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자키 준이치로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대학 3학년 때였나? 전공 외 교양 수업으로 ‘일본근대문학’을 수강한 적이 있는데, 그
수업 시간에 처음 그를 알게 되었다. 이 수업 시간에는 일본 문학사에서 아무래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작가들의 단편을 읽어보고
공부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그때 읽었던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작품은 ‘후미코의 발(富美子の足)’이었다. 그때 정말 이 단편을 읽고
나서의 충격이란!
제목을 보니 무언가 느껴지는 것이 있는가? 어쩐지 여성의 발에 집착하는 중년 ‘오덕후’의 이미지가
그려지지 않는가? 만약 그런 상상을 했다면 제대로 집었다. 이 단편은 어린 첩의 발에 집착하는 노인의 이야기인데 여자의 몸에
대한 묘사하며 일종의 성도착이라고 할 수 있는 발 페티시즘에 걸린 노인의 모습이 충격적으로 그려진다. 지금 생각해보면 좀
우스꽝스럽기도.
그때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작품을 읽고 논하면서 나왔던 이야기들이란 ‘탐미주의’ ‘유미주의’
‘악마주의’ 이런 단어들이었고,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실제로 ‘후미코의 발’ 외에 이런 성향의 작품들로 널리 이름을 알렸다.
일본에서는 ‘설국’의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였지만 그보다 먼저 노벨문학상 후보에 심심찮게 오르락내리락했던
이가 바로 다니자키 준이치로다.
‘후미코의 발’에서 느낀 변태 이미지가 컸던지 그 뒤 오래도록 그의 작품은 선뜻 다시
읽어보게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문득 어느 날엔가 그의 작품을 읽기 시작해서는 나도 모르게 새 책이 번역되어 나오기를 바라고 있더라. 아무튼 이 책
<그늘에 대하여>는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산문집이다. 예전에 <음예공간예찬>이라는 제목으로 한 번 출판되었던 적이 있다. 이
책에서는 ‘그늘’이라고 번역한 ‘음예’란 ‘그늘인 듯한데 그늘도 아니고, 그림자인 듯한데 그림자도 아닌 거무스름한 모습’으로
우리말로는 선뜻 풀이하기 쉽지 않은 듯하다.
‘그늘에 대하여’는 일본의 다다미 방이나 건축문화에 스며 있는 보일 듯
말 듯한 ‘그늘’ ‘그림자’ 이미지에 대한 예찬인데 딱히 ‘건축문화’하나로만 정의 내릴 수 없는 것이 일본의 전통 연극, 교토나
나라의 사원들의 변화, 전등이 가져다주는 득과 실, 서양 종이와 동양 종이의 효용성 등 서구 문물과 대비되는 동양(일본)의
정서적인 ‘그늘’에 대한 찬미, 일본의 전통에 대한 찬미로 볼 수 있다.
‘그늘에 대하여’가 첫 장을 이루고 있으나
이 책에는 ‘게으름을 말한다’ ‘연애와 색정’ ‘손님을 싫어함’ ‘여행’ ‘뒷간’과 같은 수필이 담겨 있다. 가장 먼저 읽었던
것은 아무래도 ‘연애와 색정’- 이 수필을 읽고 다니자키 준이치로에 대한 변태 이미지가 더 굳어지는 것은 아닐까 심히 염려했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생각보다는 싱거웠다. ‘색기’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펼치는 부분이 있는데 피식 웃음이 나기도 했다. 대놓고
드러내기 보다는 감출수록 색기가 드러난다는 그런 주장이랄까.
‘손님을 싫어함’이라는 수필에서는 자기에게도 고양이
꼬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언급한다.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누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던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대화를 하는 중 자기도
모르게 상대방 이야기를 듣다가 자기만의 생각으로 곧잘 빠졌다. 때문에 제 때 대꾸하지 못해 손님에게 불성실하게 대화에 참여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고는 한다. 해서 자기에게 고양이처럼 꼬리가 있다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서 ‘내가 너 이야기를 듣고는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는 부분에서는 피식 웃음이 났다(나도 고양이 꼬리 좀 주슈~). 남들이 다
가는 명소와는 정반대의 여행지로 떠나고 그렇게 해서 발견한 자기만 아는 최고의 여행지를 수필에서조차 끝내 밝히지 않는 괴팍함을
드러내는 ‘여행’이라는 수필도 꽤 공감이 갔다.
다만 불편한 것은 아무래도 여성이나 여체에 대한 묘사 등이
권위주의적인 남자의 시선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어 씁쓸하기도 하고, ‘하이고~ 웃기고 있네!’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또 서양에
비해 동양(즉 일본)의 우월함을 계속 강조하는 태도도 껄끄럽다. 같은 동양을 이야기할 때도 중국 등 다른 나라에 대한 비하는 물론
일본의 상대적 우월감을 여과 없이 드러내 ‘어쭈, 자화자찬은 참…’하며 혀를 차게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한
번쯤 읽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별것 아닌 소재 속에서 뛰어난 묘사와 관찰을 통해 그토록 세심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솜씨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나는 작가만의 꼴통 기질이랄까 괴팍함을 발견하는 부분도 꽤 재미있었다.
문득 ‘후미코의 발’도 읽고 싶어져서, 생각난 김에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후미코의 발'을 다시 읽었다. '후미코의 발'은 고려원에서 나왔던 <일본대표단편선> 제1권에 수록되어 있다. 지금 돌아보니 이 일본대표단편선 시리즈에는 꽤 괜찮은 단편이 많이 실려있어서 뒤늦게 1권 외에 더 사두려고 찾아보니 아쉽게도 절판되었더라.
아무튼, '후미코의 발'은 예전에는 충격적(?)이었는데, 어제는 좀 많이 웃겼다. 키득키득. 특히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는 미친 듯이 웃었다.
발뒤꿈치의 곡선을 살며시, 그러나 머리 속이 타버릴 정도로 뚫어지게
탐닉했습니다. 밑에 어떤 뼈가 있으며, 거기에 어떤 식으로 살이 감싸고 있기에 저리도 부드럽고 원만하며 윤기 도는 뒤꿈치가
되었을까요? 후미코는 태어나서 열일곱 살이 될 때까지 이 뒤꿈치로 다다미와 이불 외에 그 어떤 딱딱한 것도 밟아 본 적이
없었겠지요? 저는 한 남자로 태어나 살기보다는, 이렇듯 아름다운 뒤꿈치가 되어 후미코의 발 뒤에 붙을 수 있다면 그쪽이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후미코의 발뒤꿈치에 밟히는 다다미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저의 생명과
후미코의 발뒤꿈치 중 이 세상에서 어느쪽이 더 존귀하냐고 묻는다면 저는 일언지하에 후자 쪽이 존귀하다고 대답할 겁니다. 후미코의
뒤꿈치를 위해서라면 저는 기꺼이 죽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