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 사랑 세계문학의 숲 32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음, 김석희 옮김 / 시공사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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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어떤 사람을 자기 자신의 완벽한 이상형으로 만드는 일은 가능한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이상형'이라고 한다던가, '이상형'에 가깝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사실 그런 일은 무척 드물 것이다. 때문에 조금은 혹은 많이 자신의 이상형에서 부족한 상대방을 이상형에 가깝게 만드는 일이 노력으로 가능할까?

예를 들어 어떤 한 인간의 외모가 그 또는 그녀가 생각하는 완벽한 이상형에 가깝다고 하자. 그 또는 그녀는 그런 외모를 지닌 사람 A에게 우선 외모를 보고 반한다. 그러나 A의 외모 외에 다른 지점들은 그 또는 그녀에게 완벽하게 부합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성격이나 말투, 가치관, 옷차림, 생활 습관, 지식의 정도, 문화적 취향의 차이 등등 여러 면에서 외모가 주는 호감과 마찬가지로 반드시 비례하리라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오히려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단순히 외모만으로 어떤 한 사람을 사랑하기란 불가능한 게 아닐까? 그렇다면 이런 생각도 해 볼 수 있다. 외모가 완벽하게 이상형에 가까운 사람을 만나, 그 또는 그녀를 나의 취향에 맞게 완벽하게 ‘개조’ 혹은 ‘재교육’하는 것이다. 마치 어떤 아바타 캐릭터를 창조하고 키우듯이 말이다.

여기, 바로 그런 사람이 있다. 남자의 이름은 ‘가와이 조지’. 남자는 어느 카페에서 여급으로 일하고 있는 소녀를 우연히 보게 된다. 소녀의 나이는 열 다섯. 이 남자는 스물 여덟이다. 남자는 ‘나오미’라 불리는 소녀를 보자마자 호감을 느끼게 된다. 두어 달 정도 소녀를 만나면서 소녀와 가까워 진 남자는 그녀에게 자신의 계획을 털어놓는다.

남자는 이 소녀를 ‘키워서’ 괜찮은 여자가 된다면 아내로 맞이할 생각을 하고 있던 것이다. 남자는 소녀에게 지금부터라도 괜찮다면 자신과 함께 살면서 하고 싶은 것을 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한다. 카페 여급으로 별다른 희망 없이 살아가느니 남자와 함께 살아가며 이런 저런 경험을 해볼 생각에 소녀는 선뜻 승낙을 한다. 남자 또한 소녀가 어떻게 자랄까 내심 기대되고 호기심으로 가득하게 된다.

한편 소녀의 삶에 별다른 기대도 간섭도 없던 소녀의 가족들은 조지의 제안을 쉽게 수락한다. 그때부터 열 다섯 소녀와 스물 여덟 남자의 동거는 시작된다. 그들은 사람들과 동떨어진 곳에 집을 얻어 그들의 ‘동화 속의 집’에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조지는 회사에 출근을 하고 나오미는 평소 배우고 싶다던 영어와 음악을 익히러 일주일에 몇 번씩 외출을 한다.

그렇게 소녀의 성장 과정을 지켜 보며 남자는 황홀해 한다. 점점 자신의 관능을 자극하는 소녀의 성장 자체가 경이로움이다. 과연 이 남자는 그의 바람대로 소녀가 어른이 되면 그녀와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할 수 있을까? 그런데 어쩐지 이 소녀, 보통이 아니다. ‘친구’라고 하면서 주변에 몹시도 많은 남자들이 그녀 곁에 머문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쥐락펴락하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조지’만 모를 뿐 책을 읽는 사람들은 ‘조지’또한 ‘나오미’에게 그런 남자들 중 하나일 뿐이라는 걸 단박에 알 수 있다.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미친 사랑>은 소설 도입부부터 ‘우리 부부의 이야기를 한다’고 언급되어 있다. 때문에 조지와 나오미가 부부로 맺어졌음을 독자들은 이미 알고 이야기를 읽게 된다. 그러나 부부가 되기까지의 과정이 그리 순탄하지는 않으며 ‘부부’라고 불리는 이 관계가 그래서 정말, 행복할까?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물론 조지와 나오미는 행복할지 모르겠으나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과연 이런 관계 속에서 얼마나 행복할지 의문이 든다. 물론 그렇기에 <미친 사랑>이라 하겠지만 말이다.

앞서 언급했듯 나오미에게는 너무나 많은 남자들이 항상 그녀 주변을 맴돈다. 나오미는 그런 그들을 뿌리치지 않는다. 오히려 즐기고 이용한다. 대표적으로 이용당하는 사람이 이 작품의 화자인 ‘가와이 조지’임을 이 책을 읽는 이들은 알고도 남으리라. 그녀 입장이라면 ‘조지’같은 남자를 이용해 얻을 수 있는 것을 얻고 다른 젊고 매력적인 남자들과 즐기는 것을 이해할 만도 하다.  

그런데 이 남자, ‘조지’는 그런 그녀의 부정함, 부도덕함 혹은 뻔뻔스러움을 알면서도 쉽게 뿌리치지 못한다. 그러기엔 그녀의 아름다움에 심각하게 도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미친 사랑’도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까? 혹 단순히 미(美)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아닐까?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조지’의 입을 통해 여자의 아름다움, 그리고 그 아름다움에 빠져 허우적대는 한 남자의 모습을 밀도 있게 그려 낸다.

사랑에 있어서 믿음이랄까, 신의.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상대방을 배신하지 않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로서는 이들의 관계를 섣불리 이해할 수는 없었다. 아니 ‘조지’ 이 남자의 마음이 말이다. 자신을 이미 예전에 배신한 사람을, 그 후에도 계속해서 그토록 기만하고 배신을 일삼는 여자를 단지 미치도록 아름답다는 이유만으로 어떻게 계속해서 사랑할 수 있을까?

게다가 상대방에 대한 믿음이 산산조각 났는데도 그 관계를 계속 붙잡고 유지해야만 할 이유가 과연 어디에 있을까? 마음을 가질 수 없다면 육체라도 갖겠다는 무모한 집착이 아닐까? 그 상대가 ‘너무나 아름답기’때문에 과연 그럴 가치가 있을까?

조지의 모습이 점점 마조히스트적으로 변해 간다는 점에서 이 작품을 읽다 보면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의 <모피를 입은 비너스>가 떠오르기도 한다. <미친 사랑>의 ‘조지’, <모피를 입은 비너스>의 ‘제베린’ 이 두 남자는 아름다움에 눈이 멀어 자신을 하찮게 대하는 상대방에게서 벗어나지 못한다.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사랑에 빠진 인간에게는 누구에게나 이런 모습이 있으리라. 그러기에 이런 작품들이 수십 년이 흘러도 계속해서 읽히는 게 아닐까. 그럼에도 이 눈 먼 사랑에 그저 안타까운 마음이 들 뿐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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