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의 키스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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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소설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아서 많이 읽지는 않았다. 국가 체제가 특수하다 보니 그런 상황 아래 탄생하는 문학작품도 왠지 어떤 종류일지 뻔해 보인달까. 체제를 찬양하거나(그런 작품은 사실 다른 나라에까지 소개될 리 만무하겠지만), 완전히 그 반대이거나. 아니면 아예 체제와 상관없는 이야기를 하거나. 옌롄커의 <레닌의 키스>는 어느 쪽일까. 이 작품을 쓰고 TV 책 소개 프로그램에서 옌롄커가 이 책을 언급했는데, 직업군인이었던 그가 군대에서 쫓겨났다고 하니, 어떤 작품일지 가히 짐작이 간다. 읽다 보면 체제 비판을 이렇게 해도 될까 싶을 만큼 독한 구석이 있다. 다른 설명 필요 없이, 중국 사회주의 체제의 ‘인민공사’를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는 어느 마을 이야기라고 하면 대충 감이 잡힐 것이다.

<레닌의 키스>라는 제목이 눈길을 끈다. 이 책의 원제는 ‘수활(受活)’이다. 이 제목 그대로, 한자를 병기해 우리말로 옮겨도 선뜻 그 의미가 다가오지 않는다. 그러니 원제 그대로 서구에 소개했다면 누가 알아들으랴. 물론 이 작품을 읽기 시작해 몇 장 넘기지 않고 ‘수활’의 의미가 나온다. ‘수활(受活)’ 즉, ‘서우훠’는 중국 북방 방언으로 허난성 서부 바러우산 사람들이 사용하는 단어이다. 즐거움, 향락 등의 의미로 쓰이지만 바러우산맥에서는 특히 ‘고통 속의 즐거움’ ‘고통 속에서 즐거움을 찾는다’는 뜻으로 쓰인다. 인민공사를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는 ‘서우훠’마을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책의 프랑스어판 번역자가 붙여, 유럽과 영미에도 소개된 <레닌의 키스>라는 제목도 꽤 그럴듯하다. 아니, 중국에서 왜 레닌인가? 싶을 수도 있는데 이 작품에서 레닌은 아주 큰 역할(?)을 한다. <레닌의 키스>는 이 두 가지 이야기, 즉 인민공사라는 거스를 수 없는 국가 체제를 벗어나려는 어느 마을과 ‘레닌’이라는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아주 상징적인 인물을 중심으로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서우훠마을은 좀 특이하다. 세 현이 교차하는 바러우산맥에 자리해 가장 가까운 마을과도 최소 십 여리가 떨어져 있는 이 마을은 명나라 때 조성, 맹인과 절름발이, 귀머거리들이 잔뜩 모여 살기 시작했다. 장애인이 아닌 장성한 사람들은 짝을 찾아 모두 외지로 나갔고, 여자들 또한 전부 외지로 시집을 갔다. 그러다 보니 바깥세상의 장애인들은 마을로 들어오고 마을의 ‘온전한 사람들’은 모조리 밖으로 나가, 현재는 장애인들만이 모여 사는 마을이 되었다. 수백 년 동안 이런 상황이 이어졌지만 마을 사정이 이렇다 보니 어느 군, 어느 현에서도 서우훠마을을 수용하려 들지 않았다. 한마디로 서우훠는 세상에서 잊힌, 세상 밖의 마을이었다.

그런데 이 마을에 ‘마오즈’라는 전설적인 인물이 나타나면서 상황이 급변한다. 현재 할머니가 된 마오즈는 서우훠마을의 지도자이자, 정신적인 지주나 다름없다. 그런데 이런 그녀에게도 아픈 기억은 여럿 있다. 마오즈는 열한 살에 홍군이 되었고, 홍군 제4방면군의 전사가 되어 산길을 가다 계곡으로 떨어지는 바람에 왼쪽 다리가 부러져 지팡이 없이는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 바러우산맥을 지나다 한 석공에게 구조되어 그가 살던 서우훠마을로 함께 오게 된 것이다. 그 석공과 결혼해 이 마을에 정착하지만 혁명에 참여했던 그녀는 이 궁핍한 마을에서 숨죽이며 사는 세월이 도무지 성에 차지 않는다. 세상과 단절된 채 농사만 짓던 마오즈는 어느 날 다시 혁명의 바람이 불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자신이 마을을 이끌어 혁명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앞장서서 인민공사에 가입한다. 그런데 그렇게 젊은 시절을 보내고 이제 칠순 노인이 된 그녀는 왜 이제는 인민공사를 퇴사하겠다고 애를 쓰는 것일까. 게다가 거의 반평생을 그 일에만 매달린 것 같다. 이 책의 한 가지 재미는 이렇게 서우훠마을과 마오즈 할머니에 얽힌 사연을 따라가면서 중국의 체제가 지닌 모순을 적나라하게 들여다보는 점에 있다.

마오즈 할머니와 대척점에 있는 인물로 ‘류잉췌’, 즉 류 현장이 있다. 그는 중국에 대기근이 닥쳤던 1960년에 태어났으나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고아이다. 오갈 데 없는 그를 사회주의교육학교 선생이 양자로 입양하면서, 그는 철저히‘사교의 아이’가 되어 어릴 적부터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경제, 정치, 철학 등의 교육을 받으며 자란다. 양아버지가 알려준 출세의 비밀을 깨우친 그는 온갖 수단을 써서 관료의 길에 접어들어 빠르게 현장이 된다. 이제 그는 더 큰 꿈을 꾼다. 여전히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솽화이현. 그곳에는 공장도 광산도 없다. 그런데 산이 좋고 물이 맑으니 관광산업을 발전시키자는 것이 류 현장의 생각이다. 베이징에는 마오주석 기념관을 구경하러 가는 사람이 많지 않은가. 그러니 우리도 자금을 마련해 러시아에 가서 레닌의 유해를 사오는 것이다. 레닌의 유해를 솽화이현 훈포산에 안치하면 현의 관광산업은 폭발적으로 발전할 테고 현도 순식간에 부유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는 더 이상 일개 현장이 아닐 것이고 부위원장이나 부서기 정도도 아닌 대단한 인물이 될 것이다. 세계적인 풍운아가 되어 있으리라!!! 이것이 류 현장의 포부이자 참으로 원대한 계획이었다.

레닌의 유해를 사오는 이 엄청난 기금은 어떻게 마련할까? 뜻밖에도 류 현장은 서우훠마을 사람들의 특기랄까 신묘한 재주를 알게 된다. 그래서 그는 서우훠마을 묘기공연단을 조직해 세계 방방곡곡에 돌아다니며 공연을 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공연 입장 수입으로 레닌 유해 구매에 쓸 거액의 자금을 조달할 수 있겠다는 계산인 것이다. 아니, 그런데 서우훠마을은 장애인만 모여 산다는데 무슨 묘기인가 싶다. 이 마을에는 현재 주민 ‘백구십일 명 가운데 어른 아이 합쳐서 맹인 서른다섯, 귀머거리 벙어리 마흔일곱, 절름발이 서른셋. 한쪽 팔이 업거나 손가락 하나가 떨어져 나간 사람, 손가락 하나가 더 있는 사람, 키가 자라지 못한 사람 등 여기저기 불편하거나 모자라거나 불편한 사람들도 수십 명’이다. 그런 그들이 보여주는 묘기란 외다리로 빨리 달리기, 귀머거리 마 씨 귀에 대고 폭죽 터뜨리기, 외눈박이 외눈으로 바늘 꿰기, 앉은뱅이 아줌마 나뭇잎에 수놓기, 맹인이 예민한 귀로 소리 알아맞히기 등이다. 과연 이걸로 공연이 될까, 사람들이 몰려올까 싶은 걱정스러운 것 투성이다. 자, 이 묘기단이 그래서 흥행에 성공하는지 어떤지는 직접 보시라. 레닌의 유해를 사오게 되는지도.



이제 해방이 되어 공산당과 마오주석이 가장이 되었다고요, 집집마다 하나로 합쳐서 농사짓는 걸 호조조라고 불러요. 여러 호조조를 한데 합친 것은 합작사라고 한대요. 저는 우리 서우훠마을을 합작사에 가입시켜 각 가구를 하나로 조직한 후 함께 농사를 짓고 수확하며 양곡을 분배하게 할 생각이에요. 저는 서우훠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합작사에 가입해서 서우훠 사람들이 천당의 세월을 보낼 수 있게 할 거예요. (<레닌의 키스>, 227쪽)


한때 혁명을 꿈꾸고 현 정부의 여주석이나 현장이 됐을 거라 당차게 말하던 젊은 날의 ‘마오즈’- 그녀는 인민공사에 마을을 가입시킬 때 마을 주민들에게 천당의 세월을 약속했다. 그런데 할머니가 되어서는 반혁명주의자가 되어 인민공사 퇴사만을 자신의 남은 생의 가장 큰 과업으로 삼고 있다. 그 어느 현에도 속하지 않고, 정부와 국가에서 나 몰라라 하던 시절의 서우훠마을은 몸이 불편한 이들만 모여 살았어도 말 그대로 기쁨이 넘쳤다. 고통 속의 기쁨, 즐거움이랄까. 그런데 혁명을 거쳐 인민공사에 가입한 후 강철재앙, 대흉년, 문화대혁명 등의 풍랑에 휩쓸리며 서우훠마을 사람들의 삶은 이전보다 훨씬 고단해지기만 한다. 아니 처절하다시피 할 정도로 망가진다. 장애가 없는 ‘온전한 사람들’이 마을을 찾아와 수탈하고 마을 사람들을 괴롭히는 그 잔혹한 모습에는 아연해질 뿐이다. 그들을 과연 정말 온전한 이들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마오즈 할머니가 꿈꾸던 혁명의 이상은 그렇게 산산조각이 났다. 한때 사회주의 사상의 아버지라 떠받들어졌어도 죽은 레닌의 유해는 러시아에서도 처치곤란, 골칫거리이다. 그러니 중국의 일개 현장이 마을 관광산업을 위해 그의 유해를 유치하려는 야심까지 품지 않는가. 신해혁명, 5·4운동, 문화대혁명 등등 혁명으로 이어진 중국 근현대사. 그런데 혁명은 정말 중국 인민에게 천당 같은 세월을 살게 해주었는가? 서우훠사람들은 묻는다. “제가 평생 할머니 말씀 잘 들었잖아요. 하지만 좋은 세월이 한 번도 없었어요.”(203쪽), “그 천당의 세월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건지 설명 좀 해줘요.”(424쪽). 이 절규는 아마도 옌롄커가 중국에 묻고 싶은 말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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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12-04 17: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정치인들은 어디에서나 천당 같은
시절을 약속하지만 지상에 그런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덤으로 알려 주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레닌의 키스> 제목만 보고 대뜸
샀는데 이거이 분량이 제법인지라
어딘가에 내팽겨쳐 두었네요 이론.

발저의 <산책자>처럼 당장 찾아내서
주말 내내 읽고 싶다는 고런 생각이
잠시 동안 들었습니다.

역시 책은 사거나 빌려서 읽는 게
아니라 집에 있는 책을 읽는 거군요.

잠자냥 2020-12-04 17:31   좋아요 2 | URL
ㅎㅎㅎ 맞습니다. 이 지상에 어디 천당 같은 세월이 존재하겠습니까. ㅎㅎ

책 잘 찾아서 주말에 읽으실 수 있게 되길 바라겠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