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0
하인리히 뵐 지음, 김연수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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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신문을 끊은 지 꽤 오래 되었다. 이명박근혜로 이어지는 세월 동안 사실,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으로도 뉴스를 잘 보지 않았다. 그들 얼굴만 보면 뭔가 치밀어올라서.... 그러다가 작년부터 시절이 하 수상하여 뉴스를 이것저것 챙겨보기 시작했는데, 하- 거참. 뉴스라고 하기 뭐한 일종의 찌라시 같은 기사들이 넘쳐난다. 게다가 ~카더라 하는 식의 확인되지도 않은 기사는 또 어찌나 많은지. 아님 말고 하는 식도 많다. 대선을 앞두고도 이런 기사의 열기는 식을 줄을 모른다. 연예인 관련 기사는 말할 것도 없다.


하인리히 뵐의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는 신문 기사, 방송 보도 등 저널리즘과 기자라는 이들, 저널리스트들이 한 인간의 삶을 얼마나 황폐하게 만들 수 있는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사실 이 작품을 읽은 지는 꽤 되었다. 예전에 우리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한 여배우의 자살 사건 이후 뭔가에 꽂힌 듯 이 책을 읽었다. 이 책이 요즘 문득 눈에 다시 들어온 까닭은, 바로 그 황색 저널리즘의 행태가 극에 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작품은 읽는 내내 그때 그 배우의 죽음을 떠올리게 했다. 자살의 원인으로 여러 가지가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라 하더라’ ‘~라더라’ 등등 확인되지 않은 소문, 루머가 그녀를 괴롭힌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녀의 죽음 이후에도 황색 언론은 여전히 ‘~ 더라’를 찾아 헤맸다. 더 자극적인 먹이를 찾아 두 눈을 희번덕거리는 하이에나들처럼. 그 배우의 죽음뿐만이 아니다. 연예인처럼 대중이 많은 관심을 보이고 언론이 만만하게 여기는 대상은 쉽사리 희생양이 되곤 한다.

이 작품의 주인공 카타리나 블룸은 27살의 평범한 소시민이다. 그저 ‘평범하다’고 말하기 좀 어려운 점이 있다면 눈에 뜨일 정도의 아름다운 외모 정도? 어쩌면 27살에 이혼 경력이 있다는 것도 블룸이 살던 시대에는 ‘평범하지’ 않은 이력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그녀가 일간지 ‘기자’를 살인하고 제 발로 경찰에 찾아와 자신이 그를 총으로 쏴 죽였다고 자백한다.

성실하고 진실한 모습으로 주변 사람의 사랑을 받던 27살의 가정부 카타리나 블룸에게 어떤 일이 있었기에 그녀는 일간지 기자를 총으로 쏴 죽이는 일을 저지르게 되었을까? 블룸은 댄스파티에서 한 남자를 만난 것이 화근이었다. 자신이 그토록 기다리던 이상형에 가깝던 그 남자는 알고 보니 은행 강도와 살인 혐의까지 있는 인물로 언론과 경찰에 쫓기던 인물이었던 것이다! 블룸의 집에서 안전하게 도주한 그 남자 때문에 그녀는 순간 세간의 호기심이 된다.

황색 언론은 이 미모의 27살 이혼녀를 두고 더욱 자극적인 기사를 쓰기 시작한다. 주변 인물 인터뷰에서 얻은 기삿거리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조작하고, 편집한다. 성실하게 살아온 그녀의 삶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신사들’의 방문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던 것이었고, 그녀를 도와주던 지인들마저 ‘과격한 빨갱이’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힌다. 기자들이 그녀의 삶, 그녀의 인생을 조작하고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한편의 ‘소설’로 각색하는 장면을 보면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황색 언론에서 얻은 정보로 그녀를 ‘살인자의 정부’ ‘음탕한 공산주의자’ 등으로 단죄하기 시작한 시민들은 블룸에게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 치욕적인 성적 발언 등을 가득 담은 익명의 우편물을 보내기 시작한다. 가까운 친구들마저 그녀의 말보다 황색 언론을 믿기 시작한다. 이런 모습에서는 인터넷 뒤에 숨어 입에 담을 수 없는 저속한 말들을 쏟아내는 오늘날 한국의 수많은 인터넷 찌질이들 모습이 오버랩 되기도 한다. 

블룸은 결국 자신을 인터뷰하러 온 기자를 총으로 쏴 버린다. 물론 그 기자는 평소 블룸에 대해 악랄한 기사를 쓰던 기자였다. 그를 총으로 쏴 죽여도 평범하게 행복했던 그녀의 인생은 다시 되돌릴 수 없다.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 그녀가 살인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과연 누구의 책임인가. 소설 속 주인공 블룸이 아닌 그 여배우는 타인에게 총구를 겨누는 대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책의 부제는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이다. 타인의 삶에 대한 끊임없는 저속한 호기심, 그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자극적인 기사를 만들어 내는 저널리스트와 황색 언론…. 이런 것들이 사라지지 않는 한 제2, 제3의 카타리나 블룸은 계속 등장할 것이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는 흥미롭게 읽히면서도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준다. 하인리히 뵐의 짧지만, 강렬하고 묵직한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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