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 - 훈련된 외교관의 시각으로 풀어낸 에도시대 이야기
신상목 지음 / 뿌리와이파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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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상당수 사람들이 개항시기가 20년 정도 빨랐던 것이 일본과 조선의 운명을 갈랐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간 일본을 지켜보고 공부해온 관점에서 본다면 이건 교정돼야 할 인식이다.
그런 관점에서 '근세'로 분류되는 에도시대의 성격이 좀더 환기돼야 할 필요가 있다. 이 시기 일본이 이룬 상업자본주의의 놀라운 성취, 기술축적, 출판문화의 발흥 등을 보면 이미 조선과 엄청나게 격차를 벌려놓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근대성의 '맹아' 정도가 아니라 묘목 정도가 자라고 있던 시대라고 할까. 현대 일본사회, 경제구조의 원형이 에도시대에 형성됐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국내의 일본관련 출판물들을 보면 메이지유신이후의 일본에 대해서는 책이 제법 있지만 에도시대에 관한 저작들은 별로 눈에 띠지 않는다.
최근 출간된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가 에도시대의 다양한 모습을 다루고 있어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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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굴레 - 헤이안 시대에서 아베 정권까지, 타인의 눈으로 안에서 통찰해낸 일본의 빛과 그늘
R. 태가트 머피 지음, 윤영수 외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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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굴레>(태가트 머피 지음, 윤경수 박경환 옮김, 글항아리)를 읽었다. 최근 몇년간 읽은 일본에 관한 서적 중에서 가장 통찰력이 돋보이는 책이다. 개인적으로는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일본의 '무책임의 정치'를 목도하면서 그 원인이 뭘까 궁금했었는데, 이에 대한 가장 날카로운 분석을 한 것 아닐까 싶다. 저자의 분석을 내 나름대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메이지 유신에 성공한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 메이지 원로들은 행정부가 의회의 견제를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천황을 이용했다. '천황의 칙서'는 추밀원이라는 자문기관에 의해 결정됐고 추밀원은 원로들이 장악했다. 그러나 원로들은 거부권은 행사하면서 결과에는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역할을 맡으면서 거대한 정치적 무책임의 무대가 마련됐다.
그나마 원로들이 노쇠해 죽은 뒤로는 군부의 폭주, 육군과 해군간의 갈등에 제동을 걸 세력도 사라졌다. 그 결과 일본은 권력이 각기 독립한 여러 세력에 분산돼 있는(그래서 합리적 조정이 불가능한) '봉건제적' 거버넌스가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합리적인 정책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린 일본은 진주만 공습으로 치닫게 된다.
전쟁에서 진 이후로는 외교와 국방에 관한 결정권을 미국에 빼앗긴 채 일본은 '하던대로' 경제총력전을 벌여 성장했으나, 성장이 끝난 이후에는 어쩔줄 몰라 우왕좌왕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일본의 '무책임 거버넌스'를 바꿀 수 있었던 인물로 오자와 이치로를 주목한다. 오자와는 지금은 '불가촉'적인 존재가 돼 버렸지만, 2009년 민주당 집권의 주역이었다. 하지만 그의 노선 중 '자주외교'가 미국의 노여움을 샀고, 좌표가 찍히면서 검찰과 언론의 표적이 돼버렸다. 일본에 있을 때 오자와에 대한 일본 사회의 혐오에 가까운 반감과, 반대로 외국인 저널리스트(네덜란드 출신의 판볼페런)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했었는데(책까지 사놨는데 읽지는 못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의문이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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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대통령 김대중과 현대사 - 김대중 재평가
장신기 지음 / 시대의창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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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대통령 김대중 현대사>(장신기 지음, 시대의 창)를 읽었다. 흔히 김대중 대통령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IMF를 조기 극복하고, 처음으로 남북정상회담을 연 대통령으로 기억할 것이고, 좀더 들어가면 민주주의와 인권에 앞장섰으며 정보화의 토대를 닦은 점 정도를 꼽을 것이다. 하지만, DJ가 남긴 업적들은 너무도 많아 제대로 헤아리기도 어렵다. 한국 사회에서 지나치게 저평가되고 있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안타까울 뿐이다.
나는 DJ 정부 당시 대북정책도 취재한 바 있었고, <김대중자서전>(삼인)도 읽어 남들보다는 많이 안다고 생각하는 편이었는데, 이 책은 DJ의 업적을 야당 시절부터 대통령 재임기까지 객관적이자 체계적으로 재평가하고 의미 부여를 했다는 점에서 읽을 가치가 있다.
또 놀랍게도 그가 1960~70년대부터 외자유치에 적극적이었으며 지식산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던 점 등 잘 알려지지 않은 면모들이 많이 담겨 있다. 새롭거나 잘 환기되지 않은 내용을 일부 소개해본다.
1. DJ는 1970년대부터 지식산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신민당은 구주제국이나 일본에서 본 바와 같이 자원이 풍요한 나라보다는 교육에 힘쓴 나라만이 일류 국가로 성공한 역사의 교훈과 현대 경제가 지식산업의 시대란 특징 그리고 국민 정의의 앙양의 필요성 등에 감하여 교육입국의 대원칙을 크게 내세워 국력을 여기에 집중할 것임을 이 기회에 천명해 두는 바 이다.’(1970년 11월22일 친필자료)
2. DJ는 1960년대부터 외자유치에 적극적이었다.(1966년 6월21일 국회연설)
'제가 생각하기에는 외국의 투자를 자꾸 끌어들이는 것이 우리가 외국 군대 1개 사단, 2개 사단 주둔시키는 것보다 더 우리에게 힘이 된다고 이렇게 생각이 됩니다.(중략) 우리가 지금 일본 경제에 예속을 우려하고 있는데 그것을 막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미국이라든가 서독이라든가 서구 제국의 자본을 끌어들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3. IMF당시 구조조정을 진두지휘한 이헌재의 평가
'지금도 고맙게 생각하는 게 있다. 그 살벌했던 구조조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DJ는 한번도 개인적 청탁을 하거나 정책에 대해 간섭한 적이 없었다.(중략) 그가 내게 물어본 것은 단 두가지였다. “원칙에 맞는 것이오?” 그리고 “절차는 공정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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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으로 간 일본인 아내
하야시 노리코 지음, 정수윤 옮김 / 정은문고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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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건넌 일본인 아내들은 3년 후에는 북한과 일본이 서로 왕래할 수 있게 되리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이곳에 온 일본인은 모두 그렇게 생각했어요"라고 어느 일본인 여성은 말한다. 북한으로 가는 걸 반대하는 부모님에게 "3년 후에 돌아올게"하며 이해를 시켰다는 여성도 있다. (42쪽)

일본인 사진작가 하야시 노리코의 <조선으로 간 일본인 아내>(정수윤 옮김, 정은문고)에서 가장 눈길을 끈 대목이다. 1959년부터 1984년까지 이뤄진 재일동포의 북송사업에서 재일동포 배우자(주로 남편)를 따라간 일본인 배우자는 1830명 가량이다. 그런데 북으로 갈 당시에 영영 되돌아가지 못하리라고 여긴 이는 없었다. '길어야 3년 정도 지나면 북한과 일본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으리라. 북한에서 어느 정도 자리잡고 나서 부모님을 만나러 가야지' 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중 43명의 고향방문단을 빼고는 일본 땅을 밟을 수 없었다.(간혹 일본의 가족, 친척들이 북에 와서 상봉한 사례는 있다)

왜 그들은 '3년 후'를 기대했을까. 이 숫자가 그냥 나왔을 것 같지는 않다. 아마 조선총련 쪽에서 흘러나오지 않았을까? 당시 북일 당국간에 적어도 민간교류는 보장하는 방침을 갖고 있었던 것인가? 그런 분위기가 총련을 통해 북송자들에게 전해진 것일까. 당시 상황이 궁금해진다.

관련 자료들을 찾아보니 북한은 1954년부터 북일관계 개선을 꾀하고 있었다. 1955년 북한의 남일 외무상은 대일관계에 관한 성명을 발표해 일본에 공식적인 국교정상화 제안을 했다. 북일간 접근은 속도를 내면서 일본 국회의원 대표단이 1955년 10월 방북해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와 '국교정상화와 제 현안 타결을 내용으로 하는 공동 코뮤니케'를 채택했다. 정부 차원에서는 북한에 잔류해 있는 일본인들의 귀국과 재일조선인의 귀국문제를 둘러싼 공식 교섭이 시작됐다. 무역부문에서는 일본에 일조무역회사가 설립됐고, 북일간에 민간무역협정(1957)이 체결되기도 했다.
즉 북송사업은 1950년대 중반부터 형성된 '북일 교류 무드' 속에서 추진됐던 것이다. 그런 만큼 '귀국사업'으로 가족을 따라 북으로 간 일본인 배우자들이 3년쯤 지나면 일본에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으리란 기대를 품었을 법 하다.

하지만 1960년대 들어 동북아 정세는 미일안보조약 체결, 한일 국교정상화, 중소분쟁 등으로 경직되기 시작했고, 이 영향으로 북일관계도 후퇴했다. 게다가 재일조선인들의 북한 체제 부적응 등 여러 문제들이 불거지면서 '귀국사업'은 당초 예상과는 다른 형태로 변질돼 갔다고 할 수 있다. 재일동포 북송이 북일관계의 또다른 질곡이 돼버린 것이다.

2013년부터 2018년 11월까지 북한을 11번 방문해 이들의 삶을 기록한 저자는 "일본인 아내들의 삶을 증거로 남겨두고 싶다"며 "아무도 기록하지 않으면 그들은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들로 취급될 것"이라고 했다. 저자의 말대로 60년째 북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들의 목소리와 표정, 분위기를 선입견없이 담아내려 애쓴 흔적이 느껴진다. 저자의 말 추가. "어떤 경우에도 그 사람 하나하나의 인생은 평등하고 둘도 없는 것임을 취재를 통해 강하게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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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의 현재적 기원 - 거대 농축산업과 바이러스성 전염병의 지정학
롭 월러스 지음, 구정은 외 옮김 / 너머북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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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팬데믹의 현재적 기원>은 팬데믹을 일으키는 감염병의 기원을 정치경제학적으로 해명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진화생물학자인 저자 롭 월러스는 거대 농축산업과 글로벌화된 경제가 감염병의 구조적 원인이라는 가설을 다양한 사례를 들어 논증한다. 이런 시각이 책 앞부분부터 등장하는데 ‘과도한 도식화 아닐까’ 싶다가 후반부로 갈수록 수긍하게 된다. 


조류인플루엔자가 창궐하면 언론들은 애꿎은 철새를 탓하지만 야생조류들이 보유한 것은 저병원성 인플루엔자로 이것이 대량사육되는 가금류에 옮겨진 이후 병독성이 커지게 된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숲과 습지를 없애 축사를 짓거나 하는 과정에서 서식지가 좁아진 야생조류들이 대량사육 가금류와 접촉할 기회가 늘어나고 이 때 인플루엔자가 '숙주 갈아타기'를 하는 것이다. 더구나 공장식 축산은 인플류엔자들이 병독성을 키우는데 최적의 환경과 조건을 제공한다. 

 “병원균이 다음 숙주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더 빨리 알 수 있게 된다면 어떨까? 지금의 숙주를 죽이기 전에 취약한 다음 숙주를 성공적으로 찾아낼 수 있으니, 병원균 입장에선 병독성을 키워도 된다. 전염이 빠르다는 것은 바이러스가 마음놓고 강해질 수 있다는 뜻이다. 취약한 숙주들이 주변에 많이 있다는 것이 병독성 진화의 핵심이다.”(75쪽)“

 “처음엔 소규모 가축들에게 변형된 바이러스가 퍼지지만 산업형 축산이 강력한 병원균들에게 이상적인 숙주를 제공해준다. 단종 생산으로 인해 거의 같은 유전형질의 가축이 많아지면서 전염을 늦출 수 있는 면역 방화벽이 사라지고 있다. 규모와 밀집도가 커지면서 전염은 더 빨라진다.”(76쪽)

 “생산과정의 혁신으로 닭이 도축되는 연령은 60일에서 40일로 낮아졌다. 바이러스로서는 감염과 독성의 문턱에 빨리 도달해야 한다는 압박이 커진 셈이다. 발병을 줄이기 위해 대량 살처분할 때도 이와 비슷한 궤적이 나타난다. 도축을 많이 할수록 바이러스에게는 병독성을 키워야 한다는 압박이 높아지는 것이다.”(77쪽)

 “자연의 조류 서식지를 식민지로 만드는 과정에서 우리는 철새와 가금류의 접촉 지점을 의도하지 않게 확대해 왔다. 애그리비지니스와 구조조정, 글로벌 금융환경의 변화와 기후변화, 병원성 인플루엔자의 출현은 분명 이전보다 더 밀접하게 통합돼 있다.”(98쪽)


창궐한 바이러스에 지역이름을 붙이는 것을 둘러싼 논란에 대한 저자의 지적도 경청할 만 하다. 코로나19가 ‘중국 바이러스’ ‘우한 폐렴’으로 불리면서 한국에서 반중 정서를 낳았고, 서구에서 반아시아 정서를 부추긴 점은 물론 있다. 하지만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이후 중국 남부의 축산업 발전과 세계 농업생산망으로의 통합이라는 지역적 특성이 바이러스 창궐에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코로나 19'라는 이름으로는 읽어낼 수 없는 것도 현실이다.  

 “광둥 전체가 경제변화의 최첨단이었다. 1978년부터 광둥의 농업생산은 내수용 곡물에서 홍콩시장 수출에 맞춰 방향을 틀었다. 홍콩기업들은 채소, 과일, 어류, 화훼, 가금류, 돼지 등을 생산하려고 새로운 장비에 투자했다.”(87쪽)

 “산업과 인구가 광둥에 쏠리고 가금류 생산이 늘자 이 지역 습지는 심한 압박을 받게 됐다. 다양한 인플루엔자 혈청형이 재조합되어 연중 떠돌게 된 것 이 이 시기였다. 1997년 H5N1 바이러스의 확산경로를 보면 이런 상황속에서 나타난 감염된 상품이 화교 자본에 의해 촉진된 국제 무역을 통해 수출됐다.”(89쪽)


 저자의 주장대로라면, 거대 농축산업을 이끌어가는 자본의 작동 시스템이 멈추지 않는다면 감염병 바이러스는 더 강력해질 수 밖에 없다는 우울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더구나 주기적인 팬데믹은 이런 구조를 더 강화시킨다. 대규모 살처분 과정에서 중소농가들은 몰락하고, 거대 농축산기업의 독점력이 더 강화되기 때문이다.

 저자는 야생동물과 가축, 농작물, 인간의 건강이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원헬스’에 ‘자본주의의 본질’이라는 위험요소를 결합한 ‘구조적 원헬스’라는 차원에서 감염병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확하지만, 달성하기 어려운 접근법이다. 약소국의 규제를 간단히 무력화하면서 ‘땅뺏기’에 나서는 거대 축산기업들을 무너뜨리거나 초강력 규제로 손발을 꽁꽁 묶어야 해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기후변화도 그렇고, 감염병도 그렇고, '세계정부'가 등장하지 않으면 대처하기 어려운 과제가 인류를 덮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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