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그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1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야기가 재미있어서 읽는 문학작품이 있고 한편으로는 언어의 아름다움을 느끼기 위해 읽는 문학이 있다.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는 단연코 후자에 속한다. 어차피 번역본이라 얼마나 그 언어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을까 싶은 생각도 들지만, 그럼에도 그녀의 작품 <숨그네>는 한편의 아름다운 시(詩)다. 아주 길고 참혹한…. <숨그네>에 미사여구나 아포리즘스러운 문장은 단 한 문장도 없다. 오히려 각각의 단어들은 어떻게 보면 투박하고 건조하며 거친 느낌도 드는데 그러한 단어들이 조합되었을 때의 문장과 그 문장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는 무척이나 아름답다.

그러나 아름다운 언어와 달리 <숨그네>에서 그리고 있는 현실은 참혹하기 그지없다. 열일곱 살의 소년 ‘레오’는 가족에게도 남들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그 숨막히는 비밀에서 벗어나 좀 더 자유롭게 살고자 가족과 집으로부터 멀리 떠나기를 바란다. 그런 그에게 곧 기회(?)가 곧 찾아온다. 2차 대전이 끝난 후의 루마니아. 나치 독일과 동맹을 맺고 있던 루마니아가 러시아에 항복하면서 러시아는 루마니아에 머물고 있던 독일계 소수민족들을 강제 징집한다. 이유는 러시아의 ‘재건’ 때문. 레오 역시 강제 수용소로 끌려가게 될 운명에 처한다.

레오는 그렇게 수용소로 떠나는 강제 징집 열차에 몸을 싣는다. 그리고 황량한 러시아 수용소에서의 참혹한 생활은 시작된다. <숨그네>는 레오가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 보낸 5년간의 이야기이자 그 주변인들의 삶의 기록이다. 이 작품은 커다란 사건이나 흥미를 끌만한 이야기가 딱히 없다. 그저 수용소에서의 하루하루 삶을 덤덤하게 그리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삶은 인간의 존엄이란 무참하게 짓밟히고 오로지 매일 ‘배고픔’과 사투하는 동물적인 욕구만 남은 비참한 삶이다. 수용소에서 레오는 여전히 고독하고 외롭다. 비밀을 간직해야만 하는 숨막히는 상황에서 벗어나 멀리 떠나왔건만 오히려 그 고독은 더욱 깊어졌고 힘든 노역과 배고픔까지 더해져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사투를 벌인다. 레오뿐만이 아니라 수용소에 끌려간 모든 이들의 삶이 그렇다. 이런 비참한 현실과 대비되면서 묘하게도 언어의 아름다움은 더욱 빛난다. 그래서 어쩐지 아프다.   

수용소 안에서 많은 이들이 굶어죽거나 힘든 노역으로 결국 삶을 등져버린다. 그럼에도 레오는 끝까지 살아남아 돌아온다. 그러나 돌아온 레오는 여전히 공포와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어디 레오만 그러했을까? 아마도 레오와 같은 삶을 살았던 모든 사람들이 그러했으리라. 헤르타 뮐러는 전쟁과 강제수용소, 이런 비극적 상황을 만들어낸 근본적인 원인, 즉 전체주의나 국가주의와 같은 ‘체제’로 희생된 사람들의 비극적인 삶을 보여줌으로써 개인과 국가 혹은 체제 사이의 관계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은 직설적이기 보다는 한없이 상징적이고 응축되어 있다. 그러기에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는 좀 더 독특한 개성으로 빛난다.

헤르타 뮐러는 2009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으면서 좀 더 널리 알려진 작가이다. 한국에도 그녀의 작품이 꽤 번역되어 출판되었던데 나는 이제야 <숨그네>로 처음 그녀를 만났다. 이 한 작품만으로도 꽤 강렬한 인상을 받아 나머지 작품들도 찾아 읽어보고 싶어졌다. 이런저런 책을 읽다보면 이 세상에 문학의 존재 이유를 상기시키는 작품을 운 좋게도 만나게 된다.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가 내게는 그러했다. 인간이 왜 언어로 ‘문학’을 하고 또 그렇게 쓰인 ‘문학’을 끊임없이 찾아 읽는지 ‘문학의 존재 이유’를 오랜만에 느껴 본 작품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