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ㆍ포도ㆍ잎사귀 / 장만영 

 

순이(順伊), 벌레 우는 고풍(古風)한 뜰에 

달빛이 밀물처럼 밀려 왔구나. 

 

달은 나의 뜰에 고요히 앉아 있다. 

달은 과일보다 향그럽다. 

 

동해 바다 물처럼 

푸른 

가을 

밤 

 

포도는 달빛이 스며 고웁다. 

포도는 달빛을 머금고 익는다. 

 

순이,포도 넝쿨 밑에 어린 잎새들이 

달빛에 호젓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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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 밤, 달빛이 비치는 뜰의 모습을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묘사하고 있다. 포도와 그 잎사귀들에 스며드는 싱그럽고 호젓한 달빛은 생명력과 미적인 생성력을 함축하며, 고요하고 애수어린 느낌을 자아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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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 / 이한직 

 

눈을 감으면 

 

어린 때 선생님이 걸어 오신다. 

회초리를 드시고 

 

선생님은 낙타처럼 늙으셨다. 

늦은 봄 햇살을 등에 지고 

낙타는 항시 추억한다. 

옛날에 옛날에 

 

낙타는 어린 시절 선생님처럼 늙었다. 

나도 따뜻한 봄볕을 등에 지고 

금잔디 위에서 낙타를 본다. 

 

내가 여읜 동심의 옛 이야기가 

여기저기 

떨어져 있음직한 동물원의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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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봄날의 동물원에서 낙타를 바라보다 어린 시절 자신을 가르쳤던 선생님과 잃어버린 동심을 추억하는 심정을 그린 것이다. 잃어버린 동심을 그리워하는 아쉬움과 쓸쓸함이 따뜻한 어조 속에 배어 있다. 회고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지만 주지적인 기법과 차분한 어조로 감상에 빠지지 않고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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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강술래 / 이동주 

 

여울에 몰린 은어(銀漁) 떼 

 

삐비꽃 손들이 둘레를 짜면 

달무리가 비잉빙 돈다. 

 

가아응 가아응 수우워얼래에 

목을 빼면 설움이 솟고 

 

백장미 밭에 

공작이 취했다. 

 

뛰자 뛰자 뛰어나 보자 

강강술래 

 

뇌누리에 테이프가 감긴다. 

열두 발 상모가 마구 돈다. 

 

달빛이 배이면 

술보다 독한 것 

 

기폭(旗幅)이 찢어진다. 

갈대가 스러진다. 

 

강강술래 

강강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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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적인 회화성과 청각적인 음악성이 혼합되어 강강술래의 고전적 민속미와 거기에 투영된 한이 화사한 시어를 통해 환상적으로 표현되었다. 시각적인 춤을 여러 가지 감각적 심상과 연결시켜 표현하고 있는 시적 기교가 뛰어나며, 서정성과 간결한 균형미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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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지류(支流)에 서서 / 신석정 

 

강물 아래로 강물 아래로 

한 줄기 어두운 이 강물 아래로 

검은 밤이 흐른다. 

은하수가 흐른다. 

 

낡은 밤에 숨막히는 나도 흐르고 

은하수에 빠진 푸른 별이 흐른다. 

 

강물 아래로 강물 아래로 

못 견디게 어두운 이 강물 아래로 

빛나는 태양이 

다다를 무렵 

 

이 강물 어느 지류에 조각처럼 서서 

나는 다시 푸른 하늘을 우러러 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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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가혹한 탄압이 극에 달할 무렵, 작가적 양심을 지녔기 때문에 현실을 묵과할 수만은 없었던 시인 신석정의 심정이 드러난 시이다. 암흑 속에 발버둥치면서도 이대로 주저않을 수는 없다는 양심이 드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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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山門)에 기대어 / 송수권 

 

누이야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정정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가면 

즈믄 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 오던 것을 

더러는 물 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살아오던 것을 

그리고 산다화(山茶花) 한 가지 꺾어 스스럼없이 

건네이던 것을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낱을 기러기가 

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을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 두고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그렇게 만나는 것을 

 

누이야 아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눈썹 두어 낱이 

지금 이 못물 속에 비쳐 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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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누이를 그리워하는 정서가 시각적 심상을 통해 함축적으로 드러난 시이다. 화자는 죽은 누이를 그리워하며 재회를 기대하고 확신한다. 이로써 이 시가 불교의 윤회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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