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추의 마음 / 나희덕 

 

배추에게도 마음이 있나 보다. 

씨앗 뿌리고 농약 없이 키우려니 

하도 자라지 않아 

가을이 되어도 헛일일 것 같더니 

여름내 밭둑 지나며 잊지 않았던 말 

―나는 너희로 하여 기쁠 것 같아. 

―잘 자라 기쁠 것 같아. 

 

늦가을 배추포기 묶어 주며 보니 

그래도 튼실하게 자라 속이 꽤 찼다. 

―혹시 배추벌레 한 마리 

이 속에 갇혀 나오지 못하면 어떡하지? 

꼭 동여매지도 못하는 사람 마음이나 

배추벌레에게 반 넘어 먹히고도 

속은 점점 순결한 잎으로 차오르는 

배추의 마음이 뭐가 다를까? 

배추 풀물이 사람 소매에도 들었나 보다.  

 

========== 

시적 화자는 배추벌레와 같은 작은 사물에도 배려를 아끼지 않는데, 이러한 모습을 통해 자연의 가치를 발견하고 자연을 소중하게 여기는 모습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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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작납작-박수근 화법을 위하여 / 김혜순 

 

드문드문 세상을 끊어 내어 

한 며칠 눌렀다가 

벽에 걸어 놓고 바라본다. 

흰 하늘과 쭈그린 아낙네 둘이 

벽 위에 납작하게 뻗어 있다. 

가끔 심심하면 

여편네와 아이들도 

한 며칠 눌렀다가 벽에 붙여 놓고 

하나님 보시기 어떻습니까? 

조심스럽게 물어 본다. 

 

발바닥도 없이 서성서성. 

입술도 없이 슬그머니. 

표정도 없이 슬그머니. 

그렇게 웃고 나서 

피도 눈물도 없이 바짝 마르기. 

그리곤 드디어 납작해진 

천지 만물을 한 줄에 꿰어놓고 

가이없이 한없이 펄렁 펄렁. 

하나님, 보시기 마땅합니까? 

 

========== 

박수근 특유의 색채와 질감(회백색의 선묘를 주요한 기법으로 하여 생활을 그려 냄.)으로 형성된 아낙네들의 모습을 통해, '납작해진 천지 만물'을 읽어 내고자 한다. 

힘겨운 세상살이에 대한 서글픔과 연민이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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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씨를 닮은 마침표처럼 / 이해인 

 

내가 심은 꽃씨가 

처음으로 꽃을 피우던 날의 

그 고운 설레임으로 

 

며칠을 앓고 난 후 

창문을 열고 

푸른 하늘을 바라볼 때의 

그 눈부신 감동으로 

 

비 온 뒤의 햇빛 속에 

나무들이 들려주는 

그 깨끗한 목소리로 

 

별건 아닌 일로 

마음이 꽁꽁 얼어붙었던 

친구와 오랜만에 화해한 후의 

그 티없는 웃음으로 

나는 항상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싶다. 

 

못 견디게 힘든 때에도 

다시 기뻐하고 

다시 시작하여 

끝내는 꽃씨를 닮은 마침표 찍힌 

한 통의 아름다운 편지로 

매일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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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피리 / 한하운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 ― 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 

어린 때 그리워 

피 ― 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인환(人환)의 거리 

인간사 그리워 

피 ― 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幾山河) 

눈물의 언덕을 지나 

피 ― ㄹ 닐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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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와 시인 / 김용택 

 

아버님은 

풀과 나무와 흙과 바람과 물과 햇빛으로 

집을 지으시고 

그 집에 살며 

곡식을 가꾸셨다. 

나는 

무엇으로 시를 쓰는가. 

나도 아버지처럼 

풀과 나무와 흙과 바람과 물과 햇빛으로 

시를 쓰고 

그 시 속에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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