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한 색깔에 관한 에세이를 써보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어떤 색을 머릿속에 떠올릴까. 빨강? 검정? 초록? 파랑? 아니면 흰색? 그리고 그 색에 대한 이야기들을 얼마나 풀어갈 수 있을까? 나 또한 머리로 특정한 색과 관련된 이야깃감을 떠올려본다. 내가 좋아하는 파란색? 카키색?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누군가에게 들려줄만한 이야기들이 그리 많지 않다. 검정? 그래 검정은 그래도 몇 자 끼적일 수 있을 것 같다.

검은색을 떠올리면 아무래도 상복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어째서 당신은 늘 검은 곳을 입고 다니는 거죠” 묻는 메드베젠코에게 “이건 내 인생의 상복이에요. 불행하니까요”라고 말하던 마샤. 체호프의 <갈매기>에 나온 그 유명한 대사처럼 검은색 옷이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복을 떠올릴 것이다. 나는 아직은 장례식에 갈 일이 그리 많지 않은 나이인데, 그럼에도 이십대의 어느 날, 지금보다는 낯설었을 장례식에 참석했던 날이 떠오른다. 한 여름이었고, 얇은 천으로 지은 검은 정장을 입었지만 장례식 내내 입고 있으려니 햇볕을 고스란히 흡수해 무척이나 더웠던 기억. 슬픔도 더위 앞에서는 무색해지던 그런 기억.  

어린 시절의 검은 고양이도 떠오른다. 그 시절의 나는 에드거 앨런 포의 <검은 고양이> 영향 탓인지 검은 고양이를, 아니 고양이 자체를 좋아하지 않았다. 무서워했다는 표현이 더 옳을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 집에는 완벽하게 새카만 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다. 마당의 쥐를 잡고자 할머니가 어디선가 데리고 온 녀석이었다. 그 녀석이 귀엽다면서 늘 끌어안고 다니던 동생과 달리 나는 녀석과 마당에서 마주치면 무서워서 도망가곤 했다. 어둑한 밤이면 까만 몸은 보이지 않고 마당 어디선가 번쩍 빛나던 그 날카로운 눈빛에 온몸이 오싹해지곤 했다. 변덕이 심했던 할머니가 어느 날 고양이는 아무래도 요물이라면서 내다버릴 요량으로 녀석을 데리고 집 밖으로 나가셨는데, 할머니보다 먼저 집에 도착해서 지붕 위에서 느긋하게 가르랑거리던 녀석. 그걸 보고 질겁하던 할머니. 나는 그 후로 검은 고양이는 역시 무서운 존재라고 그렇게 더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또……. 이렇게 이야기하다 보면 몇 가지 더 풀어갈 수 있을 만큼 검은색과 관련한 기억은 다른 색깔보다는 많은 편이다. 다른 이들도 그럴까? 적어도 알랭 바디우는 그런 것 같다. 아니 그이만큼 이토록 검은색에 관해 수많은 이야기를 풀어나가기도 어려우리라. <검은색 - 무색의 섬광들>에서 바디우는 ‘검정(le noir)’이라는 단어 앞에서 처음으로 자기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그의 철학적 사유로 빛나는 어려운 글들이 아니라서 더 친숙하다. 그는 먼저 군대에서의 춥고 ‘어두운 밤’에서 시작해 유년 시절의 깜깜한 방에서 이루어지던 어느 놀이를 추억한다. 손가락에 묻은 잉크와 그 잉크와의 씨름을 통해서 얻은 글쓰기의 기쁨을 노래하고, 스탕달의 <적과 흑>의 주인공 ‘소렐’로부터 자리 잡음의 욕망(검은 충동)과 자기도취의 욕망(붉은 충동)이라는 이중적 욕망, 초라한 삶의 충동과 과도한 죽음의 충동을 탐색하기도 한다. 때로는 ‘누아르 데지르(noir desir)’라는 이름의 1990년대에 절정의 인기를 누린 유명 록밴드로부터 사유를 시작하기도 한다. 어둠, 밤, 석탄, 잉크, 검은 개, 음흉함, 검은 대륙, 적과 흑, 블랙 유머, 검은 표범, 흑인……. 검은색의 찬란한 사유는 그칠 줄 모른다.

그의 글 한 편 한편은 깊이와 아름다움에서 찬탄을 불러일으킨다. 그중에서도 ‘잉크통’에 관한 사유는 책을 좋아하고 글쓰기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않을까.


더럽고 지저분한 재료의 검은색과 잉크통 속에 담가 놓으면 ‘잉크 덩어리’라 불리는 것을 쏟아내곤 하는 변덕스러운 펜의 마술을 통해 기적적으로 얻게 되는 기호들의 검은색. 분명하고 또 어쩌면 매력적일지도 모를 한 문장을 끈적한 잉크로부터, 그리고 그 덩어리들 사이로부터 굽이쳐 나가며 얻게 되는 기적! 그것은 재료의 검은색으로부터 떼어 낸 의미의 검은색이다. 이런 방식으로 학교는 읽기와 쓰기라는 필수적인 기초를 통해 변증법의 기초를 가르쳤던 셈이다. 무시무시한 검은 색과 흰색 간 변증법의 기본. 시험, 작문, 쪽지 시험, 보충 과제 등등 이 모든 학습의 함정을 생각해 보라. 처참하게 망쳤을 때 우리는 백지를 낸다고 말하지 않는가? 반대로 영감을 받으면, ‘여섯 페이지를 까맣게’만들었다고 거만하게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잉크통’, 22~23쪽)


어린 시절, 흰 종이 또는 새하얀 스케치북 위에 연필을 쥐고 무언가를 그려 넣은 기억, 삐뚤삐뚤한 숫자나 글자를 맨 처음 적어보았을 때의 그 희열과 놀라움이 고스란히 전해오는 것 같다. 알랭 바디우는 ‘펜, 필통, 불완전한 잉크, 종이, 강렬한 생각과 어쩔 수 없는 덩어리 사이에 놓인 아이의 고민 사이에서 이미 문자의 심급과 그 바탕의 얼룩이 보이며, 글쓰기를 지지하는 것의 미묘함이 드러난다’고 말한다. 그러고는 ‘오직 하얀색 위에 검은색이 있어야 하지만, 너무 많아서는 안 된다! 적당한 정도로 쓰여서 통제되고 형상이 부여될 때, 그것은 구원의 장소’가 된다고 이야기한다. 잉크 얼룩을 묻히지 않기 위해 애써가며 흰 종이 위에 적당히 써내려간 그 글, 그것들이 곧 ‘구원의 장소’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글이 곧 구원이라고 믿는 이들에게 이보다 더 아름다운 표현이 있을까. 이 글쓰기라는 행위는 곧 바디우가 보기에 ‘세상의 모든 것은 만만찮은 불변성을 지닌 하얀색 위에 세심하게 고안된 양으로 던져진 검은색에서 나온 결과’이며 그렇기에 ‘가능한 한 빨리 그것을 경험하지 않은 자는 아무것도 배울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과학자들은 검은색은 색상이 아니며 빛의 스펙트럼 분석에서 나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알랭 바디우는 ‘검은색은 모든 색체의 결여인 데 반해, 하얀색은 모든 색채의 불순한 혼합’이라고 말한다. ‘검은색은 색채의 무이며 하얀색은 색채의 전체’인 것이다. 바디우가 보기에 ‘검은색은 식별되지 않는 것들을 상징하며 결여와 초과를 상징’한다. 그러는 한편 ‘검은 물질은 이름이 잘못 붙여진 구멍처럼 과도한 빛의 어두운 결과물이 아니다. 한동안 하늘의 엄청나게 넓은 공간을 밝힐 수도 있고, 때로는 심지어 대낮에도 밝게 빛나고 남은 육중한 별이 폭발한 뒤 남은 검은 잔여물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발견될 수 없는 채로 사유에서의 결여를 메우는 데 열중’한다. 우리는 늘 알지 못하는 것을 검게 칠하는 경향이 있는데, 인식에서 결여된 무언가를 검은색으로 명명하여 사유에서 아무것도 결여되지 않도록 한다. 따라서 ‘우주론에서의 검은색은 하늘의 푸른색에서 대한 시적 대립항인 밤의 어둠이라기보다는, 사라진 무언가의 이름(블랙홀)이며, 모든 가능적 인식의 이름이자 그 무엇도 개념을 결여하지 않기 위해 존재해야만 하는 모든 것의 이름(검은 물질)’이다. 결국 바디우가 보기에 우주론의 검은색은 부재나 죽음보다는 사유에 대립하는 무언가를 의미하는 것이다.

내가 상복을 떠올렸듯이 바디우 또한 검은색은 당연히 우리에게 애도의 색상임을 지적한다. 그는 ‘빛의 부재, 꺼져 버린 삶, 최초의 오염으로서의 음흉한 생각이라는 이 끔찍하고 치명적인 역할에 수반하는 모든 것’을 이야기한다. ‘검은 휘장을 가득 휘감은 영구차 뒤로  검은 의복을 입은 사람들의 무리가 천천히 따라 걷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 마음들 속에 오로지 삶의 덧없음과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의 불가피한 사라짐에 대한 사색만이, 어두운 생각만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러나 이런 애도의 색상인 검은색에서 그는 한편으로는 ‘흔히 분위기를 살리는 농담의 바탕’ 즉 ‘블랙유머’가 비롯되기도 함을 지적한다. 삶과 죽음, 애도와 슬픔, 유머가 공존하는 검은색이다.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 검은색의 변증법, 의복, 문학, 대중문화, 물리학과 생물학 분야를 아울러 검은색을 사유하던 바디우는 마침내 인류학적 질문을 던진다. 인간의 검은색은 정말 어떤 색깔이냐고, 그것은 백인들의 발명품이지 않느냐고. “검은 고양이를, 악마의 음흉함을, 까마귀를, 검은 누더기를 걸친 마녀들을, 흑사병을, 영혼의 우울함을 악마화한 이후에 우리들, 이른바 서구 유럽의 백인들은 대다수의 아프리카 거주민들이 오로지 ’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엄청나게 많은 인구가 노예 또는 점령된 식민지의 유형수가 되도록” 정해버린 것이 아니냐고 질문한다.


누군가의 색깔을 정말로 결정하려고 해보라. 한 사람의 백인은 하얀색인가? 확실히 아니다. (.....) 흑인, 황인, 홍인, 그리고 특히 백인은 그저 억압적인 분류 방식이나 의심스러운 상징적 계산을 지탱하며, 경멸적인 판단 혹은 비참한 자기만족을 떠받치는 헛된 ‘객관적’ 지지대일 뿐이었다. 그러므로 그 배열 가운데 어떤 것이든 하나의 색깔을 포함하려 하는 모든 상징화, 집합적 평가, 정치적 시도, 일반적 판단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인간이 바라는 보편적 차원에서는 백인도 흑인도 결코 실존할 수 없다. 인류는 그 자체로 색깔이 없다. (‘백인들의 발명품’, 128쪽)


바디우의 말처럼 인간에게 정말 색깔이 있는가?  당신은 무슨 색인가? 누군가를 색깔로 결정할 수 있는가? 백인이 정말 하얀색이며, 황인은 노란색인가? 이 글을 쓰고 있는 내 손을 바라본다. 내 손은 정말 노란색인가? 이 색이 정말 노랗다고 말할 수 있는가? 흑인은 정말 검은색인가? 그 피부를 검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인류 그 자체로 색깔이 없다’는 그의 선언은 그래서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고개를 주억거리게 한다. 130쪽 남짓의 짧은 책이지만 검은색 하나만으로도 이토록 수많은 이야기를, 이토록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니 책을 덮을 때는 나도 모르게 찬탄이 나온다. 알랭 바디우라는 이름 앞에서 왠지 어려울 것 같아 주저하는 이들이게도 이 책은 검은색에 관한 다정하고도 친숙한 에세이로 읽힐 것이다. 바디우는 이 시리즈의 또 다른 책 <행복의 형이상학>에서 ‘모든 철학은 일종의 행복의 형이상학’이라고 말했는데, <검은색 - 무색의 섬광들>을 읽는 내내 검은색과 사유의 발견이라는 또 다른 작은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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