시나마 들여다본다.
어느 해 여름날 밤 평소보다 체온이 1.5도 높아져 응급실을 찾았다. 그렇게 마음의 준비도 없이 닥친 사고는 치사율 50 퍼센트의 무서운 병이었고 40여 일의 병상 생활 중 20여 일간의 기억은 완전히 사라졌다. 잃어버린 기억 속에는 가족의 사랑과 헌신이 있었다. 정처 없지만 외롭지 않은 시간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살아가기로 끌어당겼다.
작가는 자신이 지나온 시간들을 담담히 고백하며 어떻게 살아야 제대로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지 되묻는다. 하루를 살고 하루를 기록하며 살아내면서 소소한 일에 기뻐하는 모습에 내 삶을 돌아본다. 내 인생 역시 가족이 아프기 전과 후로 나눠진다. 갑작스럽게 보호자이자 간병인으로서 삶을 살게 되면서 일상은 중단됐고 마음의 준비 없이 하루하루 어떤 식으로든 살아냈다. 그리고 그것은 내 인생이 되었다.
오늘을 살아가고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고 현재에만 집중한다. 그렇게 하루를 살아내면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된다. 거대한 목표만을 보고 살아가던 때와 달리 지금은 하루가 풍족하다. 늘 부족하다 여겼던 마음도 사라지고 오늘도 무사히 살아냈음에 감사한 마음이 생긴다. 이 책이 마음을 울렸던 건 어딘지 모르게 비슷한 점을 찾아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오늘의 소중함을 마음속에 다시 한번 새겨본다.
p. 77
내게 미래는 상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계획할 수 있는 것은 더더구나 아니었다. 나는 장차 무엇을 하겠다는 포부를 갖거나 크게 무엇을 이루어보겠다는 꿈을 꾸어보지 못했다. 늘 사소한 일에 근심하고 소소한 일에 기뻐했다. 유일한 바람은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p. 88-89
그리고 나는 여전히 장차 무엇을 하겠다는 포부를 품거나 크게 무엇을 이루어보겠다는 꿈을 꾸지 않고 산다. 내일 무엇을 할지는 생각하지만 다음 달에 다음 해에 무엇을 할지는 생각할 줄 모른다. 그러는 대신 이렇게 하루를 살고 그것을 기록한다. 그리고 가끔은 공원의 커다란 나무 아래 앉아 햇볕을 쬐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기도 한다. 때때로 바람을 맞으며 걷기도 한다. 그건 은퇴를 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거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