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정 / 이육사 

 

매운 계절(季節)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北方)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高原),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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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이육사의 지사적 풍모가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절정'이라는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한 걸음의 물러섬도 허용되지 않는 극한 상황 속에서 그것을 초극하려는 의지를 노래하고 있다. 극한적 위기 상황에까지 내몰린 시적 화자는 자신이 처한 상황이 새로운 삶의 전기가 된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가혹한 현실 속에서도 아름다운 앞날을 향해 초극의 의지로 나갈 것을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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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 / 윤동주 

 

바닷가 햇빛 바른 바위 위에 

습한 간(肝)을 펴서 말리우자. 

 

코카서스 산중(山中)에서 도망해 온 토끼처럼 

둘러리를 빙빙 돌며 간을 지키자. 

 

내가 오래 기르는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 먹어라, 시름없이 

 

너는 살찌고 

나는 야위어야지, 그러나 

 

거북이야! 

다시는 용궁(龍宮)의 유혹에 안 떨어진다.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沈澱)하는 프로메테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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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육사와 더불어 2대 민족 저항 시인으로 불리는 윤동주는, 내면적 인간의 자아 성찰과 아에 수반되는 부끄러움의 미학을 통해 비극적인 세계에서 자기 희생을 다짐하는 등, 자아의 윤리적 완성을 꾀하는 시적 특성을 보였다. 이 작품은 '간(肝)'을 매개로 하여 결합된 '프로메테우스 신화'와 '구토지설'의 시적 변용을 통해 암울한 시대에 생의 본질적 가치와 양심을 지키려고 하는 시인의 의지를 형상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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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평역에서 /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雪原)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리도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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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평역 대합실에서 막차를 기다리고 있는 시적 화자는 좁은 대합실에서 톱밥 난로를 쬐며 자신처럼 막차를 기다리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삶을 응시한다. 말이 없고, 졸고, 쿨럭이고, 낯설어하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것은 톱밥 난로와 눈이고, 시적 화자는 이 낯설음과 뼈아픔도 모두 추억이 될 것을 알고 있따. 시적 화자는 추억의 눈물조차 담담히 받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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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계 장터 / 신경림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 새우 끓어 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 년에 한 이레 쯤 천치로 변해 

짐 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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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경림은 향토적 정서와 농민, 민중들의 삶의 애환을 서정적으로 노래했으며, 민중들의 삶의 이야기를 민요적 가락으로 전달하는 기법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현대시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시인이다. 이 시에서도 목계 장터를 배경으로 방랑의 삶과 정착의 삶에 대한 욕구 때문에 갈등하는, 뿌리 뽑힌 민중들의 삶의 애환을 다루고 있다. '구름과 바람', '들꽃과 잔돌'이 가지는 속성의 대비를 통해 방랑과 정착의 삶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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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어 / 최승호 

 

밤의 식료품 가게 

케케묵은 먼지 속에 

죽어서 하루 더 손때 묻고 

터무니없이 하루 더 기다리는 

북어들, 

북어들의 일개 분대가 

나란히 꼬챙이에 꿰어져 있었다. 

나는 죽음이 꿰뚫은 대가리를 말한 셈이다. 

한 쾌의 혀가 

자갈처럼 죄다 딱딱했다. 

나는 말의 변비증을 앓는 사람들과 

무덤 속의 벙어리를 말한 셈이다. 

말라붙고 짜부라진 눈, 

북어들의 빳빳한 지느러미. 

막대기 같은 생각 

빛나지 않는 막대기 같은 사람들이 

가슴에 싱싱한 지느러미를 달고 

헤엄쳐 갈 데 없는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느닷없이 

북어들이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거봐,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귀가 먹먹하도록 부르짖고 있었다. 

 

=-=-=-=-=-= 

'북어'는 시적 대상을 넘어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지향하는 바 없이 무의미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며, 자신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언어 장애를 겪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다. 이 시는 식료품 가게에 진열된 한 쾌의 북어의 이미지를 통해 억압 체제의 물리적 폭력 앞에서 생명력을 상실한 채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풍자하고 있다. 아울러 그런 억압 체제에 대한 비판과 풍자도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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