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더 하우스 1
존 어빙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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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존 어빙의 <사이더 하우스 : 원제 The Cider House Rules>는 한 고아 소년의 성장기이자, 삶을 이루는 규칙에 관한 소설이다. 이것은 해서는 되고, 저것은 해서는 안 되고 등등 삶에는 수많은 규칙이 존재한다. 이 소설에서도 몇 가지 큰 삶의 규칙이 등장한다. 주인공 ‘호머 웰즈’가 살고 있는 고아원에서의 규칙, 호머가 사과농장의 일꾼으로 들어가면서 만나게 되는 사과농장의 규칙,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서 저절로 깨닫게 되는 사랑에서의 규칙 등등. 그 중 이 작품에서 가장 크게 다루고 있는 규칙은 ‘낙태’가 아닐까 싶다.

주인공 호머 웰즈는 고아다. 그가 태어난 시기의 미국은 낙태가 불법으로 금지되어 있는 때였다. 때문에 미혼모들은 아이를 원치 않아도 낳을 수 밖에 없었고, 그런 미혼모들에 의해 버려지는 아이들 때문에 호머 웰즈가 자란 고아원에는 불행한 아이들이 넘쳐 났다. 고아원의 원장이자 의사인 ‘닥터 라치’는 낙태 시술을 하면 의사 자격을 박탈당하던 그 시기에 고아원에서 아이를 낳고 싶어하는 산모의 아이를 받기도 하고, 아이를 원치 않는 산모에겐 낙태 시술도 해준다. 물론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고. 그는 원치 않는 아이들이 세상에 태어나 불행해지는 사례를 너무도 많이 봐왔고, 원치 않는 임신으로 자신의 삶을 망가뜨리는 수많은 불행한 여자들 또한 많이 보아왔다. 그런 닥터 라치에겐 임신과 출산도 ‘하나님의 일’이지만 낙태 또한 ‘하나님의 일’이다.

닥터 라치는 자신이 늙어 죽은 뒤 고아원에서 자신의 뒤를 이어 불행한 산모들과 불행한 고아가 될 아기들의 운명을 구해줄 ‘낙태 시술’을 감행할 의사의 필요성을 깨닫는다. 그리고 ‘호머 웰즈’를 점 찍는다. 그에게 의사가 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나 호머는 낙태 시술로 버려진 태아의 시체를 본 뒤 충격을 받아 자신은 절대로 낙태를 하지 않을 것이라며 라치의 뜻을 거부한다.  

얼마 전 읽었던 ‘르몽드 세계사’에서 낙태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는데, 한국은 (국가가) 낙태를 허용하는가, 안 하는가에 따라 분류한 세계지도에서 부분적 낙태허용국가에 속한다. 물론 그런 구분에 상관없이 한국에서는 낙태가 거의 자유롭게 허용되고 있는 듯하다. 반면 낙태가 금지되어 있는 국가는 대부분 가톨릭계 국가였다. 글쎄… 생명을 어느 순간부터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겠지만 낙태도 하나님의 일이라고 중얼거리던 닥터 라치의 생각에 나는 동의하는 편이다.

이 소설 속에서 그려지는 수많은 불행한 여자들의 삶을 봐도 그렇고, 태어나자 마자 버려지는 고통을 당하는 불행한 아이들의 삶을 봐도 그렇고… 그저 ‘태아’도 생명이기 때문에 낙태는 금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척 안이한 생각이 아닐까 싶다. 물론 태아의 성을 감별해서 원하는 성(性)이 아니면 주저 없이 낙태를 감행하는 것은 비도덕적인 일이라 찬성하지 않지만…

‘낙태’라는 무거운 주제 때문에 이 소설이 재미가 없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면 오산. 존 어빙은 현존 미국 최고의 스토리텔러라고 불리는 작가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솜씨가 탁월하다. 웃기고 울리고 독자를 쥐락펴락한다. 기본 줄거리와 상관없는 듯한 내용이 느닷없이 튀어나오기도 하는데 그런 내용들이 뒤로 흘러가면서 하나씩 얼개가 짜맞춰질 때는 작가의 이야기를 엮어가는 솜씨에 감탄이 나올 정도. 

물론 1, 2권을 합해 천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은 지나치게 길다 싶기도 하다. 그러나 고아가 고아로 태어나, 인격과 자기 나름의 가치관을 가진 어른으로 성장하고, 한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자신의 아이를 낳고, 그리고 결국 긴 길을 돌아 자신이 진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는 과정으로 천 페이지라는 양은 어쩌면 그리 많은 분량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영화에서부터 시작된다. 오래 전에 이 소설과 같은 제목의 영화를 본 적이 있었는데, 무척 감동했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영화는 그다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당시에는 거의 무명에 가깝던 토비 맥과이어가 주인공 ‘호머 웰즈’ 역을 맡았는데, 이 책을 읽는 내내 저절로 토비 맥과이어 얼굴이 그려지더라. 다만 지금에야 호머 웰즈가 사랑에 빠지는 대상인 ‘캔디’ 역을 ‘샤를리즈 테론’이 맡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나는 소설을 읽으면서 ‘캔디’의 모습을 상상할 때 어쩐지 ‘키이라 나이틀리’가 떠올랐다. 소설을 읽고 나니, 영화를 다시 보고 싶은 생각도 든다.




영화 속 호머(토비 맥과이어)와 캔디(샤를리즈 테론)- 영화도 꽤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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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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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 팬은 아니다. 그의 작품 가운데 어떤 것은 좋고, 또 어떤 것은 그렇지 못하다. 그럼에도 그가 소설가로서 살아가는 방식, 작품을 대하는 태도- 문단과 거리 두고 살기, 회사원처럼 직업적으로 꾸준히 성실히 쓰기, 몸을 단련해서 뒷받침하기 등등은 존경스럽고 본받을 만한 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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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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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새로운 책이 나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는 작가 중 한 사람, 줄리언 반스. 아내의 죽음 이후 그는 죽음에 관한 생각이 깊어진 듯하다. 반스 특유의 재치 있고 위트 넘치는 표현, 그 안에 담긴 깊은 사유의 흔적을 소설이 아닌 에세이로 만날 수 있다. 궁금했던 그의 가족사를 엿볼 수 있었던 것은 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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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털리 부인의 연인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5
D.H. 로렌스 지음, 이인규 옮김 / 민음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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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세상에는 오직 하나의 계급만 존재하는 것이니, 그것은 바로 ‘돈에 사로잡힌 돈돌이 계급’이었다. 돈돌이 사내와 돈돌이 계집. 차이가 있다면 오직, 돈이 얼마나 많이 있느냐와 돈을 얼마나 많이 바라느냐일 뿐이다. (1권 231쪽)

“어쨌든 그렇게 많이들 지껄이는데도 불구하고,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오. 젊은이들은 미칠 지경인데, 그것은 바로 쓸 돈이 없기 때문이라오. 그들의 삶은 전부 돈을 쓰는 것에 의존하고 있는데, 지금 그들에게 그 쓸 돈이 한 푼도 없는 것이오. 그게 바로 우리의 문명과 교육의 실체라오. 즉, 돈을 쓰는 것에만 완전히 의존하게끔 대중을 가르치고 길러놓는데, 그러고 나면 돈이 떨어져버리고 마는 거요.” (2권 315쪽)


위의 구절이 어떤 작품에서 나왔겠느냐고 사람들에게 묻는다면? 글쎄…. 이 구절들을 보고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떠올리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아마도 굉장히 정치적인, 계급 비판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그런 작품을 떠올리겠지. 그러나 놀랍게도 위 문장은 <채털리 부인의 연인>에 나온다. 게다가 로렌스의 이 작품에는 이와 비슷한 구절이 무수히 많이 등장한다. 내게 이것은 하나의 충격이었다. 그리고 위와 같은 구절만으로도 <채털리 부인의 연인>이 얼마나 왜곡되어 사람들에게 알려졌는지 깨달을 수 있다.

<채털리 부인의 연인>은 하반신 불구가 된 남편에게서 성적으로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남편의 하인이자 자신의 하인이기도 한 사냥터지기와 바람나 성(性)에 눈을 뜨는 한 부인의 이야기가 아니다. 아니, 그런 부인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여자가 육체의 쾌락에 눈을 뜨면서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이끌어나가기 시작한다는 점에서 페미니즘 소설이기도 하고, 돈밖에 모르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물질 위주의 산업화 시대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담긴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소설이기도 하다.

거의 100년 전에 쓰인 이 작품은 현대의 섹스리스 부부에 대한 비판서로 읽히기도 한다. 무엇 때문에 돈을 그토록 많이 필요로 하고, 돈을 많이 벌어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 무작정 돈벌이에 급급한, 서로에 대한 애정과 섹스는 뒷전이고 ‘경제’활동에 올인하는 섹스리스 부부. 코니와 그의 남편인 클리퍼드는 무늬만 부부인채로 살아가는 현대의 수많은 섹스리스 부부를 떠올리게 한다. 경제가 우선인 결혼제도에 얽혀 결혼생활을 유지하느라 인생을 낭비하는 사람들. 식은 애정을 붙들고 결혼을 유지하고, 그러기에 불륜도 아무렇지 않게 저지르는 사람들. 로렌스가 말한 ‘돈돌이 사내’와 ‘돈돌이 계집’의 허위에 찬 ‘결혼생활’은 지금도 여전하다. 아니 코니와 클리퍼드가 살던 그 시절보다 더 심하다.

이 작품은 코니의 남편 클리퍼드와 코니의 연인 멜러즈를 통해 두 세계를 끊임없이 대비해 보여준다. 클리퍼드로 상징되는 정신적, 물질적인 삶과 멜러즈로 상징되는 육체적, 인간적인 삶의 이분법적인 대비. 물질사회, 산업사회의 비인간성에 스스로 저항해 숲속에서 은둔자의 삶을 사는 사냥터지기 멜러즈와 이런 멜러즈를 사랑하게 되는 코니의 모습은 로렌스가 주장하고자 하는 인간 본연의 삶을 의미한다. 자연 속에서 자연스럽고 열정적인 애정을 나누는 삶이 인간으로서 살아야 하는 삶이라고. 이런 작가의 생각이 멜러즈의 입을 통해 끊임없이 드러나고, 종종 지나치리만큼 이분법적인 도식과 명확한 주제의식이 오히려 단점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외설’에 초점이 맞춰졌고, 여전히 그렇게 인식되어 진다는 점은 아이러니하기만 하다.

물론 나 또한 그런 인식의 틀에 갇혀 그저 야한, 페미니즘 소설로만 알고 있었다면 무척 억울했을 뻔한 작품이다. 늦게라도 로렌스의 작품을 제대로 알게 되어 다행스럽기도 하다. <채털리 부인의 연인>은 작가의 지나친 계도의식(?)이 들어있어 로렌스의 다른 작품에 비해 작품성은 좀 떨어지는 게 아닐까 추측하면서 <무지개> 같은 다른 작품도 더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길게 읽기 싫은 사람을 위한 한 줄 메모 : "이 소설은 외설이 아니었다!! 사회경제 비판서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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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이었던 남자 - 악몽 펭귄클래식 76
G. K. 체스터튼 지음, 김성중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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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버트 키스 체스터턴의 <목요일이었던 남자 The Man Who Was Thursday : A Nightmare>, 나는 이 책이 제목과 표지 등을 보고 매력적이라 느껴져서 읽게 되었는데, 손에서 책을 놓을 수가 없었다. 다른 책을 읽다 말고 이 책을 집어 들었는데 결국 끝까지 읽고 말았다.


이 책의 표지 뒷면에는 체스터턴을 에드거 앨런 포나 아서 코난 도일과 함께 가장 재미있는 추리소설의 작가라고 언급하고 있다. 보르헤스는 체스터턴을 일컬어 ‘에드커 앨런 포보다 더 훌륭한 추리 소설 작가’라고 말하기도 했단다. <목요일이었던 남자>를 손에서 놓지 못했던 이유 중 하나는 이 작품이 추리 소설의 형식을 띄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저 단순한 추리 소설일까? 그렇지만은 않다. <목요일이었던 남자>는 정치적이고 철학적이고 종교적이다. 정치적, 철학적, 종교적이라는 언급 때문에 머리가 아플 거 같지만, 그렇지는 않다. 술술 읽힌다. 그런데 그 술술 읽히는 문장들을 한 번 더 생각해보면 상당히 골치가 아파진다. 체스터턴에 대해 많이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가 어떤 생각을 지녔던 인물인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다분히 종교적인 사람이었다는 생각은 든다. 사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도 <브라운 신부> 시리즈라고 한다.

추리 소설의 내용을 밝히는 것은 스포일러가 되니 자세히 언급하지는 못하지만 주인공은 우연히 무정부주의자 조직의 음모를 파헤치는 역할을 맡게 되고 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각종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주인공이 대항해서 싸우는 조직이 '무정부주의자 조직‘이라는 점에서 나는 책을 읽는 내내 갈등하게 된다. 과연 이 책에서 다루는 것처럼 무정부의자가 악(惡)인가, 끊임없이 반문하게 되기 때문이다.

아나키즘으로 번역되는 무정부주의를 굳이 아나키즘과 똑같은 의미로 해석할 수는 없지만 모든 정치적 조직, 규율, 권위를 거부하고 국가권력기관의 강제적인 수단을 해체함으로써 인간의 진정한 자유와 평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무정부주의와 아나키즘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을 듯하다. 그리고 어느 정도 나는 비폭력 아나키즘을 신봉한다. 국가나 정부, 제도가 오히려 사람의 삶을 속박하고 인간은 어쩌면 그런 제도들이 없을 때 더 자유롭게 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이 작품에서 사회의 근간을 뿌리째 흔드는 무정부주의자들을 적으로 간주하는 것에 대해 쉽게 동의할 수가 없었다.


"위험한 범죄자들은 교육받은 자들이죠. 우리는 오늘날 가장 위험한 범죄자는 철저히 무법적인 현대 철학자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도둑이나 중혼자들이 근본적으로는 도덕적이에요. 그들은 동정의 여지가 있죠. 인간의 근본적인 이상은 수용하는데, 단지 잘못 추구할 뿐이니까요. 도둑들은 재산을 존중합니다. 그걸 너무 존중한 나머지 자기 손안에 넣고 싶어 할 뿐이죠. 하지만 철학자들은 재산을 증오해서 개인의 소유라는 생각 자체를 파괴하려고 해요. 중혼자들은 결혼을 존중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의식적이고 격식을 차리는 중혼의 형식을 따르지 않겠죠. 하지만 철학자들은 결혼 자체를 경멸합니다. 또, 살인자들은 인간의 생명을 존중합니다. 단지 자신들보다 덜 중요해 보이는 생명을 희생시킴으로써 생명의 더 큰 충만함을 맛보려는 것뿐이죠. 그런데 철학자들은 생명 그 자체를 증오해서, 다른 사람은 물론이고 자기 생명까지도 증오합니다." (54~55쪽)


이 작품에서 무정부주의자들에 대해 언급하는 내용이다. 국가를 지속하는 법이나 제도 등을 해체하고 개인의 자유를 최상의 가치로 내세우는 이들이 잘못된 것일까? 물론 체스터턴은 앞서 언급했듯 종교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종교마저 거부하려는 그들이 썩 달갑게 보이지는 않았으리란 추측도 든다. 나 또한 무정부주의자들이 폭력적으로 사회 전복을 꿈꾸는 것은 반대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사유재산이나 국가, 종교, 법 등 권위주의적인 관습, 제도, 권력이 인간을 오히려 타락하게 하고, 인간의 삶을 피폐하게 만든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무정부주의자’들에게 심정적으로 동조하게 된다.

오히려 무정부주의자 조직을 해체하려는 주인공의 생각과 노력이 좀 순진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체스터턴이나 이 책의 주인공이 보자면 나 역시도 그들이 주적으로 삼고 없애야 할,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될 썩은 사상을 지닌 사람일 텐데…. 글쎄 무엇이 선(善)이고 악(惡)인지 쉽게 판가름하기 어렵다. 책을 읽다 보면 결국 체스터턴이 생각했던 무정부주의자와 내가 생각하는 아나키스트 사이에는 분명한 간극이 존재한다는 느낌도 든다. 체스터턴은 ‘무정부주의=무질서 혹은 혼란상태’로 보았고 그는 기존의 사회 질서와 전통적인 가치가 무너지고 있던 당시 사회에서 인간의 오만함으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우주적인 질서의 회복을 꿈꾸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책의 중반쯤 넘어가면 추리소설을 즐겨 읽는 사람이라면 대충 ‘어떤’ 짐작들을 할 수 있으리라. 이 작품의 결말은 전반부에 비해 좀 싱거운 느낌도 들고, ‘흠, 뭐야 결국 이렇게 끝나는 거야?’ 싶기도 한데. 그럼에도 흥미진진하다. 끝으로 이 책 서두에는 <목요일이었던 남자에 관하여>라는 1935년 <런던 뉴스>에서 이 작품에 대해 다룬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책을 재미있게 읽으려는 분은 이 서문은 읽지 않고 시작하는 편이 좋을 듯하다. 스포일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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