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의 조카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 현암사 / 199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작품은 소설이지만 그저 픽션은 아니다. <소멸>의 작가 토마스 베른하르트와 철학자로 유명한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조카’ ‘파울 비트겐슈타인’과의 12년간의 우정의 기록이다.

<소멸>의 토마스 베른하르트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이 작품의 느낌도 대충은 감잡을 수 있다.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이 작품에서도 여전히 자신의 조국인 오스트리아를 혐오하고, 비정신적인 세계에 역겨움을 토로한다. 물질적인 것, 속물적인 것, 인간의 허위의식 등 그에게 역겨운 그 모든 것에 쓴 소리를 해대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이 <소멸>에 비해 조금은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 드는 것은 순전히 ‘파울 비트겐슈타인’ 그 때문이다. 아니 파울과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우정’ 때문이다.

파울 비트겐슈타인은 오스트리아에서는 내로라하는 가문인 비트겐슈타인가(家) 출신이다. 물론 그의 삼촌인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또한 그렇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가문에서는 내놓은 사람들이었다. 두 사람 모두 그 명망 있는 가문, 재벌 가문과는 어울리지 않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조카와 삼촌 모두 자신의 부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며 물질적인 세계와는 결별한 삶을 살았고 오로지 ‘정신적’인 세계에 계속 탐닉했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 가문에서는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나 조카인 파울 비트겐슈타인, 이 두 사람을 모두 ‘미친놈’ 취급을 했다. 비트켄슈타인이 철학자로서 그 이름을 떨쳐도 가문에서 돌아오는 소리는 비아냥거림과 멸시뿐이었다고 한다. 철학자로 유명해진 삼촌에게도 이럴진대, 조카인 파울, 토마스 베른하르트와 우정을 쌓았던 그 파울 비트겐슈타인을 향한 그들의 경멸은 오죽했을까. 삼촌 못지않은 천재성을 지녔던 파울 비트겐슈타인은 안타깝게도 정신병이 발병해 35세 이후로는 늘 정신병원을 들락날락 했기 때문이다.

파울이 정신병으로 병원을 들락거릴 때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폐병으로 병원 신세를 지게 된다. 한 사람은 정신병, 한 사람은 폐병- 정신과 몸에 ‘병’을 앓으며 더욱 친근한 우정을 나누게 된 두 사람. 미치광이와 폐병환자가 어쩌다 친구가 되었을까? 그들의 우정은 한 음악회에서 우연히 시작되었다. 파울은 클래식 음악(특히 오페라)에 엄청난 애정을 지녔고 그로 인해 상당한 식견을 갖춘 사람이었다. 그렇게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그들의 우정은 시작되었다.

음악, 철학, 정치, 예술 등 온갖 정신적인 대화를 나누며, 비정신적인 세계에 똑같은 혐오감을 표현하며 그들의 우정은 깊어진다. 조국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낼 때도 사람들의 무지와 허영, 물질에 대한 집착을 비판할 때도 그들은 한 목소리였고 뜻을 함께 했다. 파울 비트겐슈타인과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12년간의 우정의 기록을 읽다 보면 그들은 이 세상에서 ‘병’을 앓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아니었나 싶어진다.

두 사람은 물질적인 것이 최선으로 여겨지는, 비정신적인 이 세계를 살아가기엔, 익숙해지기엔 너무나 예민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 예민함이 한 사람에게는 정신병으로 또 다른 한 사람에게는 폐병으로 드러난 게 아닐까. 파울이 먼저 죽고 베른하르트는 끝내 그의 무덤을 찾아가지 않았다. 베른하르트에게 파울의 죽음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니었기 때문은 아닐까. 이 염증 나는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 정신적인 세계를 뜨겁게 추구했던 파울은 미치광이도 아니었을 뿐더러, 그런 그의 죽음은 육체의 소멸이기는 하지만 정신은 여전히 살아 숨쉬기에, 진정한 죽음은 아니었던 게 아닐까. 이 세상에서 정말 죽은 사람들, 살아 있지만 무덤에 갇혀 있는 사람들은 ‘정신적인 삶’을 포기한 채 좀비처럼 먹고 싸고 자고 물질의 구축에만 온 생애를 보내는 이들이 아닐까.

<비트겐슈타인의 조카>는 ‘파울 비트겐슈타인’과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삶을 만나 볼 수 있어 색다른 경험이었지만 무엇보다도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또 다른 면목을 볼 수 있어 흥미로웠다. <소멸>을 읽었을 때 나는 이 작가는 바늘로 찔러도 피한방울 나오지 않을 만큼 독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오만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에게도 ‘인간’에 대한 애정은 있었다. 파울에 대한 애정이나 그가 이 책에서 언급한 또 다른 사람, ‘나의 삶의 사람’이라고 부르던 그녀를 향한 무한한 애정과 신뢰가 느껴졌다.

주변을 돌아보면 사람들은 너무나도 쓸데없는 만남에 많은 시간을 보낸다. 의미 없는 인간관계를 맺고, 그 인간관계가 자신의 많은 것을 말해준다고(인맥이 어쩌고 하면서) 착각한다. 그러나 그렇게 관계 맺은 인간들이 과연 자신의 정신적인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따져본다면 지금 당장 잘라버려도 하등 문제될 것이 없는 관계들이 부지기수다. 베른하르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생애에 정말 어떤 의미를 준 사람을 우리는 다섯 손가락만으로도 다 셀 수 있으며, 우리가 솔직하다면 이런 사람을 셀 때 단 하나의 손가락도 필요하지 않을 텐데도 다섯 손가락을 다 써야 한다고 믿는 우리의 파렴치함에 나는 저항한다.’ (<비트겐슈타인의 조카>, 현암사, 110쪽)

폐병 환자였던 베른하르트와 미치광이 파울 비트켄슈타인의 결코 길지 않았던 우정의 기록은 이 험난한 세상을 견디기 위해 인간에게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조용히 깨닫게 해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