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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의 현재적 기원 - 거대 농축산업과 바이러스성 전염병의 지정학
롭 월러스 지음, 구정은 외 옮김 / 너머북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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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의 현재적 기원>은 팬데믹을 일으키는 감염병의 기원을 정치경제학적으로 해명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진화생물학자인 저자 롭 월러스는 거대 농축산업과 글로벌화된 경제가 감염병의 구조적 원인이라는 가설을 다양한 사례를 들어 논증한다. 이런 시각이 책 앞부분부터 등장하는데 ‘과도한 도식화 아닐까’ 싶다가 후반부로 갈수록 수긍하게 된다.
조류인플루엔자가 창궐하면 언론들은 애꿎은 철새를 탓하지만 야생조류들이 보유한 것은 저병원성 인플루엔자로 이것이 대량사육되는 가금류에 옮겨진 이후 병독성이 커지게 된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숲과 습지를 없애 축사를 짓거나 하는 과정에서 서식지가 좁아진 야생조류들이 대량사육 가금류와 접촉할 기회가 늘어나고 이 때 인플루엔자가 '숙주 갈아타기'를 하는 것이다. 더구나 공장식 축산은 인플류엔자들이 병독성을 키우는데 최적의 환경과 조건을 제공한다.
“병원균이 다음 숙주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더 빨리 알 수 있게 된다면 어떨까? 지금의 숙주를 죽이기 전에 취약한 다음 숙주를 성공적으로 찾아낼 수 있으니, 병원균 입장에선 병독성을 키워도 된다. 전염이 빠르다는 것은 바이러스가 마음놓고 강해질 수 있다는 뜻이다. 취약한 숙주들이 주변에 많이 있다는 것이 병독성 진화의 핵심이다.”(75쪽)“
“처음엔 소규모 가축들에게 변형된 바이러스가 퍼지지만 산업형 축산이 강력한 병원균들에게 이상적인 숙주를 제공해준다. 단종 생산으로 인해 거의 같은 유전형질의 가축이 많아지면서 전염을 늦출 수 있는 면역 방화벽이 사라지고 있다. 규모와 밀집도가 커지면서 전염은 더 빨라진다.”(76쪽)
“생산과정의 혁신으로 닭이 도축되는 연령은 60일에서 40일로 낮아졌다. 바이러스로서는 감염과 독성의 문턱에 빨리 도달해야 한다는 압박이 커진 셈이다. 발병을 줄이기 위해 대량 살처분할 때도 이와 비슷한 궤적이 나타난다. 도축을 많이 할수록 바이러스에게는 병독성을 키워야 한다는 압박이 높아지는 것이다.”(77쪽)
“자연의 조류 서식지를 식민지로 만드는 과정에서 우리는 철새와 가금류의 접촉 지점을 의도하지 않게 확대해 왔다. 애그리비지니스와 구조조정, 글로벌 금융환경의 변화와 기후변화, 병원성 인플루엔자의 출현은 분명 이전보다 더 밀접하게 통합돼 있다.”(98쪽)
창궐한 바이러스에 지역이름을 붙이는 것을 둘러싼 논란에 대한 저자의 지적도 경청할 만 하다. 코로나19가 ‘중국 바이러스’ ‘우한 폐렴’으로 불리면서 한국에서 반중 정서를 낳았고, 서구에서 반아시아 정서를 부추긴 점은 물론 있다. 하지만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이후 중국 남부의 축산업 발전과 세계 농업생산망으로의 통합이라는 지역적 특성이 바이러스 창궐에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코로나 19'라는 이름으로는 읽어낼 수 없는 것도 현실이다.
“광둥 전체가 경제변화의 최첨단이었다. 1978년부터 광둥의 농업생산은 내수용 곡물에서 홍콩시장 수출에 맞춰 방향을 틀었다. 홍콩기업들은 채소, 과일, 어류, 화훼, 가금류, 돼지 등을 생산하려고 새로운 장비에 투자했다.”(87쪽)
“산업과 인구가 광둥에 쏠리고 가금류 생산이 늘자 이 지역 습지는 심한 압박을 받게 됐다. 다양한 인플루엔자 혈청형이 재조합되어 연중 떠돌게 된 것 이 이 시기였다. 1997년 H5N1 바이러스의 확산경로를 보면 이런 상황속에서 나타난 감염된 상품이 화교 자본에 의해 촉진된 국제 무역을 통해 수출됐다.”(89쪽)
저자의 주장대로라면, 거대 농축산업을 이끌어가는 자본의 작동 시스템이 멈추지 않는다면 감염병 바이러스는 더 강력해질 수 밖에 없다는 우울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더구나 주기적인 팬데믹은 이런 구조를 더 강화시킨다. 대규모 살처분 과정에서 중소농가들은 몰락하고, 거대 농축산기업의 독점력이 더 강화되기 때문이다.
저자는 야생동물과 가축, 농작물, 인간의 건강이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원헬스’에 ‘자본주의의 본질’이라는 위험요소를 결합한 ‘구조적 원헬스’라는 차원에서 감염병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확하지만, 달성하기 어려운 접근법이다. 약소국의 규제를 간단히 무력화하면서 ‘땅뺏기’에 나서는 거대 축산기업들을 무너뜨리거나 초강력 규제로 손발을 꽁꽁 묶어야 해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기후변화도 그렇고, 감염병도 그렇고, '세계정부'가 등장하지 않으면 대처하기 어려운 과제가 인류를 덮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