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한 작품을 읽었는데도 강렬한 인상이 남는 작가와 작품이 있다. 테네시 윌리엄스가 그렇다. 예전에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읽고 난 후, 테네시 윌리엄스와 그의 저 기묘하고도 멋진 제목의 희곡은 늘 기억에 남았다. 굉장히 좋았던 작품,
언젠가 한 번은 꼭 원서로 읽어야겠다고 다짐한 작품. 그리고 더 나아가 언젠가 한 번은 꼭 저런 작품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그의 데뷔작인 <유리 동물원>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보다가 또 이런 저런 장면에서 울컥했다. 삶의 비애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쓸쓸하고, 황량한 가족의 이야기. 그러면서도 애잔하고 슬프다. 왠지 모를 아름다움도 느껴진다.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 또한 그렇다. 흥미진진하면서도 역시 쓸쓸하고 슬프다.
테네시 윌리엄스의 작품을 읽다 보면 그에
대한 애정이 솟아난다. 왠지 작가 자체의 삶이 황량하고 쓸쓸하지 않았을까 싶어진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분위기의 작품을 쓸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황량한 인생 속에서도 마음속으로는 낭만을 잃지 않았던, 섬세하고 여린 사람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본다. 그리고 그의 인생 여정을 살펴보면 조금은 그러했으리라 생각된다.
테네시 윌리엄스는 가족 안에서 행복했던
적은 그다지 없던 듯하다. 아버지는 떠돌이 외판원이었으며 어머니는 아름답지만 히스테릭한 사람이었다. 모계로부터 정신 병력이
이어져내려 왔고 그의 하나 뿐인 누나에게서 정신 분열이 발명한다(물론 테네시 윌리엄스에게도 이런 정신 병력은 나타났다고 한다).
그런 누나였지만 윌리엄스는 누나를 죽기까지 다정하게 돌보며 평생 변치 않는 우애를 나눴다고 한다.
윌리엄스에게는 이런
‘가족’외에 또 하나의 아킬레스건이 있었다. 바로 그의 성적 취향이었다. 윌리엄스는 대학 졸업 후 자신의 동성애적 성향을 깨닫고
평생 동성애자로 살았다고 한다. 그의 오랜 연인이었던 프랭크 멀로가 사망한 뒤에는 알코올과 마약에 탐닉하며 고독한 삶을 살았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나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로 한때 크게 성공한 적도 있었으나 그의
말년은 쓸쓸했던 듯하다. 호텔방에서 병마개가 목에 걸려 홀로 죽어간 죽음을 보면......
그의 인생을 구구절절 나열하는
이유는 데뷔작인 <유리 동물원>과 그에게 퓰리처상 수상의 영예를 안겨준 작품인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가 모두 어느 정도는 자전적 이야기로 읽히기 때문이다. 특히 <유리 동물원>은 윌리엄스가 벗어나고자 했던,
그러나 쉽게 벗어날 수 없었던 가족의 이야기를 고스란히 토대로 한다. 정신병을 가진 누나는 <유리 동물원>에서
절름발이 누나로 등장하며, 히스테릭한 어머니는 화려했던 과거를 잊지 못하는 다분히 허영기 가득한 어머니로 표현된다. 그리고
외판원이었던 아버지는 <유리 동물원>에서 아예 집을 나가버린, 부재중인 아버지로 그려진다. <유리 동물원>의
화자이자 극 전개자인 ‘톰’은 다분히 윌리엄스 자신으로 보인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자 공장에서 일을 하며 틈틈이 글을 쓰고
밤마다 극장으로 도피하는 것이 유일한 낙인 남자, 가족을 벗어나고 싶어 하지만 결코 쉽게 벗어날 수 없었던 남자.
<유리 동물원>은 어떤 면에서 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를 떠올리게 한다. 두 작품 모두 가족에게 상처받고,
가족 때문에 외롭고 힘든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런 가족을 버리고 벗어나고 싶어 하지만 벗어날 수 없고 쉽게 버릴 수도 없다.
그렇게 평생 서로를 끌어안고 상처 주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밤으로의 긴 여로>가 한없이 황량하고 슬픈
분위기라면 <유리 동물원>은 그런 분위기에 서정적인 아름다움이 깃들여져 있다. 그래서 왠지 슬픔은 배가 된다.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 역시 가족 간의 이야기다. 암으로 죽어가는 아버지(그러나 그 사실을 아버지와 어머니만
모른다,. 아버지가 암으로 죽어간다는 사실을 알고 아버지의 거대한 유산을 노리는 탐욕스러운 큰 아들 내외와 그들의 다섯 아이들,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무척 사랑하는 둘째 아들 ‘브릭’과 그의 부인 ‘마거리트’- 이들이 만들어내는 욕망과 좌절, 위선,
소통의 단절, 불협화음이 극의 주된 내용이다.
이 작품에서 둘째 아들 ‘브릭’은 아마도 윌리엄스의 분신으로 보인다.
그는 하루 종일 술에 취해 사는 알코올 중독자다. 탐욕스러운 큰 아들 구퍼에 비해 욕심도 없고(실은 그는 삶에 의지가 아예 없어
보인다) 호남형의 아버지를 쏙 빼닮아 잘생긴 얼굴로 여자들에게 인기가 좋았으며(그리하여 꽤 매력적인 아내 ‘마거리트’를 얻을 수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도 독차지한다. 그런데 그는 늘 술에 절어 있고 슬프다. 왜 술을 마시느냐는 아버지의 질문에
브릭은 ‘역겨움’ 때문에 술을 마신다고 대답한다.
그 ‘역겨움’을 집요하게 파고들던 아버지는 그의 슬픔의 근원이
브릭과 절친한 사이였던 스키퍼의 죽음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브릭은 스키퍼와의 관계가 보통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순결하고 고고한 ‘우정’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세상은 스키퍼와 자신의 관계를 동성애적 관계로 보았고 때문에 자신은 그들의
허위의식과 그로 인한 역겨움 때문에 술을 마실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더 집요하다. 브릭에게 반문한다. 사실은
스키퍼와의 관계를 동성애 관계로 인정하지 못하는 너 자신의 허위의식에 대한 역겨움이 아니냐며.
사람들은 글을 왜
쓸까? 잘은 모르지만 자신의 고독, 외로움, 상처를 글로 표현하면서 위로받는 이들이 많으리라. 그런 이들에게 글은 하나의
도피처이다. 테네시 윌리엄스 또한 그러하지 않았을까. 자신의 삶을 좌지우지했던 가족 간의 쓰라린 추억을 곱씹으며 글로 써내려간
그- 그런 글을 쓰고 있노라면 상처 위에 소금을 뿌리듯 더욱 아팠겠지만 ‘남에게 들은 이야기’도 아니었고 ‘타인을 관찰해서 얻은
이야기’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의 이야기였기에 그 어떤 글 보다 ‘진실’하게 다가온다. 책 표지 뒤에 새겨진 그의 얼굴을 보고 또
본다. 작품의 여운과 그의 삶이 겹쳐져 왠지 한없이 슬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