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모처럼 MBC 드라마 “하얀 거탑”을 보았는데,
좀 전에 엠파스 첫 화면에

‘하얀거탑’ 법정 반전... 팬들 “작위적” 쓴소리 

라는 뉴스 제목이 눈에 띄었다.
어, 난 그 간호사가 법정에 꼭 나와주기를 기원하며 드라마를 보았는데...
기사를 열어보니 그 내용인즉,

(앞부분 생략)
상황은 이처럼 장준혁측에 유리하게 작용하다 결말에 이르러 반전을 꾀했다. 유간호사가 아기용품에 돈다발을 담아 보내고 남편회사에 외압까지 넣은 장준혁 측의 비도덕적 행동에 분노를 참지 못해 법정에 출두한 것. 유간호사의 등장에 기뻐하는 김훈 변호사측과 유간호사의 재정증인 신청을 결사적으로 반대하는 조명준(장현성 분)변호사의 절박한 상황이 극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방송직후, 드라마 게시판엔 유간호사의 행동이 지나치게 비현실적이라는 팬들의 소감이 쏟아져 나왔다. “유간호사가 정의를 위해 나섰다는 설정은 여타의 드라마에서 보아온 너무 식상한 결말도출이었다” “현실적으로 볼 때, 사회생활을 하는 인물이 그렇게 쉽게 감정에 치우쳐 행동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었다”고 꼬집었다.

또한 시청자들은 “초반엔 다양하면서도 현실적인 인간 군상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줘 좋았는데, 갈수록 비현실적인 캐릭터가 등장하는 모습에 실망했다” “장준혁측의 사람들이 현실적인데 반해 권순일측 사람들, 즉 최도영 이윤진 김훈 변호사 등은 너무 비현실적인 캐릭터라 공감하기 힘들다” 와 같이 극이 초반의 흡입력을 작위적인 캐릭터 설정으로 힘을 떨어뜨리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를 나타냈다.

(후략)

기사 전문은 http://news.empas.com/issue/show.tsp/cp_tr/2444/20070226n02622

물론, 유 간호사처럼 행동하는 사람,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유 간호사가 법정에 나온 것을
“사회생활을 하는 인물이 그렇게 쉽게 감정에 치우쳐 행동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게, 참 놀랍다. 그런 행동이 ‘감정에 치우친 행동’일까.

한 사람이 그런 행동을 하기까지 그 사람의 내면에서는,
양심과 자존심과 현실적 위협에 대한 두려움이 뒤엉켜
매우 힘든 싸움을 벌였을 것이다.
그렇게 힘든 싸움을 거친 뒤에야 간신히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유 간호사가 그런 시간을 거쳤으리라는 것은,
돈다발을 받고 곧바로 원고 쪽 변호사에게 연락을 취하지 않고,
내내 원고 쪽을 돕는 이들(시민운동하는 이윤진, 변호사 김훈)의 속을 태우다
재판이 열릴 때에야 갑자기 나타난 점에서도 알 수 있지 않을까.
뭐, 재판 도중에 갑자기 나타나도록 설정한 것은
드라마의 극적 재미 때문이겠지만,
드라마 속 시간의 흐름을 생각할 때
유 간호사가 깊이 고민할 시간은 분명히 있었다.
그걸 어떻게 ‘쉽게 감정에 치우친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더 서글픈 것은
“장준혁측의 사람들이 현실적인데 반해 권순일측 사람들, 즉 최도영 이윤진 김훈 변호사 등은 너무 비현실적인 캐릭터라 공감하기 힘들다”라는 반응이다.
그래, 최도영 이윤진 김훈 같은 사람들,
사회생활하면서 만나기 어려운 존재들일지 모른다.
하지만 ‘너무 비현실적인 캐릭터’라니.
그런 사람들, 눈에 잘 안 띄기는 할지 몰라도,
세상 곳곳에 분명히 있는데.
누군가 억울한 일 당하면, 그걸 그냥 모른 척할 수 없어서
같이 고통을 느끼고 같이 헤쳐나가는 사람들, 분명히 있다.
억울한 일 겪고, 회사에서 부당한 대우 받고, 남모르게 폭력을 당했을 때
노조나 시민단체의 도움을 받았던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거칠게 단순화시켜 말해서
‘비열한 캐릭터는 현실적이고, 정직하고 용감한 캐릭터는 비현실적이다’란 생각,
약한 사람의 어려움을 함께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
그런 생각이 혹시, 사회생활을 하면서 알게 되는 
나 자신의 비겁에 면죄부를 주는 게 아닐까.
정직하고 용감한 사람은 세상에 없으니 내가 정직하고 용감하지 않아도 괜찮아,
약한 사람을 기꺼이 조건 없이 돕는 사람은 세상에 없으니
어쩔 수 없을 땐 나보다 약한 이를 짓밟아도 괜찮아, 하는 면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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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7-02-26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옆지기가 보는 드라마라 간혹 본 적이 있는데, 세평이란, 혹은 세간의 인식이란 참 냉혹하네요. 무서운 세상입니다. ㅠ.ㅠ

stella.K 2007-02-26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비교적 현실적이라고 보고 있는데, 의외군요. 당연있죠. 권순일 대변하는 쪽.
그쪽이 너무 힘들어 보이잖아요. 아, 이래서 재판 포기하겠구나 싶더라구요. 충분히 공감 가는데 왜 그런 반응일까?
물론 원작은 안 읽어봤지만, 이게 지금 원작대로 가 줄까 조금은 불안하긴 해요. 그래도 아직까지는 대체적으로 좋게보고 있습니다.^^

가랑비 2007-02-26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인님, 세상이 아니라 사람이 무서워요 징징.
스텔라님, 저도 원작은 안 읽었어요. 전 드라마나 영화가 꼭 원작과 같아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답니다. 물론 어설프게 만들어서 원작을 훼손한단 생각이 들면 화나지만, 드라마 작가도 창의성을 발휘해서 원작과 다르지만 나름 재미있게 만드는 것도 좋은 일 같아요. 저는 이제 차인표는 안 나오는 건가 궁금.^^

stella.K 2007-02-26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인표 이제 안 나오지 싶어요. 그때 자막 올라갈 때 특별출연이라고 해서 올라간 걸로 봐서는요.

가랑비 2007-02-26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주인공이 아니라 특별출연이었군요. ^^

전호인 2007-02-26 1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보았습니다. 요즘 흥미를 더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나 아이러니 한 것은 한 사람이 파멸되어가는 것을 지켜보며, 기원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아무리 극이라곤 하지만.....

가랑비 2007-02-27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네요.^^ 파멸을 원한다기보다 새사람(?) 되기를 기원하도록 해요. 그 어머니를 봐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