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 갔다. 이 책 저책 둘러보다 습관처럼 러시아 문학서가 앞에 섰다. 그 가운데서도 또 습관처럼 안톤 체호프의 작품이 꽂혀
있는 곳 앞에서 눈길을 이리저리 돌려본다. 우리나라에 번역되어있는 체호프의 단편들은 거의 다 읽었다고 생각하는데도 뭔가 또 새로운
게 있지 않을까 싶어 이렇게 늘 그 앞을 기웃거린다.
‘응? 이 책은 뭐지?’ 어떤 책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뽑아
들어보니 빨간 양장본에 안톤 체호프의 사인만 덩그러니 그려져 있다(도서관 책은 겉표지는 떼어내기 때문에). 표지를 넘기고 안을
보니 책 제목은 <사랑과 욕망의 변주곡>이란다. 어쩐지 내가 아는 체호프의 작품들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 제목이라는
느낌이다. 게다가 부제는 ‘안톤 체호프의 에로티시즘 단편선’- 체호프와 에로티시즘이라?
목차를 훑어보니 ‘사랑에
대하여’ ‘개를 다니고 다니는 부인’이 수록되어 있다. 나머지 제목들은 조금 생소했다. 하지만 체호프가 워낙 많은 단편을 남긴
작가라 내가 읽었어도 제목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있으리라 싶어진다. 첫 번째 단편을 서서 읽어보니 지금까지 읽어본 적 없는
작품이었다. 이미 읽은 작품이 많으면 책을 빌려 집에 갔을 때 좀 낭패이므로 도서관에서 읽어보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앉은 자리에서 이 책 한 권을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을 제외하고(이 작품은 얼마 전에 또 읽었던 지라 그날은 읽지 않았다)
‘사랑에 대하여’까지 포함해서 쭉 읽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다행스러우면서도 기쁘게도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과 ‘사랑에
대하여’를 제외하고는 모두 국내 초역된 작품들이었다.
‘에로티시즘 단편선’이라고 붙이기에는 살짝 과한 감이 좀
있다. 그러나 이 책 담긴 거의 모든 단편이 남녀 간의 사랑이나 결혼 그리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욕망이나 배신 등을 다루고 있다.
그러니까 <사랑과 욕망의 변주곡>이라는 제목은 체호프와는 어쩐지 잘 어울리지 않지만 이 안에 담긴 작품들과는 꽤 잘
어울린다고 볼 수 있다.
이 책에 실린 여러 작품들이 하나같이 인상 깊었지만 그 중에서도 첫 번째 작품인 ‘바다에서 - 한 선원의 이야기’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사람은 대개 추악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솔직히 말해 이따금 선원은 세상 그 누구보다도 더 추악하고, 심지어 가장 추잡한 짐승보다도 더
추악해진다. 짐승은 본능을 따르기 때문이라고 변명이라도 할 수 있다. 인생을 잘 모르는 내가 틀린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선원들에겐 그 누구보다 자신을 미워하고 욕할 이유가 많은 것 같다. 언제고 돛대에서 떨어져 파도 속으로 영원히 사라질 수 있고,
물속에 빠지거나 거꾸로 떨어질 때만 신을 아는 사람들에게 도대체 뭐가 필요하겠는가?' (9~10쪽) 위와 같은 문장을 읽는 순간 이미, 담백하면서도 인생의 쓸쓸함과 우수, 비애를 세밀하게 표현한 그 문장에 빠져들었다.
이
작품은 젊은 선원이 타고 있는 배에서 일어난 일을 그리고 있다. 그가 타고 있는 배에는 ‘신혼부부의 방’이라고 부르는 선실이
하나 있다. 그런데 이 방은 (당연히 선실 안에 있는 사람은 모르게) 안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구멍이 2개 있다. 선원들은 이
선실에 남녀 승객이 탔을 때 심심풀이(?)로 몰래 훔쳐보고는 했다. 이 날은 젊은 선원이 구멍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차례였다.
그가 이미 갑판 위에서 보았던 목사와 그의 젊은 아내가 이 방에 머물게 되었다. 젊은 선원은 구멍을 통해 이들을 보면서 뜻밖에도
차마 보지 못할 광경을 보게 된다.
이 짧은 단편 하나에서도 체호프는 여러 가지를 말한다. 한없이 행복해 보이는 어떤
사람들(목사와 그의 아내)의 삶을 들여다보는(훔쳐보거나 혹은 관찰하는) 젊은 선원. 그 선원은 스스로 세상에서 가장 추악한
사람들 중 하나라고 여기는 ‘선원’ 무리 중 하나다. 자기 자신이 삶의 가장 비루한 지점을 살고 있다고 느낀다.
그는 ‘구멍’을 통해 타인의 은밀한 사생활을 엿보는 행위가 추잡한 짓임을 알면서도 그와 함께하는 선원 무리의 분위기 때문이랄까,
아니면 거부할 의지조차 없이 그저 무기력하게 그 구멍 앞에 서게 된다. 그런데 그런 그가 구멍을 통해 들여다 본 타인의 삶이란
도무지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그는 어쩌면 그들의 삶이 자신의 삶보다 더 비속하고 저급할지도 모르는 것임을 깨닫는다.
아니면 겉보기와는 달리 모두가 마찬가지로 비루하게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게 삶이라고….
‘한 선원의
이야기’의 화자는 젊은 선원이다. 그러나 선원의 눈을 통해 보이는 여자의 삶(목사의 아내의 삶)도 중요하게 그려진다.
<사랑과 욕망의 변주곡>에는 이렇게 다양한 여자들이 등장한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지위와 권력을 마음껏 휘두르는
여자, 남편을 속이면서 욕망의 충실한 삶을 사는 여자, 돈이 많거나 신분이 높은 남자들의 노리개가 되는 여자 등등. 그녀들의
삶은 행복하기도 하고 불행하기도 하고 절망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그 자체로 삶의 여러 가지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어느 순간은
조용히 웃음 짓게 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쓸쓸하면서도 씁쓸하고, 때로는 서글프면서도 애잔한 그런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