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 작가로 더 유명한 슈테판 츠바이크의 문학 작품을 처음 읽은 것은 문학동네 버전의 <체스 이야기, 낯선 여인의 편지>를
통해서이다. 중편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두 개의 이야기는 무척 흥미진진했고, 이 작가의 이름을 순식간에 ‘구할 수 있는
작품이라면 다 읽어볼 것’이라는 문장과 동일시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남긴 유일한 장편이라는 <연민 Ungeduld des
Herzens (1939)>을 읽게 되었는데…. 탄성이 나올 뿐이다. 이 작품은 정말 어마어마하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유명한 정신분석학자인 프로이트와 친구였다는데, 그래서 그런 걸까? 인간의 심리 분석에 이토록 탁월할 수가 있을까
싶어진다. <체스 이야기, 낯선 여인의 편지>처럼 비교적 짧은 분량의 작품에서도 내기에 집착하는 사람, 애정에 집착하는
사람의 심리를 놀랍도록 묘사했던 그는 장편 <연민>에서는 끔찍할 정도로 섬세하게 인간의 심리를 그리고 있다.
현미경으로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 본다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빌어먹을 연민은 양면이 모두 날카로운 칼입니다. 그걸 잘 다룰 줄 모르는 사람은 연민에서 손을, 아니 마음을 놓아야 합니다. 연민은
모르핀과 같습니다. 처음에만 환자를 위한 위로이고 치료제이며 약이 되지요. 그러나 이걸 정확하게 조제할 줄 모르고, 적당한
시기에 멈출 줄 모르면 독약이 되고 맙니다. 처음에 한두 번 맞으면 통증을 진정시키고 마비시켜 기분을 좋게 만들죠. 그러나 육체나
영혼이나 우리의 기관은 불행하게도 놀라운 적응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경이 더 많은 양의 모르핀을 원하듯 감정도 점점 더 많은
연민을 원하게 되고 결국에는 당신이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됩니다….. 우리는 연민을 제대로 관리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무관심보다도 더 나쁜 해를 끼치게 됩니다.” (222~223쪽)
이
책의 표지에는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지독한 감정: 연민’이라는 문장이 새겨져 있다. 이 문장으로 책을 읽는 사람들은 대충 어떤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내용이 펼쳐질 수도 있고 혹은 전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빼곡한 글씨로 장장
4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이 작품은 지루할 틈이 없이 숨막히게 여러 가지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 작품을 읽기 전 심농의 추리
소설을 읽었는데, 그 작품보다(무려 추리 소설보다!) <연민>은 훨씬 더 긴박감이 느껴지고 흥미진진했다. 400페이지의
책을 단 이틀 만에 읽어버렸다. 뒤에 펼쳐질 이야기들이 너무나도 궁금해서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있어 동정심이나 연민과 같은 감정은 꼭 갖추고 있어야만 할, 굉장히 좋은 감정, 종종 한 사람의 ‘인간성’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앞선 문장처럼 ‘연민’을 잘 관리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발생할 수 있는지 이 작품은 처절하게
보여준다. 누군가에게 연민을 느끼고 동정을 베풀며, 그런 자신의 모습에서 ‘훌륭한 면’을 발견하고 스스로 감동받고 감탄하고
행복해지는 인간. 그 연민에 기대고 의지하는 사람을 보며 마치 ‘신이 된 듯한‘ 기분을 느끼기도 하는 인간. 타인의 눈에 비칠
자신의 ‘좋은 모습’을 상상하며 허영에 차는 인간. 그러나 어느 순간 모든 것이 부담스러워 도망치고 싶어지는 인간, 그러면서도
우유부단함 때문에 도망치지 못하는 인간. 이런 인간의 모습이 <연민>에는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자신이
시작한 ‘감정’에 어느 정도까지 책임을 져야 할까? 하는 묵직한 질문도 남는다. 연민이든 동정이든 사랑이든 어떤 감정의 신호를 또
다른 타인을 향해 보냈다면, 그 감정은 이제 순순히 ‘나만의 것’으로 남지 않는다. 이럴 경우 어디까지 그 감정의 신호를 보낸
일에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일까? 쉽게 답을 내릴 수가 없다. 주인공의 행동에 ‘이제 그만!’하고 소리를 치다가도 ‘나라면?’하는
생각을 해보면 나 역시 쉽게 벗어날 수 없었으리란 생각이 든다. 누군가를 연민에 찬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것, 동정을 베푼다는
것…. 시작은 쉽지만 끝까지 쉬운 일이 아니다. ‘책임’의 문제가 남기 때문이다.
슈테판 츠바이크가 자살하지 않고 더
많은 장편을 남겼다면 어땠을까, 싶은 안타까움이 남는다. 사람 마음을 현미경으로 들여다 보고 싶은 이들이라면 꼭 한 번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아니, 그렇지 않더라도 츠바이크의 작품은 엄청나게 흥미진진하다.
나는 이 세상에 나쁜 일이 생기는 것은 악이나 야만적 행위 때문이 아니라 거의 언제나 우유부단함 때문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깨닫기 시작했다. (23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