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촌 레이첼
대프니 듀 모리에 지음, 변용란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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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난 이야기꾼, 아니 천재 이야기꾼이라는 표현이 무엇보다 적절한 작가들이 있다. 대프니 듀 모리에도 틀림없이 그런 작가 중 한 사람일 것이다. 대프니 듀 모리에의 단편선을 시작으로 <자메이카 여인숙>에 이어 <나의 사촌 레이첼>을 읽었다. 국내에 번역된 작품 가운데 아직 읽지 않은 작품은 <레베카>와 <희생양>. 두 작품이나 남아 있다니! 참, 다행이다!!

<나의 사촌 레이첼>은 확실히 재미있다. 이 작품보다 먼저 읽은 <자메이카 여인숙>도 흥미진진했지만 <나의 사촌 레이첼>이 이야기 몰입도로 치자면 별 두 개 정도는 더 주고 싶다고나 할까. 아니, 작품 전체적으로도 <나의 사촌 레이첼>이 여러 면에서 더 좋았다. 그저 단순히 책을 손에서 놓기 힘든, 흥미진진한 작품이라고만 하기엔 읽고 나서 한동안 이런저런 생각이 든다. 섣불리 결론 내릴 수 없어서 요즘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이 작품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있다. 읽어보고 이야기 좀 하자고. 이 서늘한 결말에 대해서.

사실 이런 작품은 줄거리, 그러니까 내용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이 책을 읽을 사람들에게 해서는 안 될 짓이다. 서스펜스가 작품을 압도하는데 이러쿵저러쿵 줄거리를 언급하는 일만큼의 만행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럼에도 <나의 사촌 레이첼>의 매력과 그 빼어남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몇 가지 이야기는 할 수밖에 없다. 그저 단순히 이 책 재미있으니까 꼭 읽어보라, 하기엔 설득력이 부족하지 않은가.

다들 잘 알겠지만, 혹시라도 ‘대프니 듀 모리에’를 잘 모르는 이들을 위해 짧게 언급하자면, 그녀의 별명은 이른바 ‘서스펜스의 여왕’ ‘히치콕의 뮤즈’이다. 히치콕의 그 유명한 영화 <새>의 원작을 쓴 사람도 그녀이며, 히치콕의 또 다른 영화 <레베카>의 원작자도 그녀이다. 대프니 듀 모리에가 쓴 작품들은 현재까지 50차례 이상 영화와 드라마화 되었다. <나의 사촌 레이첼>도 여러 번 영화로 만들어졌고, 곧 국내 개봉을 앞두고 있다. 원작을 다 읽은 지금, 영화도 꽤 기대된다. 스크린으로 만날 레이첼, 그녀는 어떻게 그려질 것인지…….

<나의 사촌 레이첼>은 처음부터 음울한 분위기로 시작한다. 서술자인 필립이 어린 시절 교수대에 목 매달린 사람을 본 광경을 떠올리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때문에 독자는 이 이야기가 행복한 결말은 아닐 것이라는 짐작은 쉽게 할 수 있다. 그럴 즈음 레이첼의 등장과 함께 예상대로 그들 사이에 무언가 불행한 일이 일어났음을 알게 된다. 필립과 앰브로즈 두 남자에게 일어난 일은 과연 무엇일까? 그 일은 어떻게 일어난 것일까?

“필립, 본인에겐 아무 결점이 없는데도 재앙을 불러오는 여자들이 더러 있단다. 좋은 여자들인 경우도 아주 흔하지. 그들은 뭐든 손을 대기만 해도 비극을 일으킨다. 너한테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다만 꼭 해줘야 할 것 같구나.”

본인에게는 아무런 결점이 없는데도 재앙을 불러오는 여자, 그녀가 바로 ‘레이첼’일 것이라고 쉽사리 예상할 수 있다. 필립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부모를 잃는다. 고아가 된 그가 안쓰럽던 앰브로즈는 어린 사촌에 대한 연민으로 필립을 데려다 키우기 시작한다. 필립과는 꽤 나이 차이가 나는 앰브로즈는 그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필립을 훈육한다. 그는 어쩐지 여성혐오자, 아니 어떤 면에서는 인간혐오자로도 보인다.

그러던 그가 건강 악화로 습하고 어두운 콘월 지방을 떠나 햇볕이 잘 드는 지역, 지중해 연안으로 여행을 떠나게 된다. 필립에게 저택을 잘 지키고 있으라는 말을 남기고 훌쩍 떠난 앰브로즈. 그런데 곧 돌아올 줄 알았던 그의 여행은 꽤 길어진다. 이따금 보내는 편지로만 소식을 알 수 있을 뿐인데, 그 편지로 필립은 앰브로즈가 한 여인을 만나고, 사랑에 빠지고 그녀와 결혼했음을 알게 된다. 평생 독신으로 지내겠다던 앰브로즈가 말이다! 문제의 여인, 그녀의 이름은 ‘레이첼’-

앰브로즈와도 먼 친척 관계이고 그러므로 필립과도 친척 관계인 레이첼. 결혼까지 했으니 곧 신부와 함께 돌아올 것도 같은데 앰브로즈는 여전히 돌아올 줄 모른다. 그러다가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 전해온다. 앰브로즈가 죽은 것이다! 죽기 직전 앰브로즈는 필립에게 전과는 사뭇 다른 편지들을 보내온다. 이런 상황에서 필립 앞에 레이첼이 나타난 것이다. 앰브로즈의 편지들 때문에 필립은 레이첼이 그의 죽음과 관계가 있으리라 생각하고 그녀에게 복수를 다짐한다. 그런데 인생사가 대부분 그렇듯이 그 결심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의 감정은 계획할 수 없으며 예측할 수는 더더욱 없기 때문이다.

지금 말한 내용들은 거의 작품 초반으로, 500쪽을 훌쩍 넘는 분량 가운데 처음 50~60쪽에 다 드러나는 이야기들이다. 남은 400쪽 이상은 순전히 필립과 레이첼, 그리고 앰브로즈의 편지들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무척 흥미진진하다. 독자의 예상대로 가는 부분도 있고 전혀 뜻밖의 부분도 있다. 거의 모든 독자가 예상할 수 있듯이, 필립은 계획대로 레이첼을 대하지 못한다. 처음에는 그랬는지도 모른다. 적대적으로 무엇이든 삐딱하게 그녀를 대하기. 그런데 모두가 예상할 수 있듯이 그는 자기도 모르게 차츰 레이첼에게 매혹 당한다. 그리고 그 감정에 스스로도 놀라워한다. 어쨌든 그녀는 앰브로즈의 아내이지 않은가? 그가 이제는 죽었고 늘 검은 상복 차림의 그녀이지만, 그럼에도 필립은 레이첼을 향한 감정을 점점 숨기기 어려워진다. 필립과 레이첼은 어떻게 될 것인가.

자꾸만 결말이 궁금해서 마지막 장을 펼쳤다가,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앞으로 돌아오기를 몇 번이나 반복하는 사이에 어느덧 그 마지막 장을 읽게 되었다. 책을 다 읽고 난 뒤에는 당혹감과 쓸쓸함, 연민과 같은 이 작품을 처음 읽기 시작했을 때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감정에 휩싸였다. 이 작품에 그려진 사랑의 온갖 모습이 마음을 어지럽힌다. 이야기를 이끌어나가지만, 사실 100% 믿을 수 없는 화자인 필립. 게다가 앰브로즈의 편지는 과연 정말 진실만을 담았을까? 그 두 남자의 고통과도 같은 사랑, 그 열병과도 같은 상태가 이해가 되기도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랑이, 그들의 시선이 정말 온당한가 의심하게 된다. 그들이 느끼고 바라본 ‘레이첼’은 진짜 ‘레이첼’일까? 헛헛하고도 쓸쓸한 감정이 몰려온다.

레이첼 또한 그렇다. 그녀의 이야기는 모두 진실일까? 그녀는 정말 선한 여자였을까? 아니면 팜므파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까? 도무지 알 수 없다. 그녀는 죄인일까? 아니면 천사일까? 두 남자의 시선으로만 그려진, 그렇기에 ‘레이첼’이 아닌 ‘나의 사촌’인 레이첼, 필립이나 앰브로즈 두 남자에겐 그저 결국 ‘대상’일 수밖에 없는, 그들의 시선 속에 가두어진 ‘레이첼’- 그것이 진실한 그녀의 모습일까? 그러므로 영원히 누구도 그녀의 진실은 알 수 없는 것일까? 대프니 듀 모리에가 레이첼을 이르러 ‘이 여인은 천사인지 악마인지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했다는데 정말로 그렇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거의 모든 사랑이 그러하지 않은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됐을 때 우리는 그 누군가를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잘 안다고 생각’하는 그 모든 것들은 자신이 만들어낸 환상일지도 모른다. 감정 상태에 따라 선한 얼굴이 악한 얼굴이 되기도 하고, 못나게 보였던 점들도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서 세상에 다시없을 장점으로 보이기도 한다. 모두 마음의 상태에 달렸다. 필립이 처음 봤을 때는 평범하다고 생각했던 레이첼이 그녀를 사랑하게 되면서 세상 그 누구보다 아름다운 여인으로 느껴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 순수한, 완전무결할 것 같던 사랑이 뒤틀리는 순간은 의심과 질투가 찾아들어올 때이다. 필립과 앰브로즈 또한 그 덫에서 자유롭지는 않다. 덫에 걸린 두 남자가 뜨겁게 사랑하고 욕망한 ‘레이첼’- 그녀의 진실을, 참모습을 나는 좀 더 선한 쪽으로 해석하기에 이 작품의 결말은 몹시도 쓸쓸하고 애잔하다. 자, 필립과 앰브로즈의 눈이 아닌 당신만의 시선으로 '레이첼'을 바라보고 싶지 않은가?


덧: 작품을 읽을 분은 이 책 첫머리에 실린 로저 미첼 감독의 서문은 일단 넘기고 본 작품부터 읽으시라. 큰 스포일러는 없지만 그래도 작품을 다 읽은 뒤에 서문을 읽는 편이 더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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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1-03-23 13: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팁~감사합니다 🙂
 
행인 대산세계문학총서 8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유숙자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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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을 읽기 좋은 계절이 돌아왔다. 아직 낮은 좀 더운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아침, 저녁으로는 꽤 서늘하다. 나쓰메 소세키를 꺼내 읽는다. <행인> 역시 염세적이다. 이 작품에는 그 어느 때보다 자아가 강한 인물이 등장한다. 책의 화자는 ‘지로’인데 주인공은 지로의 형 ‘이치로’가 아닐까 싶다.


‘이치로’는 세상과 거의 담쌓고 서재에 틀어박혀 책만 파고드는 학자다. 그다지 행복하지 않은 결혼생활을 하던 중 이치로는 자신의 아내와 동생 ‘지로’ 사이를 의심하게 되고 지로에게 아내를 유혹해보라는 제안을 하게 된다. 아내의 정조를 시험해보고 싶었던 것. 물론 지로는 이런 가당찮은 형의 제안에 화를 내지만 결국 형의 제안대로 형수와 함께 여행을 떠나게 된다.

형수인 ‘나오’와 ‘지로’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내인 ‘나오’가 ‘지로’를 좋아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은 애당초 형인 ‘이치로’의 망상에서 비롯된 일이기 때문이다. 이 사건이 이 작품의 큰 줄기일 것 같지만 딱히 그렇지도 않다. 이치로의 비뚤어진 에고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하나의 사건이라고나 할까.

‘이치로’를 보면서 짜증이 많이 치밀어 올랐다. ‘아, 이거 정말 미친놈이네.’ 이렇게 중얼거릴 정도였다. 그러다가도 참 이상한 게 이해가 가기도 하더라. 어떤 면에서는 슬쩍 내 모습이 지금 이렇지 않을까, 괜히 찔리기도 했다. 이치로는 세상 사람들이 다 우습다. 경멸스럽다. 아내도 가족도 하나같이 못 미덥고 못마땅하다. 가족을 포함한 거의 모든 인간을 ‘경멸’한다. 그저 계속 자기 안으로 책 안으로만 파고들어간다. 이치로의 에고는 점점 과대하게 부풀어 오른다.

인간이 못마땅하고 못났다고 혀를 차지만 결국 그도 그 인간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 자기가 더 길을 잃어버린 모습이다. 책을 읽고 있는 제삼자의 눈에는 오히려 이치로 그가 더 흔히 말하는 인간의 궤도를 일탈한 듯 보인다. 타인과 절대 섞일 수 없는 고독한 에고이스트는 그 고독한 상태를 즐기는 듯하면서도 ‘무리’안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듯하다. 하지만 그 방법을 모른다. ‘지로, 어떤 기교는 삶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 같아.’ (185쪽)라고 털어놓지만 그는 그 기교를 절대로 알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가장 가까워야 할 아내와도 거리감만 커지고 가족과도 마찬가지다. 행인(行人)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를 스쳐지나 걸을 뿐이다. 사람 안에 들어가는 방법도 알지 못하고, 안다 한들 그 사람이 또 경멸스러워 보여 피하고 만다. 어느 한 곳에 마음을 두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려 다니기 바쁘다. “이렇게 수염을 기르고, 양복을 입고, 시가를 문 모습이 겉에서 보기엔 그럴듯한 한 사람의 신사 같겠지만, 실제로 내 마음은 집 없는 거지처럼 아침부터 밤까지 이리저리 헤맨다네. 하루 종일 불안에 쫓겨 다니고 있지. …” (329쪽)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는 자기의 상태도 못마땅하고 이리저리 가볍게 움직이는 듯한 사람들의 마음도 못마땅하다. 그러다 보니 ‘아내의 마음’도 자신에게서 동생인 ‘지로’에게 ‘옮겨갔다’는 생각이 들고 그런 경박한 마음이 너무나도 꼴보기 싫어진다. 게다가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계속 ‘움직이며’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현대 문명도 못마땅하기 그지없다. 정신적으로 사색할 틈을 주지 않는다. 그 대상에 대해 알기도 전에 또 다른 새로운 대상이 쏟아져 나온다. 사람이나 사물이나 진정한 앎의 기회는 얻기 어렵고 피상적인 감상만 남을 뿐이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모든 것이 이치로에겐 불안할 뿐이다. 그리고 그 불안은 계속 그를 고독하게 만든다.

나쓰메 소세키의 결혼 생활은 딱히 행복했던 것 같지 않은데 <행인>은 그 행복하지 않은 결혼 생활을 무척 많이 반영한 작품이 아닌가 싶다. 작품 곳곳에 드러나는 이치로나 지로 두 형제의 결혼 관념은 무척 염세적이다. ‘결혼’이라는 제도는 두 사람을 함께 묶어주고 그 두 사람이 서로 가장 잘 알게 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소통’의 방법을 알지 못하면 전혀 다른 남남이 그저 ‘행인’처럼 서로의 곁을 스치며 더욱더 뼈저린 ‘고독’을 느끼게 되는 건 아닐지. 


“오사다 씨. 결혼 얘기로 낯을 붉힐 때가 여자의 꽃이야. 정작 해보면 결혼을 낯을 붉힐 만큼 기쁜 일도 아니요. 부끄러운 일도 아니지. 뿐만 아니라 결혼해서 한 사람이 두 사람이 되면 혼자 있을 때보다 사람의 품위가 떨어지는 경우가 많아. 엄청난 일을 당하는 수도 있어. 그저 조심하는 게 상책이야.” (187쪽)

하지만 어딜 보나, 꿀처럼 달콤하진 못했던 것 같다. 이 씁쓸한 경험을 지닌 고참 부부가 자신들의 그리 행복하지 못했던 운명의 몫을 젊은 남녀의 머리 위에 나누어주어 또다시 불행한 부부를 만들 작정인가. (255쪽)

“시집가기 전의 오사다 씨와 시집 간 뒤의 오사다 씨는 전혀 다르다네. 지금의 오사다 씨는 이미 남편 때문에 스포일spoil되고 말았다네.” ... “어떤 사람한테 가든, 시집을 가면 여자는 남편 때문에 부정을 타게 되지. 이렇게 말하는 내가 이미 내 아내를 얼마나 못쓰게 만들었는지 모른다네. 내가 못쓰게 만든 아내로부터 행복을 구하는 건 너무 억지가 아닌가. 행복은 결혼으로 천진함을 잃어버린 여자에게 요구할 수 있는 게 아니라네.” (368~3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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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3 21: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9-13 17: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의 사촌 레이첼
대프니 듀 모리에 지음, 변용란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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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이야기가 어떻게 될지 몹시 궁금해서 나도 모르게 뒷장을 넘겨보려다가 아니야, 차근차근 읽어야지! 하게 되는 책. 이야기 흡인력이 대단하다. 다 읽고 난 뒤에는 또 알 수 없는 쓸쓸함과 가슴 저릿함, 연민에 휩싸이게 된다. 대프니 듀 모리에는 천재 이야기꾼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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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청이의 포트폴리오
커트 보니것 지음, 이영욱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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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난 커트 보니것 팬은 아니다. 나랑 잘 안 맞는 작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계속 읽는다. 그러다가 음반으로 치면 b-side 같은 이 책을 발견했다. 거칠고 덜 다듬어진 그의 단편들, 근데 그게 더 그다워서 오히려 좋더라? 그간 내가 보니것을 잘못 읽어왔나 싶다. 다른 작품도 다시 읽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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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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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 친구 있어요?” “결혼은 언제 할 거죠? 결혼하면 회사는 어떻게 할 거죠?” 이 땅에 사는 젊은 여성들 가운데 이런 질문 한 번 받아보지 못한 사람이 있을까? 없을 거라고 100% 확신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이곳저곳 면접을 보러 다닐 때 언제나 듣던 말 중 하나가 ‘결혼’과 관련한 질문들이었다. 스물넷 그때는 내가 너무 어렸고, 직장을 구해야 한다는 절박감에 저런 질문의 부당함을 크게 느끼지는 못했다. 다들 그런 질문을 받는 것이려니 싶었다.

그 사이 내가 컸는지, 아니, 이 사회의 모순을 너무도 뼈저리게 보고 듣고 겪었는지, 저런 질문의 부당함에 화를 내고 분노하다가 이제는 그 분노조차 덧없이 느껴진다. 해탈의 경지랄까? 남자들 가운데 입사 면접 때 저런 질문을 받은 사람이 과연 있을까? 남자들에게 결혼은 당연한 것일 테고, 결혼을 하더라도 직장을 그만두지 않는 것은 더 당연하리라. 아니 결혼하기 때문에 직장을 그만두지 않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때문에 이 땅의 남자들 중 면접 현장에서 저런 질문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내가 아들을 안 낳은 게 참 다행이다 싶어.” 언젠가 엄마가 우리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딸만 넷인 우리 집에서 아들을 못 낳는다고 그토록 구박받고 어린 내 눈엔 거의 학대와도 같은 대접을 받았던 우리 엄마가, 다 큰 우리 앞에서 이런 고백을 털어놨을 때는 참 뜻밖이었다. “왜?” “아들을 낳았으면 나도 이상한 엄마가 됐을 거 같아. 아들, 아들 하면서 니들을 얼마나 차별했겠니? 안 그런다 해도 잘 안됐을 거야. 에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우리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우리 집에는 아들이 없는 게 다행이야. 그 아들은 할머니 때문에 얼마나 개차반 왕자님이 됐을까? 상상만으로도 고개가 절레절레 저어졌다.

“네가 아들이었어야 하는데.” 가끔 엄마는 또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을 듣고 가장 먼저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랬다면 내 동생들은 태어나지 못했겠지. 게다가 나는 또 얼마나 내게 주어진 것들이 당연하다는 듯이, 처음부터 그것들은 모두 내게 주어졌어야만 하는 것들이라고 생각하면서, 내 몫이 조금이라도 줄어들까봐, 그걸 여자들이 빼앗아 갈까봐 얼마나 전전긍긍하면서 살았을까? 이 땅의 많은 남자들이 그렇듯이..... 사실, 빼앗는 것도 아니고 빼앗기는 것은 더더욱 아닌데도 말이다.

<82년생 김지영>에는 이런 모든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요즘 이 책이 그토록 널리 읽히는 이유는 뭘까 궁금해서 읽었다. 80년대에 태어나 이제 서른을 넘긴 여자들의 보편적인 삶이 담긴 이야기겠지 싶었다. ‘김지영’이라는 아주 흔한 그 이름처럼 새롭지도 않고 색다를 것도 없는, 그런 한국 여자로서의 삶. 사실 정말로 그랬다. 그런데 그 뻔한 삶을 바라보면서, 읽어나가면서 나도 모르게 분노하고 화내고 기가 막혔다. 너무나도 기가차서 혀를 끌끌 차기도 하고, 한숨을 푹푹 쉬기도 하고, 심지어 책을 읽다가 욕까지 나왔다.

누군가가 <82년생 김지영>의 줄거리가 어떻게 되느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말하리라. 그런 질문을 한 사람이 여자라면, “그냥 당신의 삶이 이 책의 줄거리.” 라고. 그런 질문을 한 사람이 남자라면 “당신 옆 여자들의 삶이 이 책의 줄거리.”라고. 그런데 이런 말을 덧붙일 것 같다. 아마 당신은 평생 가도 모를 거라고. 그런 삶을.

‘지영’씨는 태어나지 않는다, 다만 만들어질 뿐. 책을 다 읽었을 때, 긴 한숨과 함께 가장 먼저 떠오른 말이었다. 보부아르가 말했던가. ‘여자는 태어나지 않는다. 다만 만들어질 뿐’이라고. 82년생 김지영은 태어나기는 했지만 태어난 게 아니라, 82년생 김지영, 그러니까 한국 여성 '김지영'으로 서서히 만들어진다. <82년생 김지영>은 그런 과정의 추적과도 같다. 그리고 그 생생한 과정의 기록이 오늘날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또다른 ‘지영’씨들의 전폭적인 공감을 얻은 게 아닐까.

여자 ‘김지영’은 먼저 집안에서부터 만들어진다. 다섯 살 터울 남동생을 둔 지영은 아들, 아들 하는 할머니와 함께 살면서 자연스레 ‘여자’이자 ‘딸’로서의 위치를 부여받는다. 그런데도 그것이 워낙 뿌리 깊고 은밀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불합리하다는 사실조차 느끼지 못한다. ‘동생이 특별대우를 받는다거나 그래서 부럽다는 생각을 하지도 못했다. 원래 그랬으니까. 가끔 뭔가 억울하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었지만 누나니까 양보하는 거고, 성별이 같은 언니와 물건을 공유하는 거라고 자발적으로 상황을 합리화하는 데에 익숙’하다. 더군다나 ‘누나들이 샘도 없고, 동생을 잘 봐준다고 항상 칭찬했는데, 자꾸 칭찬을 받으니까 정말 샘을 낼 수도 없어’진다.(25~26쪽) ‘원래 그랬으니까. 누나니까’에 길들여지는 것이다.

여자 ‘김지영’ 만들기는 학교에서 더 심화된다. 밥을 먹는 것도 남자 아이들이 먼저이고, 반장은 늘 남자가 해야만 한다. 더더군다나 김지영 씨는 못된 남자 짝꿍이 그토록 괴롭혀서 고통스러워 죽겠는데 선생님이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남자애들은 원래 좋아하는 여자한테 더 못되게 굴고, 괴롭히고 그래.” (41쪽) 하-아-아- 이런 말도 안되는 소리는 아직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 걸까? 어떤 남자들은 정말이지 여자를 괴롭히는 게 좋아하는 것이라고 착각하고서는 성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그 버릇을 못 고친다. 스토커짓도 모자라서 여자 친구 또는 아내를 폭력적으로 괴롭히다가 죽이기까지 한다. 이렇게 단지 ‘여자’라는 이유 때문에 온갖 불평등한 모순을 겪으면서 소녀들은, ‘아이들은 스스로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남자에 대한 환멸과 두려움을 가슴 깊은 곳에 차곡차곡 쌓아’ 간다.(65쪽)

그렇게 자라서 대학을 가고 사회인이 되지만 ‘여자’만들기는 더욱 공고화될 뿐 좀처럼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대학 동아리에서도 여자들은 그저 '있어주기'만 하면 고마운 화분 같은 존재일 뿐이다. 그 화분은 결코 회장이나 우두머리는 될 수 없다. 더군다나 그 화분은 때로는 누군가가 씹다버린 ‘껌’이 되기도 한다. 똑똑해서도 안 되고 잘나서도 안 된다. 그러면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니까. 제아무리 똑똑하고 잘나도 좋은 자리는 언제나 남자들의 몫이다. 심지어 김지영 씨처럼 일 잘하는 여자들에게 까다로운 클라이언트를 맡긴 것도 그녀들을 믿어서가 아니다. ‘오래 남아 할 일이 많은 남자들에게 굳이 힘들고 진 빠지는 일을 시키지 않은 것’일 뿐이다. 그런 커리어마저도 출산과 육아와 함께 날아가 버리고, 그녀는 어느덧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이들의 눈에는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커피나 마시는 한가로운 맘충'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김지영 씨는 얼굴이 붉어져 황급히 그 자리를 뜬다. 

누가 이렇게 김지영 씨를 ‘인간’이 아닌 ‘여자’, 김지영 씨로 만들어 간 것일까? 단지 성별이 다른 남자들만의 잘못일까? 지영의 할머니도 엄마도 모두 여자다. 지영을 가르쳤던 선생님 중에도 틀림없이 여 선생님이 있었을 것이다. ‘여자’로서의 역할을 내면화하는 데는 남자뿐만이 아니라 스스로 이 사회의 모순을 뼈저리게 겪고 자랐을 또 다른 ‘지영 씨’들이 크게 한몫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82년생 김지영>은 읽을수록 답답하고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하필이면 김지영 씨는 딸을 낳는다. 그 딸은 김지영 씨와 다른 삶을 살 수 있을까? 지영의 남편과 지영을 상담했던 의사를 보면 그리 희망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지영의 남편도, 지영의 담당 의사도 그녀를 보면서 이 땅에서 여자로 산다는 것의 어려움을, 고통을 조금은 이해하는 듯하지만, 어쩐지 그 이해는 그저 멀찍이서 보는 방관자의 태도와도 같다. 그러니까 지영의 남편은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겠다는 아내에게 ‘그 일이 정말 네가 하고 싶은 일’이냐고 묻는 것이다.

김지영 씨의 담당 의사 또한 마찬가지이다. 수학 영재였으며 뛰어난 의사였던 자신의 아내가 아이 때문에 집안에 눌러 앉아 그저 초등학교 수학문제를 푸는 데 재미를 붙인 모습을 보며 불만을 품는다. 아내는 지금 자기 뜻대로 되는 게 오직 수학문제 밖에 없는데도 그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저 자기 아내가 초등 수학문제 풀이 정도가 아닌, ‘잘하는 일, 좋아하는 일, 그게 꼭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을 하길 바란다. 지영 씨와 자기의 아내가 그런 일을 다시는 찾을 수 없다는 현실을 절대 모르는 것이다. 지영 씨와 자신의 아내가 진정으로 의미 있는 일을 하기를 바란다면서도, 출산으로 회사를 그만두는 직원 대신 후임으로 미혼 여성을 뽑겠다는 그. 그런 그들이 이 사회에 계속 존재할 터인데, 과연 지영 씨와 그의 아내가 다시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을까? 여자가 아닌, 엄마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자기 존재를 찾을 수 있을까?

사람들은 문학을, 소설을 왜 읽을까? 문학을 읽음으로써 공감과 위로를 받기도 하고 잘 몰랐던 사실이나 진실을 깨닫기도 한다. 사회 모순을 담고 그런 사회를 고발하는 이야기들을 읽음으로써 어떤 변화의 바람과 작은 희망을 기대하기도 한다. <82년생 김지영>은 문학이 줄 수 있는 이런 여러 가지 것들 가운데 ‘공감’ 부분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으리라. 그런데 그 공감은 어쩐지 쓸쓸하다. 그런 공감을 도무지 느낄 수 없는 사회라면 어떨까? 마치 김지영 씨의 이야기가 화석처럼 되어 아주 먼 옛날이야기가 되어, 와, 어쩜! 이런 시절도 있었나봐! 완전 드라마 같은 이야기 아니야? 이게 말이 돼? 말도 안 돼. 비현실적이야. 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사회- 그런 사회에서는 모든 여자들이 82년생 김지영 씨의 이야기가 자기와는 너무도 동떨어진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부디, 언젠가는 그런 사회가 오기를 바란다. 62년생 김지영 씨도 72년생 김지영 씨도 82년생 김지영 씨도 92년생 김지영 씨도 02년생 김지영 씨도 12년생 김지영 씨도 그 모두가 이건 내 이야기야! 하고 공감하지 않을, 그런 사회- <82년생 김지영> 이 책이 전하는 뼈아픈 진실, 그 불평부당한 모순을 더 많은 이들이 읽고 느끼고 깨닫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 책을 출발점으로 삼아, 변화의 바람이 불어오길 바라본다. 82년생 김지영 씨가 더는 존재하지 않는, 그런 사회가 오긴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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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RTZ 2017-09-06 0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편이 벌어다준 돈으로 한가롭게 커피마시는 사람 = 맘충?

잠자냥 2017-09-06 09:32   좋아요 1 | URL
<82년생 김지영> 이 작품 속에서 그렇게 나옵니다. 제 표현이 아니고요. ^^ (충격적이죠? 정확히 말하자면 김지영 씨가 아이를 데리고 나가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직장인으로 보이는 남자들이 저런 이야기를 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QUARTZ 2017-09-06 1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 제가 오해했네요 죄송합니다. 리뷰를 재밌게 잘 읽고 있었는 데 불편한 표현이 있어서 댓글 달았습니다. 저 표현 때문에 읽고싶었던 마음이 사라졌었거든요. 한 번 읽어봐야겠네요 ㅎ 감사합니다

잠자냥 2017-09-06 13:02   좋아요 0 | URL
네, 아닙니다. 제가 인용을 확실히 구분하지 않고 오해되게 쓴 부분도 있네요. 하마터면 제 글 때문에 이 책을 못 읽어보실 뻔했군요! 큰일 날 뻔 했습니다. 오해될 것 같은 부분은 좀 수정해야겠네요- (수정했습니다. ^^;;;;)

조현우 2019-08-12 1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로써 책을 무척 재밌게 읽었었습니다. 시간가는줄 모르고 봐었고 저희 어머니의 삶이 오버랩되어 몰래 눈물을 훔치기도 하였습니다. 그 이야기들을 잘 정리해주셨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책 속의 답답한 에필로그보다도요. 다만 소설, 문학으로 볼때와 현실을 너무 깊이 연관시키시는것 같아 안타깝네요. 이미 사회가 깊게 연관시켜놓기도 하였지만..
다만 본문의 쓰신 말 중 남자들은 평생가도 모른다는 말이 조금 속상하게 느껴져 댓글을 달아봅니다. 물론 잘모르고 살아왔고 앞으로도 모르겠지만, 알아가고자 노력하는 한국의 남자 중 한명입니다. 잠자냥님의 말씀대로라면 남자들의 삶 역시 아마 여성들은 평생가도 모를 수 있을거라고도 생각이 됩니다.. 그만큼 삶의 모습과 환경이 다르기도 했다는 것일테지요.
단정짓기보단 서로를 공감해주고 배려할 수 있는 사회가 오길 기대해봅니다..^^ 좋은 내용 잘 읽고 가요..^^

잠자냥 2019-08-12 15:42   좋아요 1 | URL
소설이나 문학은 현실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82년생 김지영>은 그런 점이 극명하기 때문에 현재 동시대 여성들의 공감을 많이 얻고 있는 게 아닌가 합니다. 비단 한국만이 아니라 일본처럼 가부장제가 극명한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로 공감을 얻고 있고요. 말씀하신 것처럼 남자들의 삶 역시 여자들이 다 알기란 한계가 있겠지요. 바로 그래서 저는 문학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상상력을 통해 자기가 경험하지 않은 세계의 공백을 메꿀 수 있으니까요. 암튼 조현우 님 같은 분들이 더 많아지기를 빌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