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책 읽는 친구, 아니 책을 ‘많이’ 읽는 친구를 만나면 반가웠다. 또래에 비해 내가 얼마나 많이 읽었는지는 비교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대강 짐작으로 나보다 많이 읽는 친구, 혹은 나보다 폭넓게 독서하는 친구를 만나는 일만큼 기쁜 일도 없었다.
그러나 사실 돌아보면 딱히 그런 기쁨을 맛본 적은 드물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기준을 살짝 낮춰서, 조금이라도 책을 좋아하는
기색이 보이는 친구라면 다른 아이들보다 마음속으로 좀 더 후한 점수를 주고는 했다.
중고등학교 시절 ‘앙케트’라는 게
유행했다. 적게는 30문항에서 많게는 100문항까지 질문이 있고 그걸 아이들이 돌려가면서 답을 하는 놀이였다. 이 앙케트는
반에서 반을 돌아다녔고, 아이들은 자신이 좋아하거나 관심 있는 아이의 답변은 조금 더 관심을 기울여 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앙케트도 누군가 그렇게 읽어 주길 바라면서 정성스레 쓰고는 했다. 나 또한 그런 아이들 중 하나였다.
앙케트에는
항상 빠지지 않는 질문이 있었다. ‘좋아하는 책은?’ 또는 ‘감명 깊게 읽은 책은?’ 혹은 더 나아가 ‘좋아하는 작가는?’ 등등과
같은 질문, 또 다른 하나는 ‘좋아하는 음악은?’처럼 음악과 관련한 문항. 다른 건 몰라도 나는 이 질문들만큼은 모든 앙케트의,
모든 아이들 것을 관심 있게 보았다. 혹시라도, 어떤 대단한 발견이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기대는 늘 어긋났다. 책에 관한 질문은 보통 그 나이에 나올 수 있는 평범한 대답들로 채워지기 마련이었다. 간혹 음악에
대한 질문이라면 당시 유행하던 팝이나 가요 리스트가 빼곡한 가운데 간혹 록음악을 쓴 답변이 보여서 ‘오호? 얘가 이런 음악을
듣는구나.’ 하면서 조금 다른 발견을 했던 기억은 있지만 아쉽게도 책에 관해서 그런 짜릿한 기억은 없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책 때문에 사람에게 처음 ‘앗!’하는 전율이 받았다. 몹시도 무더웠던 여름, 야간자율학습을 기다리던 그
저녁에 한 친구가 1분단 맨 뒷자리에 앉아 ‘문학과 지성사’에서 나온 시집을 읽고 있었다. ‘문지 시집!’이었다. 내 눈은 번쩍
뜨여 책의 제목을 찾았다. 놀랍게도 ‘황지우!’였다.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를 읽고 있던 그 친구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였다. 그때까지는 그다지 말을 섞어본 적도 없는 아이였는데, ‘너 황지우 시집 읽는구나?’하면서 쪽지를 내가 먼저
보냈던 것 같다.
요즘 아이들은 대입 수능 문학 시험 때문에 황지우 시를 배우기도 하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수능이
실시 된지 얼마 되지 않았던 터라 시험에 ‘황지우’가 나올 일은 제로에 가까웠다. 때문에 그 저녁에 황지우 시집을 읽고 있다는
사실은 거의 자발적인 읽기였다고 볼 수 있다. 그때부터 그 친구와 편지를 주고 받는 사이가 되었다. 알고 보니 이 친구는 예상대로
역시나 꽤 많은 문학 작품과 시를 읽어왔었고, 황지우는 좋아하는 작가 중 한 사람이었단다. 그때 그 아이는 당시 국어국문학으로
나름 유명한 모 대학을 가고 싶어했고, 결국 고3 말미에 그 꿈을 이루었다.
편지로 주고 받은 내용은 주로 책
이야기였다. 서로 뒤질세라 이 작가 저 작가, 이 작품 저 작품 소개하기 바빴던 것 같다. 대학 진학 이후 서로 편지 왕래가
흐지부지 되면서 그 관계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지만 지금 생각해도 그 친구와 책 이야기를 했던 그 순간들은 굉장히 즐겁고 흐뭇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요즘도 황지우 시를 보면 그 친구가 자동적으로 떠오른다.
사회에 나와서도 책을 좋아하고, 꾸준히
읽는 사람들을 보면(특히 읽는 책 목록이 내가 보기에 매력적일 수록) 전에는 없던 호감이 생기기도 하고, 때로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이기도 한다. 특히 그 사람이 사랑해 마지 않는 대상이 소위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전혀 쓸모 없다는 ‘문학’일 경우에는
더 그렇다. 물론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해서 그 사람 자체가 훌륭한 인물이라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어떻게 보면 더 괴팍하고
고약한 성미를 가진 나르시시스트일 가능성이 더 많다. 그럼에도 나는 책을 든 그 손을 보면 황지우 시집을 들고 있던 그 친구를
봤을 때의 그 느낌이 고스란히 되살아난다.
샤를 단치의 <왜 책을 읽는가>를 서점에서 발견했을 때도 그런
느낌이 들었다. 사람이 아닌, 책이라는 물건인데도 그런 기분에 휩싸였다. 열아홉 그때, 황지우 시집을 읽던 그 친구에게 불쑥
말을 걸어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던 것처럼, 이 책을 보는 순간 어찌할 줄을 몰랐다. ‘이런 책은 도서관에서 빌려 읽어도
되는데…..’하다가도 ‘아니야 내용이 너무 궁금해! 도서관에 들어올 때까지 언제 기다려?’ 이런 갈팡질팡 속에 결국은 사버린 책.
그리고 집에 와서 허겁지겁 읽은 이 책.
이 책을 읽다 보니 바로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황지우 시집 때문에
친해진 친구. 책 이야기로 수다 떠느라 무척이나 즐거웠던 그 친구 말이다. 저자 샤를 단치는 나이도, 국가도 나와는 전혀 어울릴 수
없는 저 먼 나라의 사람인데 단지 책에 미쳤다는(분명 나보다도 훨씬 미친) 점 때문에 어쩐지 이야기가 통하는 기분이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과 밤새 책 이야기만 한 뿌듯한 기분이랄까.
어릴 때부터 독서광이었기 때문에 작가가 된 그는 책에 미친
사람들의 심리를 그 누구보다 잘 안다. 뿐만 아니라 광적인 독서가 사람에게 주는 피폐함까지도. 그럼에도 독서를 멈출 수 없는
사람들의 어쩌면 병적인 그 심리까지도. 샤를 단치는 자신이 독서광이기 때문에 무턱대고 독서하는 사람들을 예찬하지도 않는다.
독서광들의 뒤틀리고 괴팍한 모습까지도 가차없이 꼬집는데 그 내용이 무척 공감되면서 낄낄대고 웃지 않을 수가 없다.
“난 수영을 좋아한다. 좋아하지만 짜증난다. 짜증이 나면서도 좋아한다. 사람들은 이런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사랑하는 대상 앞에서 완전히 무릎을 꿇기를 원한다. 거짓말을 좋아하는 본성 때문이다. (194쪽)”
샤를 단치는 좋아하는 작가임에도 어떤 부분에서는 짜증이 나기도 한다면서 위와 같은 이야기를 꺼낸다. 위 구절을 읽으면서 엄청나게
공감했다. 좋아하면서도 짜증이 나는 그 심리를 이 사람은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좋아하면서도 짜증이 날 수 있다는 걸
보통, 사람들은 잘 이해하지 못한다. 오히려 좋아하는데 어떻게 짜증이 날 수 있느냐고 반문하다. 하지만 좋아하는데도 그 대상에
어떤 부분에서는 짜증이 날 수 있다! 이 구절을 읽을 때는 책을 좋아하는 친구와 수다를 떨다가 서로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있어서 박수 치며 호들갑을 떨면서 낄낄대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가끔 나는 어릴 때부터 괜히 책을 많이 읽어서
인생을 피곤하게 산다고, 책에 빠져 살아왔던 인생을 후회하기도 했다. 요즘도 종종 한다. 책을 많이 읽지 않았다면, 세상에서
도피한 채, 책으로만 파묻히지 않았다면 인생이 좀 더 평범하게, 쉽게 살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한다. 그럼에도 책에 대한 애정을
끊지 못한다. 샤를 단치의 <왜 책을 읽는가>는 이런 사람들에게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책을 읽을 수 밖에 없지
않겠소?’하며 작은 위안을 주는 것 같기도 하다.
책은 결코 삶과 대립하지 않는다. 진지하고 난폭하지 않은 삶, 경박하지 않고 견고한 삶, 자긍심은 있되 자만하지 않는 삶, 최소한의
긍지와 소심함과 침묵과 후퇴로 어우러진 그런 삶이다. 그리고 책은 실용주의가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초연히 사유의 편에 선다.
독서는 그 어느 것에도 봉사하지 않는다. 그래서 독서가 위대한 것이다. (257쪽)
왜 책을 읽는가? 내게 독서란 걷는 일과 같다. (11쪽)
문학은 실용성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유일한 글쓰기 형태이다. (13쪽)
독서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우리 내면의 은밀한 것들을 드러낸다. 추잡한 것, 소중한 것, 혹은 약한 것들까지. 아무 말 없이
문장 속에 온몸을 파묻고 책과 단 둘이 마주하게 되면, 내 안의 정직하지 못하고 거친 모습, 화내기 좋아하는 바보 같은 모습들은
감쪽같이 사라져버린다. (22쪽)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는 이기심에서 비롯되지만, 결국 독자가 얻게 되는 것은 이타심이다….. 펼쳐지지 않은 책은 존재할 뿐 살아 있지 않다. (39쪽)
처음엔 등장인물을 사랑하고, 이어서 작가를 사랑하게 되며, 결국엔 문학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44쪽)
우리는 흔히 책을 읽는 사람들이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책을 읽는 바보들도 없지 않다. (52쪽)
그러나 독서하는 동안엔 오직 책과 독자 단 둘뿐이다. 때때로 독서는 이 둘의 고독한 전쟁이기도 하다. (56쪽)
독서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고립되는 심각한 행위다. 심지어 나는 책을 읽는 이유가 스스로를 고립시키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103쪽)
작가가 될 사람은 어렸을 때부터 독서에 대해 타는 목마름이 있기 마련이다. 이는 어쩌면 사랑에 대한 탐욕과도 비슷하다. 방실방실 웃는 귀여운 아가가 가짜 허기에 사로잡혀 먹을 것에 집착하는 모습 같은 것이다. (217쪽)
유년기에 광적으로 독서를 많이 하는 사람은 필경 작가가 될 운명이다. 만일 그 꿈이 실현되지 않았다면 그 이유는 단순하다. 그
위대한 독자가 작가의 꿈을 접은 것이다. 그는 결국 꿈은 잊어버리고 계속해서 독서광으로 남을 것이다. 그가 슬퍼하지만 않는다면 이
또한 아름다운 일이다. 내 경험에 의하면, 작가가 되지 못해 씁쓸해하는 위대한 독자들보다는 자신의 글이 읽히지 않아 슬퍼하는
고만고만한 작가들이 훨씬 많다. (217쪽)
나는 대중 앞에서 내 책이 낭독되는 것을 주저한다. 내게 문학이란 소리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학은 침묵과 침묵 아닌 것 사이에 놓여 있는 하나의 사건이다. 다 읽은 책은 웅변적인 침묵으로, 읽는
중에 있는 책은 너그러운 침묵으로 존재한다. 특히 시가 그렇다. (227쪽)
대담이란 마치 테니스와 같아서 응대하는 사람이 있을 때 그 품질도 좋아지는 법이다. (23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