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의 푸가 - 철학자 김진영의 이별 일기
김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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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에 대해서 이토록 아름다운 문장으로 이토록 깊이 있는 사유를 할 수 있다니. 이별을 노래하고 있는데 그 절절한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사랑이 하고 싶어지는 묘한 책. 이제는 세상에 없는 그가 헤어지기 싫어했던 대상은 어떤 연인이 아니라 어쩌면 이 생(生) 그 자체는 아니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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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8
페터 한트케 지음, 안장혁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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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여행을 즐겨 떠나는 이유는 일상을 벗어난 낯선 환경에서 예상치 못한 일과 부딪히면서 새로운 나를 또는 그런 세계를 발견하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주말, 나는 서울을 잠시 벗어나 가까운 소도시로 짧은 여행을 다녀왔다. 벌써 3번째 가는 곳으로 그리 낯설지 않은, 어쩌면 더는 새로울 것이 없는 그런 도시이다. 그럼에도 그 익숙한 환경 속에서 몇 년 전과는 다른 작은 차이를 발견했다. 몇 해 전에 비해 인구도 더 줄어들고 노령 인구가 급속하게 늘어난 그 소도시는 이국의 노동자들로 넘쳐났다. 중국인을 대상으로 운영하는 식료품점도 여럿 문을 열어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음식점에서는 주문을 받는 이들이 거의 다른 나라 출신이라 말이 잘 통하지 않기도 했다. 한국도 이제는 이민자나 외국인 노동자를 흔히 볼 수 있음을, 그 작은 도시에서 여실히 느꼈다고나 할까.

페터 한트케의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의 ‘나’ 또한 여행을 떠난다. 그는 작은 소도시로 짧은 여행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오스트리아에서 저 먼 미국으로 떠나 곳곳을 여행한다. 그런데 이 여행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행을 떠날 때 느끼는 설렘이나 흥분, 즐거움, 일상을 벗어나는 데서 오는 해방감 등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나’는 불만과 짜증 또는 분노에 차서 욕지거리를 내뱉거나 때로는 이유 없이 불안에 시달리며 두려움에 떨기도 한다. 돈과 시간에 그다지 얽매이지 않고, 심지어 아주 먼 나라로 여행을 떠나 일상에서 그를 옭아매던 시선으로부터도 자유로울 것만 같은데 그는 왜 이토록 불만에 차 있을까?

‘나는 지금 뉴욕에 있어요. 더이상 나를 찾지 마요. 만나봐야 그다지 좋은 일이 있을 성싶지 않으니까.’ 그의 아내 유디트는 이 짧은 편지를 남겨둔 채 미국으로 홀연 떠났고, 그는 아내의 뒤를 쫓는 중이다. 딱히 아내를 사랑하는 것 같지도 않는데도 그렇다. 아내를 찾아 재결합을 시도한다던가, 망가진 관계를 되돌린다든가 하는 긍정적인 의도는 없어 보인다. 오히려 그는 여행 중간에 아내를 향해 저주와 욕을 퍼붓기도 한다. “너라는 계집!” “죽도록 패주고 말 거야, 죽도록 패주고 말 거야. 죽도록 패주고 말 거야. 제발 내 눈에 띄지 마라. 너 이 망할 년, 나한테 걸리면 정말 좋지 않을 테니.” 등등.

아내를 향한 이런 욕설에서도 짐작할 수 있지만 그는 꽤 성마른 사람이다. 여행길에서 만난 어느 군인이 자신에게 이야기를 털어놓자 ‘그가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사실에 모욕감’을 느끼기도 한다. 도대체 자신이 ‘왜 누군가의 이야기를 계속 들어주어야 하는’지 의아해한다. 여행 중 매력적인 여자를 만나도 여자에게 상냥함을 보인다는 것 자체가 그에게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단지 손만 뻗어보다는 생각으로도 그 순간 모든 의욕은 사라지면서 극심한 피로감’만 몰려온다. 짧은 편지 한 장을 남겨둔 채 집을 떠나버린 아내하고만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그가 떠나온 오스트리아에서 과연 제대로 된 인관 관계가 있었을까 의문이 들 정도로 자기 안으로만 침잠하고, 계속 고독 속에 머물기를 그 스스로 선택한다. 그런데 그의 그런 상태는 딱히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는 종종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끼며 몸서리친다.

만일 이 작품에서 ‘나’가 여행을 하면서도 계속 이렇게 혼자인 상태로 불만과 권태 고독에 젖어 삶의 아무런 가치도 발견하지 못한다면 읽는 사람조차 만족스럽지 못한 기분에 휩싸여 책을 놓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여행’ 상태이고 이 낯설기 만한 땅에서 서서히 자기도 모르게 변화해 간다. 그러나 이 변화는 아주 극적이지는 않다. 그는 오래전에 함께 밤을 보낸 적이 있는 ‘클레어’를 찾아가는데, 그녀와 그녀의 딸 ‘베네딕틴’과 함께 여행을 하면서 조금씩 변화해간다. 특히 ‘아이와 함께 있으면서 사물들의 이름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나는 이제껏 내가 얼마나 나 자신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져왔는지’를 깨닫게 된다. 그때까지 그는 자기 주변에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눈곱만치도 알지 못했다. 그제야 비로소 자기 주변의 일상적인 움직임에 대해 알고 있는 어휘가 너무나도 빈약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그렇게 차츰 사물을 단지 바라보기만 하면서 “아하!”하고 경험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변화 과정을 끝까지 관찰하는 법을 터득하기 시작한다.


장소 하나 바꾸는 것이 우리가 사실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것들을 마치 꿈을 잊는 것처럼 깨끗이 잊어버리게 만드는 데 그렇게 많은 기여를 한다면, 그거야말로 놀라운 일이 아니겠는가? (칼 필립 모리츠, <안톤 라이저>)


이 작품에는 두 가지 중요한 책이 등장한다. 하나는 고트프리트 켈러의 <녹색의 하인리히>이고 또 다른 하나가 칼 필립 모리츠의 <안톤 라이저>이다. ‘나’는 여행 내내 <녹색의 하인리히>를 읽으며, 종종 클레어와 그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녹색 옷만 고집하는 하인리히처럼 ‘나’는 언제부터인가 옷 한 벌로 버티는 일이 일상화되어 있다. 게다가 클레어의 지적처럼 그는 “다른 시대의 인물을 통해 현재를 반복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는 “하인리히처럼 차분하게 하나하나를 경험해가면서 경험이 쌓일 때마다 점점 현명한 판단을 하고, 그런 와중에 결국 자기의 이야기를 완성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때문에 녹색의 하인리히는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속의 ‘나’를 상징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한편 <안톤 라이저>의 구절들은 1부 ‘짧은 편지’와 2부 ‘긴 이별’ 앞에 삽입되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앞서 인용한 구절은 2부 ‘긴 이별’ 앞에 삽입된 구절이다. ‘그거야말로 놀라운 일’이라는 말처럼 ‘나’는 도저히 변화할 수 없었을 것만 같았던 방향으로 서서히 변해간다. 사실 <녹색의 하인리히>도 <안톤 라이저>도 성장소설임을 감안한다면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도 일종의 성장소설, 그것도 오직 ‘나’, 자기 자신으로만 침잠하는 데 익숙했던 한 성인이 낯선 세계에서 이제까지의 익숙했던 자신과 결별하고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성장소설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그가 이른바 ‘구대륙’이라고 할 수 있는 오스트리아에서 ‘신대륙’이라고 부르는 미국으로 여행을 떠나온 것도, 그가 이 여행 중에 이십대를 지나 서른 살 생일을 맞이하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나는 나의 두 팔을 가급적이면 나한테서 멀리 떨어뜨려놓았다. 안락의자에 앉을 때 나의 체온이 느껴지면 그 순간 다른 안락의자로 옮겨가곤 했다. 그러다보면 모든 의자에서 내 몸의 온기가 느껴졌고 그러면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나는 보폭을 크게 하고는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바짓가랑이가 서로 맞닿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서였다.(<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165쪽)


그리하여 그는 급기야 “며칠 전부터 이 세상이 정말 나를 향해 가슴을 활짝 열어젖히고 있으며 매 순간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것을 진지한 자세로 받아들이면서 신중하게 생각해보고 싶다고 말하게 된다. 이제 그는 자기의 에고(ego) 안에만 갇혀있기를 바라지 않는다. ‘내가 나 자신한테서 떠밀려난 채 더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 듯’하며 ‘이제부터 나 자신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고민한다. 어느덧 ‘나라는 존재는 잉여 인간과 같은 처지가 되어’(169쪽) 있는 것이다. 심지어 ‘나는 나 자신과 관련된 것이라면 더이상 아무것도 떠올리고 싶지’(185쪽) 않은 지경에까지 이른다. 이런 변화 속에 지난날 자신이 ‘소외감이라고 하는 자의적이고 편의적인 포즈에 묻혀서 너무 오랫동안 자족감에 젖어 살아왔다.’(191쪽)고 깨닫게 되기도 한다.

그의 이런 변화를 지켜보는 일은 묘하게 감동적이다. 고독에 잠겨 “제대로 전화하는 법을 배우는 날이 오기는 올까.” 혼잣말을 하고 까닭 없이 분노를 표출하고 누군가와 쉽사리 가까워졌다하더라도 다음 날이면 관계를 새로 시작해야만 했던 그. 무에서 유를 만든다든가 어떤 것을 다른 것으로 변화시키기를 원했다기보다는 마법으로 자기 스스로를 변신시키기를 바랐던 그. 그러나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라 클레어의 말처럼 ‘사건이 일어나는 대로 그냥 내버려두었다가 무엇인가 그에게 직접 영향을 미치면 그제야 놀라서 해결하려고’ 나섰던 그. ‘무엇하나도 끝까지 경험하는 법이 없고 그것이 그냥 그 곁을 스쳐 지나가도록 내버려’두고 ‘그런 거지 뭐’하고 생각하고는 다음에 일어날 일을 수동적으로 기다리고 있기만 했던 그. 그는 이제 그런 지나간 시절의 자신과 작별한다. 아마 이 작별은 아주 긴 이별이 되리라.

그래서 이 작품 끝 부분에 그와 유디트가 존 포드를 만나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그의 이 여행이 궁극적으로 에고 안으로만 숨어 있기를 바랐던, 어른 아닌 어른이 진정한 어른으로 거듭나는 이야기임을 보여준다. 유디트는 존 포드에게 왜 항상 ‘나’라는 말 대신에 ‘우리’라는 말을 쓰느냐고 묻는다. 존 포드는 말한다. “아무도 자기만의 세계로 침잠해 들어가려 하지 않기 때문이죠. 말하자면 우리는 외로워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혼자 있으면 무시당하고 자기 자신만 염탐하게 되죠.” 존 포드와 대화를 나누고, 한때 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했던 유디트와 함께 있는 그의 모습은 작품 초반에 볼 수 있었던 불만과 분노, 공포와 두려움에 시달리던 모습에서 완연히 벗어나 있다.

녹색의 하인리히는 클레어의 말처럼 “비겁하거나 소심해서 경험을 회피한 것이 아니라 그 일이 자신에게 별 가치가 없거나 그가 관여했을 때 행여 거절당할까봐 두려웠을 뿐”이다. 칼 필립 모리츠의 안톤 라이저는 자폐와 분열, 감정의 과잉 상태 등 세상과 조화를 이루지 못해 고통받았던 한 소년의 성장을 그린다. 때로는 녹색의 하인리히 같기도 하고, 또 어떤 부분에서는 안톤 라이저를 떠올리게 하는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의 ‘나’- 그는 결국 이 긴 여행을 통해 자기 자신과 화해하는 법을 배운다. 이제 그는 유디트와의 진정한 이별은 물론 누군가를 떠나보내고 또 새로이 받아들이는 일에도 조금은 달라질 것이다.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관점 또한 그러할 것이다. 그래서 그의 이 여행에 동참했던 일은 감동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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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멘 선언 ff 시리즈 4
페멘 지음, 길경선 옮김 / 꿈꾼문고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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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지만 강력하고 엄청난 에너지가 느껴지는 뜨거운 선언문. ‘여성인 당신, 함께 모여 저항하라. 자신, 타인, 그리고 여성 동지들이 처한 현실에 책임을 느껴라’ 다크웹 아동성착취물 범죄자 한국인 223명이 솜방망이 처벌받는 이 땅에서 더 소리 높여 알려져야 할 선언문이다. ff시리즈 계속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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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10-23 07: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케바리, 읽겠습니다!

잠자냥 2019-10-23 09:29   좋아요 0 | URL
이 책을 읽으신 뒤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 회원(?)분들 만난 그날 모임에서 모두 이 선언을 외치는.... 장면을 잠깐 그려봤습니다. 응? ㅋㅋㅋㅋㅋ

다락방 2019-10-23 09:44   좋아요 1 | URL
아 음.. 너무 근사한 장면이 연출될 것 같긴 하지만..
우리가 그 날 여성주의... 에 대해 얘기를 조금이라도 할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흥청망청 술파티가 될거란 생각이 ..... 킁킁.
 


프랑소와 오종의 <인 더 하우스>는 개봉 당시부터 봐야지 생각했는데 차일피일 미루다 여태까지 보지 못했다. 그러다 지난 주말, 드디어 봤는데, 후안 마요르가의 <맨 끝줄 소년>을 읽었기 때문이다. 오종의 <인 더 하우스>는 <맨 끝줄 소년>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희곡인 <맨 끝줄 소년>은 여러 차례 무대 위에 올려 졌고, 우리나라에서도 몇 해 전 상연한 적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나는 희곡은 좋아해도 연극은 좋아하지 않아서 연극을 볼 생각은 전혀 없는데, 오종은 과연 이 작품을 어떻게 영화화했는지 꽤 궁금했다. 오종의 작품은 대부분 연극적이거나 희곡을 성공적으로 영화화했기 때문에(<8명의 여인들>, <워터 드랍스 온 버닝 락>과 같은 작품들) <맨 끝줄 소년> 또한 기대되었다. 그리고 영화는 기대 이상이었다. <맨 끝줄 소년>보다  도발적이다. 물론 원작인 <맨 끝줄 소년>이 빼어난 작품이기에 영화로도 흥미로운 작품이 탄생했겠지만, 오종은 그 좋은 작품을 스크린으로 옮기면서 자신만의 매력을 덧붙여 또 다른 개성 넘치는 작품을 만들어냈다.

후안 마요르가의 <맨 끝줄 소년>은 한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한다.한때 작가를 꿈꾸던, 그러나 이제는 고등학교에서 형편없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문학을 가르치는 교사인 헤르만(영화에서는 ‘제르망’)은 학생들이 제출한 작문 과제를 채점하느라 고통스럽다. 글이라고 부르기도 뭐한 형편없는 문장의 나열을 보며 아내인 후아나(영화에서는 ‘쟝’)에게 투덜투덜 학생들 비난을 멈추지 않는다. 아마 작가를 포기한 채 교사로 살아가고 있는 자기에 대한 불만의 토로이기도 하리라. 그런데 문득, 한 학생의 글이 눈에 들어온다. 지난 주말 친구인 ‘라파’(영화에서도 ‘라파’)네 집을 방문해서 그들 가족을 관찰하고 쓴 글인데, 그것을 아내에게 읽어주던 헤르만의 눈이 빛나기 시작하고 잠자코 듣던 후아나도 귀를 기울인다. 재능이 있는데? 이야기가 뭔 줄 아는 것 같은데? 그 글을 쓴 학생의 이름은 ‘클라우디오’(영화에서는 ‘클로드’). 별로 말도 없고 언제나 맨 끝줄에 앉는 학생이다.



헤르만: 맨 끝줄에 앉아. 말이 없지. 수업에 적극적이지도 않고, 문제를 일으키지도 않아. 다른 과목들은 잘하지도 못하지도 않아. 수학 빼고.
헤르만: 좀 특이한 애지, 그러니까 제대로 된 아이랄까.
후아나: 당신도 맨 끝줄에 앉아 봤어?
헤르만: 가장 좋은 자리야. 아무도 거기는 못 보는데 거기서는 모두를 보지.
후아나: 이 작문들이 세상에 알려진다고 생각해봐. 어떤 면에서는 당신에게도 책임이 있어.
헤르만: 무슨 책임?
후아나: 어떤 면에서는 당신이 공범자가 되는 거야. (<맨 끝줄 소년>, 21쪽)


‘맨 끝줄’이란 ‘아무도 거기는 보지 못하는데, 거기서는 모두를 볼 수 있는’ 장소이다. 클라우디오와 헤르만은 둘 다 그 자리에서 앉아본 경험이 있고 글쓰기를 좋아하거나, 작가가 되기를 꿈꿔본 경험이 있는 이들이다. 영화에서는 좀 더 대사가 직설적이어서, 제르망은 ‘모든 걸 훔쳐볼 수 있는 자리’라고 말한다. 나 또한 학창 시절에 맨 끝줄에 앉기를 좋아했는데, 그 자리는 실제로 딴 짓을 하기에도 좋고, 누군가를, 어떤 행동이나 사건을 남몰래 지켜보기에 딱 좋은 그런 자리이다. 멀리 떨어져서 관찰하기 좋은 그런 자리라고나 할까. 실제로 영화에서 ‘클로드’ 즉 ‘클라우디오’는 타인을 관찰하고 은밀히 엿보는 걸 좋아하는 소년으로 등장한다. ‘라파’에게도 의도를 갖고 접근한 것으로 나오는데, 라파는 자기와는 전혀 다른 가정(화목해보이고, 부유하고 아무런 구김살 없는)에서 자란 말 그대로 ‘밝고 순수한’ 소년이기에 클라우디오가 호기심을 갖게 되고, 어떤 계기를 찾다가 수학을 못하는 라파에게 수학을 가르쳐 준다는 구실로 그의 집에 드나드는 데 성공하게 된다. 그리고 그때부터 라파의 가족, 특히 라파의 엄마인 ‘에스테르’를 엿보면서 글을 써나가고, 헤르만과 그의 아내 후아나는 점점 이 이야기에 빠져들어 간다. 그런데 후아나는 헤르만과 달리 타인의 가족을 엿보면서 글을 쓰는 행위를 탐탁지 않아 한다. 열여섯 살 소년이 쓰기에는 은근히 도발적인 내용도 불편하다. 그러면서도 클라우디오의 글에 대한 관심을 끊지 못한다.

오종의 영화는 좀 더 직접적이다. 제르망은 글쓰기에 재능 있는 제자를 발견해내고 그 아이의 재능을 꽃피워준다는 명목으로 날마다 클로드에게 글쓰기 관련 개인 교수까지 해주며 그를 북돋는다. 그런데 이 호기심은 조금 기이하다. ‘쟝’(원작의 ‘후아나’)이 지적하듯이 클로드의 글에 집착하면서 둘은 섹스리스 부부가 되어가고 제르망은 그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다가 아내가 지적하자 그제야 깨닫는다. 그러나 그와는 별개로 제르망과 쟝 사이에는 전에 없던 활기가 감돈다. 그들에게는 클로드의 작문 안에서나 존재하는 라파 가족의 사생활, 특히 라파의 엄마인 ‘에스테르’와 라파 아버지의 관계 및 에스테르를 향해 연정을 품은 클로드의 관계가 궁금하다.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그들은 묘한 쾌감을 느끼며 다음, 다음, 다음 편을 궁금해한다. 마치 <아라비안 나이트>의 ‘샤리아르’ 왕과 ‘셰에라자드’의 관계와도 같다. ‘제르망’이 ‘샤리아르’라고 한다면 왕에게 다음 이야기를 가져다줘야 하는 클로드는 ‘셰에라자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야기에 미친 왕이 셰에라자드를 죽이지 못한 것과 달리 <인 더 하우스> 즉, <맨 끝줄 소년>에서는 이야기를 하는 자, ‘클로드’가 모든 주도권을 쥐고 있는 듯이 보인다.

영화에서는 클로드의 이야기를 완성하기 위해, 아니 제르망,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계속 이야기를 이끌어가기 위해 교사로서는 도저히 해서는 안 될 짓까지 하게 된다. 이 사건은 원작인 희곡에서는 모호한 암시로 흐릿하게 처리되는데(이 또한 독자의 상상력에 맡긴다), <인 더 하우스>에서는 아예 그 사건을 ‘있는 것’으로 처리한다. 그리고 제르망의 행동은 나중에 큰  화를 불러온다. 제르망과 클로드의 관계는 교사와 학생이라는 구분을 넘어, 편집자와 작가의 관계로도 볼 수 있다. 편집자는 계속 자신의 영향 아래 작가를 두고 싶어 하고 그의 글이 나아갈 방향을 유도하면서도 그 글이 지닌 독특한 매력에서 빠져나오지를 못한다. 처음에는 편집자나 마찬가지인 제르망의 말을 유순하게 듣는 것 같던 클로드는 어느 순간 자신이 주도권을 쥐고 있음을 깨닫고는 제르망과 그의 아내 쟝까지 ‘갖고 노는’ 경지에 이른다. 작품 속 인물인 ‘에스테르’와 ‘라파 아버지’의 모습은 때로 ‘제르망’과 ‘쟝’의 투영 같기도 하다. 도발적이고 대담한 이 어린 작가 클로드는 라파 가족을 통해 결국 제르망이라는 한 속물 교양인의 이중성을 폭로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또는 문학이라는 외피를 쓴 채  ‘관음증’의 욕망을 마음껏 채우고 있는 그를 조롱했던 것은 아닐까?
 
<인 더 하우스> 와 <맨 끝줄 소년>이 둘 다 매력적인 까닭은 이 모든 이야기들이 관객 또는 독자가 보는 대로 언제든 새로운 이야기로 재탄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클로드, 즉 클라우디오가 쓴 ‘라파 가족 이야기’는 과연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떤 부분은 허구일까? 애초에 라파에게 수학을 가르쳐 주러 간 적이 없는 것은 아닐까? 영화에서 설명된 클로드의 집안 환경도 모두 거짓은 아닐까? 아니면 이 모든 이야기 자체가 ‘맨 끝줄 소년’ 클라우디오가 지어낸 이야기는 아닐까? 이야기의 현실과 상상, 그 경계의 구분을 어떻게 독자가(또는 관객이) 설정하는가에 따라 <인 더 하우스>도 <맨 끝줄 소년>도 전하고자 하는 바는 조금씩 달라진다. 클로드가 욕망한 사람은 ‘에스테르’일 수도 있고, 때로는 ‘제르망’이기도 하며, ‘쟝’ 또는 ‘후아나’가 될 수도 있다. 또 어쩌면 그저 해맑은 소년 ‘라파’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이 모든 것이 그저 글쓰기에 도취된 한 나르시시스트 소년의 조롱과 풍자는 아니었을까. <맨 끝줄 소년>과 <인 더 하우스>는 그렇게 활짝 열린 ‘상상’의 공간으로 독자를 초대한다.



클로드와 라파네 가족



글쓰기 지도 중인 제르망, 그리고 클로드



제르망과 그의 아내 쟝은 점점 클로드의 글에 빠져든다.



이 모든 이야기는 혹시 '맨 끝줄 소년' 클라우디오, 즉 클로드의 상상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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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인 식탁 - 먹는 입, 말하는 입, 사랑하는 입
이라영 지음 / 동녘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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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 먹고 말하고 요리하고 등등 가장 평범한 공간을 중심으로 권력과 차별 문제를 짚는다. 먹는 입, 말하는 입, 사랑하는 입으로 살펴 보는 관점이 흥미로웠고 종종 보이는 예리한 시선도 인상 깊다. ‘작은 고추가 맵다는 말은 작은 고추가 맵기를 바라는 누군가의 열망이 담긴 표현’에서 빵터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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