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작품을 읽는 것은 쓸모없는 일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문학작품에서 더 큰 것을 알게 되거나 깨닫게 되는 일은 종종
있다. 아니, 확연하게 인지하지 못할 뿐 무수히 많은 것들이 몸과 마음에 새겨질 것이다. 그 어떤 역사책이나 사회과학 책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사실을, 진실을 만나게 되는 순간도 있고,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문학이라는 형식으로 만났기에 새롭게 다가오기도 하고 더 진실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V.S. 나이폴의
<미겔 스트리트>를 읽으면서 그런 경험을 하게 되었다. 책에 소개 되어 있는 저자의 사진을 보면 저자는 인도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 물론 그 약력을 읽었기에 그가 인도인이라고 짐작했다. 그러나 약력을 읽지 않아도 사진 속 작가의 얼굴을 보면 이른바
‘동남아시아인’의 모습이다. 그런데 책을 읽다 보면 갸우뚱하게 된다. ‘트리니다드 토바고? 여기에 인도인이?’ 아니, 이 섬은
대체 어떤 곳이기에 인도인과 흑인이 전체 인구 구성의 절반씩을 차지할까? 대체 이 섬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베네수엘라와 가까운,
카리브해에 위치한 ‘트리니다드 토바고’라는 나라에 관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이 작품을 읽다 보면
‘포트오브스페인’이라는 지명도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스페인의 지배를 받은 적도 있으려니 추측을 한다. 공용어가 영어인걸 보니,
영국의 지배도 받은 적 있을 테고, 미군이 자주 등장하는 걸 보니 미국도 이곳에 적을 둔 적이 있는 듯싶다. 한마디로 남아메리카에
있는 대부분 나라가 그렇듯 이곳 역시 꽤나 험난한 역사의 질곡을 겪은 듯하다.
예상대로다. 트리니다드는
17세기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한 섬인데 처음에는 스페인과 영국의 통치를 받았다. 그때는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수입했고, 19세기부터
인도에서 이주 정착민을 받아들여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때문에 전체 인구의 절반은 인도인, 절반은 흑인이 차지하는 기이한 인구
구성을 이루고 있다. 1962년 영국으로부터 독립, 트리니다드 섬과 토바고 섬 두 개를 엮어 트리니다드 토바고 공화국으로 불리고
있고 토바고 섬 주민은 흑인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이 책의 제목인 ‘미겔 스트리트’는 나이폴이
태어나 살던 동네로 트리니다드의 수도인 포트오브스페인에서 하층민이 모여 살던 슬럼가 이름이다. 이곳은 대부분 주민이 인도계였으며
종종 흑인이 보이기도 하지만 그들과 사이가 좋지는 않다. 미겔 스트리트에서 태어나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 작품의 주된
내용이다. 나이폴 그 자신으로 보아도 무방한 어린 소년의 눈을 통해 이곳 주민의 생생한 삶이 전달된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이
작품의 느낌은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 혹은 바스콘셀로스의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를 읽을 때와
비슷하다. 어린 소년의 눈을 통해 바라본 하층민들의 가난하고 힘겨운 삶…. 그런 것들. 그런데 한 가지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이
거리에 희망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
총 17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마지막 장을 제외하고 16개
장은 모두 ‘보가트’ ‘조지와 핑크 하우스’ ‘꽃불 전문가’ ‘기계의 천재’ ‘해트’ 등등 미겔 스트리트 주민을 개별적으로
주인공으로 삼아 이야기를 이끌어 가고 있다. 소년이 관찰한 마을 주민들의 모습은 무기력하고 도덕관념도 희박하고 삶에 대한 애착도
크지 않고, 미래에 대한 희망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볼 수가 없다. 그저 그냥 하루하루 버틸 뿐이다. 이런 이야기이니 무척 암담할
것이라고 생각되겠지만 놀랍게도 작품은 꽤 유머러스하다. 이 유머러스함은 생생한 캐릭터와 함께 더 빛이 난다. 그러나 그들의 삶을
바라보면 웃기는 웃는데 가슴 한 구석이 싸해진다. 이런 곳이라면 이렇게 살 수 밖에 없겠구나 싶어진다.
오랜 식민
통치를 받다 보니 무언가 자발적으로 삶을 살아갈 의지를 아주 오래 전에 잃어버린 사람들. 독특한 인구 구성 비율 때문에 민족적
의식도 희박하고 전통은커녕 정체성 또한 희박한 사람들. 무언가 해보려 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마는 사람들. 때문에 이제는 아예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 재능을 실현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고, 혹시라도 재능을 살려보았자 보이지 않는
벽에 막혀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이 책에 등장한 인물 중 공부를 해서 영국으로 장학생이 되어 가겠다고 큰 꿈을 가졌던 소년
‘엘리아스’가 번번이 시험에 낙방하고 ‘결국 돈도 빽도 없어서 영국에 갈 수 없었다.’며 자조하는 모습은 트리니다드의 꽉 막힌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작품의 장점은 무수히 많다. 그러나 역시 가장 큰 장점은 앞서 말했듯 어쩌면 전혀
모르고 살았을 세계에 대해 그 어떤 역사책보다도 생생하게 증언을 한다는 점이다. 게다가 이런 공간을 ‘제3세계’라 부르며 식민
통치나 침략, 노예 약탈 등을 자행하고 심지어 그런 행위를 정당화하기까지 한 서구에게 고발에 가까운 기록을 꺼내 보이면서도
유머러스함과 따스한 시선을 잃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그 어떤 백 마디 선전선동보다도 그곳에서 나고 자란 사람의 이런 생생한
기록이 더 큰 울림을 줄 수 있으리라.
마지막 장인 ‘내가 미겔 스트리트를 떠나게 된 경위’에서 나이폴은 해외
유학 장학금을 받고 영국으로 떠나게 된 이야기를 꺼낸다. 나이폴의 어머니는 그에게 이 질식할 것 같은, 무덤과 같은 곳을 하루
빨리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고 당부한다. 영국에 온 나이폴은 트리니다드로 다시 끌려가는 '악몽'을 몇 년간이나 꾸었고 .
어머니 당부대로 실제로 다시는 그곳에 발을 딛지 않았다고 한다(훗날 일 때문에 잠시 머물렀던 적이 있다는데, 그때도 체류기간은
무척 짧았다고). 보통 사람들은 자신이 나고 자란 곳에 대한 향수랄까, 회한이랄까 이런 심정으로 늘그막에는 한번쯤 찾고 싶어
하던데, 그에게 트리니다드는 결코 그런 공간이 될 수조차 없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