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 - 어떻게 세계의 절반을 가난으로부터 구할 것인가
피터 싱어 지음, 함규진 옮김 / 산책자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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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피터 싱어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 : The Life You Can Save>는 한마디로 세다. 거침없다. 읽는 내내 죄책감이 든다. 양심이 찔린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와 같은 분류에 속하면서도 여태까지 나온 이런 책들과는 조금 다르다. 기존의 책들이 읽는 이로 하여금 ‘아… 마음 아프다.’라는 생각을 들게 한다면 이 책은 ‘앗! 이럴 수가 내가 이러고 있으면 안 되겠다! 뭐라도 빨리 해야지.’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보통 사람은 자기 눈앞에 물에 빠진 아이가 있다면 그리고 그걸 목격한 사람이 나 혼자뿐이라면 당장 그 물에 들어가 아이를 구할 것이다. 아이가 물에 빠져 죽어가는 걸 목격하고도 수수방관한다면 자기 자신을 용납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주위에서도 그 사람을 엄청 비난할 것이다. 그러나 저 멀리 아시아나 아프리카, 중남미에서 하루에도 수많은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우리는 나 몰라라 한다. 눈앞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아니더라도 다른 그 누군가가 도와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피터 싱어는 그런 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의 아이가 소중하다면 남의 아이도 소중하다. 나의 아이뿐만 아니라 남의 아이도 살릴 수 있는 방법은 분명히 있다. 인간에게 있어 기부는 선택이 아니라 ‘의무’이다. 당신이 지금 쓸데없는 사치품을 사는데 쓰는 돈으로 몇 명의 아이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지금 당장 ‘기부를 하라!’ 많이 버는 사람은 많이 버는 만큼 적게 버는 이는 적게 버는 만큼 ‘무조건 기부를 하라!’고.

첫 장을 들추면서부터 마음이 불편했다. 저자는 잘사는 국가에서 수돗물을 놔두고 생수를 사먹는 행위도 사치라고 본다. 음료수를 사먹는 것도, 콘서트를 가고 영화를 보고 등등 문화를 즐길 돈이 있으면 그 돈으로 기부를 하라고 다그친다. 읽다 보면 ‘아, 정말 내가 쓸데없는 소비를 많이 하지.’라고 생각을 하다가도 살짝 반감이 들기도 한다. 기부를 하자고 내 삶의 즐거움을 다 포기해야 하나? 아니지, 내 즐거움을 조금 줄이면 다른 생명을 구할 수 있다는데? 하지만, 왜 나만? 나보다 더 부자들도 기부를 안 하는데? 내가 왜? 이런 생각들.

이런 생각을 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피터 싱어는 기부를 왜 해야 하는지부터 기부를 잘 하려면 어떤 단체에 해야 하며, 자기 수입에 비례해서 얼마큼의 기부를 하는 게 좋을지 조목조목 짚어준다. 즐거움을 위한 소비를 하는 이들에게 저자는 물론 이렇게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맵시 나는 옷을 입고, 훌륭한 음식을 먹고, 고급 스테레오로 음악을 듣는 일에서 큰 기쁨을 느낀다. 나는 그 기쁨에 반대하지 않는다. 같은 값이면 최대한 기쁨을 누리며 살라. 그러나 나의 주장은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하거나 극심한 고통을 막을 수 있는 데도 그런 ‘가치 있는 것들’에 돈을 쓰는 일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201쪽)

저자는 거의 무조건적으로 기부할 것을 종용한다. 나중에 돈을 좀 벌어서 하겠다고 생각하면 이미 늦었다고 한다. 그 사이 아이들은 매일 죽어가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부자들이 사치를 부리는 행위도 비난한다. 물론 그들도 기부금을 내기는 하지만 저자는 그들 소득에 비해 한 없이 부족한 액수라고 일침을 가한다. 미국인들이 기부를 많이 한다고 하지만 그 기부금은 대체로 교회와 같은 종교단체로 들어가는 일이 많고, 미국 정부 역시 기부금을 정치적으로 이용한다. 정말로 필요한 국가의, 필요한 사람들에게 기부금을 주기보다는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굶어 죽지는 않는 사람들에게 원조가 되고 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한국에서도 기부를 한다며 교회 등 종교단체에 기부금을 내거나 대학교 장학금으로 돈을 내는 경우가 많은데, 그 보다는 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지금도 죽어가고 있는 저 먼 나라의 아이들에게 기부를 하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는 걸 깨닫게 된다. 솔직히 나는 종교단체나 대학교에 기부하는 것만큼 아까운 돈이 없다. 평생 김밥을 팔아 몇 십억을 모은 할머니가 자신이 못 배운 게 한이 되어 돈이 없어 공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 쓰라며 전액을 대학교에 장학금을 냈다는 이런 기사를 보면 ‘아 그 돈을 굶어 죽어 가는 애들을 위해 쓰면 더 좋으련만’ 싶어진다. 피터 싱어도 그렇게 이야기 한다. 종교단체나 자기 지역의 발전을 위해 기부금을 내기 보다는 당장 죽음 앞에 처한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고.

잘 사는 국가에서는 가난한 나라에 원조를 하는 것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며 기부하는 행위에 의문을 품기도 한다. 빈곤 국가가 가난한 것은 그들 책임이라며 기부할 의무가 없다고까지 이야기 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부유한 국가가 부유해지기까지는 가난한 나라의 풍부한 자원이나 값싼 노동력 덕을 본 경우가 많다. 게다가 온실효과 등 선진국의 산업화로  피해를 보는 이들은 결국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이다. 선진국이 ‘우리는 빈곡 국가에 대해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닌 것이다. 저자는 ‘우리는 우리가 한 행동이 우리가 사는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평가하고, 그에 따라 그 사람을 평가하는 윤리 문화를 일굴 필요가 있다.’(215쪽)며 부를 가진 만큼 남에게 베풀어야 함을 강조한다.

나는 아직 기부할 만큼 여유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 기부란 특별한 사람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기부하는 사람을 보고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어서 하는 것이라 색안경을 쓰고 보는 사람, 조금 더 여유가 생기면 그때 기부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 종교단체에 기부하면서 ‘나는 기부를 한다.’는 만족감에 빠져 있는 사람, 기부금을 내고 싶어도 어떤 단체에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할 지 잘 모르는 사람, 먼 나라의 얼굴도 모르는 이에게 기부를 하느니 우선 우리나라의 가난한 이부터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그리고 기부란 의무가 아니라 ‘선택’이라고 믿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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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1-24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사람은 사회가 기부 문화를 권하는 일을 (열심히 돈을 번) 개인의 자유를 개입하는 것이라고 하던데, 이러다가 기부 좀 하자는 말 한 마디 했다간 좌빨, 종북 소리 듣게 될지도 모릅니다... ^^;;

잠자냥 2017-01-24 15:04   좋아요 0 | URL
요즘 우리나라에선 뭐 조그만 다른 사람들 생각하고 살자고만 말해도 좌빨, 종북이라고 하니까요. 하하하.
 
지루한 이야기 창비세계문학 53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지음, 석영중 옮김 / 창비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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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앞둔 어느 노교수의 삶과 인생, 그의 가족에 관한 끊임없는 불평불만을 읽고 있노라면, 산다는 것은 결국 이토록 비참하고 쓸쓸한 것인가 서글퍼지면서 가슴이 아려온다. 체호프의 인생에 대한 통찰력이 빛나는 명작. 국내 초역 ‘지루한 이야기‘ 이 한 편만으로 이 책은 살가치가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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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야산 스님.초롱불 노래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3
이즈미 교카 지음, 임태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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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이 매우 아름다운 환상 문학. 페드로 알모도바르가 전설의 고향을 찍는다면 아마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초롱불 노래>는 1950~60년대 일본 영화 황금기에 나왔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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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워드 진, 세상을 어떻게 통찰할 것인가
데이비드 바사미언.하워드 진 지음, 강주헌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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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나는 어른들이 쉽게 체념하는 모습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분명, 바꿀 수 있어 보이는데도 어른들은 시작도 하기 전에 포기하고는 했다. 내가 어른이 되고, 아니 지금 이 나이에 이르고 보니, 그 체념, 그 포기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 것이었다.

어젯밤만 하더라도 나는 오늘 아침엔 이재용 구속이라는, 도저히 볼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헤드라인을 드디어 보게 되겠거니 하고 잠들었다. 꿈을 잘 꾸지 않는 내가 어젯밤에는 가방을 잃어버려서 계속 어딘가를 헤매다 깨어났다. 일어나자마자 스마트폰으로 포털사이트에 접속한 나는 극심한 실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어서 한 10분인가 망연자실 누워만 있었다. 꿈속에서 잃어버린 가방이 자꾸만 떠올랐다.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

구치소를 나오며 지은 그의 희미한 미소에서 나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절망감을 느낀다. 성 앞에 선 K처럼 무기력할 뿐이다.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 것이었다.......... 눈물이 나기도 한다. 너무나 분하고, 절망스러워서. 촛불 시위를 또 나가면 무엇하나 싶기도 하다.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데.... 다시 그냥 책이나 읽고 음악이나 듣고 영화나 보면서 세상과 나를 격리해야겠다 싶어진다...... 그러다가도 이런 나를 추스려야지, 싶어진다. 그럴 때 떠오른 한 사람 하워드 진. 그를 읽으면 이 절망감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으려나.


그의 책을 다시 들춰본다. 이 책의 원제는 “Conversations on History and Politics”로 하워드 진이 미국, 캐나다, 유럽, 남아프리카공화국, 오스트레일리아 등 영어권에 공동으로 방송되는 얼터너티브 라디오의 창립자 겸 진행자인 데이비드 버사미언과 인터뷰한 내용들을 수록했다. 내용은 ‘자본주의의 위기는 구조적인 위기다 / 지배계급의 논리에 저항해야한다 / 문화 지도자들은 대중을 이끌 수 있다 / 나는 전쟁에 반대한다 / 예술가들은 사회적 변화를 위한 역할이 있다 / 비판적 사고와 의심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 역사는 기억되어야 한다 / 국경 없는 세계를 위하여’ 등으로 역사, 정치, 사회에 관한 하워드 진의 철학과 신념을 만나보기에 더없이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터뷰 진행자인 데이비드 버사이먼은 저널리스트이자 인터뷰의 대가로 알려졌는데, 그가 하워드 진에게 던지는 질문을 보면 ‘인터뷰의 대가’라는 명성을 괜히 얻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질문의 내용은 물론 질문을 던지는 방식 등이 무척 날카롭고 인터뷰이 못지않게 해박한 지식을 겸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살아있는 미국역사>나 <미국 민중사>와 같은 책을 먼저 읽고 이 책을 읽는다면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듯하다. 하워드 진은 미국에서도 학계의 이단자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미국 정부 및 지배계급에 거침없는 비판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단순히 말로만 쓴소리를 내뱉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 흑인(유색인), 노동자, 노숙자, 여성, 억압받는 자들 등 항상 약자 편에서 행동하는 지성인으로 살아왔다. 그런 그의 삶의 기록이 이 책에서는 여과 없이 드러나 책을 읽다가 울컥하고 눈물이 나기도 한다.


원제와는 조금 다른 <세상을 어떻게 통찰할 것인가>라는 한국어판 제목이 그리 생뚱맞지 않다고 여겨지는 이유는, 하워드 진의 이야기를 통해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인간답게 사는 길인가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하워드 진은 역사상 유례없이 빈부의 격차가 심해진 오늘날 미국 사회의 갖가지 병폐를 꼬집으며 전쟁광 부시 정부와 그들과 함께 결탁한 자본가, 민주당 공화당 양당 정치가들에게 신랄한 비판을 가한다. 물론 아울러 이러한 지배계급에 맞서기 위해 민중은 계속 깨어 있기를 촉구한다.


예를 들어, 지배계급의 논리에 저항할 것, 잘못된 역사를 잊지 말고 기억해서 그와 같은 실수를 절대 되풀이하지 않도록 할 것(역사를 잊기를 바라는 것은 언제나 지배계급이다. 그리고 우리는 너무도 금세 쉽게 잊는다), 예술가와 문화지도자들의 역할이 민중에게 일깨우는 힘은 그 어떤 힘보다 막강하다. 때문에 침묵하지 말아야 한다, 비판적 사고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텔레비전은 몇몇 좋은 프로그램을 제외하고는 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를 멍청하게 받아들이기에 무척 좋은 도구라고 하워드 진은 지적한다) 등등.


마지막에 수록된 ‘실망을 이겨내고’라는 하워드 진의 스펠먼 대학 졸업 축사는(그는 1956년 애틀랜타에 있는 흑인 여자 대학 스펠먼 대학에서 교수로 임용되었으나 1963년 ‘불복종’을 이유로 해고 당한다.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가하고, 보수적인 학교 운영에 반발한 학생들의 시위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05년 하워드 진은 스펠먼 대학으로 돌아가 명예학위를 받았고 졸업식 축사를 했다) 이 책에서 그가 이야기하는 모든 것이 집약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어느 때보다 절망적인 현실에 놓여 있는 지금, 절대로 실망하지 말 것을 하워드 진은 당부한다. 역사는 그러한 때 지배계급에 저항하는 민중의 뜨거운 움직임에 의해 언제나 더 나은 방향으로 움직여 왔음을 지적하면서.


“물론 여러분이 현실적인 선택을 해야 한다는 걸 압니다. 일자리를 구하고 결혼을 해서 자식도 낳아야겠지요. 부자가 되어 우리 사회가 성공이라 규정하는 ‘성공’을 거두기도 할 겁니다. 재산을 모으고 사회적 지위와 권위도 쌓아갈 겁니다. 하지만 ‘좋은 삶(Good Life)’은 그런 것만으로는 충족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좋은 삶’을 영위하기 위해 무슨 일은 하던, 교사가 되던, 사회 운동가가 되던, 사업가, 변호사, 시인, 과학자 등 무엇이 되던, 여러분의 자식, 아니 모든 아이를 위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여러분의 삶을 조금이라도 투자하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세대는 전쟁 종식을 강력히 요구하고, 여러분의 세대는 역사에서 아직 이뤄내지 못한 일을 해내고, 이 지구에서 살아가는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구분 짓는 국경을 지워버리길 바랍니다.(...) 나는 여러분이 사회에서 성공이라고 평가하는 그 성공에 안주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부당한 규칙에까지 순종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안에 감춰진 용기를 마음껏 끌어내서 행동하길 바랍니다. 흑백을 넘어서 우리가 귀감으로 삼을 사람은 많습니다. 콘돌리자 라이스, 콜린 파월, 클라렌스 토마스 같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귀감으로 삼지는 마십시오. 그들은 권력자와 부자의 하수인이 됐을 뿐입니다. W.E.B 듀보이스, 마틴 루서 킹, 맬컴 엑스, 매리언 라이트 에델먼, 제임스 볼드윈, 조세핀 베이커 그리고 평화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지배집단에 도전한 훌륭한 백인을 귀감으로 삼으십시오.”


미국 국부의 상당한 부분이 군사비에 지출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모두가 안보라는 이름하에 자행되는 짓이지요. 하지만 일상적인 삶에서 국민의 안전은 도외시됩니다. 국민이 노동을 중단하고 싶은 연령에 이르렀을 때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삶이 진정한 안보입니다. 모든 국민이 비용을 걱정하지 않으면서 의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삶이 진정한 안보입니다. 우리가 일할 수 있을 때 언제라도 일자리를 가질 수 있는 삶이 진정한 안보입니다. (‘자본주의의 위기는 구조적인 위기다’ p.14)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 가운데는 공직에 나선 적이 없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어쩌면 당연히 그랬어야 합니다. 일단 공직에 나서면 역사적으로 덜 중요한 인물이 됩니다. 물론 지배계급의 눈에는 의사결정권을 갖는다는 점에서 더 중요한 인물로 비춰질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사회적 변화를 유도하는 변수로서는 덜 중요해집니다. 왜냐고요? 공적에 취임하는 순간부터 부와 권력에서 비롯되는 모든 수단에 길들여지기 때문입니다. (‘문화 지도자들은 대중을 이끌 수 있다’ p.61)

대니 셰터라는 독불장군 같은 방송인이 쓴 <오랫동안 볼수록 아는 건 줄어든다 The More You Watch, The Less You Know>라는 책이었을 겁니다. 맞습니다. 정확한 지적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미국인이 텔레비전에서 정보를 얻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텔레비전은 기업과 정부의 시녀에 가깝습니다. (‘나는 전쟁에 반대한다’ p.90)

권력을 쥔 사람들 우리가 모든 걸 잊기를 바랍니다. 기억하지 못해야 우리가 어제 태어난 사람처럼 기업의 지배 하에 있는 언론이나 정부가 우리에게 하는 말을 점검할 방법이 없을 테니까요. 기억, 즉 역사는 과거의 거짓말과 속임수를 적발하는 수단이며, 겉으로는 무력해 보이는 국민이 권력을 쥔 지배계급을 무찌를 수 있는 무기입니다. (‘역사는 기억되어야 한다. p.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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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치는 여자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4
엘프리데 옐리네크 지음, 이병애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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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사두었던 책을 뒤늦게 읽었다. 처음 살 때는 의욕에 불탔는데 이 책은 읽기 힘든 구석이 꽤 있다. 그러다 보니 계속 미루게 되었다. 드디어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피아노 치는 여자>를 손에 들게 된 이유는 마찬가지로 최근에 본 영화 <피아니스트>의 영향이 꽤 크다(‘피아니스트’라는 제목을 가진 영화는 두 편이 있다. 하나는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피아니스트> 그리고 또 하나는 오늘 이야기 할 미하엘 하네케의 <피아니스트 : La Pianiste / The Piano Teacher>). 미하엘 하네케 감독의 영화를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의 영화 <피아니스트>가 어떤 분위기일지 대충 짐작할 수 있으리라.

이 영화는 굉장히 불편하고, 당혹스럽고, 폭력적이다. 그러면서도 무척 강렬하다. 그리고 미하엘 하네케 <피아니스트>의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배우 ‘이자벨 위페르’는 눈부시다. 이자벨 위페르의 연기 하나만으로도 이 영화는 정말 매혹적이다. 끔찍한(?) 영화 <피아니스트>의 소문은 익히 들어 대충 어떠리란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영화가 그토록 당혹스러울 줄은 몰랐다. 영화가 끝나고도 한동안 멍했다. 이자벨 위페르가 연기했던 ‘에리카’ 그녀의 심리가 너무나도 궁금해서 드디어 책을 읽기로 결심했다. 영화만으로도 대충 ‘에리카’ 그녀의 마음을 헤아릴 수는 있으나 책은 영화보다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해주기에 이 당혹스러운 작품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졌다. 영화와 책은 거의 비슷하다. 책을 읽는 내내 에리카에 ‘이자벨 위페르’를 대입해 상상했다. 정말 완벽한 조화였다.

피아노 교사인 ‘에리카’는 삼십대 중반임에도 아직 엄마와 산다. 특별하게 사귀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직장과 집을 오가는 생활이 거의 전부다. 그런데 이 모녀 관계는 좀 특이하다. 엄마는 에리카의 일상을 감시하고 조종한다. 엄마는 에리카가 어릴 때부터 자신의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 에리카에게 음악 교육을 시켰고, 특별한 재능이 없는 딸인데도 천재로 치켜세우며 ‘피아니스트’를 만들고자 ‘에리카’에게 거의 모든 쾌락을 금지한다. 남자를 사귀는 것은 물론, 친구를 만나는 것조차 ‘관리’한다. 더 좋은 아파트로 이사를 가려면 돈을 모아야 한다며 쇼핑도 금지한다. 그리고 이 모녀는 한 침대에서 잔다! 마치 부부처럼! 엄마의 지나친 억압과 구속 때문에 그 안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에리카, 그러나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구속과 억압에 길들여져 있다. 벗어나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안에서 평온함을 느낀다.

이렇게 키워진 에리카는 ‘정상적’이라고 할 수 없는 온갖 행태를 한다. 그녀는 자신에게 금지된 물건을 훔친다. 그렇지 못하면 남들도 갖지 못하도록 파괴해버린다. 엄마와의 관계에서 스트레스를 받으면 대중교통을 타고 타인에게 은밀한 폭력을 행사한다(꼬집기, 발로 짓밟기 등등). 때로는 면도칼로 자해를 한다. 그러나 그녀는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 무엇보다 엘프리데 옐리네크 <피아노 치는 여자>와 미하엘 하네케의 <피아니스트>가 ‘외설’ 혹은 ‘음란물’ 취급을 받은 이유는 다음과 같다. 에리카는 여자임에도 남자들이 가득한 포르노샵에 들러 포르노물을 즐겨본다(영화와 책에선 굉장히 충격적인 장면이 있는데 그건 차마 말 못하겠다). 뿐만 아니다. 그녀는 숲에서 사랑을 나누는 커플을 찾아 훔쳐보는 것도 즐긴다(영화에서는 자동차극장에서 섹스하는 커플을 훔쳐보는 장면으로 나옴).

그녀는 엄마가 이성 관계조차 금지하다 보니 성에 굶주린 것일까?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에리카는 엄마의 감시망을 교묘히 피해 몇몇 남자와 사귀어왔고 그들과 당연히 섹스를 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정상적인 관계에서는 쾌락을 느끼지 못한다. 마치 자신의 몸을 자해해도 아무런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그런 그녀에게 음악 교습소 제자 중 하나인 발터 클레머가 다가온다. 당연히 에리카와 그녀의 엄마는 클레머를 경계하고, 그 둘만의 기이하지만 평온한 일상에 끼어들지 못하도록 밀어낸다. 그러나 집요한 클레머의 구애는 드디어 성공! 에리카와 키스를 하고 그 이상을 하게 되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러나 에리카는 그 순간 이른바 ‘정상적’이라고 할 만한 반응이 아닌 다른 모습을 드러낸다. 그 이후에도 에리카는 클레머에게 ‘편지’를 써 ‘편지’안에 쓰인 대로 자신을 대해주길 바란다. 영화에서는 이 편지의 내용이 자세하게 나오지 않고 관객이 그저 추측할 수 있게 해줄 뿐이다. 반면 책에서는 구구절절 그 내용이 소개된다. 편지 속 에리카의 요구는 참 당황스럽다. 그녀는 클레머가 그녀를 학대해주길 바란다. 채찍을 휘둘러 구타해주길 바란다. 그런 에리카 잎에서 망연자실한 클레머. 과연 이들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아니, 이 여자 에리카의 인생은 어떻게 될까?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피아노 치는 여자>는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라고 한다. 그녀는 실제로 아버지가 정신병원에서 일찍 생을 마감하자 엄마와 단둘이 살았고, 어릴 때부터 ‘음악가’로 성장하길 바라는 엄마로부터 스파르타식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과연 어디까지가 자전적인 이야기일지는 가늠되지 않는다. 만약 이 책에 담긴 모든 내용이 ‘자전적’ 내용이라면 엘리네크 그녀는 정말 자신의 ‘상처’를 폭로함으로써 역설적으로 간절히 치유되기를 바랐던 것은 아닐까 싶어진다.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영화도 마찬가지) 결코 정상이라고는 할 수 없는, 기이한 여자 에리카에게 한없는 연민이 느껴진다. 평생을 억압에 시달려왔고,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엄마에게 아버지의 역할(남성성의 대리)까지 강요받은 여자. 정상적인 관계를 꿈꾸면서도 이제는 그 정상적인 관계를 맺는 방법을 잊어버린 여자. 그래서 가학/피학의 도착적인 성적 일탈로 억압된 상태를 벗어나고자 꿈꾸는 여자. 그 여자의 서늘한 삶이 오래도로 기억에 남는다. 그래서 책의 마지막 장면이자 영화의 엔딩장면이, 그 장면 속의 이자벨 위페르의 처절한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미하엘 하네케 감독 <피아니스트>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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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1-17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리카의 자녀 교육법이 사드와 정반대입니다. 사드의 소설에 나오는 변태 백작은 딸에게 쾌락을 즐기는 것의 장점을 가르치려고 합니다. 그래서 딸을 거의 감금하다시피 키우고, 결국 아버지와 딸의 비정상적인 관계가 형성되고 맙니다. 제가 언급한 사드의 소설과 옐리네크의 이 소설을 비교해보고 싶군요. ^^

잠자냥 2017-01-17 12:41   좋아요 0 | URL
어떤 관계든 비정상적인 인간 관계가 한 사람에게 불러오는 피해는 엄청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말씀하신 소설은 사드의 <소돔 120일> 인가요?

cyrus 2017-01-17 13:14   좋아요 1 | URL
제가 언급한 사드의 소설은 단편입니다. 제목이 ‘외제니 드 프랑발‘입니다. 《사랑의 범죄》에 수록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