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일즈맨의 죽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8
아서 밀러 지음, 강유나 옮김 / 민음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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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일어나는(그러나 한 번 일어나면 엄청난) 대자연이 주는 공포와 달리, 비록 미세할지라도 인간의 삶은 태어나자마자 공포와 불안을 내포한다는 생각이 든다. ‘태어나자마자 썩어가기 시작’한다는 노래 가사도 있듯이, 삶의 시작은 곧 죽음으로 가는 길이라는, 삶이 주는 태생적인 공포. 게다가 결국 그렇게 죽고 말 것인데, 죽기까지 어떻게 ‘먹고 살아야’하는지에 대한 끊이지 않는 불안과 공포. 아주 유복한 환경에서 태어나 ‘먹고 살아야’하는 일에 대한 불안이 없는 특수한 환경의 몇몇 인간을 제외하고 이 지구의 인간은 모두 이런 ‘불안’을 안고 살아갈 것이다.

아서 밀러의 희곡 <세일즈맨의 죽음>은 바로 그런 현대인의 불안과 공포가 절절하게 녹아있다. 그렇기에 이 작품이 1949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되자마자 엄청난 화제를 불러일으켰고, 현재까지 전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공연되고 사랑받는 미국의 대표적인 희곡으로 자리 잡은 게 아닐까. <세일즈맨의 죽음>은 공간과 시간을 초월해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잠재된 ‘먹고 사는 일에 대한 불안’을 탁월하게 표현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우리 나이로 치면 환갑을 넘긴 윌리 로먼은 세일즈맨으로 30년이 넘게 일했다. 지금도 일하고 있지만, 여전히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있다. 나이 들어 운전하기 어려운 지경인데도 매일 무엇인가를 팔고자 차를 타고 집을 나선다. 한때 잘나가던 세일즈맨이었지만 그의 현재는 초라하다. 성공하지 못한 자신의 인생을 보상받기라도 할 생각으로 집착했던 두 아들은 백수건달이나 다름없다. 특히 그토록 사랑했던 첫째 아들 ‘비프’와는 어디서부터 꼬였는지 만나기만 하면 싸움뿐이다. 윌리는 이런 초라한 현실을 잊고자 자꾸만 찬란했던 과거에 집착한다. 과연 윌리 로먼과 그의 가족에겐 그가 꿈꾸듯 더 나은 미래, 희망이 있을까?

<세일즈맨의 죽음 Death of a Salesman>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작품은 비극이다. 그런데 그 비극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대단히 탁월하다. 윌리의 환상을 통해 나타나는 찬란했던 과거와 남루한 현재의 적절한 대비, 이웃이자 친구인 찰리와 그의 아들 버나드의 성공한 삶과 대비되는 윌리 로먼 가족의 초라한 현실, 아들 비프와 아버지 윌리의 갈등과 그 갈등의 원인인 된 비밀 등이 차례로 드러나면서 극은 탄탄하게 전개된다. 그다지 길지 않은 분량의, 한정된 공간 안에서 펼쳐지는 희곡임에도 그 안에서 전달하는 주제와 인생에 대한 통찰력은 묵직하다.

‘저는 이 회사에서 삼십사 년을 봉직했는데 지금은 보험금조차 낼 수 없는 형편입니다! 오렌지 속만 까먹고 껍데기는 내다 버리실 참입니까. 사람은 과일 나부랭이가 아니지 않습니까!’ 와 같은 윌리의 대사에서는 자본주의 사회의 참혹한 현실에 대한 비판도 엿보인다. 대공황 이후 ‘먹고 사는 일’에서 벼랑 끝에 내몰린 한 가정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세일즈맨의 죽음>은 지금 이 땅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매일 일해도 가난함을 벗어날 수 없는 워킹푸어들이 넘쳐나고, 그렇게 회사에서 일해도 나이 들면 언제 폐기처분될지 모르는, 그래서 미래는 더 암담하기만 한 직장인들의 삶…. 그 불안과 공포를 잠시라도 잊고자 ‘지르고’ 또 ‘질러보지만’ 돌아오는 것은 카드 값과 카드 할부가 끝날 때쯤이면 고장 나기 일쑤인 전자제품에 둘러싸인 그런 삶. 그 삶이 60년 전 작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린다 : 여보 인생은 버리며 사는 거예요. 항상 그런 거지요. (14쪽)

비프 : 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육칠 년이나 뭔가를 해보려고 애썼거든. 물품 배송부 직원, 세일즈맨, 이런 저런 일들. 그냥 하찮은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었지. 뜨거운 여름날 아침에 전철을 타고, 재고를 챙기고, 전화를 하고, 아니면 사고팔고 하는 것에 너의 온 인생을 바친다고 생각해 봐. 진짜 바라는 것은 셔츠를 벗어 던지고 야외에서 일하는 건데 고작 두 주짜리 휴가를 위해 일년 중 오십 주를 죽어라 고생하는 거지. 그리고 언제나 네 옆의 녀석보다 한발 앞서야해. 그러나 여전히, 그게 네가 말하는 미래가 있다는 거지. (22~23쪽)

비프 : 모르겠어요. 좀 둘러보며 뭘 할지 봐야겠어요.
린다 : 비프, 평생을 둘러보며 살 수는 없지 않겠니?
비프 : 뭘 지그시 붙들고 있지를 못하겠어요. 어머니, 뭐든 죽 붙들고 있을 수가 없다고요.
린다 : 비프, 사람은 철새처럼 봄이 되면 왔다가 가을 되면 날아가는 게 아니란다. (62쪽)

윌 리 : 헤이스팅스 냉장고라니, 들어나 봤어? 내 인생에 한 번이라도 좋으니 고장 나기 전에 내 것으로 가져 봤으면 좋겠네! 만날 고물만 내 차지야! 막 자동차 할부가 끝나니 폐차 직전이지. 냉장고는 미친 듯이 벨트나 닳아 없애고 있어. 그런 물건들은 유효 기간을 정해 놓고 나오나 봐. 할부가 마침내 끝나면 물건도 생명이 끝나도록 말이야. (85~86쪽)

윌리 : 저는 이 회사에서 삼십사 년을 봉직했는데 지금은 보험금조차 낼 수 없는 형편입니다! 오렌지 속만 까먹고 껍데기는 내다 버리실 참입니까. 사람은 과일 나부랭이가 아니지 않습니까! (97쪽)

윌리 : 우습지 않아? 고속도로 여행, 기차 여행, 수많은 약속, 오랜 세월, 그런 것들 다 거쳐서 결국엔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더 가치 있는 인생이 되었으니 말이야. (117쪽)


-아서 밀러, <세일즈맨의 죽음>,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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