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입은 옷
줌파 라히리 지음, 이승수 옮김 / 마음산책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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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과 다른 정체성 때문에 차라리 교복을 입기를 바랐던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시작, 자연스레 책 이야기로 넘어가는 글솜씨가 유려하다. 내용과 어긋나는 책 표지 또는 반대로 책을 더 살리는 표지 이야기가 흥미롭다. 단, 이 짧은 글을 이렇게 부풀려서 출간한 출판사의 장사속엔 작가도 화를 낼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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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소음
줄리언 반스 지음, 송은주 옮김 / 다산책방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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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플로베르의 앵무새>를 통해서 플로베르와 그의 문학, 그의 삶, 그리고 작가로서 예술가의 삶을 살펴보았던 줄리언 반스가 이번에는 음악가의 삶을 조명해본다.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가 그 주인공이다. 바흐도, 베토벤도, 브람스도, 모차르트도, 슈베르트도 아닌 쇼스타코비치이다. 왜일까? 아마도 쇼스타코비치는 러시아에서 태어나 러시아에서 음악 활동을 했으며, 러시아 국적으로 평생 살다가, 모스크바에서 삶을 마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살아가던 러시아는 스탈린 치하였다. 스탈린이 죽은 뒤로도 쇼스타코비치는 질기게도 그 목숨을 이어갔지만 그 삶이 온전했으리라고 말할 수 없음은 <시대의 소음>을 읽노라면 자연스레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시대의 소음>은 스탈린 치하 러시아라는 폭압적인 권력이 작동하던 시대의 어느 예술가의, 그것도 처절하리만치 감수성 예민하고 자아가 확고한, 그런 예술가의 삶을 쫓는다. 그는 일찌감치 천재적 재능을 타고났으며, 그 재능을 어릴 때부터 인정받았고, 그 스스로도 자신의 재능을 인지한다. 그리고 그 재능에 자연스레 화답이라도 하듯이 그의 명성은 날로 높아만 갔다. 자국 내에서만이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그의 이름은 널리 알려진다. 하지만 그러한들 무엇 하겠는가? 그가 사는 시대는 스탈린의 권력이 무소불위로 작동하는 공산주의 치하 러시아인데 말이다.

소련 공산당이 보기에 그의 음악은 때로는 부르주아적이고, 때로는 인민의 사상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는 요소가 다분하다. 무엇보다 그저 국가 최고 권력자 스탈린의 귀에 거슬리면 목숨까지도 위협받는 시대를 살아가는 힘없는 음악가일 뿐이다. 그런 그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자고 일어나면 누군가가 알 틈도 없이,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서 목숨을 빼앗길 수도 있는 시대이다. 그런 일은 자기의 목숨을 잃는 것만으로 끝나지도 않는다. 그와 관련한 인물들, 아내와 아이들 등 가족과 가까운 친지 또는 친구들의 삶마저도 그의 단 한순간의 실수만으로 모조리 무너질 수도 있는 시대인 것이다.

 그는 인간 영혼의 파멸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삶은 흔히들 말하듯 들판을 거니는 것이 아니다. 영혼은 셋 중 한 가지 방식으로 파괴될 수 있다. 남들이 당신에게 한 짓으로, 남들이 당신으로 하여금 하게 만든 짓으로, 당신 스스로가 자발적으로 한 짓으로. 셋 중 어느 것이든 한가지만으로도 충분하다. 세 가지가 다 있다면, 그 결과는 거부할 수 없는 것이 되겠지만. (239쪽)



그런 시대를 살아가는 이 나약하고 한없이 예민한 음악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가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는 그저 목숨을 부지하면서 작곡을 하고 피아노를 연주할 뿐이다. 위의 예문에서 언급한 그 세 가지 모두를 어쩔 수 없이 하게 된다. 스탈린의 눈밖에 벗어나지 않기 위해 누군가가 보기에는 치졸할 정도로 당에 협력을 하기도 하고 또 누군가가 보기에는 그런 대가로 상처뿐인 영광을 얻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그저 겉으로 보는 하나의 시선 또는 누군가의 관점에 지나지 않는다. 쇼스타코비치의 삶을 그 누구도 그 스스로처럼 살아낸 것이 아니라, 곁에서 또는 멀찍이서 그의 음악을 듣거나 그의 행적을 전하는 소식 등에 기대어 바라볼 뿐이다. 그리고 쉽사리 잣대를 들이댈 뿐이다.

누구도 쇼스타코비치의 삶을 살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쉽게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영욕에 얽매인 삶을 재단하고 평가한다. ‘흠 예술가로서 양심이 있지, 그게 뭐야? 수치도 없나? 순전히 스탈린에, 공산당에 아부하면서 온갖 영예를 차지하면서 살았지 뭐야?! 나라면 스탈린 치하에서 공산당을, 혁명을 찬양하는 그 따위 곡은 작곡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야! 예술가가 비겁하게!’ 이렇게 말이다. 스탈린 치하 러시아가 아닌 곳에서는 누구나 공산주의자가 되기 쉽고, 공산주의를 찬양하기 쉽다. ‘그들은 소련에 대한 단순한 사실 한 가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여기에서는 진실을 말하고는 목숨을 부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 (157쪽)  이런 사실은 도무지 모르는 채 말이다.

공산주의 밑에서 살지 않으면서 공산주의자가 되기란 얼마나 쉬운가! 피카소는 거지같은 그림을 그리고 소비에트 권력에 환호하며 평생을 보냈다. 그러나 신은 소비에트 권력 밑에서 고통받는 불쌍한 화가는 그 누구도 피카소처럼 그림을 그릴 수 없게 하셨다. 피카소는 자유로이 진실을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을 대신하여 말해주면 안 되는가? 하지만 그는 그러는 대신 파리와 남프랑스 부유한 사람처럼 앉아서 역겨운 평화의 비둘기를 그리고 또 그렸다. 그는 그 피투성이 비둘기의 모습에 혐오감을 느꼈다. 그리고 육체적 노예제를 혐오하는 것 못지않게 생각의 노예제도 혐오했다.  (191쪽)



나는 쇼스타코치비의 음악을 썩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의 음악은 때로는 지나치게 과장되었으며, 난해하고 복잡하다. 아름답다고 느끼기 보다는 너무나도 많은 요소를 담으려다 보니 과하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 반찬이 과하게 나오는 한정식을 먹을 때의 느낌이랄까. 이것저것 맛봐야 하는 음식이 많다보니 정작 다 먹은 뒤에는 기억에 남는 음식이 없는, 온갖 맛이 섞여서 무슨 맛인지 모르겠는 그런 음식 말이다. 그의 음악에 크게 감동을 받은 기억이 없다 보니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그의 삶에도 자연스레 별다른 관심이 생기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줄리언 반스의 <시대의 소음>을 통해 쇼스타코비치의 삶을 마주하다 보니 왜 그의 음악이 그토록 복잡할 수밖에 없었는지, 무언가를 숨기고 어떤 두려운 대상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이중의 이중의 의미. 복잡함을 띄는 곡들을 작곡할 수밖에 없었는지 조금이나마 그를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쇼스타코비치에게 연민을 느낀다.

그리고 음악가이자, 예술가로서의 삶이 아닌, 한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본다. 이 나약한 인간은 지구상에 사는 모든 인간의 초상이다. 우리는 곧잘 작가라든지, 음악가라든지, 어떤 예술가 또는 어떤 철학가나 사상가들에게 우리 나약한 인간으로서는 도무지 할 수 없는 어떤 소명 같은 것을 요구하고 바란다. 그리고 그 기대에 어긋나면 그런 그들에게 쉽게 비난의 화살을 돌린다. 나치 치하에서 그들에게 부역하면서 살아남은 화가나 작가, 음악가나 철학가, 사상가나 과학자들을 쉽게 비난한다. 멀리서 찾을 것도 없이 일제에 부역하면서 살아남은 우리나라 작가들에게도 온갖 비난을 마다하지 않는다. 물론 나는 그런 이들을 옹호하려는 게 아니다.

그러나 그들도 인간이었음을, 나약하고 또 나약한 한 인간이었음을, 그러므로 어쩔 수 없이 양심을 버리고 목숨이라도, 또는 그렇게 목숨을 지킴으로써 자신이 사랑해마지않는 예술을 해나갈 수 있었음을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스스로의 양심을 저버렸기에 늘 고뇌하고 삶이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웠으리라는 것도 이해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시대에 영합하면서 살아간다. 인간은 그토록 나약한 존재인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늙어가면서 자신이 젊은 시절에 그토록 경멸하던 모습으로 변해만 간다.

‘그는 자존심을 시킬 수가 없었다.’ 그것은 하나의 표현에 불과했으나 정확한 표현이었다. 권력층의 압력을 받다보면 자아는 금이 가고 쪼개진다. 남들 앞에서 겁쟁이는 마음속으로는 영웅으로 살아간다. 혹은 그 반대이거나. 아니면, 더 흔한 경우는 남들 앞에서 겁쟁이는 마음속으로도 겁쟁이로 산다. 그러나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았다. 사람의 생각은 도끼날에 반으로 쪼개진다. (223쪽)



그를 아는 이들은 그를 알았다. 귀가 있는 이들은 그의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세상이 하는 식대로만 이해하려 하는 젊은이들에게 그가 어떻게 비쳤을까? 그런 이들이 어떻게 그를 비판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이제 겁에 질린 공식 차량을 타고 지나쳐갈 때, 길가에 서 있는 젊은 시절의 그에게는 그가 어떻게 보일까? 이런 것이 우리를 위해 삶이 구상하는 비극들 중 하나일지 모른다. 늙어서 젊은 시절에는 가장 경멸했을 모습이 되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233쪽)



처음 <시대의 소음>을 읽기 시작했을 때는 크게 관심 없는 작곡가인 쇼스타코비치의 삶을 그린 작품이라 살짝 실망이 들기도 하고 지루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새 나는 쇼스타코비치의 삶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으며 그의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더불어 그의 음악을 하나하나 다시 들으면서 그를 좀 더 인간적으로 이해해보고 싶은 심정도 들었다. 그러다가 책장을 덮을 즈음에는 인간, 이 세상을 사는 나약하고 비겁한, 용기 없는 모든 인간의 삶, 그들에 대한 연민으로 마음이 아파왔다. 젊은 시절 자신이 경멸하던 모습으로 늙어가는 것이 우리 인간의 운명이라는 구절에서는 눈물이 나올 것도 같았다. 나 또한 그럴 것이고 당신 또한 그럴 것이다 평범하지 않은 음악가의 삶을 통해 보편적인 인간과 삶의 진실을 자연스레 마주하고 성찰하게끔 하는 솜씨는 온전히 줄리언 반스 그이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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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소음
줄리언 반스 지음, 송은주 옮김 / 다산책방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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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누가 그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자유로이 예술을 말할 수 없는 시대에 예술가로서 양심을 지키며 산다는 것의 의미와 그 고통을 쇼스타코비치의 삶을 통해 살펴본다. 그의 삶으로 한없이 나약하고 흔들리는 인간의 초상을 그린다. 쇼스타코비치에게 스탈린 치하 영욕의 삶은 그저 '소음'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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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아이
엠마뉘엘 카레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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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뉘엘 카레르의 신간 <러시아 소설>이 요즘 새로 출간되었다. 그 작품은 아직 읽지 않았는데, 아마 곧 읽을 듯하다. 카레르는 프랑스에서 수많은 컬트 팬을 거느린 작가이다. ‘컬트’라는 단어에서 짐작할 수 있듯 그의 작품은 그로테스크하다. 딱히 무서운 장면이 있는 것도 아닌데 읽고 있으면 왠지 으스스해지고 책을 덮고 나서도 그 무서운 분위기 때문에 쉽게 잠이 오지 않는다. 꿈자리가 뒤숭숭하다. <러시아 소설>도 그렇지 않을까 싶은데, 전에 읽은 이 작품 <겨울 아이>도 만만치 않다.

<겨울 아이>는 늦은 밤에 읽기 시작했는데 책장을 몇 장 넘기지 않고 나서 괜히 밤에 읽기 시작했나 싶어졌다. 해가 떠 있는 낮에 다시 읽을까? 이런 후회가 잠깐 밀려왔지만 손에서 책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만큼 <겨울 아이 Le Classe de Neige>는 흡인력이 대단하다. 다음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해서 손에서 책을 놓기가 어렵다. 책의 분량이 200페이지 정도로 얇기 때문에 한 번에 다 읽어버려야지 하는 욕심이 나기도 했지만, 이 책을 집어든 모든 사람들마다 ‘궁금증’ 때문에 다음 날로 책 읽기를 미룰 수는 없었을 것이다.

결말을 알면 읽는 재미가 반감되기 때문에 자세히 줄거리를 적을 수는 없지만 주인공 소년 니꼴라가 겨울 스키 캠프에 참가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니꼴라는(이 친숙한 이름은 르네 고시니의 ‘꼬마 니꼴라’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한다) 보통 아이들과 별로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좀 허약해 보이는 외모와 때문인지 부모의 과보호를 받는다는 것 정도가 다를까? 

니꼴라는 과보호하는 아빠 때문에 스키 캠프에도 다른 아이들과 같이 전세 버스를 타고 가지 못하고 아빠가 직접 운전하는 차를 타고 그 먼 거리를 이동해서 홀로 뒤늦게 스키 캠프에 참가하게 된다. 아빠는 깜빡하고 니꼴라의 가방을 챙겨주는 것을 잊고 캠프를 떠난다. 잠옷도 세면도구도 갈아입을 옷도 없는 니꼴라는 난감해지고, 아빠가 니꼴라의 짐을 내려놓지 않은 것을 빨리 깨닫고 돌아오기만을 기다린다.

스키 캠프에서 니꼴라는 지도 교사의 도움으로 일단 다른 아이의 잠옷을 빌려 입으며 첫날을 보내게 된다. 오줌을 쌀지도 모른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던 니꼴라는 이런저런 공상을 하게 된다. 자기가 들은 이야기, 책에서 읽은 이야기 등등을 토대로 공상의 세계를 펼쳐간다. 그런데 왠지 니꼴라는 그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무서운 이야기, 슬픈 이야기를 좋아하는 듯하다. 니꼴라는 스키 캠프에서 가장 힘 있는, 그래서 모든 아이들이 두려워하는 오드칸이 자신을 괴롭힐까 전전긍긍 두렵고, 오드칸의 환심을 사기 위해 혼자만의 공상을 토대로 거짓말을 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니꼴라의 거짓말은….

눈치 빠른 독자라면 이야기가 어느 정도 전개된 중반 이후 대충 결말을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작품의 분위기가 어딘지 어둡고 슬픈 느낌이라 니꼴라에게 왠지 좋지 않은 일이 생길 것 같다는 불길한 기분을 시종 일관 느끼게 된다. 정신없이 이야기를 쫓아가다가 마지막 문장을 읽고 책장을 덮을 즈음 마음 한편이 아프고 시리다.

엠마뉘엘 카레르는 이 짧은(?) 작품을 무려 8년간이나 구상했고 집필을 하는 데만 1년이 걸렸다 한다. 씨줄과 날줄처럼 정교한 구성과 교묘한 배치 때문에 이 작품을 읽고 나면 카레르가 공들인 시간이 그럴 만도 하다 싶다. 그의 다른 작품인 <적>과 <콧수염>도 <겨울 아이>와 비슷하게 치밀하고 정교하다. 엠마뉘엘 카레르의 작품을 더 읽을 수는 없을까 아쉬워하던 차에 <러시아 소설>이 출간되었다. 기쁜 마음으로 기대를 담아, 이제 그 책을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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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6-14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로테스크하고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엠마뉘엘 카레르의 소설이 그로테스크하다니 처음 알게 된 사실입니다. 이름만 들었지 그의 소설은 안 읽어봤어요.

잠자냥 2017-06-14 10:50   좋아요 0 | URL
사람마다 그로테스크의 기준이 좀 다르겠지만 ㅎㅎ 전 이 사람 소설 읽을 때마다 좀 으스스하더라고요. 새로 출간된 <러시아 소설>부터 읽어보시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
 
언니네 이발관 - 6집 홀로 있는 사람들 [일반반]
언니네 이발관 노래 / 블루보이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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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앨범이라는데, 최고의 앨범은 아닌 것 같다. <보통의 존재>를 뛰어넘을 만한 감동이나 울림이 부족하다. 아이유 피쳐링도 어쩐지 언니네 이발관의 음악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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