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피를 입은 비너스 펭귄클래식 61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 지음, 김재혁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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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학적인 성적취향을 일컫는 말인 마조히즘(masochism). 마조히즘은 ‘이성으로부터 육체적 또는 정신적으로 학대를 받고 고통을 받음으로써 성적 만족을 느끼는 병적인 심리상태. 사디즘(sadism)에 대응하는 뜻을 지녔다. 오스트리아의 작가 L.R.von 자허마조흐가 이와 같은 변태적 성격의 소유자로서 이런 경향의 테마로 작품을 쓴 데서 유래한다(네이버 백과사전).’고 나와 있다.

마조히스트, 마조히즘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어쩐지 채찍을 뜬 여자와 그 채찍을 맞으며 기뻐하는 남자의 모습이 떠오른다. <모피를 입은 비너스>의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는 그의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 이 작품을 통해 ‘마조히즘’의 기원이 된다. <모피를 입은 비너스 Venus in Furs>에는 가학적인 여성 반다와 그녀의 채찍에 맞아 괴로워하면서 동시에 기뻐하는 한 남자 제베린이 등장한다. 이 작품의 주인공 제베린은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의 분신이라고 볼 수 있다.

반다와 제베린의 사랑이 처음부터 그러했을까? 그렇지는 않다. 제베린은 반다를 보고 한눈에 반해 그녀에게 자신과 결혼해달라고 애원한다. 반다는 이미 한 번 결혼을 해서 남편을 잃은 젊은 미망인이다. 남편과 사별한 자유분방한 성격의 그녀는 이제는 자유로운 연애를 즐기려 한다. 게다가 자신이 다시 남편으로 맞이할 사람은 자기보다 강한 사람, 자신이 섬기고 싶은 마음이 드는 사람이어야 한단다. 그런 의미에서 몽상가적 기질에 섬세하고 여리기만 한 제베린은 반다의 눈에 결혼할 만한 상대자는 되지 못한다. 연애라면 모를까.

“내 생각으로는.” 그녀가 말했다. “한 남자를 영원히 붙잡아 두려면 무엇보다 그 남자에게 충실해서는 안 돼요. 정숙한 여자가 매춘부처럼 그렇게 많은 이의 숭앙을 받은 적이 있던가요?” “사실 사랑하는 여자의 불충은 고통스러운 자극이자 최고의 쾌락이지요.” (95쪽) 반다와 제베린은 이렇게 죽이 잘 맞는다. 

반다 곁에 있고 싶은 열망이 큰 제베린은 그렇다면 그녀에게 자신을 노예로, 하인으로 삼아서라도 곁에 둬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한다. “사랑에 있어서 평등은 있을 수 없습니다.” 나는 진지하고도 엄숙한 투로 대답했다. “상대를 지배할 것인지, 아니면 상대에게 지배를 받을 것인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나 같은 경우에는 아름다운 여인의 노예가 되는 편이 훨씬 더 매력적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사사건건 바가지나 긁어대며 괴롭히려 드는 여자가 아닌, 차분하고도 자의식에 찬 엄격함으로 상대를 다스릴 줄 아는 여자를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요?” (42쪽) 이런 이야기를 반다에게 건넨 적이 있던 제베린에게 반다는 바로 그가 찾던 이상적인 여인이었다. 그의 이 기묘한 부탁에 처음엔 난색을 표하던 반다는 점점 호기심이 발동하고 제베린의 부탁을 들어주기 시작한다.

모피는 권위의 상징이자 근엄함, 차가움의 상징이다. 반다는 모피를 입고 채찍을 들고 제베린을 가학적으로 다루기 시작한다. 그런 행동에 머뭇거리던 반다는 조금씩 남을 학대하는 재미, 학대를 받으면서도 자기에 대한 사랑을 멈추지 못하는 사람을 괴롭히는 쾌락을 즐기기 시작한다. 그녀와 그는 노예 계약서까지 쓰고 심지어 노예에서 풀려나기 위해서는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는 계약서에 제베린은 서명하게 된다. 반다는 제베린 앞에서 다른 남자와 어울리며 제베린을 하인처럼 부리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제베린은 질투에 눈이 멀어 몸부림친다. 그녀가 그를 심하게 다룰수록 그의 고통도 커진다. 그리하여 그녀 곁을 떠나려고 시도하지만 결국 그는 그녀 곁으로 돌아오고야 만다. 

이 기묘한 사랑을 이해할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한 사람은 채찍을 들고 때리고, 또 다른 사람은 그 채찍에 맞아 괴로워하면서 즐거워하는 다분히 변태적인(?) 이러한 행위를 흔히 SM이라 부르며 정상적이지 못한 관계로 치부한다. 사전적 정의에서도 ‘변태’ ‘병적인 증상’이라고 단정적으로 나온다. 게다가 종종 ‘결혼 전까지 한 번도 잠자리를 함께 하지 않았던 연인이 있었는데, 신혼 첫날밤 난리가 나서 헤어졌다. 알고 보니 남편이 가방에서 채찍을 꺼냈다하더라’ 등등 이런 음담패설 속 주인공으로 SM이 등장한다. 채찍으로 상징되는 SM은 변태적 성행위의 대명사다.   

그런데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제베린과 반다의 관계가 이해가 되기도 했다.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연인간의 관계를 살펴보자. 그들의 손에 채찍이 쥐어져 있느냐, 아니냐의 차이일 뿐이다. 사랑하는 두 사람의 사이에서도 권력 관계는 다분히 존재한다. 더 사랑하는 쪽이 언제나 약자라고. 반다와 제베린의 관계에서 더 많이, 너무나 고통스러울 듯이 사랑하는 사람은 제베린이다. 그는 남편이 되지 못한다면 하인으로, 노예로라도 그녀 곁에 머물고 싶을 만큼 그녀를 사랑했던 것이다. 물론 그들의 손엔 진짜 채찍이 들려 있었다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일까.

사랑은 평등해야 한다고 하지만, “사랑에 있어서 평등은 있을 수 없습니다.”는 제베린의 말에 나도 모르게 공감했다. 남을 학대하고 괴롭히면서 자기도 모르게 쾌감을 느끼는 반다의 모습도 낯설지 않다. 누군가에게 감정적으로 상처를 주면서 은근히 쾌감을 느꼈던 적은 누구나 한 번쯤 있는 일이 아닐까. 그런 이들의 마음속에는 보이지 않는 채찍이 휘둘러졌던 것은 아닐까. 제베린 앞에서는 한없이 강자로 군림하지만 반다 또한 그녀가 더 사랑하는 남자 앞에서는 무참히 짓밟힌다. 누가 누구를 더 사랑하느냐에 따라서 사람은 이토록 잔인해지기도 하고, 약해지기도 한다.

<모피를 입은 비너스>는 채찍을 휘두르는 여자와 그 채찍에 맞아 희열을 느끼는 남자의 이야기라는 자극적인 소재 때문에, 그 소재만으로 주목받는다면 조금 억울할 듯하다. 그런 자극적인 소재, 마조히즘의 유래가 된 작품이라는 점을 제외하고 이 책은 사랑하는 두 사람 사이의 미묘한 권력 관계에 대한 통찰이 뛰어난 작품으로 한 번쯤은 꼭 읽어볼 만하다.   

사랑은 미덕이나 이익 같은 것을 따지지 않는다. 사랑은 사랑하고 용서하고 모든 것을 참는다. 그것은 그렇게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이 우리를 이끄는 것도 아니며, 우리가 발견한 상대의 장점이나 결점이 우리로 하여금 몸을 바치게 하거나 아니면 뒤로 선뜻 물러서게 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를 이끄는 것은 달콤하고 멜랑콜리하고 신비로운 힘이다. 그때 우리는 생각하고 느끼고 원하기를 그친다. 우리는 그저 그 신비로운 힘에 이끌려 떠돌지만 어디로 가는지는 묻지 않는다. (1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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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뿐하게 읽는 나쓰메 소세키
오쿠이즈미 히카루 지음, 지비원 옮김 / 현암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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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치게 가뿐하다. 중학생을 대상으로 썼나 싶을 정도. 당신이 나쓰메 소세키 팬이며 그의 작품을 거의 다 읽었다면 이 책은 가뿐히 넘겨라. 소세키가 아닌, 자기 이야기도 너무 많다. (플루트 이야기 그만!!) 가뿐하게 알라딘 중고로 팔아버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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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고양이 창비세계문학 23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 지음, 임미경 옮김 / 창비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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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이 사랑의 완성 또는 새로운 시작으로 여겨지지만 사랑의 종말일 수도 있다. 자유를 그리며 관능과 질투로 겨우 유지되던 사랑은 결국 파국으로 치닫는다. 어쩌면 고양이는 핑계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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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리히터 마스터 5집 - 슈베르트 : 피아노 소나타 9번, 15번 '유품' & 18번 (2 for 1)
슈베르트 (Franz Schubert) 작곡, 리히터 (Sviatoslav Richter) / Decca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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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울리는` `영혼을 뒤흔드는` 이런 상투적인 언어로 밖에 표현할 길 없는 틀림없는 명연주, 명반이다. 이 음반은 듣는 순간, 조용히 차분하게 자신의 삶을, 생활을 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다. 당신은 분명히 리히터의 이 연주로 슈베르트를 더욱 사랑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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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처럼 읽기 - 내 몸이 한 권의 책을 통과할 때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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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은 좋은 책(혹은 글)이란 그 책이 읽는 이의 몸을 통과해 책을 읽고 난 후 읽은 이에게 생각이든 행동이든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라 했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정희진의 책(글)은 언제나 내게 ‘참으로’ 좋은 ‘글’이자 ‘책’이었다.

<페미니즘의 도전>이 그러했듯 <정희진처럼 읽기> 또한 앎의 즐거움, 깨달음의 즐거움,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 알게 되었다는 것의 책임감을 느끼도록 한다. <정희진처럼 읽기>에서도 그녀의 일관된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정희진의 글을 읽으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언어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일을 한번쯤은 멈추고 왜? 하는 의문을 품어보아야 할 듯하다.

정희진이 보기에 지금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언어들은 ‘서구/백인/남성/이성애’ 중심 언어이다. 우리는 그러한 언어를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임으로써 그 세계관을 또 당연하게 수용한다. 그러기에 기존의 언어를 의심하는 일은, 기존의 세계관을 의심하고 반문하는 일이 된다.

나는 대학에서 어문학을 전공했고, 글을 쓰고 싶어 했고, 글과 관련된 일을 해왔으며 지금도 방향은 살짝 바뀌었지만 또 글과 관련한 일을 하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먹고사는 일관 상관없이 내 글을 쓰고 싶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언어에 예민해야 함은 어쩌면 숙명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뒤돌아보면 내가 그렇게까지 언어를 사용하는 일에 예민했을까? 반드시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공해와도 같은 언어를 만들어내는 일에 한몫했던 때도 있었으리라.

그렇기에 예전에 <페미니즘의 도전>을 읽었을 때 충격이 상당했다. 언어를 사용하는 일에 그토록 무감각했던 내 자신을 꽤나 반성했다. 그런데도 책을 읽고 시간이 지나면 그런 기억은 또 희미해진다. 인간이란 그토록 간사하다. 그렇게 또 다시 무뎌질 즈음 <정희전처럼 읽기>를 만나게 된 것은 어쩌면 축복과도 같으리라.

책 한쪽 한쪽 소중하게 읽었다. 그녀의 말과 글과 생각이 뼈 마디마디에 올올이 새겨지기를 바라면서. 읽는 내내 감탄하고 존경심이 일면서 한편으로는 부럽고 질투심이 일기도 했다. 이 사람은 정말 책을 제대로 잘 읽는구나, 이렇게 사유를 하는, 이토록 똑똑한 사람이라니!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어를 사용하며 사는 일에 크게 감사하는 적이 그다지 없는데, 그녀의 글을 읽을 때면 그 사실에 무척 감사하게 된다.

책과 글을 읽기를 즐겨하고, 또 책과 글을 쓰며 살기를 원하는 삶에서 내게 이 책은 마치 경전과도 같으리라.

깍두기 국물의 세계를 아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여성주의는 양성 평등이 아니라 사회 정의를 위한 것이다. (97)

작가를 꿈꾸지 않더라도 글쓰기와 말하기는 자신을 재현하는 것, 인생의 전부다. (138)

공부는 지식을 습득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인식자가 자기에 대해 아는 것 그리고 그 과정을 사회와 공유하는 것이다. 모든 앎은 자신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해야)하며 따라서 글쓰기나 말하기(인문학)는 저자 개인에 대한 연설이다. 보편적 지식은 인식자가 자신을 인간의 대표라거나 우주, 신, 과학 등과 동격으로 간주할 때만 가능하다. 자신을 지배하는 정열이 사라질 때, 스스로에게 질문이 없을 때, ‘나는 정상’이라고 믿을 때, ‘지당하신 말씀’ ‘쉽게 읽히는’, ‘대중성’ 있는 글이 생산된다. (199)

지적으로, 정치적으로 빼어난 글을 쓰는 방법? 책상에 여덟 시간 이상 앉아 있을 수 있는 몸이 첫째다. (....) 특히 지식인, 운동선수, 예술가는 부자나 권력자와 달리 혼자만의 노동, 자신과의 결투가 성공에 절대적이다. (209)

여성의 언어는 없으며, 여성주의자는 기존의 언어를 의심하는 사람들이다. (216)

우리 사회에서 여성학은 여성과 모든 타자를 종속적 범주로 만들려는 사회에 대한 비판 연구(feminist studies)라기 보다는 ‘여자(female)가 하는 공부’로 간주된다. (...) 양성 평등 주장보다 중요한 것은 남성과 여성이 만들어지는 역사와 방법이다. (218)

인간의 매력은 말과 글을 따른다. 학력과 계층과 무관하게 10분만 말하는 태도와 내용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229)

은유의 대상이 되는 말(‘호수’, 성별, 지역....)의 의미를 변화시키는 것이 사회 운동이다. (230)

지식인은 해체된 지 오래된 단어다. 임시 복원한다면, 자기 노동과 일상을 언어화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231)

무지는 약자를 무시하는 권력에서 나온다. 자신을 ‘남성’으로 생각하는 이들은 ‘여성’과 ‘흑인’의 목소리를 공부하지 않는다. 간혹 고민하더라도 그것을 공부로 착각해서, 자기도취와 연민에 빠지기도 한다. 여성은 남성 이론을 모르면 무시 받지만, 남성은 좌우를 막론하고 여성주의는 물론 자기 생각도 모르는 이가 숱하다. 주체가 타자를 모르면 자기를 알 수 없다. (...) 의미는 찾아나서는 것이다. 있는 의미는 이미 권위다. (251)

생각할수록 공부할수록 무지의 공포는 비례 상승한다. 나 자신이 작아지고 우울해진다. 우울은 공부의 벗. 공부를 멈추지 않는 사람은 겸손하다. 자신에게 몰두한다. 계속 자기 한계, 사회적 한계와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계속 공부하는 사람이 드문 이유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생각하기를 두려워하는 사회는 생각하는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을 치러야 한다는 사실이다. (278)

나는 처음부터 아니 인생에서 한 번도 나를 ‘저명한 백인 남성’ 인류학자와 동일시한 적이 없다. 이를 테면 나는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어렸을 적에 이미 그것을 알았다. 밥상에는 깍두기를 먹는 사람과 깍두기 국물을 먹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것을. 그것이 역할이든 윤리든 취향이든 그냥 버릴 수 없는 아까운 ‘깍두기 국물’의 세계를 아는 사람과 그러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298)

책을 읽고 책에 대해 쓰는 것은 결국 자신에 대해 쓰는 것이다. 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독후감, 책을 다시 쓰는 것, 저자가 쓰지 못한/않은 부분을 쓰는 것 그리하여 새로운 의미, 곧 새로운 정치학을 주장하는 것이다. (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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