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 물고기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
J.M.G. 르 클레지오 지음, 최수철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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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클레지오의 작품은 참으로 오랜만에 읽는다. 그의 문장은 예전과 다름없이 고요하고 맑으며 투명하다. 마치 조용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던 오랜 친구를 만난 느낌이다. 그의 섬세한 문장들 사이로 한 어린 소녀의 얼굴이 떠오른다. <황금 물고기>는 그런 소설이다.

‘예닐곱 살 무렵에 나는 유괴당했다’는 담담하지만 꽤 충격적인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작품은 무척이나 아름답다. 르 클레지오의 깨끗하고 담백한 문장. 그리고 한 어린 소녀의 성장담. 이런 것들이 조용히 어우러져 투명한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그러나 르 클레지오의 문장이 빚어내는 소녀의 삶, 그 이야기 속 현실은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다. 소녀는 어린 나이에 유괴되어 노예로 팔려간다. 소녀의 얼굴은 검다. 자신의 이름도, 나이도 정확히 모른 채 팔려가고 그곳에서 시작된 삶 또한 녹록치 않다.

친절하고 선한, 좋은 사람의 뒷모습은, 혹은 속마음은 소녀의 얼굴보다도 검기 일쑤이다. 게다가 좋은 사람 곁에 늘 좋은 이들만 함께 있는 것도 아니어서 그런 이의 가족들이 느닷없이 악마의 모습으로 돌변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소녀는 사람들로부터, 거친 세상으로부터 도망치고 또 달아난다. 아프리카에서 프랑스로 프랑스에서 미국으로…….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느덧 세계 여기저기를 떠돌게 된다. 그리고 언제나 세계 이곳저곳, 소녀의 발길이 닿는 곳은 모두 비슷한 얼굴로 소녀를 맞이한다. 좋다가도 곧 나빠지는 그런 세상.

세상 사람들은 처음에는 한없이 선량한 모습, 좋은 얼굴로 소녀에게 다가왔다가 끝내 자기들의 욕망이나 이기심 때문에 곧 진짜 얼굴을 드러내며 소녀를, 소녀에서 여자가 되어가는 그녀를, 그리고 어엿한 어른이 된 그녀를 그토록 길게, 아주 오랜 시간동안 따라다니면서 고통을 준다.

험난한 파도가 이는 바다에 홀로 내던져진 작은 물고기 마냥 소녀는 세상을 떠다닌다. 큰 물고기 밥이 될 수도 있고 파도에 휩쓸려 정신을 잃었다가 그대로 죽을 수도 있으며 육지로 떠밀려 호흡이 끊어져 생을 마감할 수도 있을 만큼 거친 바다. 그런 바다가 바로 이 작은 소녀가 살아가는 세상 모습 그대로이다.

이 작은 물고기는 파도에 휩쓸리고 여러 물고기들의 먹잇감으로 노림 당하면서 수없이 상처입고 쓰러지고는 한다. 그때마다 물고기는 살아남는 방식. 자기만의 생존 방법을 찾아내며 마침내 살아남아 온전한 자기만의 세계로 돌아간다. 마치 연어가 강을 거슬러 고향으로 돌아가듯이.

이 가녀린 물고기는 어느덧 튼튼하고 단단한 황금 비늘로 둘러싸인 물고기가 되어 있다. 이 황금 물고기는 거친 파도에서도 더는 예전처럼 나약하게 상처입지 않을 것이며, 등 뒤에서 입을 쫙 벌리고 진짜 얼굴을 드러내는 선한 가면을 쓴 물고기들에게도 더는 순진하게 속아 넘어가지만은 않을 것이다. 거친 물살에 적응하고, 흐르는 법을 배우고, 물고기들을 뛰어넘어 건너는 법, 자기의 연약한 그 한 몸뚱이를 지키며 살아남는 법을 알아냈기에…….

그것은 스스로 강인해지는 법, 그리고 그 안에서도, 그 거친 바다 위에서도 이 작은 물고기를 살아가도록 하는 또 다른 물고기들이 비록 그 숫자는 적을지라도 분명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작고 가녀린 물고기는 그리하여 이제 거친 바다 위에서도 찬란하게 빛을 내며 헤엄쳐 나아갈 수 있으리라.

르 클레지오의 <황금 물고기>는 그렇기에 너무도 찬란히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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