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은유가 찾아왔다 - 교유서가 소설
박이강 지음 / 교유서가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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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을 무엇일까. 나는 신뢰라고 생각한다. 이 신뢰는 타인에 대한 믿음에 기반하여 형성되는 데 우리는 믿음으로 포장된 관계 속에서 표현할 수 없는 안정감을 느끼곤 한다. 박이강의 소설은 바로 이 믿음에 대한 단상을 보여준다. 믿음을 주제로 한 9편의 단편을 읽으며 잊고 있던, 아니 잊고 싶은 경험들을 다시 떠올려 본다.


​단편을 즐겨 읽지 않지만 박이강의 단편에는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마치 내 이야기를, 내가 목격한 타인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만 같았기에 몰두할 수 있었다. 오피스를 배경으로 한 각각의 인물들이 처한 상황이 낯설지 않았다. 견디는 삶에 익숙해져 한순간의 충동에도 희열을 느끼던 시간들이 문득 생각난다.


​카드 명세서와 퇴사 결심을 반복하는 10년 차 직장인의 미소, 상사에게는 비굴한 선의를 보이지만 스스로에게만은 비겁하지 않으려 하는 세영, 전 직장 상사에 대한 상처로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 계약직 지수, 불안한 미래에 휴가지에서 히스테리를 부리는 희수 등 일과 삶의 굴레에서 방황하는 이들의 모습이 측은하면서도 공감이 간다. 


​나는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걸까.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이 올 거라는 헛된 믿음을 맹목적으로 믿으며 현재를 견뎌낸다. 소설 속 다양한 인물들의 모습은 그런 나의 헌신을 알아주고 인정해 주는 것만 같다. <어느 날 은유가 찾아왔다>는 살기 위해 오늘 하루를 무사히 견뎌낸 모든 이들에게 다정한 위로를 건네는 소설이다.

​p. 13-14
내 마음은 변화를 갈구하는 만큼 변화에 저항했다. 부장을 참을 수 없어 하면서도 10년째 같은 회사에 다니고 있고, 늘 자책하면서도 여전히 습관처럼 공과금 연체료를 내며. 하물며 전 남자친구와는 그만 만날 결심을 하면서 몇 년을 더 만나지 않았던가. 어쩌면 변화에 대한 저항이야말로 지금의 삶을 지탱하는 힘인지도 모르겠다.


p. 233
오늘 하루가 지났다. 나는 무너지지 않았다. 어쩌면 아무것도 아닐지 모른다. 오늘이 어제와 비슷했듯이 내일도 오늘과 비슷하겠지. 따지고 보면 다 거기서 거기인 날들일 뿐이다. 무탈해 보인다고 무탈한 건 아님을 모르지 않지만, 나는 그렇게 보이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되는 시간을 통과하고 있을 뿐이다. 삶이 무탈하기를 바라는 건 누군가의 순정한 얼굴만을 보길 기대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임을 알고 있으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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